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TC는 분명 선망의 대상이었다.
1,2학년 때 본 후보생들은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패기에 넘치며 적극적이고 솔선수범하는 우등생이었다. 또한 동대의 자랑이었다.
구리 아저씨가 5대독자 이기는 하나, 제아는 형제들이 많은 것도 그렇거니와 미래 지도자의 길을 위해 ROTC에 지원, 합격하였다. 300여 명이 훨씬 넘는 후보생 응시자 가운데 2,000m 달리기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내면서...
가난하게 성장을 하였으나 건강과 체력은 선택 받은 것이었다. 늘 제아가 감사하고 있는 점이다.
고학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새벽 집합, 밤 늦은 시간까지 장충공원과 남산을 오간 A.T(Animal Training), P.T(physical Training) 훈련과 여름 한달간의 병영 훈련 기간에 귀중한 시간을 투자하여야 했다.
학군장교후보생 군사훈련소인 문무대에서의 첫 여름은 땀의 소금기와 빗물로 범벅이 된 동료들과 함께 했던, 유난히 길고 고달펐지만 보람된 훈련기간이었다. 후보생 1년차의 훈련소의 감회는 수양록에 이렇게 담겨져 있다.
「폭염에 그을은 사나이의 젊음에서 정열까지 여기에 묻어두고 길을 또 간다. 우리는 무관 후보생, 대한의 아들. 조국 위해 길이 충성하리라. 나라 위해 이 한목숨 다 바치리라. 이 땅에서 학군은 영원하리라! 조국과 더불어 빛이 나리라!」
돌밭에서 나온 돈
3학년 여름 병영훈련을 마치고 피서를 겸해 친구들과 강원도 정선으로 캠핑을 갔다. 정선읍을 감싸는 강을 가로지른 큰 교각 밑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제아가 텐트를 치려고 자갈밭에서 둥그렇고 모양 좋은 돌을 찾아 나섰을 때, 대변이 놓여 있는 아주 잘 생긴 돌을 발견하고, 그 똥 묻은 돌을 치우자 그 바로 밑에 그 것 만한 돌이 또 포개어 있었다.
그 돌을 들어 치우자 이번에는 네오마겐 약통 깡통이 나오고, 그 깡통 속에서 비닐로 포장된 무엇이 나왔다. 그 비닐을 풀러 보았다.
돈이었다. 19만 8천원이나 되는 큰 금액이었다. 쌀 30가마니 정도의 값이었다. 친구들은 2학기 등록금으로 내는게 좋겠다고 하였다. 여름 병영훈련으로 아르바이트를 못해 등록금 준비가 안 되어 있음은 물론이었다.
땅에서 캔 돈으로 학비를 내었다. 어른 똥이 놓여 진 다리 교각 밑의 돈뭉치, 장마가 지면 다 떠내려갈 터인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제아는 학교 앞에서 시작해 여의도의 개인지도를 마지막으로 마치고 의숙에 드는 늦은 시각까지 분주하게 살아야 했다.
3학년 겨울방학도 학비 마련을 위해 다시 영월을 다녀와야 했다. 많은 후배들이 제아의 문하생이 되었다. 어느새 제아는 4학년 졸업반이 되어 있었다.
세상은 10.26 사건으로 어수선해 지고, 이른바 80년 서울의 봄에 들뜬 세상이 되었지만 이내 5.17 이후에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외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제아는 4학년 여름병영훈련을 마치고 과외를 갑자기 끊을 경우, 학업이 어려운 학생에게 정부가 특별히 지급한 세칭 전두환 장학금으로 여덟 번 중 마지막 등록을 필할 수 있었다.
육군소위 임관
그리고 1981년 2월 26일 몹시도 춥던 겨울의 끝날, 장교복을 입고 입학 5년 만에 졸업식을 하였다. 회갑을 지낸 구리 아저씨도 학사모를 쓰는 감회를 맞이하였다.
제아는 아버지를 배웅하고는 만감이 교차하는 캠퍼스에 다시 올라 은혜를 준 목정배, 이영자, 최덕희 세 분 교수님께 인사를 올렸다.
졸업 이틀 뒤인 1981년 2월 28일, 제아는 육군 소위로 임관을 하여 군복을 입고 용산에서 출발하는 광주행 열차로 육군포병학교로 향했다.
힘들었던 지난 중ㆍ고ㆍ대학의 10여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제아를 「전천후 사나이」라고 불러 주었다. 단짝 이기수가 나와서 멀리 떠나는 이 「모진 사내」를 전송하여 주었다.
광주 상무대에서의 4개월은 지나온 어둡고 방황했던 터널을 말끔하게 잊고 씻어 낼 수 있는 여유를 교육중이나마 처음으로 가질 수 있었다.
소위 계급장의 빛이 점점 밝아져 갈 즈음, 교육을 마치던 날 밤 축제의 불을 지피고 3구대원에게 바친 제아의 졸작 시 한 수는 이렇게 작별의 아쉬움을 남기며 동기생들을 임지 부대로 떠나보낸다.
'여기에서 춤을 추어라'
六月의 밝은 아침,
용솟음치는 햇살처럼
이제 너는
황산벌 전장터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조국 앞에 섰다
네 위용을 자랑 한다
네 충직을 사모한다.
너는
고귀한 젊음을 네가 사랑하던
푸른 제복에 바쳤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총으로 서고 검으로 서고
네 조국 이 땅 위에 네 두발로 굳게 섰다
가슴속의 조국은 언제나
네 아내요, 어머니요, 고향이자
너도 곧 조국이요, 자유요, 평화다.
너와 난 군인이다
「군인의 운명은 마지막 전장터
마지막 전투에서
마지막 탄환을 맞아죽는 것이다」라는
롬멜 원수를 따르자.
자!
