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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 신학공부 '오바댜'는 누구이고 '에돔'은 어떤 곳인가?
장코뱅 추천 3 조회 378 24.03.22 08:29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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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3.22 08:45

    첫댓글 <GODpia 성경: 아가페출판사>, “에돔”

    모압의 남쪽, 아라바의 동쪽에 위치하던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 에돔 족은 에서의 후손들인데 에서의 별명인 에돔이란 이름을 본딴 것이다(창 25:30; 참조. 36:1).
    에돔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셈족의 '붉은, 붉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에돔 지역의 토질 또한 붉기 때문에 그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다. 바벨론 귀향 이후 수많은 에돔 족들이 유다 남부 지방에 정착하였다. 그 후부터 이들은 '이두메 사람들'이라 불리웠다.

    Ⅰ. 영토 에돔의 북쪽 국경은, 세렛 강(와디 엘- 헤사)의 깊은 협곡을 따라 이어져 있는 모압의 남쪽 국경이었다. 남쪽 국경은 B.C. 10세기경까지 아카바 만에 연해 있는 에시온 게벨(텔 엘 켈레이페)까지 얻어 있었다. 동쪽과 서쪽 국경은 지리적인 자료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정확 한계를 결정할 수가 없다. 고대 근동 지역의 유목민족들에게는 이와 같은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대략 서쪽의 시내 광야(참조. 민 20:16)와 동쪽의 아라비아 사막 사이에 거주하였다는 것만은 추측할 수가 있다.

  • 작성자 24.03.22 08:46

    에돔의 중심부는 길게 뻗은 높은 고원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북부 지방은 해발 1515-1615m였으며, 남부 지방은 해발 1735m였다. 그 중심 도시가 북부 에서는 '보스라'(오늘날의 부체이라)와 남부에서는 '데만' (오늘날의 타월란)이 었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중요한 상업로 '왕의 대로'가 바로 에돔의 중심부을 통과하였다. 이 지역의 특징 중 하나는 붉은 사암(沙岩)과 석회석이 수 마일씩 연이어져 있다는 것이다(참조. 램 49:16; 옵 1:3).
    이와 같은 지리적 특성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 에서는 한 방울의 이슬도 내리지 않으리라는 성경의 묘사와 일치한다(창 27:39).
    그러나 세일산(예벨 에쉬 쉐바)의 구릉지대에는 수많은 양의 구리와 철이 매장되어있어서 에돔의 증요한 경제원이 되었다.

    Ⅱ. 역사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면 에돔 문명이 B.C. 2300-2200년경에도 존재하였는데, B.C.1900년경에 그돌라오멜(창14장)이나 이웃 민족에 의해 멸망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애굽의 자료에는 에돔의 베두윈들이 애굽을 침범하였으나 라암셋 3세에 의해 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B.C. 약 1170).

  • 작성자 24.03.22 08:47

    B.C. 13-11세기경에는 애굽에서 네게브 지역의 에돔 광산들을 관장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에돔족에 대하여 성경이 맨 처음 언급 한 곳은 창36장이다. 이곳에는 에서의 후손들과 에돔족의 족장들(15-19절, 40-43절)과 왕들(31-39절; 참조. 대상 1:43-51)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비록 창 36:31에는 에돔의 왕들이 사울왕 시대 이전에 통치하고 있었다고 기록 되어 있으나, 39절에 언급된 하달(하닷)은 실제로 이스라엘 왕조 시대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에돔에는 왕조가 형성되기는 했으나(왕상 11:14) 부자 세습 제도는 취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각 족장들이 선거 또는 윤번제의 형식으로 왕이 되었던 것 같다. 에돔과 이스라엘 사이의 첫 번째 접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왕의 대로'로 통과시켜 달라고 에돔에게 요구했을 때였다. 이때 에돔 왕은 이스라엘의 평화적인 접근과는 대조적으로 강력하게 거절하였다(민 20:40-21; 참조, 신 2:4-8, 삿 11:17).
    이스라엘은 조용히 에돔 변방으로 돌아서 행진하였다. 후에 가나안 정복이 끝난 후 사울 왕은 에돔 족과 싸워서 승리하였다(삼상 14:47).

  • 작성자 24.03.22 08:48

    이스라엘은 조용히 에돔 변방으로 돌아서 행진하였다. 후에 가나안 정복이 끝난 후 사울 왕은 에돔 족과 싸워서 승리하였다(삼상 14:47).
    그러나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목자장 이었던 것으로 보아서 이와 같은 적대관계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던 것 같다(삼상 21:7; 참조, 22: 9, 18).
    사올 왕의 뒤를 이은 다윗 왕은 염곡(黶谷)에서 18,000명의 에돔 사람을 죽이고, 에돔에 수비대를 주둔시켜서 에돔 사람들을 그의 종으로 만들었다(삼하 8:13,14; 참조, 왕상 11:15,16).
    솔로몬의 대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던 하닷 3세는(왕상 11:14) 솔로몬 치하에 있던 에돔을 다시 독립 시켜보고자 노력하였으나, 일시적으로 괴롭히기 만 했지 독립을 얻지는 못하였다. 하닷의 자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에돔 왕이라 불리운 적이 있으나(왕하 3: 9,13, 26), 사실은 유다의 왕들에 의해 임명된 섭정왕에 지나지 않았다(왕상 22:47).
    유다 왕 여호사밧 때에도(B. C.873-839) 에돔은 독립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유다를 간헐적으로 침범하였으나(대하 20:10-12,22-23) 실패하였다.

