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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청(淸)의 발전(發展)(6) - 십전노인(十全老人)-건륭제(乾隆帝) (2)
임광자 추천 0 조회 92 08.06.05 17: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청(淸)의 발전(發展)(6) - 십전노인(十全老人)-건륭제(乾隆帝) (2)

청(淸)의 발전(發展)(6) - 십전노인(十全老人)-건륭제(乾隆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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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십전 노인(十全老人)                                              이길상

(1) 건륭제와 대외 원정

열하이궁의 부분25세에 청나라 황제가 되었던 건륭제는그의 말년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칭하고 이를 도장(圖章)에 새겨 즐겨 사용하면서자신만이 세계제국의 완성자임을 은근히 자랑했다.

십전(十全)이란 열 번의 대외 원정에서 고루 갖추고완전히 승리하여 결함이 없다는 뜻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주변지역도 자신의 위엄(威嚴)과덕화(德化)가 완전하게 펴졌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정해서 평정되었다는 열 번이란 중가르(2회/ 1754·57)·위구르(1759)·대금천(大金川 / 1749), 대·소금천(大小金川 / 1776),타이완(臺灣 / 1788)·미얀마(1778)·베트남(1789)·네팔(2회 / 1790, 92) 등을 말한다.

이런 열 번의 무공(武功)을 십전기(十全記)라는 이름으로자신이 직접 쓰고, 이를 돌에 새겨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전 언덕에 있던조부 강희제의 평정서장비(平定西藏碑) 옆에 나란히 세웠다.

그런데 이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강희·옹정 부조(父祖)2대에 걸쳐 피와 땀으로 땅을 일구어 씨앗을 뿌리고 가꾼 것을 건륭제는 거두는데지나지 않았으나, 그나마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기에 얻는 것에 비해서 잃는것도 많았다.

건륭제의 첫 번째 원정은 건륭 12년(1747) 금천(金川/진촨)의토벌로부터 시작되는데, 사천(四川/쓰촨)의 서쪽에 위치한 이 작은 땅덩이 하나를얻기 위해 3년간, 무려 당시 청나라 국고 수입의 2 년 분에 해당하는.은화(銀貨)7천만 냥을 썼다고 한다.

그렇지만 완전히 정복하기까지는 무려 30년의 세월이더 소요(所要)되였고 수많은 장졸과 막대한 전비(戰費)를 대가로 지불한 후에야 겨우이 작은 땅덩이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요즘 경제논리대로 말한다면 투자에 비해서소득이 형편없는 밑진 장사였다는 것이다.

중가르와 티베트를 지키기 위해 텐산과 히말라야 산맥을넘어 그 멀고 험한 곳까지 군대를 보낸 것은 매우 장한 일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이미 부조(父祖) 2대에 걸쳐 이룬 업적을 여차하면 잃을 뻔했으나, 행운이 그를 도와주었다. 실전에서는 번번이 패하면서도 상대방의 내부사정이나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이들을 정복하게 된 것은 건륭제의 행운이라 할 수밖에 없다.

미얀마나 베트남 원정은 사정이 더욱 나빠서 하마터면완전한 실패로 끝날 번 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운 좋게 상대편에서 먼저 화평(和平)을요구했고, 이 요구를 받아들여 독립을 인정하고 조공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여 겨우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말하자면 생쥐와 코끼리의 싸움에서 작은 생쥐가 덩치큰 코끼리에게 겁먹지 않고 오히려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끈질기게 골탕을 먹이고,지치고 화나게는 만들었지만, 피해 다니던 생쥐로서도 제풀에 피로해서 서둘러 화평을요청하자 이를 선 듯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건륭제 때 중국 영토는 일찍이 그 유례가 없을만큼 최대로 넓어졌다. 원래 중국은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나라로서,중화(中華)와 이적(夷狄)만 구분했을 뿐(華夷觀) 지리적 국경이라는 개념은 없었다.정복이라는 것도 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따라서 신하의 예와 조공만 바치면 그것으로 만족했는데, 이를 종주권(宗主權)이라한다.