이젠 모두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
너를 기다리는
민족의 아침이 뜨는 곳으로
자유 평화의 성을 향해
통일로를 따라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
이제
네가 곧 둥우리를 떠나면
빈 둥지만 지킬 내겐
아무리 작별을 고해도 좋다
끝없는 눈물을 뿌려도 좋다.
가을저녁
부슬비가 함초롬히 내리기 전에
여기에서 너는 춤을 추어라
창공에서 빛나고
광해에서 다다르며
지축을 움직일 때까지
이 땅에 바친
네 목숨이 닳고
네 영혼이 다 흩어지도록
너는 살아서 여기에서 춤을 추어라
춤,
춤을 추어라!
-1981. 6. 광주 상무대에서-
2-2
전방 칼포대장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에 제아는 최전방 휴전선의 비무장 지대를 가보았다.
가까이는 북한의 선전 마을이 보이고, 개성시내가 멀리 포대경으로 내려다 보였다. 시내 한 가운데 높이 솟은 김일성의 탑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의 요란한 대남방송이 적막에 쌓인 전선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북괴군들이 눈에 들어왔다. 큰소리로 외치면 들릴 듯하였다. 가까운 거리였다.
이렇게 30여년 역사의 냉전 속에서 우리는 서로 외세가 갈라놓은 강토를 사이에 두고 적이 되었다.
산, 산, 산으로 뒤섞인 더 멀리의 북녘 땅을 보려고 제아는 「지뢰밭」이라는 곳을 비켜 산등성이로 올라가 보았다.
하늘은 남북이 맞닿아 하나였다.
새들이 남북을 오가고 있었다.
분단, 휴전선, 비무장지대 현실이었다.
제아는 이 역사의 현장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땅'
아!
가 보고 싶은
북녘 하늘
우리 땅.
땅
철책
조국.
민족, 철주, 동포, 비극,
천 갈래의 아픔
산, 산, 산, 산.
하늘이 끝나는 거기서라도
목으로 울음을
울먹여야 겠다.
-1981. 7. 서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결코 감상적인 군인이 되진 말아야 한다.
군인 정신이 투철하여야 한다.
싸우면 이겨야 한다.
북한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한반도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동북아를 면밀히 이해하여야 한다.
전쟁과 평화를 알아야 한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려 작은 고갯마루를 넘으니, 콘크리트 막사 건물이 나타났다. 연병장에서는 대대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다고 선배 장교가 일러 주었다.
“충-성”
위병소의 초병이 신임 장교들이 탄 짚차에 받들어 총 경례를 붙였다. 제아는 경례를 받지 않고 차를 세웠다.
“다시 해봐”
“충-성”
목소리가 떠나갈 듯하였다.
“총 놔!”
“네, 보초는 총을 놓지 않습니다”
“그래? 받들어 총을 그렇게 배웠나?”
“퍽”
순간적으로 제아의 군홧발이 초병의 가슴에 올라갔다. 위병은 경계총 자세가 아닌, 소총을 땅에 세워 두었다가 짚차가 나타나자 얼떨결에 받들어 총을 아무렇게나 했던 것이었다.
“받들어 총시 소염기의 끝은 눈의 높이와 같다. 알겠나?”
“네, 즉각 시정하겠습니다.”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이라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너무했다 싶다.)
호랑이 신임장교들이 왔다고 부대 안에서는 야단들이었다.
영내의 사병들은 될 수 있는 한, 제아의 눈에 띄기를 꺼려했다.
더구나 5분 대기조를 3분 대기조로 만들겠다고 초시계를 들고 설치는 바람에, 제아가 일직 사령을 서는 날에는 아얘 새우잠 대기를 하는 것이 통례화 될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골치 아픈 「신삥 소위」였다.
그의 악명은 옆부대까지 이미 퍼져 있었다.
제아는 군인은 군인다워야 한다고 원칙론을 강조하였다. 군인은 무엇보다도 명령 하나에 죽고 살아야 된다며 충성론까지 강조하는 것이었다.
제아가 이 부대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날, 「간부사격 경연대회」가 있었다.
부대의 장교, 하사관들이 사병들의 기록 사격 이후, 25미터 거리에다 담배를 3개피씩 나무위에 꽂고 맞히는 담배 관통 시키기였다. 특등 사수 뽑기였다.
제아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하도 자신만만하다는 본부포대 이상사의 실력을 보기 위해서였다.
「탕, 탕, 탕」
세발의 사격이 끝났을 때 담배는 쓰러져 있었다.
나무의 밑두방치를 맞혀 나무만 넘어졌을 뿐, 담배는 고스란히 끼워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제아는 정조준 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세발 중 두발이 담배를 관통시켜 두 동강났다.
탄성의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제아에게 다시 「호랑이」에다「명사수」의 닉네임이 달려졌다.
제아는 한종식 대대장으로부터 작전보좌관 보직을 명 받았다.
포병에서 작전보좌관은 소위 보직 중에는 핵심 직책이다. 포탄 사격지휘를 하는 보직으로, 장기 근무자들이 차지하는 중요한 자리이다.
무덥고 찌든 전방에서의 여름 훈련을 마친 후에 있었던 군단포술 경연대회에서 우승하여 제아는 부대에 배치되어 가던 해, 그 다음 해, 제대하던 해까지 사격지휘 3연승이라는 대업적을 이루게 된다.
보직을 받던 해에 있었던 포사격 훈련을 앞두고, 자전거로 40여 km나 떨어진 인접 부대에 가서 선배 장교들에게서 포술을 익히기도 하였으며, 원거리에 떨어진 격지 포대의 포술훈련을 위해서 자주 출타를 하기도 했다.
작전과장 김진완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을 하여 부대대장이 되면서 제아를 본부 포대장으로 불러 내렸다.
제아는 일 백 명이 훨씬 넘는 부하를 가진 지휘관이 되었다.
포대장이 되면서 제아는 「칼포대장」으로 개칭되었다.
