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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청(淸)의 발전(發展)(5) - 십전노인(十全老人)-건륭제(乾隆帝) (1)
임광자 추천 0 조회 84 08.06.05 17: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청(淸)의 발전(發展)(5) - 십전노인(十全老人)-건륭제(乾隆帝) (1)

청(淸)의 발전(發展)(5) - 십전노인(十全老人)-건륭제(乾隆帝)(1)

가. 행운의 별. 건륭제(乾隆帝/1711. 9. 25 ~ 1799.2. 7 / 재위 1735∼95)                                이길상

(1)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

정대광명이라는 편액이 걸린 자금성의 건청궁 내부청은4대 성조(聖祖) 강희제(康熙帝)로부터 5대 세종(世宗) 옹정제(擁正帝)를 지나 6대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 / 1711. 9. 25 ~ 1799. 2. 7)까지 3대 130 여 년 간을전성시기라 한다.

흔히들 말하기를 강희제가 만주인 데릴사위로서 눈치껏살았다면, 옹정제는 만주인이라는 자격지심에서 독재권력을 세웠고, 이런 유산을물려받은 건륭제는 천자(天子)로서 너그러운 금도(襟度)와 아량으로 황제 업을 유유히구사하였다고 한다.

옹정 13년(1735년) 8월, 옹정제의 넷째 아들 홍력(弘曆)이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청나라 6대황제로 즉위하고 이듬해 연호를 “하늘의영광”이라는 뜻이 담긴 건륭(乾隆)이라 개원했다.

빈틈없이 매사를 처리했던 옹정제가 자신의 즉위를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고, 이런 것을 없애기 위해서 고심하여 만들어 낸 것이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라는 제위계승 법이다.

앞서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적장자(嫡長子)를 우선으로황태자를 책봉했다가 황제가 죽고 나면 내각수보가 작성한 유조(遺詔)가 발표되고,이에 따라 황위를 계승하는 명(明)대의 중국제도를 옹정제는 그대로 수용할 수는없었다. 최소한 영웅칭호를 가졌거나 우러러 볼만한 인물을 추대하여 선거로서 칸(Khan)을뽑는 것이 만주의 유습이다.

옹정제는 이런 만주 전래의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의상속제도를 혼합해서 밀건법이라 걸 만들어 황위를 계승케 했다는 것인데, 그 내용은대략 이러했다.

여러 후비(后妃)의 몸에서 황자(皇子/아고)가 태어나면우선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내서방(內書房)이라는 황자들의 글방에 보내어 교육시키고이들간에 학문과 무예의 성적을 매겨 경쟁시켰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 됨됨이를 보고 가장 황제에 적합하다고판단되는 황자가 눈에 띄면 그 이름을 비밀히 적어 작은 상자에 넣고 밀봉(密封)한후, 순치제의 친필인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쓴 건청궁의 편액 뒤에 놓아 두었다가황제가 죽은 후 대신들이 이를 꺼내 후계자를 발표하게 하였다.

옹정제가 죽은 5일 후, 이런 밀건법의 유서가 발표되고,이에 따라 25세의 혈기 왕성한 보친왕(寶親王) 홍력(弘曆)이 즉위하여 건륭제가 되었다.건륭제의 이런 행운은 그의 탄생부터 조금은 이색적이다.

그의 어머니는 열하(熱河)에 주둔하고 있던 보잘 것없는 만주 기인(旗人)의 딸이었다. 그녀의 나이 열 세 살 때 우연히 베이징에 들렸다가,공교롭게도 수녀(秀女)를 뽑는 시기와 맞물렸다.

곱게 차려 입은 한 무리의 12세 소녀들이 조잘 대며궁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던 이 시골 소녀에게, 궁성 문지기가그녀도 수녀지망생 인줄 잘못 알고 궁성 안으로 불러들임으로서 황실 어른들을 알현할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수수한 옷 차림과 총명한 눈빛, 단아한 용모가 황실어른들의 눈에 들어 수녀로 뽑히고 후일 옹정제가 되는 옹친왕 처소에 배치됐다.이가 곧 건륭제의 모후가 되는 유호록(뉴 祜祿 : 弘毅公額亦都)의 증손녀(曾孫女)다.

그르던 어느날 옹친왕이 전염병으로 심하게 앓게 되자,남들이 꺼리는 병구완을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펴 기적적으로 옹친왕은 살아났고,이 어린 소녀를 옹친왕은 사랑하고 아끼면서 듬뿍 정을 주어 건륭제가 탄생하였다고한다.