  • 작성자 24.03.22 08:49

    아마도 에시온 게벨에서 여호사밧의 상선대를 피선시킨 것도 에돔이었던 것 같다(왕상 22: 48).
    하여튼 그들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때에야 반란에 성공하여(왕하 8:20-22), 아라바와 에시온게델의 통치권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유다 왕 아마샤가 다시 에돔을무찌르고 셀라를 정복함으로써, 50여년동안의 에돔의 독립이 막을 내리고 다시 유다에 복속되었다(왕하 14:7).
    그후 아마샤의 아들 웃시야(아사랴) 왕은 에룻(홍해의 항구)까지 점령하였다.(14:22, 대하 26: 2).
    그러나 유다의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가자, 북방의 아람이 침범하여 엘랏성을 빼앗아 버렸다(왕하 16:6).
    앗수르 제국이 왕성해지자 중동 지방의 판도가 바뀌게 되었다. 에돔 역시 약 180여년 동안(B.C. 800-627년)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반란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실권은 없고 명목만 유지하던 에돔 왕들은 바벨론 제국이 등장할 떼까지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

  • 작성자 24.03.22 08:50

    B.C. 587년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추방당하자(참조. 시 137: 7, 애 4: 21,22), 에돔 사람들은 헤브론 근처인 유다 남부 지방으로 건너와 정착하였다. 그러나 몇몇 촌락은 유다의 손에 남아 있었다(참조. 느 11: 25-28).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는 더 많은 에돔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왔는데, 그 이유는 '페트라'에 본거지를 둔 나바티안 족들이 에돔 지역으로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유다 남부로 이주해온 에돔인들을 오늘날에는 이두매인이 라고 부르고 있으며, 에돔 지방에 남아있던 나머지 에돔인들은 나바티아인들과 동화되어 버렸다. 요한 힐카누스 통치 시대에는 에돔인들이 유다 민족과 통합되어(B.C. 135-105) 할례 의식까지 행하였다 (요세푸스 Ant xiii. 9.1 p.257; xv. 7.9 pp. 253-254).
    그러나 혜롯 대제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비공식적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실제적인 지배자가 되었으며 ( B.C. 63년), 마침내 유대의 통치 책임자가 되었다(B.C. 47년 ).
    예루살렘이 포위당하자(A.D. 70년) 이두매인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끝까지 성을 지키는 일을 도왔다.

  • 작성자 24.03.22 08:51

    그러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후 이두매인들은 여러 민족들과 동화되어 그 자취가 사라져 버렸다.

    Ⅲ. 유적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 에돔의 우상숭배에 대한 성경의 언급들이 사실이라는 것이 확증되었다(대하 25:14, '세일자손의 우상').
    도자기로 만든 작은 여신상이 '부체이라'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모신상(母神像)이 그려진 도자기 장식판이 '텔 엘-켈레이페'의 지하에서 발굴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에돔의 우상은 전쟁신인 '카우스'(참조. 요세프스 Ant xv. 7. 9 p. 253)였는데, 이 카우스란 이름이 에돔 사람들의 인명에도 가끔 사용되었다. 에돔의 언어는 성경 히브리어, 모압어와 관련이 깊은 서북 셈족 계통의 방언이었다. 비록 비문이나 편지의 필적이 그롯 손잡이에 기록된 것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들이 고도로 세련된 문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에돔의 지혜에 대한 전통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었다(렘 49:7; 옵 1:8).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욥기의 기원이 에돔 문학에 근거를 두었다고 까지 주장을 한다 (참조. 요밥, 창 36:34; 데만사람 엘리바스, 욥 2:11).

  • 작성자 24.03.22 08:51

    이스라엘과 에돔은 문화적인 연분이 깊은데도 불구하고(참조. 신 23: 7; 암1: 9, 11; 말 1: 2), 왕국 시대 초부터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적대 관계는 에돔의 무역로를 차지하려는 이스라엘의 정책에 의해 더욱 확산되었던 것 같다. 특히 에돔에 대한 비난의 글들이 선지서에 수 없이 기록되어 있다(사 34: 5, 6,9 ; 렘 49:7-22; 겔 25: 12-14; 옵 1장; 암 1:6; 말1:3,4).