군대에서 「칼」이란, 규정과 원리원칙만을 따르는 이에게 붙는, 껄끄러운 말이다.
포대장이 되어서도 제아는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상을 재삼 강조하였다.
제아는 포대가를 만들어 포대원들이 부르도록 하였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단 하나
육군포병 장타대대 본부포대 요원이다.
이 한목숨 나라 위한 군인이 되리라.
명령에 죽고 사는 칼포대가 되리라.
우리는 포병의 왕자요 조국의 방패다』
김병장과 제아
제아는 쉴틈이 없었다.
낮 밤을 항상 포대원과 함께 해야 했다.
어느 날, 제아는 본부 행정반에서 인사계상사에게 불려와 호되게 호통을 당하는 두 병장을 보았다.
포대장 방으로 그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모범사병들인데 무슨 잘못을 하였나?”
“네. 조병장이 저를 배신하였습니다.”
“배신? 놈들. 전우에게도 배신이 있나? 뭔가?”
김병장만 남게 하고 제아는 사연을 들었다.
김병장은 전남 영암 출생으로 고생을 많이 하고 자라나,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입대하였는데 자신의 어렵게 고생하며 살아온 지난날을 절친한 친구인 조병장에게만 비밀로 얘기했었고, 조병장이 그 사연을 포대원에게 해버려 김병장이 이번에 있은 포대 「불우전우돕기」에 불우사병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 제아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포대원들이 제작, 판매하는 캠페인을 벌였었다.
제아는 부드러운 어조로 김병장에게 말했다.
“김병장.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음, 김병장이 볼때 포대장은 어떻다고 생각하나?”
“포대장님은 저 보다 훨씬 나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포대장님은 부자집 아들 같으신 데요….”
“그래? 우리 누가 서로 불행하게 자랐는가 비교해 봐야겠는데…. 어머니 안 계시지?”
“네. 열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안 계신 점은 나와 같다. 그러나 난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지. 김병장은 어머니 얼굴이라도 알잖나?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
“시골에서 농사짓고 계십니다.”
“김병장네 땅인가?”
“네”
“나의 아버님은 병환중이시기도 하거니와 땅은 한 평도 없다. 집은 누구집이지?”
『저희 집입니다』
“그 점도 나보다는 좋아. 우리집은 초가로, 새마을 사업때 지붕 개량을 못해 강제로 헐렸지. 지금은 남의 집에 세 살고 있네.”
이후 복잡한 가족상황 등, 여러가지 살아온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서로 주고 받았다.
“포대장님. 죄송합니다. 오늘 저는 저보다 불행한 분을 만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아는 김병장에게 성금으로 전기 밥솥을 사서 위로휴가를 보내 주었고, 불우사병으로 휴가는 절대 안가겠다던 김병장도 기꺼이 응해주었다. 전우 신문에도 이 기사는 게재되었다. 제아는 이후 김병장을 의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으며, 김병장도 모범적이며 충성스런 포대원이 되어, 포대의 분위기는 더욱 밝게 되었다.
벙커 벼락
비가 세차게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던 여름 밤, 제아는 일직사령을 서고 있었다. 일직사령은 야간 대대장으로 대대장 대신 야간동안 지하 벙커에서 장병들과 당직을 서는 것을 말한다. 상부부대의 지시와 전달사항을 대대장에게 긴급 보고도 하여야 하고, 야간에 5분대기조 등을 비상출동 발령하여 점검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포대에 연락을 하여 도상으로 대포 발사 연습을 시키기도 하고, 전 A(알파), B(부라보), C(챠리) 포대에게 통신유지 상황을 체크하기도 한다.
그 날 따라 빗줄기가 거세고 천둥이 요란하였다. 밤은 이슥해 지고 사병들은 각 포대 전화기 앞에서 앉아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제아가 도판 위에 있다가 내려와 꺽어진 출입구 쪽으로 걸어갈 무렵 갑자기 밖이 훤해지면서 벼락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포대로 연결된 전화기에서 파란 불덩이가 튀어 나와 출입구 쪽으로 나가는 것 아닌가!
모두들 기겁을 하였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고, 그 파란불덩이는 낙뢰전파였던 것이다.
물론 맞았으면 즉사라고 일러 준다.
인접부대 공격
어느날 제아는 인접부대를 공격하였다.
바로 옆 부대는 8**포병대대로 8인치 대대였고, 1군단 예하의 직할부대이다. 제아는 소위였고 직책이 작전보좌관이어서 벙커인 작전과의 지휘통제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군대 용어로는 ‘S-3보좌관’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전쟁발발시 포탄을 어떤 재원으로 발사할지 그 재원을 산출하여 대대의 12개 대포에게 알려주는 일이다. 평소에는 작전, 훈련 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제아가 일직사령을 서던 날, 제아는 5분대기조를 출동시키어 인접 옆 부대인 8**대대의 철조망을 넘어 그 부대에 대기중인 트럭을 훔쳐 부대로 몰고 오도록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인접 대대는 우리부대와 경계를 같이하는 곳은 근무를 게을리하고 다른 쪽에 야간 보초를 배치하고 있어 침투가 가능한 곳을 찾으라 하였다.
벙커 앞에는 언제나 출동대기중인 2톤반 트럭이 키를 꽂은 채로 있고, 그 차가 병사들을 싣고 부대 정문 쪽으로 나가면 위병소에서는 출동인가보다 하고 문을 열어주게 마련이다. 야간에 부대로 들어오는 차는 “정지, 라이트 꺼, 암구호, 선탑자 내려” 등 확인 후 들여보내지만, 야간이고 비상출동차이므로 탑승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은 잘 하질 않는다.
한마디로 5분대기조의 출동 능력과 용감성을 보겠다는 신빙소위의 무모한 작전명령이었다.