옹정제가 건륭제를 태자로 지명한 것은 건륭제 본인의자질도 황제로서 손색이 없었지만, 이 만주출신의 소박한 여인을 아끼고 사랑하였고,그 몸에서 태어난 황자가 더욱 미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후일의 중론(衆論)이다.

(2) 신강(新疆/신장) 정복(征服)

건륭제의 재위기간 60년(1735 ~95)은 청나라가 중원에진출한지 1세기를 지나는 시기다. 중국은 혁명의 나라라 할만큼 단명왕조가 많고1세기 이상을 지탱한 왕조는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다.

쿠빌라이가 중원(中原)에서 세운 원(元 / 1271 ~ 1368)나라가백년을 체 넘기지 못하고 황망히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한 것은 중국에 대한 역(逆)차별에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몽골을 오랑캐라고 우습게 보았듯이 원나라역시 중국을 우습게 보고 기름을 짜듯 철저히 긁어 냈다. 특히 남인(南人)이라고불렀던 강남인들에 대한 수탈은 그 도가 지나쳐 홍건적 활동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 단명왕조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만주인, 한인(漢人), 몽고인의 3족 협화의평등주의와 상호주의에서 출발한 청나라는 그 사정이 원나라와는 달랐다. 강희제의성천자라는 이상적인 꿈과 옹정제의 냉엄한 현실적 금욕주의에 이어 건륭제에 이르러서는10만수가 넘는 자작시를 남길 정도의 여유 속에서 다시 위구르(Uighur)와 티베트(Tibet)를정복하고 5족 협화의 세계제국으로 올라섰다.

지금도 중국은 한족(漢族)을 주축으로 56개의 민족으로구성된 다민족(多民族) 1국가 형태의 나라다. 따라서 중국인 학자들 중에는 청나라가정복왕조라는 말 자체를 거부한다. 중국이라는 다민족 국가에서 만주족 출신이 천자가되었을 뿐 누가 정복하고 정복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륭제(乾隆帝)는 풍류천자답게 그의 치세기간 남쪽순행(巡行) 길에 오른 것이 강희제와 같은 여섯 번, 그 외 다른 곳에도 여러 차례순행하였는데, 그 비용은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열 배가 넘었고, 그의 아버지 옹정제가정무에 골몰하여 궁성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건륭제가 탕아적인 군주가 아니라 선제(先帝)들못지 않게 정무(政務)에 몰두했고, 그러면서도 시(詩)를 썼는가 하면, 널리 고전(古典)을읽고 교양을 쌓았으며 수 많은 시(詩)를 남길 만큼 굉장한 어학력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嘉?關/자위꽌)을지나 더 서쪽으로 나가면 감숙성(甘肅省/간슈)의 돈황(敦煌/툰황)에 이르고, 조금더 나가면 감숙· 신강의 경계지점 옥문관(玉門關/위먼관)에 다다른다. 당의 수도였던장안(현재 西安)에서 이곳 옥문관(玉門關/위먼관)까지는 2400㎞, 실크로드라고 부르는텐산남·북로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곳이다.

서역(西域)이라고 불렀던 이곳에는 당나라 중기 이래중국이 이곳에서 물러난 후, 이른바 호마(胡馬)가 구슬피 우는 오랑캐의 땅으로 피가피를 부르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천년이 지나 이곳에 청나라군대가 들어갔고, 오늘날까지 중국의 영토가 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건륭제가 이곳을 새로이 얻은 땅이라 하여 신강(新疆)이란이름을 붙였지만, 우루무치를 주도(州都)로 하는 이 신강성은 천산산맥(天山山脈/텐산산맥)을기준으로 그 남과 북은 전혀 형편이 달랐다.

텐산 북쪽에는 중가르 초원지대가 있고 그 서쪽에는이리분지(伊犁盆地)가 있다. 이곳에는 중가르·티베트 세계제국을 염원했던 갈단과그 후손들의 중가르부족이 세력을 떨쳤으나, 강희·옹정년간 청의 공격을 받고 그세력이 현저히 약화된 가운데 내분까지 겹쳐 건륭 19년(1754)과 건륭 22년(1757)두 차례의 출병으로 쉽게 청나라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텐산 북쪽이 라마교의 세계라면 그 남쪽은 이슬람의세계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유목생활에서 정착농경으로 생활을 바꾼 투르크계 위구르(Uighur/ 回紇)·회골(回골)족들이 부족단위로 성곽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나 역시 종교적인분열도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건륭제는 중가르 정복의 여세를 몰아 건륭 23년(1758)군대를 출병하여 그 이듬해 까지 이곳에 산재해 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평정했다.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렇게 반갑지 않는 황사(黃砂)의 진원지 신강성전체가 청나라의 세력 판도에 들어왔다.

