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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학자들 중에 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나?
-<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존 레녹스/두란노)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들이 어리석어 보인다. 피조된 만물과 문명의 위대함은 과학자나 예술가들의 것으로 느껴지고, 하나님은 그저 신화 해설가나 군소민족 대상의 전형적인 종교꾼쯤으로 비친다. 창조주 하나님이 종교적 우상일 뿐이라면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에게도 종교심 외에는 다른 능력이 없어야 한다.
“시간이 충분하면 무생물도 생물이 되고 식물에서 동물이 나오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한 명문대생에게 전도하던 중 필자가 들어야 했던 말이다. 신이 있다는 걸 인정할 바에야 차라리 우연을 신으로 삼고야 말겠다는 자신만만한 어투였다. 신과 우연 사이의 제3지대에 인간의 턱없는 자존심이 존재한다는 실상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청년을 포함해 지금 세상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른바 ‘진화주의’ 가치관에 깊이 물들어 있다. 진화론자들 스스로도 진화론의 허점을 잘 안다. 그러나 진화론의 허점을 인정하기보다 신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곤혹스럽다. 그래서 확실한 증거가 많다 해도 초월적인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증거가 빈약해도 진화론을 옹호하는 게 더 낫다고 노골적으로 공언한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불신의 가치관을 체계화하며 선전해온 것이 진화론이다. 지금은 그것이 ‘진화 이데올로기’로 격상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계속 진화중이다.
빈틈의 신, 빈틈의 진화
‘과학은 신을 매장했는가?’라는 질문을 부제로 단 이 책에서 저자가 일관되이 고발하고자 하는 것은 정통 과학인 듯 위장하고 있는 진화 이데올로기의 교묘한 허구성이다. 이 작업을 위해 그는 무신론적 진화론자와 유신론적 과학자들의 말을 두루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확신있게 펼쳐간다. 저자가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한 전문가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한 과학자의 말을 인용한 대목에 이 책의 주된 논조가 담겨 있다.
“현재의 생물학 지식은 상당 부분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의 핵심 징후는 함축하는 바도 없고 시험될 수도 없는 설명이다. 나는 논리적으로 막다른 그런 지경을 반(反)이론이라고 부른다. 그런 설명은 진짜 이론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 설명은 생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중단시킨다. 가령, 다윈이 위대한 이론으로 구상했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최근 들어 창피스러운 실험적 결함을 은폐하고 잘해야 의문스럽고 최악의 경우 잘못이라고 말할 수준도 못되는 연구 결과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는 반이론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단백질이 질량 작용 법칙을 위배한다 – 진화가 그것을 해냈다! 복잡하게 얽힌 화학반응들이 닭이 된다 – 진화다! 인간의 뇌는 어떤 컴퓨터도 모방할 수 없는 논리적 원리들에 따라 작동한다? 진화가 원인이다!”(로버트 로플린, p.285).
그동안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자들이 “과학이 설명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하신 일이야”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해왔다. 이는 창조론자들이 지적 게으름으로 인해 ‘빈틈의 신’을 신봉하는 것이라고 조롱해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진화론자들이야말로 생명의 기원 등의 문제에서 무엇이든 설명하기 어려워지면 “진화가 했다”고 얼버무린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빈틈의 신’에 빗대어 그들 역시 ‘빈틈의 진화’를 믿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꼬집는다(p.285).
저자는 이 책에서 물리학자들과 우주론자들, 그리고 생물학자들의 자연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철저히 현재 널리 수용되는 표준적인 현대 과학에 근거하여 논증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도 곳곳에 이해하기 쉬운 비유들을 들어 진화 이데올로기의 허구적인 문제점들을 잘 드러낸다. 이 주제로 이전에 출간된 책들의 내용과 중복되는 부분들은 되도록 피하면서 저자가 든 비유를 중심으로 진화 이데올로기의 주된 허점들을 짚어본다.
비유1. 마틸다 이모의 케이크
“마틸다 이모가 멋진 케이크를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 케이크를 세계 최고의 과학자 집단에게로 가져간다. 영양학자들은 케이크의 칼로리와 어떤 영양을 공급하는지 들려줄 것이다. 생화학자들은 케이크 안에 있는 단백질, 지방 등의 구조를 알려줄 것이다. 화학자들은 케이크의 원소들과 그 결합에 대해 말할 것이다. ... 이제 내가 그 자리에 모인 전문가들에게 최후의 질문을 한다고 해보자. ‘이 케이크는 왜 만들어졌을까요?’”(p.78).