이런 사상이 청 대에 이르러 러시아인(人)들이 밀려오자서양인들과의 문화적인 장벽을 세울 필요에서 선을 긋게 되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서구적인 국경선이 되고 말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런 서양인들의 출입을 청으로서는일종의 국경무역인 마시(馬市)거나 조공(朝貢) 정도로 간주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영국 사절이 베이징에 들어올 때도 "영이조공(英夷朝貢)"이라는 깃발을앞세우게 했는데. 이는 영국 오랑캐가 조공을 바치러 왔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1689) 이나 캬흐타조약(1727) 등도 분별없이 러시아 인들이 밀려들자 이들의 출입을 어느 한 곳으로제한하고, 조공을 바친다는 전제하에서 마시(馬市)를 허용한 것쯤으로 간주했던 것이다.그러나 사정이야 어떻던 외국과 대등한 일대 일 개념의 배타적인 국경선이 생겼다는것은 대단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많은 영토를 중국지도에 편입시킨황제였다.

그러나 주로 종주권(宗主權)를 지키거나 뺏기 위해치렀던 이런 대외 원정에 쏟은 전비(戰費)는 가히 천문학적 숫자였다. 그러면서도재정에 큰 무리 없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청나라의 경제가 도약했음을의미한다. 사회는 안정되고 대량 생산은 이루어 졌으며, 외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무역 흑자를 얻어 멕시코산 은화가 유럽을 거쳐 마구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런 변화에 잘 대처하지 못했던 청나라는 건륭말기부터체제의 모순이 노출되고, 서세동점(西勢東漸)과 거대한 제국주의 물줄기 앞에 서게되자, 얼음판 위에 돼지처럼 방향을 잃고 전락하고 말았다. 19세기 중반을 고비로청(淸)제국은 거대한 몸집에 팔 다리가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숨을 고르기도힘들게 되었다. 다시 만하면 열강의 식민 혹은 반(半)식민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2)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

말을 타고 있는 건륭제중국에서 황제가 백성들에게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통치 못지 않게 조칙(詔勅)을 잘 써야 한다. 비록 행위 자체는보잘것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을 시켜서라도 기가 막히게 명문장(名文章)을만들어 발표하면 줄줄이 백성들이 따르는 요술 같은 위력이 일어난다.

명의 영락제가 난징을 점령하고 자신의 즉위교서를방효유라는 당시의 대가에게 부탁했으나 오히려 방효유는 영락제를 역적(纂敵燕王)이라하여 이를 완강이 거절했다.

이래서 애가 탄 영락제는 얼레고 달래기를 수없이반복했으나 결국 그의 문장을 얻어 즉위교서를 발표하는데는 실패했다.

영락제가 방효유의 가족은 물론 그의 일가친척 및스승, 친지, 친구들을 포함한 8백 수십 명을 방효유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면서까지달래고 겁을 주었으나 끝내 방효유는 영락제에게 즉위교서를 써주지 않았고, 자신도처형 당했다.

그래서 영락제는 동창(東廠)이라는 비밀 정보기관을만들어 이런 불손한 선비들을 색출하고 가차없이 목을 잘랐는가 하면. 그런 한편영락대전의 편찬을 명하여 많은 선비들에게 자신의 정권에 동참을 유도하고 이들을회유(懷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주에서 들어온 청나라 역시 자신들을 욕하는 한인(漢人)들은철저히 탄압했다(문자의 옥) 그러나 이들 지식인들의 협조 없이는 통치자체가 불가능하다.

순치제가 중국인 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유학에 정진한 것이나, 강희제가 남서방을 열고 중국인 학자들을 우대한 것, 그리고옹정제 역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라는 대규모 편찬 사업을 한인(漢人) 지식인들손을 빌려 마무리 지었던 것도 이런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처사라 할 수 있다.

건륭제 역시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대규모 문화사업을펼쳤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중국사상 최대규모의 편찬사업이다.

사고(四庫)란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네부류 서적을 일컫는 것인데, 경(經)이란 사서오경(四書五經)등 유학의 모든 경전(經典)을말하고, 사(史)는 역사, 자(子)는 공자 맹자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사상, 집(集)은개인들의 문학을 포함한 문집(文集)을 말한다.

건륭 6년(1741), 건륭제는 천하에 흩어져 있는 모든책들, 이를테면 이미 출판된 것(旣刊)과 아직 출판되지 못한 것(未刊) 구분 없이모든 서적을 수집한다는 조칙(詔勅)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해서 많은 책들이 산더미처럼모이게 되었다.