5분대기조는 이 일을 거뜬히 잘 해 주었고, 이튿날 아침 차를 돌려 주면서 그 부대의 작전장교 김대위에게 용서를 구했다. 우리부대 5분대기조 훈련이었음으로 널리 양해해 달라고...그리고 그 부대도 우리에게 공격해 와도 받아 주겠다면서... 너스레를 떠니 후배 장교가 벌린 일을 김대위는 눈감아 주었다.
2-3
허일병의 탈영
인접 사단사령부에서 대통령 브리핑 챠트를 한다며 제아를 데리러 짚차가 왔다.
제아는 서당 출신이라 글씨가 괜찮은 편이었는데, 군단에서 시와 서예로 상을 받은 이후부터는, 인근 사단에서도 일을 부탁하였다.
한글 챠트는 사병들이 있지만, 한자 챠트병은 구하기 쉽지 않아서였다.
제아의 직책 상, 한시라도 비울 수 없는 자리인데도 인접부대의 청에 밀려 보내졌지만, 제아에게는 아주 고된 일이었다.
한 번 가면 밤낮없이 며칠을 해 다 해치우고 급히 부대로 돌아왔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제아는, 일을 마치고 1사단 포병단장(한광덕 대령)의 관저로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문중위, 자네 전역이 멀지 않았는데 전역하면 뭘 할 건가?”
“공부를 좀 더 해야겠습니다.”
“공부? 무슨 공부를?”
“정치학입니다.”
“정치학이라고? 자네 꿈이 그쪽인가?”
“그렇습니다.”
“그래? 그러면 더욱 잘 됐네. 장기 복무를 하게.”
“네에?”
『“것 봐 문중위.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군인이 통치하였지만 앞으로도 한 30년은 더 그럴 걸세.”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치군인이 되라는 말씀입니까?”
“하여간 잘 생각해 보게. 내가 자네 대대장에게 전화를 해 두었네.”
부대장은, 자신은 육군사관학교 동기생(20기) 가운데 선두주자이며 곧 장군으로 진급할 것이므로 제아를 이끌어 줄 수 있다 하였다. 당시 대령이던 부대장은 별 셋을 단 군단장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밤 열 한시가 좀 지났을까?
자대로 돌아와 밀린 잠을 깊이 곤하게 자고 있는데, BOQ(독신장교 숙소)로 포대 일직사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밤에 걸려오는 전화는 비상발령이나 거동 수상자 출현 등, 긴급 상황이 대부분이어서 긴장되기 마련이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충성. 일직사관 박중삽니다.”
“예. 수고 많소, 발령권자가 누굽니까?”
“비상발령이 아닙니다. 포대장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요?”
“작전과의 허일병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요? 탄약고나 벙커에도 없소?”
“네, 고참들을 풀어 영내를 지금까지 샅샅이 뒤져도 없습니다.”
“알았소, 내 바로 가겠소. 차를 본부 막사 앞에 대기시키시오.”
후배 김소위를 동두천으로 내보내, 사창가를 훑도록 하였다.
진상을 조사해 보니, 오늘 오후 저녁식사 시간이전까지, 부대 외곽의 교통호 정비작업을 하였는데, 그 때 허일병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관물대를 보았지만, 내무반에는 특별이 없어진 게 없었다.
소총과 탄약도 모두 그대로 있었다. 단지, 작업모 하나만 없었다.
저녁식사 직전 작업을 마치고 하산할 때 철조망을 넘어, 무장 없이 홀몸으로 탈영한 게 틀림없었다.
제아는 일단, 대대장과 상급부대, 안전부대, 군 수사기관에 탈영보고를 하였다.
탈영은 탈영을 한 당사자는 물론, 소속 부대장에게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지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과연 허일병은 어디로 갔을까?
그에게 무슨 고민거리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제아는 포대 CP로 와서 「지휘관일지」와 설문지 「소사이어그램(Sociagram)」을 펼쳐 놓고 「허일병 연구」를 하였다.
「지휘관일지」는 포대원들의 관찰기록이며 설문지는 제아가 개발한 특수 연구자료였다.
신병이 부대로 전입되면, 포대장에게 전입신고를 하게 되는데, 그 이전에 여러 계통을 거쳐 교육을 받지만, 정작 지휘관인 포대장 방에 들어 와서는 얼이 빠지는 게 보통이며, 뭐를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흐려지게 마련이다.
제아는 이 때 중요한 사항들을 질문하고 기록해 둔다.
성장, 환경, 직장, 애인, 희망, 병력, 고충 등…. 특히 애인문제는 잘 관리해 주어야 탈이 없으므로,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허일병의 부친은, 충북청주에서 주류제조업을 하는 사장이며, 1개월쯤 전에 부대로 허일병을 면회 오기도 하여 제아도 한 번 만나 뵌 적이 있었다.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서울 시내의 K대학 1학년에 재학 중 입대하였다. 말수가 적었으며 가끔 포대장과 어울려 축구시합을 갖기도 하였다.
'문제사병' 꺼리라곤 평소에 전혀 없던 녀석이라 허일병의 '본심'의 파악에 고심하였다.
다시 「소사이어그램」설문지를 보았다.
이것은 좀 더 깊숙한 곳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 설문 중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끼어 있다.
① 오늘 포대장이 저녁식사를 초대 한다면, 누구와 함께 가고 싶은가?
②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사랑하고 싶은 전우가 있다면, 누구인가?
③ 오늘 포대장이 갑자기 휴가를 명한다면 제일 먼저 어디로 가고 싶은가?
④ 다음 란에 첫 번째는 외박을 하고 싶은 사람, 두 번째는 외출을 하고 싶은 사람, 세 번째는 면회를 하고 싶은 사람을 차례대로 쓰시오.
⑤ 부대에서 제일 존경하고 싶은 상사가 있다면 누구인가? 등등의 내용이다.
