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두무지 2
"그때 진무사의 이야기를 듣는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네.
말세운이 아직 미치지 않은 서방 제국의 문물이
비록 휘황하다고 할지라도
두 눈을 막고 거기에구애되지 마시오.
단풍이 비록 아름다우나
"곧떨어지고 말 낙엽이라는 것을…"
나 두무지는 공평 무사한 우주 운동을
마치원수처럼 생각했던 스스로의 무지를
통렬하게깨달았다네.
또한 오묘하기 이를 데 없는
신비의진면목을 알게된 데 대한 기쁨이
가슴을 난자하여놓았네.
나는 다시 문답할 용기를 잃었다네. -
"그래서 나는 그만 두무지의 환영 앞에 무릎을꿇었지."
"두무지는 그렇게 사라졌습니까?"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는내 가슴 속에 맺힌 말을 꺼내어
두무지 선사께보였다네."
"무엇이었는데요?"
"화담 선생님을 묻고, 안명세를 묻고, 민이를물었지."
"형님도 참.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군요."
"나이가 들어가니까 옛 생각이 점점 더깊어지더군."
"그랬더니 그 어르신께서는 뭐라시던가요?"
"묵묵부답이었네. 다만 빙그레 웃으시더군.
그래서한번 더 애원하였지.
그랬더니 두무지는 이렇게말씀하셨다네."
"궁금합니다."
"하늘의 일은 하늘이 하고, 땅의 일은 땅이 한다-.
이 말뿐이었네.
그러니 내가 하늘에 가서 직접 물어볼수밖에,
허허허."
이야기를 마친 토정은 크게 웃음을 지었다.
"형님, 그러나 백성들은 끊임없이 굶고 병듭니다."
"후천을 여는 징조일세.
내가 그런 물상(物象)에만사로잡혀
큰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일세.
정말 큰 것은 하늘에 있네."
"천즉불인(天卽不仁)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하늘은그렇게 잔인한 것입니까?
그래서 형님도 잔인해진것입니까?"
"비인부전(非人不傳)하게. 이 말을 함부로 하지말게.
날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일세."
"그래서 임진 대환난 준비를 그만두셨군요."
"전쟁 대비만 그만둔 것이라네.
나는 대환난에 대한준비를 따로 하고 있었던 것이네.
바로 <토정비결>이그것이네.
백성들의 마음을 위무해주고,
용기를 주고희망을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준비한 방책이었네.
삼개나루에 있을 때 쓴 <천기비전>으로
화담 선생님의유지를 받들었다고 생각했었네만
그게 아니었네.
이제서야 그 말씀을 받들게 된 것이지."
"세상은 이대로 내버려두실 겁니까?"
"무슨 소린가?
해마다 정초가 되면 온 식구들이 빙둘러앉아
한 해 신수를 볼 것일세.
<토정비결>을 볼것이란 말일세.
그게 무엇인가.
그저 잘 되었으면,
우리 식구 모두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밝은 마음 아닌가.
그렇게 온 나라 백성이염원하며 밝은 마음을 내면
후천 세계는 빨리 열릴것일세."
"후천은 그렇게 천천히 준비되는 것입니까?"
"앞으로 수백 년간 계속되네.
그런 질곡 속에서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살아가려면
<토정비결> 속에있는 희망을 가져야 하네.
선후천이 갈리는 때에는마음 공부가 최고라네."
토정은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뇌었다.
"전우치, 남궁두, 정개청, 서치무, 남사고.
모두 다그리우이."
정휴는 토정의 숙연한 자세에 고개를 떨구었다.
"돌아갈 시각이 다가오고 있네."
토정이 나직하게 말했다.
"예, 유시(酉時)입니다."
"내게 할 말 없나?"
"형님께서 평생을 바쳐 미친 사람마냥
팔도를휘젓고 다니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백성을 수없이 만나고
도와주기도 많이 하셨습니다.
벼슬도걷어차고 세상을 버렸다는 분이
왜 그토록 세상에 미련이 많았습니까?
미련만으로 보자면,
아니 백성을생각하는 마음으로 보자면
여느 고관 대작보다 더하면더했지
덜 할 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두무지 어른에게서 그런 말씀까지 들었더라면
끝까지 금강산이나 지리산에 들어가
수도나 하실일이지
뭣하러 가난뱅이, 거지, 병자를 떼거리로몰아다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약을 지어주십니까?
그런다고 그네들의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의 운명이 바뀌는 것도 역시 아닌데 말입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상은 바뀌지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해는 다시 떠오르고달은 날마다 찹니다.