건륭 37년(1772),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이라는 편찬소(編纂所)를열고, 300 명의 학자를 등용하여 우선 책의 정본(定本)을 만들고, 다시 이를 정서(淨書)하여,경(經)은 노랑 색, 사(史)는 빨강 색, 자(子)는 푸른 색, 집(集)은 회색으로 표지를구분하고, 10년 고심 끝에 1781년 79,070 권을 3천 수천 책(冊)으로 우선 한 벌을완성했다. 이런 전집류에 四庫全書(사고전서)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 후 네 벌을 만들어서 열하 이궁 등 각기 다른 곳에소장케 했으며(熱河, 圓明園, 紫禁城, 瀋陽), 민간인 열람용으로 다시 세 벌을 더만들어 양주(楊州/양저우)와 항주(抗州/항저우) 등 강남(江南)의 문화 중심지에 서고를세우고 일반인도 열람케 하여 모두 일곱 벌이되었다.

수록된 책은 3,458종, 7만 9582권(각 벌의 책 수는동일하지 않다고 함)에 이르렀는데, 편집과정에서 청 왕조(淸 王朝)로서 마음에 들지않는 것은 소각하거나 판목(版木)을 부수는 등, 이른바 발금몰수(發禁沒收)가 된것도 많았으며, 수록된 책 중에서도 부분적으로 고쳐진 것도 있었다고 한다.

사고전서의 학술상 가치는 능히 건륭제의 금자탑(金子塔)과같은 문화업적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를 통해서 천하의 책을 모아 이미 반만(反滿)사상을 통제했던 소위 "문자의 옥"의 연장선상에서 이를 편찬하게 되었으며,불온 서적을 더욱 단속하는 기회로 이용했다는 의미도 된다.

나쁘게 말하면 대규모 편찬사업을 빙자해서 불온(?)서적이란 이름으로 많은 서적을 없앴다는 것인데, 이때 소각되거나 개작된 책이 약3 천 종에 7, 8 만 부나 되었다면 훗날 이런 이야기도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3) 향비(香妃)에 얽힌 사랑 이야기

건륭제가 은퇴 후 머물었다는 수연궁 벽의 용 조각건륭제역시 여니 황제들처럼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고, 이들로부터 아들 17명, 딸 10명등 모두 2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런 그에게 젊은 시절 향비라는 아릿다운 한 여인을두고 애간장을 태웠지만 황제의 권위와 위엄으로도 한 여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고,그녀의 죽음으로 이 희대(稀代)의 대 로망스는  애처로운 추억만을 그의 가슴에묻게 하여 후세 사람들은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중국 신강성에 있는 타크라마칸사막(타림분지라고도함)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텐산산맥 남쪽 기슭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거쳐서쪽으로 나가거나, 타크라마칸 사막 남쪽, 즉 쿤륜산맥 북쪽 사면을 따라 역시 오아시스국가들을 지나 서쪽으로 나가면 이 두 곳이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이른바 실크로드의서쪽 출발이자 동쪽에서는 종착지가되는 카슈가르(Kashgar)라는 곳이다.