설문 ①, ②는 전우의 파악에, ③은 외출, 외박 등의 처소에 ④는 애인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설문 ④의 경우는 대개 첫 번째에 애인이 있는 경우 당연히 쓰며, 없는 경우 어머니 등을 쓰기도 하고, 애인이 여럿인 경우에는 우선 순위 대로 쓰기 마련이다.
제아는 애인들이 겹치기 출연으로 면회를 오는 경우에도 이 자료를 참고 하는 등 포대원들의 애인연구는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그런 허일병의 경우는 친구도 많지 않았고, 설문③의 답은 '우리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아는 청주 허일병의 본가로 전화를 넣었다.
그의 부친이 받았다.
“허일병이 오늘 탈영을 했습니다.”
“탈영을요? 내 자식이 탈영을 할 리가 없는데요….”
“네, 아무튼 오늘밤에 집에 들르면 휴가 왔냐고 반기면서 일단 재우십시요. 그리고 전화를 제게 주십시오.”
“예. 오기만 하면 즉시 전화를 올리겠습니다.”
상급부대와 수사기관에서는 야단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갔길래 포위망에도 걸리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기야 저녁 다섯 시쯤에 나간 시간을 고려하면 보고시간이 너무 늦었던 것이었다.
동두천으로 나갔던 김소위가 허탕을 쳤다고 보고하였다.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다.
평소의 내무생활상태, 지휘관의 의견 등을 대답하느라 제아는 정신이 없었다.
새벽 2시.
청주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포대장님, 우리 그 놈이 지금 막 집에 들어왔습니다. 설득을 할까요?”
“아, 아닙니다. 편히 놔 두십시오, 제가 내일 아침 일찍 청주로 내려 가겠습니다.”
제아는 대대장님께 상의를 드렸다.
무장탈영이 아니고 집으로 갔으니, 탈영 사유를 알아본 후에 처벌하자고 의견을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여 주셨다.
제아는 상급부대 및 수사기관에 작업 후에 있은 회식에서 허일병이 과음을 해 통신대 뒤에서 잠을 자고 있었노라고 보고해 두었다.
전방 탈영(월북)인가? 후방 탈영인가? 를 곤두세우던 사건은 일단 「상황 끝」이 되었다.
그날 새벽 청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제아는 「부친 위독 급히 귀향」이라는 급전을 받고 고향 집으로 내려가게 되어 인사계인 정상사에게 허일병을 잘 모셔오도록 하였다.
정일병의 탈영보고서는 이러하였다.
본인이 입대 전 결핵을 앓았었는데 최근 목에서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보고 재발이라고 생각하니 살고 봐야 겠다는 생각에 앞서 집으로 무작정 갔노라고 털어 놓았다.
허일병의 부친도 그 사실을 알고 자주 허일병을 부대로 방문했었던 것이었다.
아~ 진작 말씀해 주시지.
부모님들은 부대까지 찾아와 대대장에게 이렇게 간구 하는 것이었다.
“내 자식이지만 군법에 따라 엄하게 처벌을 해 주십시오. 이 애비 탓입니다.”라고 ....
군단 헌병대에 15일 영창감이였다.
헌병대로 가는 조서를 작성해 짚차로 허일병을 태우고 군단 헌병대를 지나 의정부에 내려주면서 청주 집으로 가서 15일간 수감기간만큼 입원 휴양토록 해주었다.
얼마 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허일병은 이후 있은 군단포술 경연대회에서 우승의 주역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더욱 솔선수범하는 모범사병이 되어주었다.
너무 빠른 2년
제아는 포대원 사기진작을 위해 진중문고 1,000권을 모아 읽도록 해 주었으며, 「애인과 함께하는 체육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포대원의 체력단련을 위해 태권도를 매일 하도록 하였고, 포병이지만 구보도 매주 인솔하였고, 대 간첩 작전 중에 즉각 투입 될 수 있도록 교육훈련과 작전 계획에 만전을 기하였다.
세월을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리고 어느덧 제아도 말년 중위가 되어있었다.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날, 다시 또 부친 위독이라는 지급 전보를 받고 달려갔을 때 제아의 아버지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일전 위급 상황 때는 원주 기독병원에 입원케 해 드리고 상경했었는데, 간병할 이가 없다고 당신께서 뛰쳐나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제아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큰아야. 얼른 가거라. 아버지 안죽는다. 네 어미가 장생하여 네가 출세하는걸 본댔어. 얼른가! 가쟎고 애비 마음을 아프게 하느냐. 가서 부대일이나 열심으로 보그라. 어여 가...”라고.
‘어머니도 안 계시는데 아버님이라도 오래 사셔야 될 터인데.... 와병중인 아버님을 위한 자식의 도리는 무엇인가?’
제아는 찢어질 것만 같은 저린 아픔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부대로 복귀하였다.
제아는 전역이냐. 말뚝이냐를 놓고 고심하였다.
결국 아버님의 병구완과 공부, 가족 상황 등을 고려해 전역하기로 최종 결정을 하였다.
1983년 6월말 제아는 전역을 하였고 대대장이 의정부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사회로 새 출발하는 젊은 친구를 축하해 주었다.
황금기의 스물넷, 다섯, 여섯과「칼포대장」을 동시에 마감하였다.
제아는 육군 『정훈』지에「나의 조국」을 전역기념으로 남겼다.
'나의 조국'
너를 잉태한
땅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창천(蒼天)으로
질긴 함성을 나누는
너와 나는 자요의 순례자로
몸뚱아리에 둘러진 철책이 아프지만
여린 너의 가슴은 갈기 찢어져
고통으로 남을 지라도
더 시린 나의 영혼은
창공을 나는 전투기 빛으로
네게 서겠다.
나는
숨 겹도록 고동치는 가슴으로
열애(熱愛)를 불태우는 활화산(活化山)이 되어
바람으로 온 산야를 누비며
너 위해 불끈 쥔 주 주먹으로
늘 서겠다.
