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강 본래무일물
5. 천지창조와 법계연기法界緣起
기독교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쉬시었다”[창2:1]고 합니다만 굳이 기독교식으로 불교의 창조론과 종말론을 말한다면
연기법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인연을 따라 생겨나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인연을
따라 소멸한다”는 그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은 곧 우주만물의 창조론이요,
제법종연멸諸法從緣滅은 그 종말론이 될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창조와 종말은 그 어떤 신이나 혹은 부처님이나 그 누구에 의해서
창조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닌, 다만 연기적생멸緣起的生滅이 있을 뿐임을 부처님께서
명백하게 밝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법은 무시 이래로 인연을 따라 끊임없이 생멸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관점에서 말하는 창조니 종말이니 하는 말은 법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참으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엄경』에서는 연기를 화엄연기華嚴緣起 혹은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했고,
노자는 『도덕경』에서 연기를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함이 없이 저 스스로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노자의 ‘함이 없다’, ‘스스로 그러하다’ 함은 화엄연기의 본뜻인 우주의 모든
존재는 ‘나’ 없이 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 ‘창조자’ 없이 공성 스스로 연기緣起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아상’이 주체가 되어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을 아뢰야식연기
阿賴耶識緣起 혹은 업감연기業感緣起라 하지만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계연기法界緣起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들 각자의 몸과 그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개개의 ‘아상我相’과
그 무수히 일어나는 번뇌조차도 “법계法界가 동시에 함이 없이 공성 스스로 연기되어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나’라고 생각하고, ‘나’라고 믿고, ‘나’라고 느끼고, ‘나’로서 행동하며
살고 있지만, 그 ‘나’라는 생각조차 실상은 ‘내가 아닌’ 법계연기의 현현일 뿐이라는 것이요,
우리들의 몸도, 우리들의 생각도, 우리들의 삶도, 우리들의 죽음도, “우주법계가 저 스스로
그렇게 연기하고 있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식識인 공성空性’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물질이 연기되어 ‘몸’과 ‘나’라는 ‘아상我相’이
만들어지고, 실존해 있는 것으로 느끼며, 울고 웃고 살아갑니다만 그 ‘나’라는 생각을
잠시 한 번 쉬어보신다면, 그렇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비로소 여실如實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곧 ‘반야지혜般若智慧’40)입니다. 그러하다면 어디에
집착하고, 무엇을 얻고자 하며, 왜 그리 목숨 걸고 살아야 할 것이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생각을 잠시 멈추고, 욕심을 내려놓고, 지금 무한 집착의 그 ‘나’와 ‘내 몸’과
‘내 것의 소유’와 늘 두렵고 걱정스러운 ‘삶과 죽음’의 모든 인연을 한 번쯤 혹은 자주자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보고 또 보아야 할 일입니다.
39) 법계연기法界緣起 : 화엄연기華嚴緣起라고도 한다. 『화엄경』의 사법계四法界는 다음과 같다.
사법계事法界는 현실의 미혹의 세계, 즉 모든 사물이 제각기 한계를 지니면서 대립하고 있는
차별적인 현상의 세계를 말하고, 이법계理法界는 언제나 평등한 본체의 세계, 즉 진실에 대한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는 이상으로써 깨달음의 세계가 현실의
미혹의 세계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나타내었고, 마지막으로 사사무애법계
事事無碍法界는 현실의 개개의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에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40) 반야지혜般若智慧 : 모든 사물의 도리를 분명히 꿰뚫어 보는 지혜를 말한다. 육바라밀 가운데
반야바라밀은 제불의 어머니라 일컬어지고,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로써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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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먼저, 생각을 잠시 멈추고, 욕심을 내려놓고, 지금 무한 집착의 그 ‘나’와 ‘내 몸’과
‘내 것의 소유’와 늘 두렵고 걱정스러운 ‘삶과 죽음’의 모든 인연을 한 번쯤 혹은 자주자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보고 또 보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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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福찾기 114 - 第9講 本來無一物 (5. 天地創造와 法界緣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