이 비유는 과학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과학은 ‘어떻게?’에 대한 답을 준다면 종교는 ‘왜?’에 대한 답을 준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우주의 시작이나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과학이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진화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상식을 인정하지 않고 과학이 존재의 모든 측면을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신론자와 신자를 가르는 문제는 궁극적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타당한지 여부가 아니라 ‘어떤 사실이 궁극적인가?’ 하는 질문이다. 무신론자의 궁극적 사실은 우주이고, 유신론자의 궁극적 사실은 하나님이다”(p.339).
비유2. 포드 자동차와 포드
“세계의 외딴 지역에서 온 어떤 사람이 현대의 공학 기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난생 처음 그 차를 보고는 엔진 안에 신(포드 씨)이 들어 있어서 차를 가게 한다고 상상한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다. 더 나아가 그는 엔진이 잘 굴러가는 것은 그 안에 있는 포드 씨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엔진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포드 씨가 자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후에 그가 공학을 공부하고 엔진을 분해한다면 그 안에 포드 씨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단한 지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해도 그는 엔진의 작동을 설명하기 위해 포드 씨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인격적 내부 연소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으로 엔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기에 충분할 것이다”(p.85).
이 비유에서 저자는 범신론적인 신들을 믿고 살던 고대인들의 우주관과 과학이 발달한 시대의 사람들이 갖게 된 과학주의적 사고방식을 비교한다. 우주를 작동케 한 비인격적 원리들에 대한 이해가 우주를 설계하고 만들고 보존하는 인격적인 창조주의 존재를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가리켜 저자는 ‘범주 오류’라고 지적한다(p.86).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나 피터 앳킨스처럼 무신론적 자연주의와 과학주의적 사고에 물든 신무신론자들은 과학이 자연의 특정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도록 설계한 행위 주체가 따로 존재한다고 여길 필요가 없다는 오류를 범한다. 이것이 진화 이데올로기의 기저에 광범위하게 깔려 있는 비합리적인 논리다.
비유3. 자동차 생산 공정과 인공로봇
“차를 처음 본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처음에 그는 차가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로봇들이 제작하는 공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공장의 로봇들을 만든 기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었다. 그가 처음에 지적 기원을 추론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그 지성이 구현되는 방식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로봇이 제작하는 공장에서 직접적인 인간의 활동을 탐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인간의 지적 활동의 궁극적 결과가 공장 자체와 기계들의 존재이기 때문이다”(P.165).
이 비유는 애초에 미세조정된 우주가 없거나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따라서 창조자가 없었다면), 자연선택과 같은 진화의 과정 자체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것을 우리 삶속에 익숙한 비유로 바꿔보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동차 생산라인의 조립대가 아무리 많아도 조립대는 조립대를 못 만든다. 그와 같이 내 부모의 부모를 거슬러 올라가도 부모는 사람의 창조자가 아니다.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독립적인 초월자가 꼭 필요한 이유다.
생물학적 기능을 보유한 단백질에는 적어도 100개의 아미노산이 관여한다. 이 단백질은 고도의 분자적 민감성을 보이는데, 멀쩡한 단백질에서 아미노산 하나만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도 재앙이라 할 만한 실패가 일어난다고 한다(p. 283). 세포에 대해 연구하는 분자생물학이 밝혀낸 생물체 내의 미세조정과 같은 특정화된 복잡성은 생명체가 무작위한 기원에서 생겨났다는 진화 이데올로기의 주된 가설을 뒤엎는다.
“생명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믿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배열을 보면 지성이 관여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p.319). 잘 알려진 대로 철학자 앤터니 플루가 50년 넘게 신봉하던 무신론을 버리고 유신론을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현대의 과학계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는 무신론적인 진화 이데올로기의 버팀목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어야 맞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실질적인 성과가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워 충분히 대중화되지 못한 데다 유물론적 성향을 띠는 현대의 철학 사상 자체가 무신론적 진화론을 옹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여전히 진화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의 무지와 오해 가운데 날로 더욱 번성하고 있다.
참된 과학은 유신론을 지지한다
일전에 한 장관 후보자가 진화론을 거부하는 창조과학회의 주요 멤버였다는 경력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 진화론자들에 의해 유사과학, 비주류 과학으로 취급받는 창조론 추종자는 한 나라의 장관 자격으론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창조과학 = 개인의 종교관’이라는 청와대의 인식에 대해 ‘창조과학 = 반지성적 세계관’이라고 맞받아치는 과학계의 반응이 대조적이었다. 후자의 눈에는 무신론적 지성만 합당하고 거듭난 유신론적 지성은 미개하게만 보였던 셈이다.