이 땅에서
포화가 종식되는
끝날 끝 전투에서
나는 너를
꼭 한번 안아주고
억만년이고 포근한 네게 돌아가
화사한 청백(淸白)빛 무궁화를
설해목(雪害木)에다가도 피우겠다.
-1983. 6월 육군 5699 장타부대에서 -
2-4
전역과 취업
한여름의 열기가 대단한 서울 장안은 이산가족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분단의 아픔은 곳 곳에서 분출되었고 온 국민의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연일 '이상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제아는 감동 체험을 위해 KBS 생방송 현장 스튜디오로 달려갔다.
'아들아 내 아들아'
아픈 가슴
찢어진 가슴.
어데서 살았네?
어드렇게 살았네?
네 모습 꿈에도 그리다가
허공에다 부른 이름.
헤어딘 디 30년
너무도 변했구나
아들아
내 아들아
죽어도 한,
한이 없구나.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 생방송 KBS 공개홀에서 -
제아는 군복을 입은 채로 독서실에 입실하였다.
1983년 6월초 제대 1개월여를 앞두고 전방으로 훈련을 떠나면서 당번병을 서울로 내보내어 장교특채를 하는 회사 중에서 지원 마감이 안 된 회사에 입사원서를 넣어달라고 하였더니 흥국생명보험에 지원해 주었다.
제아가 전역하던 날 독서실로 직행한 것은 입사 직전 보름여 사이에 대학원 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독서실은 이미 낯익은 곳이었다.
한국외대대학원에 지원하였지만 정치외교학과장 노명준 교수는 학부 3학년에라면 몰라도 수학과 출신을 바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거절하였다.
시험을 치르고 대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닷가를 걸으며 이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심하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정미를 생각했다.
'정미(貞美) 생각'
보고 싶은 얼굴
노을 진 바닷가에서
혼자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다.
파도소리는
정(貞)한 목소리
포말은 당신의 미(美)한 사랑.
연이은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천국(天國)가는 날까지
우리 둘이는
하늘과 바다.
보고 싶은 얼굴
정(貞)하고 미(美)한 사람
당신의 모습.
- 대천해수욕장에서 -
3천만 원을 벌어라
여행을 다녀온 제아는 사회인이 되었다.
제아는 그해 겨울 곧바로 대학원 진학이 어렵게 되자. 고려대 정외과에 학사편입학을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제아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 졌지만 입학금을 내고 나니 학비가 없었다.
제대시에 받은 130만원 중 100만원은 아버님 병구완 값으로 드리고, 새 의복과 월셋방을 얻고 나니 남은 것은 몇 푼 되지 않았다.
무리를 해서 지난 대학시절처럼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다닐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과외가 묶였고 결혼이나 아버님 병환 치료 문제 등 여러 정황이 공부를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휴학을 하였다.
앞으로 두 번의 휴학과 제적기간 2년을 감안하면, 4년여를 돈을 버는 일에 충실키로 작정하고, 3천만 원의 4개년 PLAN을 세웠다.
2년간의 학부를 마치는데 필요한 학비 1천만 원, 결혼 및 생활에 필요한 비용으로 1천만 원, 집을 얻는데 1천만 원 등 3천만 원이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당시의 월 급여 30만원으로 4년 만에 3천만 원의 자금 마련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제아는 명저 나폴레온 힐의 『거부가 되는 13가지 비결』을 읽고 또 읽었다.
뚜렷한 묘책은 없었지만. 그 책이 주는 메시지는 벌 수 있다는 신념 하나였다.
스스로 믿는 것이며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기간별로 언제까지는 얼마 얼마라는 식의 단계적 상승 방법이었다.
경제 신문을 뒤져 보았다.
돈을 벌 수 있는 게 무얼까?
주식투자가 눈에 들어 왔다.
제아는 정치학 공부를 하겠다고 다시 대학에 다시 입학했지만 내심 문외한인 경제를 공부할 기회를 전역 후에 갖고 싶어 하던 터였다.
또 한편, 돈의 포트폴리오인 주식을 알아야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증권회사에 가서 시장지와 상장회사 결산분석을 얻을 수 있었다.
밤 새는 줄 모르고 독파하였다.
각종 생소한 용어와 기술적 지표가 무엇인지 몰랐다.
단지 방송을 통해 칠판에 백묵으로 여직원이 받아 적는 팔자, 사자의 호가정도만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 해 가을, 한신공영을 80만원 어치 처음 매입하였다.
운 좋게도 곧바로 달포이내에 140만원이 되어 주었다.
돈벌이가 너무 쉽게 생각되었다.
당시는 거의 저가주가 대종이었고, 주가지수 역시 100선 대였다.
5원짜리 주식이 있었는가 하면 40원짜리 주식이 관리종목 상한가폭인 하루 50원씩이나 상승해 90원이 되는 수도 있었다.
1985년 봄, 대학에 복학을 하지 못하고 역시 지난해에 이어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하던 해부터 시작한 주식 투자는, 이제 눈을 뜨고 감을 잡을 만한 때였다.
재미있었다.
한탕 해보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이 해에 제아는 매우 큰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사이에 모았던 주식 모두로 남광토건 주식을 샀다.
당시 남광토건 주식은 주식2부 소속으로, 액면 500원짜리가 80원에서 160원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당시 하루의 상한. 하한가 제한폭은 30원이었는데 150원을 고수하던 주가가 연일 140, 130, 120원 등으로 밀려 내려왔다.
110원대에 들자 제아는 매수에 들어갔다.
다음 날은 100원대로 내렸지만 다시 매수를 하였다.
100원대를 바닥으로 보던 주가는 주춤하더니, 이번에는 90원대로 내려앉았다.
제아는 추가 집중매주를 하였다.
정신없는 물타기였다.
지금까지의 재형저축 등을 모두 해약하여 12만주를 샀다.