그것은 하늘의 일이지,
사람의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두무지의 말을듣고서도
아산 백성이 그토록 불쌍하셨단 말입니까?"
토정이 껄껄 웃었다.
"내가 언젠가는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알았네.
자네 운명(運命)이란 말을 생각해보았나?
다쓰는 말이니 모를 리 없겠네만
운명이란 명을 나르는것,
즉 자기의 목숨을 나르는 것이지.
자네가 자네의 몸을
지금 이 순간 이곳으로 끌고 온 것,
이것이운명일세.
그러므로 운명이란 자기 자신에게
어떤 경험을시켜주느냐 하는 것일세.
내가 사람들을 도와주러찾아다닌 게 아니라
내게 경험을 시켜주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뿐이네."
"아산 백성을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라
형님 자신을위해서 하신 일이라구요?"
"그렇다네. 내가 늘그막에 내 욕심 채운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네."
자신에게 시켜준 경험으로는 지나칩니다.
편안하고즐거운 경험도
많이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필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수발하는 경험을
택하셨습니까?
형님 자신은 정작 권력의 핵심에있었잖습니까?
"조카가 조정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고,
친구가역시 영의정을 지냈고,
화담 산방에서 같이 공부를 한사람들이
다 정승 반열에 있잖습니까?
기왕 경험을하실 요량이셨다면
한 나라 전체를 다스려 보시든가하지
겨우 작은 고을에서 현감 노릇이나 하시는 게
큰경험을 하는 것입니까?"
"이제 임종이 임박했으니
그 정도 의문이야 내마땅히 풀어주고 가는 게
옳을 것 같으이.
난 전생의업보가 남보다 두텁고 끈질기다네.
내가 살아온 길을돌이켜보면
나 자신도 뭐 이따위 인생이 다 있었나싶네.
그래서 그저 빚이 많으니 빚을 갚으러
부지런히돌아다니는 인생이라고 밖에
달리 뭐라 할 게없었다네.
이제 난 사주가 뭔지 약간 눈을 떴다네.
사주 팔자,
그게 바로 전생의 생김새 그대로라네.
그걸 보면 그 사람이 전생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네.
그래서 가만히 내 사주를 들여다보면
글쎄 내 인생돌아가는 모양이
척 들어맞지 않는가 말일세.
나도깜짝 놀랐다네.
내가 친구 안명세를 잃은 것과
내가지금껏 못 잊어 하고 있는 민이
그이와의 전생 인연을보니 역시 그러하고,
여기 있는 희수 여인 또한
이생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더란 말일세.
내가 겪은 경험 가운데 털끝만큼 작은 일도
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더란 말일세."
"그 말씀에는 저도 느끼는 게 많습니다.
천지만물이 나고 죽는 데에는
나름대로 다 이치가 있으니
사람의 삶에 이치가 없을 리 없지요.
전생과 금생과내생이 그러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처럼
모두 인과관계를 맺어
함께 맞물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정 그 분을 만나서 배운 게 하나 더 있지.
삼귀의(三歸依)라고 있잖은가?
그 중에 세번째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變誓願渡)'란 말에서
나는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알았다네.
중생은 변함이없다,
그런데도 끝까지 구제를 하겠다.
그 마음이중요하지 않은가?"
"그러나 도를 구하는 사람은
우선상구보리(上求菩提)부터 해야
중생 구제에 나설 수있는 것,
인간으로서는 누굴 가르치려는 것보다는
스스로 길을 밝히는 수도 생활을 하는 것이
더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난 중생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중생 속으로 들어간것일세.
나 자신 한 중생이니 중생과 어울려
한바탕살아본 것일세.
이제 생각해보면 한때나마 세상을 건져내어
사람들이 다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을까
노심초사하던 것이 부끄럽네.
알고 보면 난 그저 내빚을 갚으러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것일 뿐이네.
아직도 그 빚이 많이 남았으니
언젠가 이 모습으로다시 돌아오겠지."
"다시 오면 무얼 하시게요?"
"또 떠돌이가 되어 방랑하겠지.
앞으로 시절없이지팡이 짚고
삿갓이나 눌러쓰고 다니는 나그네를보거든
혹시 나 아닌가 여겨보시게, 허허허."
점심 나절이 되자 토정의 아들 산휘가 방에 들어와앉았다.
산휘도 아버지의 임종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신시(申時)가 되자 희수 여인이 가벼운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그것을 들이밀자 토정이 빙그레 웃었다.
"여보시오, 이걸 먹다가 체하면 어쩌라고 내오는거요?"
희수 여인이 당황했으나 토정은 더 껄껄 웃으면서
그 여인의 손을 잡아들였다.