(3) 티베트(Tibet) 정복

티베트 일대북쪽으로는 쿤륜산맥이 남쪽으로는히말라야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티베트고원은 지구상 최대이자 최고(最高)의 고원지대다.

건륭 55년(1790)과 57년 청은 두 차례의 원정으로티베트가 완전 복속됨으로써 사상유례없는 1150만 ㎢의 방대한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다.지금의 중국 영토가 대략 960만 ㎢라고 하는데 이와 비교해도 건륭제 때의 영토가이 보다는 훨씬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가 티베트를 정복한 것은 라마교와 다라이 라마(Dalai-Lama/(達賴喇?/달뢰라마)라는종교적 분쟁을 교묘히 이행하였고, 이로써 중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전생(轉生)과활불(活佛)이라는 특이한 티베트식 불교가 지금도 이들을 하나로 묶고 있어서 그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 또한 대단하다.

청조의 쇠퇴와 함께 중국은 건륭제 때의 영토를 많이잃었다. 그러나 지금 중국 공산당 정권은 어느 왕조보다도 세력이 강하다. 이런 가운데티베트와 다라이 라마, 중국 정부간에는 미묘한 갈등이 노출되고, 여기에 이해관계가얽힌 국제사회가 이를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의 과거를 잠시 더듬어보고자 한다.(이하 글 내용이 조금은 따분합니다. 필요하신 분들만 읽어 주세요)

파미르고원과 더불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이곳대부분 지역은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다. 따라서 위도상으로는 북위 27∼37°사이에해당하나 고도에 따른 기후변화가 매우 심하여 대체적으로 겨울은 춥고 여름은 서늘하며바람이 몹시 강하게 부는 곳이다.

분지 안에는 나무호(納木湖)를 비롯한 많은 함수호(鹹水湖/鹽湖)가형성되어 있고, 짱난 곡지에 해당하는 동부에는 연평균강수량이 1,000 mm가 넘고있으나, 그 외 지역은 200 mm 이하의 건조지대에 해당한다.

이런 자연환경은 초원을 만들었고 이 초원을 따라일찍부터 유목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漢)나라에서부터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오호(五胡)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저(底)·강(羌)이라 불리었던 유목민들이 이들티베트족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런 유목사회에 7세기 초 중앙 티베트를 중심으로손챈 감포왕(Srong btsan sgam po / 643 ∼ 49)이라는 걸물이 등장하여 티베트족을통합하고 통일국가를 이루었는데, 이를 당시의 당나라에서는 토번(吐蕃)이라 불렀다.

당(唐) 태종(太宗/626 ~ 49)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문성공주(文成公主)를 감포왕에게 시집 보냈고, 이 문성공주가 석가모니 불상(佛像)을가져가 라싸에 사원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게 된 것이 티베트에 불교를 전파한 계기가되었다고 한다. 또한 공주가 데리고 간 기술자에 의해서 주조(酒造)와 제지(製紙)등의 중국문화가 티베트에 전파되었다.

티베트사회에서도 여니 유목사회와 같이 원시적 정령(精靈)을숭배하는 주술신앙(呪術信仰)을 믿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교(Bon)라고 한다.

그 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불교가 이들 토착신앙과밀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티베트불교가 토착신앙인 본교와 경쟁하면서현교(顯敎)보다는 밀교(密敎)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신비적인 요소가 다분히 내포된밀교(密敎)가 이들에게는 친근했기 때문이다.

9세기 전반 랄파첸 왕(Ral pa can / 티죽데첸, Khrigtsug lde brtsan, 재위 815∼838)은 지나치게 불교를 옹호하여 사원건립과 불사에많은 돈을 뿌렸고, 불교신자라면 병역 면제의 특전까지 부여하여 국가의 경제기반과군사력에 일대 위기로 불러 일으켰다.

이 틈을 노려 왕의 형인 랑 다르 마(glang dar ma/ 티두둠첸, Khri bdu dum brtsan, 809∼842)는 본(Bon)교의 지지자들과 공모하여랄파첸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뒤 모든 사원들을 허물고,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는등 철저하게 불교를 탄압했다.

그러나 그가 842년 한 승려에 의해 살해되므로써 티베트의정통 왕조는 사라지고 이후 약 400년간 몽골군대가 이곳에 들어오기까지 티베트고원은군웅할거의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른바 랑 다르 마 왕의 법난(法難)이 있었던 80년후, 다시 티베트에서는 불교 재건의 기운이 높아지고, 인도 사호르왕국의 왕자 출신아티샤(Atisa / 982 ~ 1054) 스님을 초빙하여 불교 쇄신운동을 펼쳤다.

