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2주일 1월 14일
요한금구는 이름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바꾸실까? 하는 물음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옛 계약을 주신 분이 당신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라이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부르십니다. 이사악과 삼손, 예언서에 나오는 많은 이들에게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여호수아 같은 이들에게는 부모에게 이름을 받은 뒤에 새 이름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옛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건의 의미를 이름으로 붙이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부모들은 자식의 이름을 통해 하느님의 선하심을 기억하였습니다. 또한 이름의 주인이 자기 이름이 전하는 예언을 영구히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마다 다른 이름을 받았지만 우리 모두 공통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이름보다 위대한 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들’, ‘하느님의 자녀’, ‘친구들’, 그리고 그분의 ‘몸’이라 불립니다.
복음을 살펴봅니다. 세례자 요한과 두 제자가 나옵니다. 두 제자는 안드레아와 이 복음을 쓴 사도 요한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세례를 주었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소개합니다. 희생제사의 흠없는 제물인 어린양으로 자신이 기다려온 주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는 듯, 이 짧은 설명으로 두 제자의 거취가 바뀝니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기다려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감히 먼저 그분께 질문을 드리기에 앞서, 그분이 먼저 질문을 던지실 만큼의 거리에서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무엇을 찾느냐?’는 물음에 그분과의 신뢰를 쌓아갈 질문을 내놓습니다. 무엇이든 배우고픈 열망 가득한 학생처럼 보입니다. ‘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장소를 묻는 듯 질문했지만,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그에 알맞은 대답을 하십니다. 마치, ‘같이 밥이나 먹자꾸나’하시는 것 같습니다. 복음사가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바로 그날 함께 묵었다고 알려줍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불현 듯 때를 알려줍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이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열 개의 계명인 십계명이 그렇습니다. 네 시쯤이라고 말하는 것이 꼭 네 번째 계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예수님으로 완성되는 율법의 정신에는 사랑이 있음을, 즉 사랑으로 완성에 이르는 때가 왔음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기반이었던 율법에서 강조되는 것이 두려움이었다면, 주님께서 가져오시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요한 복음사가는 제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굳이 시간, 즉 때를 표현합니다.
사랑의 시간 속에서 두 형제의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어린양’으로 소개받은 주님을 ‘메시아’로 소개합니다. “우리는 만났소”라고 반갑게 표현합니다. 예컨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채 한 껏 들뜬 목소리로 외치는 안드레아의 표현이 곧 이 미사에서 주님을 만나려는 나 자신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반가운 소개로 단숨에 예수님을 찾아간 시몬은 새 이름을 받습니다. 작게는 그의 삶에 가장 커다란 기반이 될 이름이요, 주님의 형제들, 친구들, 그분의 몸이 될 우리에게는 신앙이 시작되는 반석이 될 이름입니다.
우리에게는 세례명이 있습니다. 자신의 기억에는 없지만, 가장 좋은 순간에 부모의 사랑만으로 충만한 때에 받은 주님의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 언젠가 삶을 살아가면서 뒤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정한 새 이름도 있습니다. 주보성인의 삶을 본받고자 정했을 수도 있고, 요셉, 요셉피나, 요나, 요안나처럼 앞글자만이라도 같은 이름을 가져볼 생각으로 정한 세례명도 있습니다. 세련되고 멋지다고 여겨지는 이름을 붙였다가 부르기가 어려워 후회하는 이들도 있고, 자신과 같은 세례명이 너무 많다고 불만이었지만, 그만큼 부르기 좋아서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이씨인데, 어려서 부모님께서 ‘안’으로 자주 부르셔서, 저를 안지목으로 오해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흔하게 부르던지, 특별하던지간에 그 모든 이름은 한가지를 가리켜줍니다. 우리가 모두 그분의 몸이며, 그분의 자녀들임과 동시에 형제들, 친구들임을 말해줍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단순히 호칭에 그치지 않을 때, 그 순간 순간은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만남이 이루어는 때가 될 것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셨지만,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잊어버렸을 때에는 고해성사를 보면 됩니다. 단순히 써져있는 명목을 나열하는 정보전달이 아닌 고백의 성사인 고해는 안드레아의 소개와 마찬가지로 반가움이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누가 아닌 나를 주님 앞에 고발하는 것이, 두려움을 넘어서는 까닭은 이 죄인을 사랑하시려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연중시기에 들려주는 2독서의 서간들은 초대 신앙공동체의 다양한 문제와 갈등에서 비롯한 이야기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해 줍니다. 불륜을 통해 가리키는 것은 몸입니다. 주님의 몸과 하나인 우리 자신에게 불륜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소개하는 순간에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려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십시오.
첫댓글 +찬미 예수님!
강론 중 열심히 듣고.공감하고, 새기고, 담고,
돌아 와 일상을 하다가 잠시 강론 말씀을 기억해 보지만 무심하게도 기억이 가물아물 ㅠㅠ
그럴 때 다시한번 읽어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흐뭇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