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글자 그대로 박금선생이 이 같은 기록을 남기게 된 연유와 까닭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곧, 원문 <징심록>은 갖고 있지 않으나, "전 날에 수리를 연구하고 고증하는 기간에, 개인적으로 모아 놓은 자료에 의지한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 몇 가지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선생은 원문이 문천 금호의 종합이학원에 있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함경남도 문천이란 곳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인데, 문천에는 옥녀봉과 운림폭포, 용담약수 등이 있는 곳으로,
선생이 자주 운림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을 쓰신 것으로 보아, 운림폭포 근처의 지역으로 이해됩니다.
곧 영해 박씨 문중의 세가사와 여기 징심록 제1지 부도지와의 인연이라 할 것인데요.
이는, 처음 관설당 제상공 선생이 양산백으로 있을 때, <징심헌>에서 그 집필이 이루어진 것인데,
이후 아들이신 백결선생이 증보한 것으로 영해로 이주할 때 같이 옮겨 놓은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이로써 영해 박씨가 시작되고, 다시금 역사의 부침을 통하여 문중은 연리의 집안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들어서, 급기야 세종의 배려로 서울로 이사하게 되어 나라의 일을 돌보는 듯 하였으나....
오히려 세조의 계유 파천을 당하여 마침내 동족처럼 지내던 김시습 선생과 함께 함경도 문천으로 이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은 원래 금강산 운와공의 집에 있었다 하고, 이를 청한자가 수습 행장하여 문천에 와서 두고간 것이
박금선생의 집안에 남겨지게 된 연유라고 하였습니다.
곧, 이러한 가문의 이합집산에도 불구하고, 이후 영해 박씨 문중은 관조이신 제상공이 남긴 문중의 철학문화사적 기록을,
그 때 마다 잘 수습하여 문천으로까지 이송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백결선생은 금척과 만파식적 같은 전설을 남기면서, 또 수와 음에 관계된 절묘한 신비 내지 수리상수학적 내용의
많은 전설과 일화를 남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명절을 지냈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가운데 선생이 증보한 징심록 중 제1지가 부도지란 이름으로, 민족의 고대 역사기록과 함께 부도복본의 이념이
남겨지게 된 것이지요. 이후 영해 박씨문중에서는 이를 극비의 문서로 취급하여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증언에서는 금척지를 제외한 나머지 기록들은 근고체로 되어 있었다 하니,
위와 같이 극비 문서로 다루는 가운데서도, 때때로 필사를 통하여 그 기록의 훼손에 대비하고 그 기록물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거나 정리해 왔던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이러한 필사의 과정에서 당시에 사용하는 언어글자체로 바꾼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1장에서 보듯이 백결선생이 이를 증보하였다면, 당시에는 거의 이두문 곧 향찰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다시금 이것이 한자 한문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실로 이 <징심록>이란 자료가 최근세의
병란 속에서라도 멸실되지 않고 <함경도 문천, 양산댁>에 남아 있기만 한다면, 이는 참으로 하늘의 보우하심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입론은 다음 장을 해설하면서 덧붙여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