이미 한(漢) 나라 때부터 소륵국(疏勒國)이란 이름으로중국사서(史書)에 등장한 이곳에는 투르크계 사람들이 대상무역을 상대로 숙영지를제공하거나 중계무역을 통하여 번창하고 있었는데, 이슬람세력의 동진(東進)에 따라이슬람화되었고,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곳을 발판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전진기지로삼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화된 투르크계 사람들을 중국에서는위구르(Uighur)인(人)이라 불렀다. 회교(回敎), 즉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란뜻이다. 그런데 16세기경부터 이곳에는 위구르인들이 카슈가르 한국(汗國)이라는나라를 세우고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건륭 년간 청나라의 군대가 여기에 이르자 이곳 주민들은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은 힘에 부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이 망국의 서러움속에서 향비라는 위구르 왕족 출신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선녀처럼아름다운 몸에서 그윽한 향기까지 풍기는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청나라의 원정 사령관은 이 절세의 미인을 베이징의건륭제에게 보냈다. 혹은 일설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건륭제는이 여인을 얻기 위해 이곳에 출병시켰고, 이 여인을 사로잡아 보낸다는 연락을 받고는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머나먼 길을 오는 도중 행여 향기라도 사라지면어쩌나 하고 고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향비 본인은 베이징에 도착해서도 아무런표정 없이 매우 담담했다. 그러나 황제가 접근하자 싹 돌아앉고 말았다. 애가 타는건륭제는 말 잘하는 궁녀를 보내 달래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황제가 접근하면 칼로찌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매정하게 잘라 버렸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향비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다리던황제는 향비의 주변만 서성일 뿐 번번이 헛걸음만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처소앞에 이슬람 풍의 거리를 만들고 향수를 달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등 그녀의마음이 돌아서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런 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다 못한 황제의 어머니(母后)는단념하라고 충고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이 절세의 미인을 결코 잊을 수도 포기할수도 없다는 것이 아들인 황제의 대답이었다. 답답하기는 어머니인 모후도 마찬가지였다.결국 모후는 결단을 내렸다.

어느 날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자금성을나간 사이, 모후는 향비의 소원대로 자결을 허용했고, 이래서 향비는 스스로 목숨을끊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모후가 궁녀를 시켜 향비를 목 졸라 죽였다고도 한다.

여하튼 향비의 죽음을 접하고 허둥지둥 달려온 건륭제가향비의 시신을 바라보았을 때,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몸에서는 향기를내 뿜고, 살갗은 더욱 싱싱했으며, 앵두같은 붉은 입술은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고한다.

그 전 같았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절대군주의이런 사랑이야기가 건륭제 때 나타났다는 것은 또 다른 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서양선교사들에 대해서 그 지식과기술만 빌렸을 뿐 카톨릭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서 건륭제의신임을 받고 베이징에 머물고 있었던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 G?useppe / 郞世寧/ 1688 ~ 1766)에게 명하여 향비의 요염한 자태와 조용한 슬픔, 그리고 군장(軍裝)을한 반신상, 건륭제와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기는 그림들을 그리게 하여 만년에이를 추억으로 간직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전하는 이야기일 뿐, 향비가 언제어떤 경로로 얼마나 베이징에 머물렀는가는 확실하게 기록된 것이 없다고 한다. 다만건륭제가 위구르를 정복한 것은 1759년으로 때에 건륭제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리고베이징의 동릉에는 건륭제와 비빈들의 무덤이 있고 그 가운데 용비(容妃)라는 이름의무덤이 있는데 이것이 향비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카슈가르에는 향비의 무덤이라 해서 인도의타지마할보다는 작은 규모의 묘당(廟堂)이 있고, 이곳 사람들은 향비를 그들의 성녀(聖女)로지금도 제사를 올리고 수많은 참배 객들이 줄을 잇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두 곳중 어느 한 곳은 빈 무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 청조(淸朝)에서 이름을 떨친 한인(韓人)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인종과 언어학의입장에서 분류하면 우리들과 가장 유사한 집단이 만주족이라고 한다. 일례로 고구려를우리나라에서는 고대사의 한 분야로 잡고 있지만 중국에서도 고대사의 범주에서 자국의변방 여러 곳 중 하나로 고구려史를 엮고 있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의 강역은 대동강 남쪽에 머물렀고,고려태조의 북진정책으로 청천강 유역까지 북상했다가, 거란의 침입 후 서쪽으로는압록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의 함경도 지방은 전과 다름없이 여진족들이 부족단위로살고 있었고, 이것이 조선초기까지 이어졌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그의 5대조가 함경도로 이주한후 대대로 그곳에서 살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그의 막하(幕下)에는 퉁두란(李之蘭)을비롯한 많은 여진 인들이 군사적인 힘을 보태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이런 저런 여러 경로를 통하여 조선과 여진의 혼혈(混血)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 후, 중국적인 화이관(華夷觀)을 받아들인 조선의양반 사대부들은 정묘(丁卯)·병자(丙子) 호란(胡亂)을 당하여 그들의 지배하에 들게되자, 사상적으로 더욱 단단히 무장하고, 오기(傲氣)까지 발동하여 지배를 받으면서도더욱 얕잡아 보는 자기 모순에 빠져들게 되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 1737 ~ 1805)은 건륭45년 (정조4년/1780) 6월, 그의 종형(從兄) 박명원(朴明源 / 英祖 3女 和平翁主 駙馬錦城尉)이 건륭제의 칠순(七旬) 축하사절로 베이징에 갔을 때 따라 갔다가 돌아와서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상세한 견문기를 남겼다.

