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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 (2)
전능하신 하나님
(2022.11.04 금)
본문 : 창17 :1~8
흔히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
보여 달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려 듭니다.
보여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전도를 하다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영이시라 보여줄 수가 없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자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정신이 없는 사람이군요” 하였더니
“내가 왜 정신이 없느냐”고 화를 내더랍니다.
그래서 “그럼 정신을 보여주세요” 했답니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 사람이 많았고 그러한 논증도 많았습니다.
대략 4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본체론적 증명입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인데 ..
.그러면서도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보며 완전한 존재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본능이라는 것과 감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능이 있고 감각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만족시켜줄 대상이 있음을 증명해 줍니다.
- 가령 사람에게는 먹고 싶은 본능이 있는데
그것은 먹을 음식이 있기 때문이고....
- 성적 본능도 있는데 그것은 그 본능을
충족시켜 줄 이성이 있기 때문이고,....
-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종교적 본능도 있는데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주론적 증명 혹은 인과론적 증명입니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말합니다. 즉 결과가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첫 원인
곧 제 1원인으로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셋째는 목적론적 증명입니다.
이 논증은 우주가 맹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목적이 있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 전체를 관찰할 때 우주는 조화적이며
질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질서 배후에는 이해력이 있는 의지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넷째 도덕론적 증명입니다.
이는 도덕의 근본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이 땅에 도덕이 존재할 수 없고
설명되어질 수 없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매일같이
궁리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바닷가를 거닐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계시냐, 안 계시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본즉 웬 어린아이 하나가 바닷가에
웅덩이를 파놓고 두 손으로 바닷물을
움켜서 거기에 넣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얘! 너는 왜 바닷물을 손으로 움켜서
거기에 넣는 거냐?" .....
"예! 저는 이렇게 해서 저 바닷물을 전부
이 웅덩이 속에 넣어 보려고 합니다." ....
"예이 바보 같으니 그게 될 일이냐"
그때에 그 아이 반문하기를.....
"그럼 아저씨는 그 작은 머릿속에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넣어 보려고 하십니까?"
하더니 홀연히 사라지더랍니다.
그 꿈 이후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부질없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말씀에 기반을 두다>...............
우리의 신앙은 철저히 성경말씀에 그 기반을 둡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는 믿음으로써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영적인 세계에 관한 한,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입니다.
예전 연세대 총장을 지내신 송자 교수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강연 중에 .......하나님이 계실 가능성과
없을 가능성이 반반으로 보인다면......
- 하나님이 계신 쪽에 서라고 하시더군요.
이유는 만일 있다는 쪽에 인생을 걸었다가 죽고
나서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별로 손해 볼 것이 없지만,....
- 없다는 쪽에 걸었는데...... 죽고 나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드러나면 큰 낭패를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게임하듯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철저히 성경말씀에 그 기반을 둡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우리의 이성이라는 작은 그릇에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에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다 보면,
전에는 도대체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깨달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아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복음 전도자였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사역을 함께 했던 ’킴 윅스‘라는 한국인
시각장애인 아가씨가 있습니다.
그녀는 6.25 한국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라났습니다. 그 때 어떤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또 오스트리아에서 성악 수업을 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녀가 예수를 믿고 ’빌리 그래함‘과
함께 집회 때마다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시각 장애인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존재를 온전히 인식하거나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드러내신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다보면 ...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고백에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세 가지 고백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셋째,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고백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전능하다’는 말은 세 가지 개념을
품고 있는 말입니다.
전재(全在, 無所不在), 전지(全知),
전능(全能)이 그것입니다.
첫째, ‘전재’(全在)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다는 말입니다.(무소부재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어디든지 계십니다. 하나님은 안 계시는 곳이 없으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역은 없으며...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렘23:24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 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실제로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눈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하나님의 눈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다윗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139:7∼10>
7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절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절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절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렇습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둘째, ‘전지’(全知)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입니다.
보통 인간은 경험 반경이 너무나 좁기 때문에
미래의 일을 전혀 모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을 지식 전체의
몇 억 분의 일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므로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십니다.
이새의 집에 왕을 선택하러 간 사무엘이
장남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우리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훗날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 139:2-4>
2절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니
3절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47:2-5)
예수님도 하나님의 전지하신 능력을 설명하시면서...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마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전능’(全能)이란 말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무엇이든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잘 드러내는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창17장입니다.
오늘 성경의 배경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에게는
실망과 좌절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75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향을 떠날 때
분명 하나님께서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할 99세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그 어떤 자식도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고작 자기 아내인 사라의 여종
하갈로부터 얻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의 속마음은 “이제 틀렸구나!”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 사라도 역시 남편 아브라함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내 나이 여든 아홉이니 하나님께서도
별 수 없겠구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절>
1절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절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하나님은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면서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창17:17∼18>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절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뒤늦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일까 ?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는
이미 월경이 끊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도저히 임신할 수 있는 몸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소망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사람의 절망이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창18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 가정을 방문합니다.
그 때 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18:12)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라의 웃음을 들으셨습니다.
<창18:13-14절>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절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은 인간의 소망이 끊어졌을 때를 기다려
자신의 전능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렘 32:17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시편145편8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악한 분이시라면....
조석으로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시라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다행히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당신의
거룩하신 뜻에 반하여 함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에는 악한 성품이나 더러운 성품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당신의 성품에
반대되는 일은 하시지 않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재(全在, 無所不在),
전지(全知), 전능(全能)하신 분이십니다.
악한 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공포스러운 말씀이지만 ....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8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라고 묻습니다.
정말 멋진 질문이 아닙니까? 바울은 스스로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신데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겠습니까?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