정교분리 정책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호하고 장려한다. 그렇다면 과학과 종교의 분리, 곧 ‘과교분리’를 통해 진화론을 따르든 창조론을 따르든 이 문제로 공적 영역에서 차별받아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권력화되면 헌법이 보장한 신앙의 자유마저 위축시킬 위험요소가 크다. 이러한 추세에 힘을 더해주고 있는 무지막지한 과학 권력이 바로 진화 이데올로기이며, 기독교인 장관 후보자 해프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권력 지형과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물론 공적 영역을 떠나서라도 결국 과학과 종교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두 영역이 어떤 형태로든 사실들을 다룰 때는 많은 공통분모들로 인해 양립 가능하다. 창조가 사실이고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성경의 저자라면 과학과 성경의 내용물에 겹치는 영역들이 있다. 그 영역이 창조의 과학적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 “과학은 ‘신조가 되는’ 전제들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신앙과 비슷하고, 이 전제들이 우주의 질서 및 이해 가능성과 관련이 있기에 우주를 질서 있는 창조물로 보는 유신론적 우주관과도 닮았다”고 말하는 저자는 더욱이 유신론자들은 우주에서 볼 수 있는 질서가 어떻게 가능한지 파고드는 방식으로 과학적 탐구정신을 한껏 밀어붙이고 우주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기술과 설명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진단한다(p.117).
그러나 무신론적 과학주의는 “과학이 진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고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p.75)는 가치관으로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래서 신이나 종교, 종교적 경험에 대한 모든 논의가 과학의 바깥에 있다고 여기고, 따라서 객관적인 참이라고 보지 않는다(p.76). 그러나 과학만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참이 아니다. 한 편의 시나 노래나 그림이 졸작인지 천재의 작품인지는 과학적 방법론만으론 다 판단할 수 없다(p.77).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모든 과학의 핵심 기저에는 우주가 질서정연하다는 확신이 놓여 있다면서 과학의 뿌리는 다름 아닌 유신론이라고 주장한다(p.42). “사람들이 과학적이 된 것은 자연에 법칙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런 기대를 품은 이유는 입법자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이다”(C.S. 루이스, p.43). 그래서 갈릴레오 역시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손가락이 수학의 언어로 작성한 것”(p.48)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결국 “신에 대한 불신은 신에 대한 믿음 못지않게 과학적 정통성을 보증하지 못한다”(p.52)는 게 저자의 공평한 판단이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 간에 갈등이 있다기보다 실제로는 정반대의 두 세계관, 즉 자연주의와 유신론 간의 갈등이 있을 뿐이다(p.56). 유신론과 무신론 중 어느 쪽 세계관이 과학과 잘 어울리는가를 놓고 양쪽 진영 과학자들의 견해들을 균형있게 소개하며 치열한 논증을 진행해나간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은 자연주의를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유신론을 지지한다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과학은 신을 매장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과학의 결과는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킬 뿐 아니라 과학 활동 자체가 그분의 존재로 인해 정당성을 인정받는다”(p.382).
-더 깊은 탐구를 위한 연관 질문
1. 과학은 ‘어떻게?’에 대한 답을 주고 종교는 ‘왜?’에 대한 답을 준다면 과학과 종교는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지식은 왜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2. 과학이 진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무신론적 과학주의의 주장에 어떤 허점이 있는가? 신이나 종교적 경험처럼 과학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은 진리일 수 없다는 주장은 합리적인가?
-더 깊은 탐구를 위한 관련 도서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J. P. 모어랜드, 생명의말씀사)
오직 자연과학만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적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 과학은 우주의 기원,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들, 우주의 미세 조정, 의식의 기원, 도덕과 합리성, 심미성의 객관적 법칙과 내재적 가치 속성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근거를 들어 “과학주의는 철학이지 과학이 아니다. 과학주의에 맞서 진정한 과학을 옹호해야 한다”라고 결론짓는다.
“최소한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과학은 우주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첫째, 과학은 우주의 한 측면을 설명할 때, 우주의 다른 측면을 활용한다. 보통 이 두 가지를 자연의 법칙 아래 포함시켜서 연관 짓는 방법을 사용한다. 둘째, 과학의 설명은 관련된 법칙에 따라 현재 진행중인 일시적인 상태나 상태의 변화에 적용된다. 셋째, 존재하게 되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p.194).
<신을 탐하다>(에드거 앤드류스, 복 있는 사람)
리처드 도킨스가 쓴 책 <만들어진 신>에 대한 대항마로 쓰인 이 책의 원제는 <Who made God?>.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성경의 ‘하나님 가설’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 진화론의 주장과 근거들을 주제별로 소개하고 조목조목 비판한 다음 같은 주제에 대한 하나님 가설의 입장과 그 타당성을 제시했다.
“우리가 신을 ‘창조되지 않은 만물의 창조자’로 정의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누가 신을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의 무의미함이 금세 드러난다. ‘창조되지 않은 자를 누가 창조했는가?’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신을 ‘다른 존재에 의해 창조된 그보다 못한 존재’로 정의한다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그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p.31).
- 안환균,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