그의 열하일기 심세편(審勢編)에 따르면 당시의 연행(燕行)사신과 그 일행은 조공을 바치러 가는 형편에서도 만주인들을 오랑캐로 얕잡아 보았다고하며, 연암(燕巖)은 이런 것을 오망(五妄), 육불가(六不可)라 하여 경계하는 이런글을 남겼다.

오망(五妄)이란, 자신의 지체나 벼슬, 신분 또는 학식,재력을 자만하여 외국에 가서도 그를 뽐내고 과시하는 것이 일망(一妄)이요, 붉은모자, 이상한 옷소매 등 우리와 다른 풍속이나 문물을 깔보고 비웃는 것이 이망(二妄)이며,비록 대국을 지배하고 있을 망정 오랑캐라 하여 교만하게 그들의 문물을 거들떠보지도않고 고고한 체하는 것을 삼망(三妄)이다.

배운 글 대부분이 중국 글이기에 글을 조금 안다 하여상대편의 시문(詩文)을 얕보고 헐뜯는 것이 사망(四妄)이고, 한족(漢族)이면서 오랑캐황제의 은택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 춘추(春秋)의 의리를 망각했다고 의분하는 따위가오망(五妄)이라 했다.

이어서 육불가(六不可)라 하여, 남의 나라에 들어가길 가는 행인을 붙들고 나라 정세를 알아보는 것이 일불가(一不可)요, 말이 통하지않아 글을 써 통하는데 의견을 나눌 수 없는 것이 이불가(二不可)며, 외국인이라형적이 바로 드러나 경원받는 것이 삼불가(三不可)다.

슬쩍 물어서는 실정을 알 수 없고 깊이 물으면 기휘(忌諱)에저촉됨이 사불가(四不可)고,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으면 다른 뜻이라도 있는지 오해를받으니 이것이 오불가(五不可)요, 그 나라 금령이나 법도. 예의를 몰라 실수를 저지르기일쑤이니 이것이 육불가(六不可)다.

어쨋거나 청(淸)나라의 멸망으로 만주족은 소리 없이중국에 동화(同化)되고 말았다.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중에는 19세기 말에서20세기 초, 가난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여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신천지를 찾아떠난 사람들이거나 그 후예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두 지역간 인적 교류는 빈번히있었고, 청나라의 공식 기록에도 조선 인으로서 청조에 귀화한 성씨가 42개나 된다.이들 조선 인들을 청나라는 만주 8기에 배속 시켰는데,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떨친 성씨로 김씨, 한씨, 박씨, 안씨 등이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거부(巨富) 중에는 소금 전매업자가많았다. 조선 출신 안기(安岐 / 1683 ~ ?)라는 사람도 소금 전매권(專賣權)을 얻어큰 재산을 모으고, 가난한 문인들과 불우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많은 골동서화를 수집하여 감식가로서 당대 제일인자였다.

특히 동진시대(東晋時代/317 ~ 419) 고개지(顧愷之)가그렸다는 여사잠도(女史箴圖)라는 족자(簇子) 그림은 원래가 안기의 소장품이 였는데,그의 사후 건륭제에게 넘어 갔다가,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다시 영국인 손으로 넘어가게되어, 지금은 이 귀중한 동양 최고의 신품(神品)이 엉뚱하게도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있다.

자(字)를 의주(儀周). 호를 녹촌(麓邨) 또는 송천노인(松泉老人)이라고했던 안기의 서화목록인 묵연휘관(墨緣彙觀)은 진(晉)·당(唐) 이래 서화의 최고감식 준칙으로, 중국과 미국의 동양화 연구가들에게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한다. 그러나 막상 한국인들은 안기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

의주(義州) 출신 김남해(金南海)란 사람은 병자호란때 가족이 몰살 당했으나, 청 태종을 따라 만주로 들어가 공을 세워 내무부3기화기도총관의벼슬을 얻었으며, 그의 손자 김상명(金常明)은 세종 옹정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받고 어전대신 등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옹정제가 그와 의논할 때는 사다리를 놓고김상명과 함께 다락에 오른 뒤 사다리를 치우고는 누구도 접근치 못하게 한 다음그와 독대(獨對)할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고 한다.