"아니오. 이젠 먹을 필요가 없는 시간이 되었다는말이오.
내게 품었던 한이나 원이 있으면 이제 다푸시오.
내가 죽으면 그나마도 누구에게 말하겠소."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현수 수좌를 불러주오."
토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면서
젊은중이 방으로 들어왔다.
옛적 화순 운주사에서 보았던
지족 선사의 상좌였다.
"아니?"
정휴가 현수 수좌를 보고 놀라자
토정이 정휴를돌아다보면서 말했다.
"맞네. 이 수좌가 해사에서 낳은 아들 규철이라네.
내가 그때 운주사에서 의심스럽게 보았었는데
나중에사주를 짚어보고
이 아이가 있을 만한 곳을 수소문한끝에
바로 운주사의 그 상좌승이 바로 내 아들이라는것을 알고
불러온 것이라네.
지난 달에야 만났다네."
현수 수좌는 어머니 희수 여인 곁에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았다.
"아버님."
산휘가 지극한 정으로 담고 아버지를 불렀다.
"오냐."
토정 역시 정을 담뿍 담은 목소리로 산휘의 부름에
대답했다.
"아버님."
이번엔 현수 수좌, 아니 규철이 아버지를 불렀다.
세상에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것이었다.
"오냐. 내 아들아."
토정이 팔을 뻗어 규철의 어깨를 잡았다.
울음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규철의 어깨가 심하게
들먹였다.
토정이 산휘와 규철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형제이니라.
규철은 기왕에 출가했으니후사를 두지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가장결에 이른 대로
가계를 꾸려 가면서 임진년을 준비하거라.
내 일은이미 다 끝났다."
"아버님, 하늘에 올라가셔서 어머님을 만나게되시거든…"
"오냐. 네가 장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전해주마."
아버지의 말에 산휘의 두 눈에서 눈물이흘러내렸다.
"여보게 정휴."
토정이 정휴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자네가 있어서 이 생은 외롭지 않았네."
"형님!"
"벗을 홀로 남겨두고 가려니 마음이 아프이."
토정이 말에 정휴의 가슴 속이 꽉 메었다.
평생동안 의지하고 따랐던 토정,
정휴의 토정이 떠나가고있는 것이었다.
정휴의 온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것이었다.
그러나 정휴는 내색을 않으려 애를 쓰면서
토정에게마지막 가르침을 청했다.
"한 말씀 해주십시오."
벌써 문 밖 대청으로 현의 관리들이 무릎을 꿇고앉은 채
조금씩 흐느끼고 있었다.
마당에도 사람이가득했다.
그리고 멀리 대문 밖으로도 울먹이고 있는
백성들이 보였다.
토정은 그런 바깥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내가 어디 남을 위해 살았던가,
다 나를 위해 산거지.
세상을 위한다고? 백성을 위한다고? 다거짓일세.
이 세상은 내 세상, 내가 이 꼴이라서
세상도 이 모양 아닌가.
이제 내 세상, 내 우주는문을 닫는다네.
나도 죽고, 그대들도 죽고, 우리 모두죽는 것이라네."
말을 마친 토정은 피곤하다면서
아들 산휘에게자리를 깔라고 했다.
산휘가 자리를 마련하자 토정은그 위에 누웠다.
현수 수좌가 베개를 받치고,
희수여인이 삼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희수 여인은
손부채를 들고 토정을 향해 천천히 부쳤다.
토정은 몇 번 눈을 껌벅이다가 감았다.
침묵이 흘렀다.
여름해가 길어서 신시(申時)가 넘어
유시(酉時)가 되어가는데도 해는 서산마루에
아직높이 걸려 있었다.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이윽고 유시(酉時)가 되었다.
의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희수 여인이숨죽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어 산휘와 현수가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관리들이
그제서야 토정의임종을 알아차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를따라서 마당에 모여 있던 아산현의 백성들이
울기시작하였고,
다시 바깥에 있던 백성들도 곡을터뜨렸다.
곡소리는 한동안 아산현에 진동했다.
1578년(戊寅年, 62세), 선조 11년 음력 7월17일이었다.
토정이 돌아가고 며칠 뒤 희수 여인도 그의 뒤를따랐다.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고 걸인들을 돌보던희수 여인은
어느날 밤 잠에 든 뒤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사후를 처리하느라 남아 있던 산휘와 규철형제는
희수 여인의 장례를 치른 후
토정의 묘가바라다보이는 앞산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아산현에는 곧 새 현감이 부임했고,
산휘는한양으로 돌아갔다.
현수는 그가 머물던 절로 다시돌아갔다.
정휴 역시 온 세상을 잃은 허탈한 심정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