그리고 여름휴가에서 돌아와 보니, 주가는 지하실로 곤두박질해 있었다.
아연질색하였다.
63원이었고, 관리대상종목으로 쫓겨 가 있었다.
정보 부재였고 자만이었다.
큰 손실이었다.
가을이 다 가고 찬바람이 불어 올 때까지도 지지부진, 관리대상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다.「주식 투기」2년 만에 된 서리를 맞고 말았다.
이때 지병이 악화되어 시골집에 가계시던 아버님의 병환이 위급하여, 제아는 급히 혼수상태의 부친을 모셔 와야 했다.
한강 성심병원에 입원을 시켜드렸지만 낮 시간에는 제아가 회사엘 다니느라 보호자 없는 환자 인 셈이었다.
점심 식사 때는 간호사가 대신 도와주었다.
부인도 많고 자식도 많은 아버지였지만, 아무도 병실을 찾아보지 아니 하였다.
치료비용으로 주식을 할 수없이 처분하였다.
후에 이 남광토건 주식은 액면가가 5천 원짜리로 바뀌고 건설주 호황을 틈타, 2만원까지 무려 30배 이상 오르기도 하였다.
'분산투자를 하라. 물타기를 하지 말라. 쉬는 것도 버는 것이다. 어깨쯤에서 팔고 무릎에서 사라' 는 투자자 격언을 터득하고 실감하는 데는 근 3년여가 걸렸다.
욕심이 과한 즉 죄를 낳은 꼴이 되고 말았다.
사랑
이즈음 제아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정미의 생일날에 보낸 글을 보자.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님을 생각하며 …)
'생일(生日)'
이름 아침부터 저물 무렵까지
님을 위한 비가
종일 내리고 있었다.
스물 네 해전 오늘은
님이 세상(世上)에 태어난 날
행복의 꿈을 꾸기 시작한 날.
님의
이름만큼이나 소중한
貞하고 美한 마음
貞하고 美한 숨결
貞하고 美한 사랑
貞美한 모습.
백목련을 닮은 환한 얼굴
고운 뺨, 온유한 가슴
우아한 정중동(靜中動)을 잉태한
님의 모습.
님은
언제나 푸르른 새 생명(生命)으로
아침마다 다시 태어날
세상에 빛
세상에 소금!
님의 탄생은 나의 탄생
님의 축복은 나의 축복
님의 행복은 나의 행복, 우리 둘의 행복
우리의 꿈.
- 정미 생일날 -
전셋집 사건
한편, 그 해 가을 제아는 이듬해의 결혼을 앞두고, 이사철을 맞추어 부천시 역곡동에 800만원의 전세집을 얻었다.
보통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계약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등기를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복덕방 아줌마가 마을금고에 500만원 대출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물론 값싸고 좋은 집이라고 일러주기까지 하면서 ...
그러나 이사 후 다음날 회사에서 돌아와 보니 문틈에 쪽지 편지가 끼어 있었다.
「이 집은 문제가 있는 집이므로 저희 회사로 연락 바랍니다. 새마을 금고」
마을금고에서 최고장이 날아들고 경매가 들어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등본 상에는 아직 경매신청 내용이 미기재 된 상태였으므로 속는 것은 당연했다.
본인의 헛똑똑함이었다.
그 경매 신청자인 새마을금고의 경리 아가씨가 새로 누군가가 아사를 온다는 애길 듣고 일부러 다녀간 것이었다.
주인은 대출금 ,전세금, 사채 등으로 집을 담보하여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빼내어 서울에서 옷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후 제아는 여러군데로 문의를 하고 애써 보았지만, 근저당 이후 세입자는 물론 전세권 설정이 없는 입주자는 보호 받을 수 없으며, 더구나 당시 200만원이던 임대차 보호법의 소액 보증금에도 훨씬 초과되는 금액이므로 한 푼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마을금고 이사장 최호순씨를 만났을 때, 최이사장은 제아가 끼고 있는 반지를 보고 자신도 ROTC 5기 (한양대) 출신임을 밝히며, 강제 경매를 즉각 중지해주고 주인과 조속히 해결을 보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서울의 융창상호신용금고에서 경매신청이 또 들어왔다.
900만원의 일수대출과 맞보증 900만원, 합이 1천 800만원이나 됐다.
이번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은 지독한 철면피였다.
집을 담보로 융자 500만 원과 일수900만 원, 전세800만 원 등 총 2천만 원을 빼내어 고속터미널에 의류점포를 차리고는 집은 흑석동에 월세로 살고 있었다.
제아가 주인집을 찾아 전세금 반환을 요구하자 그들은 부엌칼을 들고 와서 죽이겠다고 까지 하였다.
한마디로 짐승 같은 사람들이었다.
파출소에서 경찰이 달려오고, 경찰은 제아에게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제소하도록 권유하였다.
6개월이나 시간을 끌던 이 사건은 제아가 은행감독원에 신용금고를 상대로 소액상업자금의 한도초과대출(1인당 300만 원)을 탄원함으로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게 됐고, 상호신용금고가 경매 취하를 하였다.
제아는 크리스찬으로 교회에 나갈 때마다 이 전세사건의 해결을 응답 받을 경우, 십분의 일인 100만 원을 불우한 이들에게 내도록 작정하였는데 3자 매매를 통한 방법으로 해결을 하고 나니, 700만 원만 받고 100만 원이 꼭 남아 어음공증으로 대신하였다.
후일 제아가 주소지를 옮기며 도망 다니던 주인을 찾았을 때 그 집의 주인아저씨가
“젊은 양반 교회에 나가시유? 어지간하면 그냥 놔두시유.”라는 말에 주인의 자녀들을 생각하여 증서를 행사치 아니 하였다.
이 모두는 기도의 응답이었다.
축복의 결혼
1986년 3월 15일 비가 함촉하게 내려 주던 봄날, 제아는 평소 존경하던 유순근 목사님을 모시고 혼례를 올렸다.