김상명의 조카딸은 건륭제의 잠저(潛邸)시절 귀인(貴人)이되었고, 건륭제의 즉위 후 가귀비(嘉貴妃)로 승차되고, 사후에는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의시호(諡號)를 받았으며, 그녀가 출산한 네 명의 황자 중, 11황자 성친왕은 시문·서법에뛰어나 청의 4대가로 꼽힐 정도였다.

가귀비의 오빠가 김간(金簡 / ? ~ 1794)이란 사람으로건륭제 때 대신과 공부, 호부, 이부의 상서(尙書)를 역임하였고, 특히 인쇄·제책담당인 무영전(武英殿)의 장(長)으로 있을 때 동자(銅字) 사용을 건의하고, 6개월동안 25만 3500자의 목활자를 완성하였다.

이괄의 난(1624) 때 이괄에게 가담했던 구성부사 한명련은이천에서 부하에게 피살되었지만 그의 두 아들 윤(潤)과 난(?)은 청나라로  망명하여형은 한운(韓雲)으로 동생은 한니(韓尼)로 개명하고, 1632년 송산(松山) 싸움에서크게 공을 세웠다.

그 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에 들어갔을 때,유적(流謫) 소탕에 큰 공을 세우고 형제 모두 일등경차도위(一等輕車都尉)를 제수(除授)받았다. 한니의 셋째 아들 한걸도(韓傑都)는 호군참령(護軍參領)으로 여러 전투에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다고 하는데 청나라에서는 이를 매우 애석하게 여겨 벼슬을높여 주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박씨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의주 출신 박동안(朴東安)이청 태종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서 대신까지 지냈으며 그 후손들도 크게 번창했다고한다. 이 외에도 많은 조선 인들이 청나라로 건너가 군공(軍功)을 세운 이가 많았고,나라에서 받드는 제사(祭祀)에 이름이 오른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청나라가 중국에 들어 서면서 서둘러 시작했던 명사(明史)도건륭제 때 완성을 보았다. 그런데 건륭제에 이르러 모든 왕족들이 수도 한 곳에만오밀조밀 몰려 살다보니까 불편함은 고사하고 서로가 서로를 헐 뜯는 등 그 폐단이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왕공(王公)은 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조법(祖法)에묶여 다른 곳으로 분산할 수도 없었다. 이에 놀란 건륭제가 도대체 이런 천하의 악법을누가 만들었는가를 조사케 했더니 순치제의 섭정 다이곤에게 열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내각 수보로 기용되었던 김지준이 만들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인(旗人)은 상업에 종사할 수 없다는것도 그의 소치임을 알고는 이를 갈면서 분을 터뜨렸지만 이미 만들어진 조법을 어찌할수는 없었다. 다만 그 분풀이로 명사의 이신전(貳臣傳)에 김지준을 포함 시켜버렸다.이신(貳臣)이란 두 왕조를 섬긴 매국노, 즉 한간(漢奸)이란 뜻이다.

1795년, 건륭제의 나이 85세, 제위기간 60년, 아직도정정했다. 그러나 그의 열 다섯째 아들 영염(永琰)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그 이듬해부터연호를 가경(嘉慶)으로 고쳐 부르게 하여, 외견상 청의 7대 황제 인종(仁宗) 가경제(嘉慶帝/1760~1820)가즉위했다 조부 강희제의 치세 61년을 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는 하나,그의 아버지 옹정제가 만든 밀건법을 스스로 어기고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후계자를세웠다.

그리나 자신은 태상황제(太上皇帝)가 되어 4년간 실권을더 행사하다가 1799년 89세로 타계했는데, 좋은 일에는 항상 마(魔)가 끼게 된다.건륭제가 화신(和? / ? ~ 1799)이라는 만주기인 출신을 총애한 것까지는 좋았으나,군기처대신을 무려 20 여 년 간 시키면서 그가 저지른 천문학적인 부정을 막지 못했다.