    ※ 참고 문헌 J. R. Bartlett, “The Rise and Fall of t-

  • 24.03.23 07:55

    @장코뱅 긴 내용이지만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잘 읽고 공부했습니다^^

  • 24.03.22 09:39

    구약의 예언서 중 가장 짧은 것이 오바댜서이군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 24.03.22 09:40

    오바댜(Obadiah)
    뜻 : 주의 종

    [1] 예언자 오바댜(오바댜서).

    [2] 아합궁의 대신 이세벨이 바알을 숭배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할 때에 엘리야들 선지자를 보호한 사람이다. 갈멜산 대결의 기회를 이 사람이 만들었다(왕상 18:3-16).

    [3] 잇사갈 족속의 어른(대상 7:3).

    [4] 스룹바벨의 손자(대상 3:21).

    [5] 에스라와 같이 돌아온 가족의 장(스 8:9).

    [6] 느혜미야와 동시대 제사장(느10:5).

    [7] 문지기 가족의 장(느12:25).

    [8] 시글락에서 다윗을 따른 갓 사람(대상12:9).

    [9] 이스마야의 아버지(대상27:19).

    [10] 레위 족 므라미 사람(대하34:12).

    [11] 스마야의 아들(대상9:16).

    [12] 여호사밧의 관리(대하17:7).

    여기 소개하고자 하는 오바댜는 아합왕(BC870­850) 시대의 궁내대신을 말한다. 그는 자신의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 였더라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왕상 18:2-3).

  • 24.03.22 09:41


    오바댜는 왕후 이세벨의 박해로 인하여 선지자들이 멸절될 위기에 처했을 때 1백명의 선지자를 50명씩 두그룹으로 나누어 굴에 숨겨두고 음식물을 날라다 먹였다. 이것은 야훼 신앙의 맥이 바알과 아세라 종교의 박해로 인하여 끊어지려는 때 그 맥을 잇기 위하여 투쟁한 최선의 신앙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열왕기하 4장 1-7절에 등장하는 가난한 선지 생도의 아내는 오바댜의 부인이며, 그녀의 가정이 그렇게 가난하게 된 이유는 남편이 아합왕 때에 선지 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재산을 헌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왕상 18:5).

    아합과 그가 갈라져서 길을 갈때에 오바댜는 엘리야를 만나서 아합과 대면할 것을 권했으며 그 결 과 갈멜산의 대결이 벌어져 엘리야가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권력과 재물을 포기하기까지 하면서 하나님의 의와 야훼 신앙고수를 위해서 헌신한 모범적 신자상을 오바댜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 24.03.22 09:42

    오바댜는 [주의 종]이라는 뜻이다. 오바댜는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한 사람이요 독실한 신앙의 인물이었다. 아합 왕은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었지만 오바댜를 궁내대신으로 삼았다.

    이는 영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대립된 관계였으나 오바댜의 성실함과 충성됨은 아합 왕의 신복이 되는 조건이 되었다. 왕후 이세벨까지도 오바댜를 신임한 것을 보면 그의 인격과 신실함을 대변하고 있다. 이세벨과는 종교적으로 대치상태여서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살해할 때 오바댜는 하나님의 선지자 1백명을 두 굴에 숨기고 식량을 공급할만큼 이세벨의 위험속에서 선지자들을 건져 내는 신앙의 위인 이었다.

    이렇게 영적인 대결과 갈등속에서도 아합과의 주종관계가 원만했던 것을 보면 오바댜의 훌륭한 모습을 보게 된다. 북조 이스라엘에 3년이상 가뭄이 계속될 때에 아합과 오바댜가 나라의 국토를 둘로 나누어 각기 물을 구하러 나섰다가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게 된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리도록 지시하였다.

  • 24.03.22 09:43

    오바댜가 말하기를 각 나라와 각 나라의 영내에서 엘리야를 수색하게 하였고 엘리야를 찾지 못할 때에는 없다는 증서까지 받아냈다. 이같은 상황에서 당신을 고하였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나만 죽게 되리이다. 그 때에 엘리야가 오바댜에게 약속했고 결국 아합을 만나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인 것을 증거하였다.

    교훈과적용

    첫째, 신앙은 위험과 박해와 고난도 초연한다. 오바댜의 선지자에 대한 구명 운동은 신앙의 용기를 대변한다.
    둘째, 충성된 일꾼은 어느 시대나 어떤 왕에게도 요긴하다. 한 시대를 지키는 사람이 되자.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 24.03.22 19:27

    오바댜가 아합의 궁내대신으로 일한 것이 의로운 선지자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활약상이 놀랍네요.
    에돔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네요. 댓글에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에돔 사람이었다는 것도 흥미롭군요.
    우리가 성경을 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연구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네요.
    간단하지만 좋은 포스팅입니다.

  • 24.03.23 07:58

    좋은 포인트를 알려 주셔서 저에게 도움과 공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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