아버님은 병원에서 퇴원을 하여 시골집에 갔었지만 받아들이지를 아니하여 제아가 고교시절 자취하던 읍내의 주인집에 부탁해 하숙을 하며 병환 중이었으므로, 제아는 양부모가 다 참석치 못한 가운데 결혼식을 하였다.
서글픈 일이었다.
그러나 큰 축복이었다.
제아는 신부에게 아름다운 축복의 노래를 선물하였다.
'축복'
오늘은 기쁜 날
축복받는 날
우리의 만남을 감사하는 날
이화 빛깔 사랑을
열매 맺는 날.
우리 둘이는
우주를 감싸는 달무리를 영근 채로
주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며
활짝 필 꿈을
정성들여 심는 날.
낙원으로 드는 촛불 행렬사이로
웨딩마치에 순애(純愛)를 싣고서
우리는
그 꿈을 가슴으로
약속하는 날.
아라리요
당신은 언제나
태양을 향하여
아침스런 환희를 잉태하는
당신은 천사
당신은 여왕.
오늘은 기쁜 날
축복받은 날
우리의 만남을 감사하는 날
잊지 못할 날.
1986. 3. 15 국빈예식장에서
제아가 대학 4년 때, 버스 안에서 자리를 내드렸던 한 할아버지가 굳이 자청하여「운명」을 얘기해 주었는데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라고 시작한 말이 너무 신통해 무슨 성씨와 결혼하겠냐고 묻자, 거침없이 그는 『장씨야』라고 답변해 주었다.
제아의 마담 뚜는 전우신문이 해주었다.
제아가 부대로 전입을 가던 그 해 겨울, 제아가 군단포병사령부에서 1등상을 받고 전우신문과 KBS 국군의 방송에 난 뒤, 제아에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날아든 아름다운 꽃엽서가 제아의 신부로 변신하였다.
사랑의 열매가 5년여 만에 이뤄진 셈이었다.
제아와 신부는 신혼여행시 오른 한라산의 설산 위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漢拏山에서'
이른 아침부터 저물 무렵까지
靈山은 우리와 함께 하였지!
용암과 구릉과 고목과 산허리 둘러진 띠구름과
白羊과 우리 두 사람
한라는 우리의 비밀을 감춰주었지!
처음과 끝을 다 내보이고서
모여 있는 백록담은 역사를 주워 담고 있었지!
漢拏의 四季는 漢拏가 알고
漢拏의 하루도 漢拏가 안다지!
靈峰 높은 곳에서
용두암 낮은 데까지
漢拏는 돌을 낳고 폭포를 다듬고
濟州를 길렀다지!
계절에 걸맞게 눈에 덮인
사제비 동산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漢拏는 어승생(어리목)까지 따라 나와
우리 두 사람을 마중하여 주었제!
우리는 사랑을 많이 뿌리고 돌아왔제!
이 다음에 우리는 다시 오마고 하였제!
-신혼여행 때 漢拏山을 등정하고 -
행운을 안겨준 주식
휴학을 계속했던 대학은 복학 만료 시기가 되었지만 전세 사건, 부친의 입원, 자금의 부족 등으로 제적이 되고 말았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지만 도리가 없었다.
2년 뒤의 재입학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었다.
1986년에 개화되기 시작한 주식 시장은 제아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제아는 주식시장에 다시 재도전하여 「씨감자가 여물 때까지 기다리기」를 하였다.
씨눈이 달린 감자를 심어서 싹이 났을 때, 사람들은 그 싹을 보고 웅성대기 시작하고, 조바심이 나는 사람들은 새끼감자가 달렸을 때, 먹지도 못하는 물감자를 캐버리고 만다.
제아는 잎이 지고 여문감자를 캐니는 시기를 「증시과열」이라는 기사가 신문지면에 대서특필될 때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그랬다.
그러나 투자가들은 과열일 때 팔고 바닥일 때 사지만, 투기자들은 그 반대로 달려들기 마련이다.
이듬해의「4월 조치」시에도 그랬다.
제아는 지난 남광토건에서의 대패를 거울삼아 다시 공부를 하였다.
각 상장사의 유보율, 부채비율, 당기순이익 등을 토대로 저평가 주를 물색하였다.
연중 최고, 최저치는 좋은 비교자료가 되었다.
종목 선택의 결정적 자료는 역시계곡선, 이동평균선, 투자심리선 등으로 결정하였다.
위 3가지 지표는 거의 적중하였다.
투자심리선 25% 이하시 역시계곡선에 의해 매수시기에 선택된 종목은 성공이었다.
자동차, 전자에 이은 주가는 연일 내릴 줄 몰랐다.
주식인구가 불고, 지점이 늘어나고, 시장은 북적대기 시작하였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중에는 작전설이 난무하였다.
초여름에 산 증권주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주어 18,000원에 매입한 주식이 38,000원까지 가 주었다.
이어 갈아탄 대한종합식품 주는 대통령선거 직후 수직 상승에다 배당락시세를 무시하고 이듬해 개장되었을 때 하루 아침에 황금주가 되어있었다.
4,000원짜리 주식은 이후 12,000원대까지 상승하였다.
당시 그 회사는 적자상태였으나 부산에 시가 수십억 원의 공터를 갖고 있으며, 곧 매도 예정이라는 걸 알았던 터였다.
「실적주와 재료주에 오래 기다리는 것」,「팔기전에는 절대 손해가 아니다」라는 격언을 거울삼았던 제아는 복을 많이 받았다.
세 번에 걸친 투기(제아는 서슴없이 부른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투자는 투기다)는 가난을 걷어가 주었다.
9천원으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여 도전하였던 제1라운드에 이어 재입학 후 새로 시작한 일어서기, 허물벗기의 제2라운드가 끝나는 공이 요란스레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