이렇게 해서 티베트에는 다시 불교가 융성하게 되었는데,이 아티샤 직계 제자들을 카담파(bka’-gdams-pa)라고 불렀고 이들이 전교를 위해황색모자를 썻기 때문에 후일 황모파(黃帽派)라고 불렀다. 여기에 반해서 불교 탄압이전에 티베트에 있었던 기존의 불교계열을 닝마파(rnying-ma-pa)라 했다.

이런 카담파니 닝마파니 하는 외에 카규파(bka’-brgyud-pa)와사캬파(Sakyapa)라는 종파가 생겨 크게 4파로 갈라 겼는데, 이런 새로운 종파들은닝마파의 성격을 반쯤 유지하면서 인도로부터 새로 전해진 밀교의 성격을 혼합한가르침을 펴고 수행했다. 현재 가장 교세가 강한 겔룩파(dge-lugs-pa)는 카담파의정신을 이어받아 14세기 후반에 새로 생긴 종파라고 한다.

이런 유목사회에 칭기즈칸이 등장하여 사방을 누빌때, 티베트에도 1253년 후일 원(元)나라 헌종(憲宗)이 된 몬케가 군대를 보내어 티베트전역을 장악하고 이곳에 선위사(宣慰使)를 두었으며, 원(元)을 세운 세조(世祖) 쿠빌라이는1253년 사캬파의 고승 파스파를 모셔와 중용하고 그의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은 유명한이야기다.

1578년 티베트의 소남 걈초(1543∼1588)가 저 유명한몽골의 알탄 칸의 초청을 받고 칭하이(靑海)에 갔을 때 알탄 칸은 소남 걈초를 다라이라마라고 불렀고, 이 후 다라이 라마는 티베트 사회에서 정(政)·교(敎) 일치의 종교적지배자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라이 라마가 세속권력까지 장악하게되자 그 계승법(繼承法)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원나라 때 까지는 라마가 아내를거느리는 것을 인정하고 교주(敎主)의 세습이 허락되었다. 이들을 카르마파에서 분파된홍모파(紅帽派/시바 마르파)라고 한다.

이런 홍모파가 타락하자 황모파(黃帽派 / Shva serpa)에서는 새로운 계율을 정하고 홍모파를 몰아냈다. 청대 초기에는 황모파(黃帽派)가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다라이 라마라는칭호를 부여하였다.

이들은 라마가 아내를 두는 것을 금하고 법왕격인다라이 라마의 계승은 전생활불(轉生活佛)이라는 특이한 방법을 채택했는데, 전생(轉生)이란육신(肉身)의 죽음과 동시에 정신은 다른 육체에 옮겨가서 거듭 사는 것을 말하고,활불(活佛)이란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라마라는 사람의 육신을 빌려서 이 세상에 오는데, 다라이 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고,판첸라마(Panchen Lama)는 아미타부처님의 화신이라는 것이며, 다시 이들 육신이사라지면 다른 사람의 육신으로 영혼이 옮겨 간다는 것이다.

청나라는 관음보살의 화신인 다라이 라마를 티베트사회에서성(聖)·속(俗) 최고의 지배자로 삼았고, 아미타불의 화신인 판쳰 라마(판첸 고르드니/ 淸 太宗이 내린 칭호)를 그 다음의 지배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 2대 활불(活佛)에게종교와 속세를 모두 지배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다라이 라마는 법왕, 판첸라마는부법왕으로 삼고 이들에게 그 지역의 지배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라이 라마가 활불로서 이들 유목사회의 정신적지주가 되자 중가르부족들을 위시해서 많은 유목사회가 이를 이용하여 칭기즈칸 이래의유목국가 형성에 꿈을 키웠고, 그때 마다 청나라는 집요하게 이를 방해하였다.

이들과 연결되면 무서운 종교적인 힘이 발동될 수있기 때문이다. 이런 다라이 라마를 청나라는 교묘히 이용하여 옹정제는 티베트주재대신인 주장대신(駐藏大臣)을 라싸에 두고 이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직접 지배하거나 내정을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건륭제에 이르러 이런 티베트에서 5대 다라이라마가 사망하자 그 후계자 문제를 두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다. 각 파벌을 배경으로소위 자신이 전생(轉生) 활불(活佛)이라고 제가끔 주장하는 다라이 라마 후보가 세명이나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당연히 진짜와 가짜를 두고 서로간에 공방이 오고갔다.