건륭제의 사후, 가경제(嘉慶帝)는 그를 체포하고,그가 저지른 큰 죄(大罪) 20 가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으며,그의 전재산을 몰수했는데, 화신의 재산이 황제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역시 호사스러운 생활로 많은 국고를 낭비했다.

건륭제를 고비로 청조는 사양 길로 접어들게 된다.이것은 그 후의 황제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이미 세계적인 추세가 그렇게 움직이고있었다. 이런 추세에서 몰법자(沒法子/메이파즈)라고 스스로 목을 움츠리고 살았던서민사회가 역사 무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신기한 일이다.몰법자(沒法子/메이파즈)를 우리말로 풀이할 적당한 용어는 없으나 구태여 이야기한다면"별 볼일 없는 서민"들, 혹은 "어쩔 수 없는 사람" 들이 근사치에해당한다.

중국은 예부터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라 하여 자연현상에순응하고 살았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 강자인 지배계급이약자인 서민들, 소위 메이파즈들을 긁어 내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하늘의 법칙(順天)을 따를 뿐이라고 여겼다. 오히려 이를 거부하거나 불평하는 것은하늘의 뜻을 어기는(逆天) 것으로 생각했다.

이를테면 적군에게 포위되어 모두가 굶어 죽을 지경에이르면, 이들은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육신(肉身)은 윗 사람들의 식량으로 제공하는것이 남은 볼 일이다. 이런 것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즉 스스로를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이아니라 지배자를 위한 살신연명(殺身延命)으로, 어떻게 보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주옥같은 경구가 메이파즈들에게는 天命(천명)을 빌린 올가미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16회로 나누어 부족하남아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명(明)·청(淸) 시대의 동아시아 사회를 살펴 보았습니다. 남은 청나라의 이야기와청대에 발달했다는 고증학, 이와 병행한 우리나라의 실학 운동을 곁들이고자 했으나.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어차피 다시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일단 마감하고,같은 시기 일본사와 동남아시아 역사에 대해서도 좀 살펴 볼까 했는데, 이것 역시다음 기회로 넘깁니다, 녹음의 계절 5월부터 프랑스혁명을 위시한 유럽에서의 시민사회성장과정을 따라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꿈을 따라서 작품7 제1번 - 노부코 이마이(Vl), 롤란트 푄티넨(Pf) 

바보같은 사나이-나훈아

 

 

세계는 지금 ................2002.4. 21. 일요일

 

팔레스타인의 한 가장이 그의 어린자녀들과 함께 난민 수용소에서...

철없는 아이들은 놀고 있지만....이스라엘 포격으로무너진 담장이..

Palestinian men gather in a livingroom to chat as a young boy carries out debris
from his homein the destroyed area of the refugee camp of Jenin Saturday, April20, 2002.
The U.N. Security Council voted Friday night to backa U.N. fact-finding team
that will visit the Jenin refugeecamp.
The Israelis and Palestinians remained locked in a bitterdispute about
the nature of the battle in the refugee camp.Israel says dozens of Palestinians
were killed, most of themmilitants. Palestinian officialshave estimated the death toll
in the hundreds. (AP Photo/Elizabeth Dalziel)

간절한 소원을 빌기 위해 두 명의아프간이 솟대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소원은 뭘까?...

ONE OF FIVE PHOTOS BY GREGORY BULL--
Two men walk beyond fraying flags over an Afghan cemetery outsideKandahar,
Afghanistan, March 9, 2002. These strips of clothmark the graves, heaps of stone,
of the "shahidan,"those taken before their time. Most estimates put the toll of those
killed in Afghanistan in 23 years of war at more than one million,even without considering
those who succumbed to malnutrition,disease and other indirect effects of war's
dislocations. (APPhoto/Gregory Bull)

 

홍콩에서는 타이완의 뮤직 그룹 빅 즈 단원들의앨범 발표회에 수 많은 오빠부대들이....

This Fans screamduring a meeting with Taiwan singer Vic Zhou, member of
Taiwanmusic group, in Hong Kong April 20, 2002. Zhou just released hislatest album
"Make a Wish". REUTERS/Kin0

Click here.....more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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