여기에 음모가 등장하고 외세까지 동원하여 혼란이가중되자, 이런 내분을 틈타 네팔에서는 판첸라마가 있는 타실룬포(bKra-sis lhun-po)사원을 침입하여 티베트의 내정(內政)에 끼여 들었다.

건륭55년(1790) 청나라 군대는 다시 티베트의 수도라싸에 들어갔고, 2년 후에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Katmandu)까지육박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건륭제는 내정 불간섭이 결국 이런 분쟁을 더욱 조장시키는것으로 보고 주장대신에게 티베트의 행정·외교·군사상의 지배권을 부여하고 다라이라마의 권력기관으로 가샤(티베트 지방정부)조직을 정하고, 그 계승법을 확립하여전횡을 막는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다라이 라마의 계승은 전생했다고 하는 활불들의 이름을모두 적어서 황금함에 넣고 라마승이 7일간 독경한 후에 주장대신의 입회아래 제비를뽑아 그 진부(眞否)를 가리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무사공평을 기했다. 그러나, 그결과는 다라이 라마와 티베트는 주권을 상실하고 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하고 1차대전 후 외몽골과함께 티베트의 다라이 라마는 주권을 찾고 독립 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에서는1930년부터 관리를 파견하였고 34년에는 라싸에 몽장(蒙藏) 위원회 주(駐) 티베트사무소를 설치하여 몽고와 함께 중국의 종주권을 유지코자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킨 티베트는 종전 이후에도독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1950년 10월, 중국 공산당 정부는 티베트를 침공,51년 5월 중공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항의 평화협정을 다시체결했다. 국제 사회가 이를 두고 말들이 많았으나 이때는 한국전쟁으로 미국을 위시한국제사회가 이를 간섭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런 티베트사회에 중국인들이 몰려들고, 중국인들과의차별이 심하게 되자 이에 반발한 티베트인들이 1959년 14대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중국에 대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다라이 라마와 그 추종자들은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에는 이사건을 계기로 중국 공산주의가 도입되었다.

그 후 중국은 새로이 판첸 라마를 세우고, 수많은불교 사찰 가운데 일부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라마승에게 탄압을 가하자 승려들의대부분은 피신하거나 투옥되었다. 1961년과 62년에는 티베트에 기근이 닥치자 다시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판첸 라마도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가 중국을 비난하자 1965년 중국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들어 민족자치를 인정하였으며, 1980년대 중반, 동서해빙의기운을 타고 중국의 통치도 완화되었다. 그리고 1989년 스웨덴의 한림원에서는 망명중인 14대 다라이 라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였는데, 그 수상 공적은 비 폭력이라고한다. 이 14대 다라이 라마의 망명정권은 지금도 중국 당국을 긴장시킨다.

- 다음 호에 계속 -


Memory - 사라브라이트만 (Sarah Brightman)

 

 

세계는 지금 ................2002.4. 14. 일요일

 

어쩌다가 이렇게 늠름하게 하늘을날던 비행기 떨어졌다니....2002. 4. 15.

An Air China Boeing 767 aircraftsimilar to the one that crashed near
the South Korean city ofPusan on April 15 is pictured
in this undated file photo. REUTERS

 

네덜란드의 암스델담에서는 피켓까지든 아랍의 소녀들이 반이스라엘 데모에....

A group of youngArab women hold anti Israel signs during a demonstration in Amsterdam,
April 13, 2002. More than a dozen people were arrested after themarch by around 5,000
protesters began to turn violent. REUTERS/MichaelKooren

 

로마 교황 바오르 2세는 바티칸광장에서 천주교 신도들의 시복을 주제하며 황금 잔을
올리고 있는데...용기있는자들에게 수여하는 이 시복에서.........

Pope John Paul IIraises the chalice during a beatification ceremony in St. Peter's
Square at the Vatican, Sunday, April 14, 2002. The Pontiffbeatified six persons and held
them up as courageous role modelsto Catholics in Latin America and elsewhere. In his
23-year-oldpapacy, he has also canonized 456 people,
far outstripping thepace of his predecessors.
(AP Photo/Massimo Sambucetti)


 
홍공의 듀엣가수 리 핵켄(좌)과디오르 웡(우)이 상하이에서 개최한 팝 가수 대회에서
듀엣부문최고상을 받고...

Hong Kong singer Lee Hack Ken (L) andDior Wong perform after accepting the best duet
award duringthe 2001 Chinese Pop Song Chart music award ceremony in Shanghai
April 13, 2002. More than ten singers from Hong Kong, Taiwan andmainland
participated in the ceremony. REUTERS/China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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