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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굳세어라 금순아〉는 한국 전쟁 휴전 무렵에 발표된 노래다.
전쟁과 분단으로 헤어진 사람들의 정서를 담은 노래인 탓에 많은 인기를 끌었던 대한민국의 대표노래이다.
인기 작곡가 박시춘이 작곡하고 그의 친구인 강사랑이 작사했다.
노래는 순수음악을 전공하다가 대중가수가 되어 〈신라의 달밤〉이라는 히트곡을 낸 ‘현 인’이 불렀다.
1953년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1.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 ~ ♩♪♬ ~
2.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 달만 외로이떴다
♩♪♬ ~ ♩♪♬ ~
3.철의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잡고 웃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노랫말에는 ‘흥남부두’, ‘일사(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들어 있다.
노래 속 화자는 전쟁 때문에 가족과 연인을 생이별을 하고 피난지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함경도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연인 ‘금순이’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굳세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노랫말 속의 피난지는 부산이지만 실제 노래를 만든 박시춘과 강사랑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다.
노래 말은 실향민의 아픔과 기원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구구절절한 가사와는 다르게 노랫가락은 경쾌하면서도 구성지다.
특히 3절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너와 나 사이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남북통일’이 되면 재회하여 함께 춤을 추자는 매우 희망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노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절묘한 묘사로 전쟁 직후의 시대상과 공명하면서 ‘국민가요’로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인상적인 제목은 이후에 영화나 드라마, 코미디나 패러디의 대상으로 자주 쓰였다.
정치인 나경원에게 힘을 내라는 내용의 기사 제목을 [굳세어라 경원아!]로 붙이는 식이다.
동명의 영화가 두 차례, 드라마가 한 차례 만들어졌으나 1962년에 처음 제작된 영화를 제외하고는 ‘금순이’라는 이름의 여자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 노래와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 [굳세어라 금순아] : 영화는?
1962년에 제작되었다.
♥ 주요 등장인물은 최무룡, 이대엽, 구봉서, 윤일봉, 황정순, 이방진 등이다.
1.4후퇴 때 피난을 와서 각자 헤어져서 살다가 나중에 극적으로 상봉을 한다.
그러나 이미 병이 든 동생은 오빠의 행복을 빌며 숨을 거둔다는 줄거리이다.
♣ [굳세어라 금순아] : 드라마는?
2005년 2월 14일부터 2005년 9월 30일까지 mbc문화방송에서 일일연속극으로 제작하여 방송하였다.
♥ 주요 등장인물은?
한혜진 : 나금순 역, 강지환 : 구재희 역, 이세은 : 장은주 역, 김서형 : 시완 아내 역, 이민기 : 둘째 아들 노태완 역, 김유석 : 첫째아들 노시완 역할이고, 윤여정, 양희경, 최자혜, 이희도, 박인환, 김자옥, 김남길, 윤미라, 장 용, 양미경 등이 출연했다.
♣ 가수 [현 인]은?
부산 출생으로 본명은 현동주(玄東柱)이다.
1938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2까지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다.
그는 1943년 일제의 징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태양극단’에서 활동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6년에 귀국을 해서 '고향 경음단'이라는 7인조 악단을 만들어 UN군 위문공연에 참여했고, 팝송을 레퍼토리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던 그는 1947년에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하여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성악에 바탕을 둔 그의 창법은 신민요나 트로트와 달리 시원한 맛을 내며 해방 이후 가요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로선 새로운 창법이었던 [바이브레이션]과 경상도 억양을 멋지게 구사했던 그의 노래 「신라의 달밤」은 그 시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어서 곧바로 내놓은 〈비 내리는 고모령〉은 일제 강점기 국민들의 아픈 실향의 기억을 되살린 노래로, 그는 일약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1947년 한 해 동안 그는 박시춘, 유호와 손을 잡고 무려 5곡을 히트시키면서 ‘현인시대’를 열었다.
특히 「서울야곡」과 「꿈속의 사랑」은 그가 직접 작곡한 곡이다.
1946년 2월에 귀국선을 타다가 중국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4개월 동안 베이징 형무소에 있을 때 서울을 생각하며 만든 탱고 멜로디는 유호의 가사로 〈서울 야곡〉으로 탄생했다.
또한 그가 즐겨 부르던 중국노래는 〈꿈속의 사랑〉이란 노래로 만들어졌다.
1951년 흥남 부두에서의 이별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전쟁 통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버티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의지를 심어주었으며, 월남 가족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전쟁 중에는 ‘군예대’로 활동하면서 1952년에 발표한 〈전우야 잘 자라〉는 군인들의 사기를 드높였고, 1953년에는 가사에 처음으로 외국어를 넣은 〈럭키서울〉로 서울 수복의 감격을 담았다.
그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서, 일제강점기의 트로트와 신 민요를 소화하였고, 미국식 대중가요가 개화한 1960년대의 팝 스타일의 가창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다.
샹송, 칸초네, 탱고, 맘보 등 서구의 새로운 음악이 그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번안가요 제1호인 〈베사메무쵸〉나 〈고엽〉 등의 번안곡도 그의 입을 거치면서 히트곡이 되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던 그는, 무명가수가 천신만고 끝에 인기가수가 된다는 내용으로 1947년에 발표한 국내 첫 음악영화 〈푸른 언덕〉의 주인공 역을 맡았다.
1965년에는 악극 〈춘향전〉에서 이 도령 역으로 열연했다.
1974년에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고국과 무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어 1981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1991년 〈노래하는 나그네〉·〈길〉 등 신곡을 발표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1998년에는 배삼룡·은방울자매·남진·김세레나 문주란 등과 악극 ‘그 때 그 쇼를 아십니까’를 비롯해 KBS ‘가요무대’ 등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였으나 2002년 4월에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음반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고 하여 '대한민국 가수 제1호'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가 남긴 노래는 1,000여 곡이 넘는다.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독특한 창법의 그의 노래는 고난과 슬픔을 노래하되 건강함과 감미로움으로 현실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 인은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그의 딸 현혜정은 1969년에 ‘서수남과 하청일’의 가수 '서수남'과 듀엣으로 활동하다가 결혼까지 하였으나 얼마 후 이혼을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1999년 화랑문화훈장을 받았다.
부산 〈영도다리〉에는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있고,
경주 〈불국사〉 앞에는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 [흥남부두] 철수 작전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이 북한을 지원하기 위하여 갑자기 참전을 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리게 되는 전세가 매우 불리해진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제발 좀 도와주시라요!”
하면서 눈물로 애걸복걸한 결과물이었다.
수적으로 밀어 붙이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긴급히 후퇴 작전을 벌이던 우리나라와 유엔군은 철수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미 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철수작전’이 마무리되자 곧 이어 흥남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193척의 선박에 10만 명의 군인들, 10만 명의 피난민들, 차량 1만7천 대, 연료 2만9천 드럼, 탄약 9천 톤과 35만 톤의 군수장비를 싣고 철수하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철수작전이었다.
작전의 성공으로 이 작전은 ‘기네스북’에 올랐다.
철수 작전 기간은 1950년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10일간이었다.
문제는 북한군의 학살이 두려워 남으로 가려고 목숨을 걸고 흥남부두로 몰려온 50만 명의 피난민들의 승선문제였다.
고향이 함북 명천인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북한 공산당의 잔인한 학살 모습을 직접 보았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난민들을 데리고 가야만 했다.
총 철수 책임자인 미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수송선의 공간 부족과 북한군 첩자 잠입 가능성 때문에 피난민 승선은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선박이 없는 국군은 난감했다.
피난민 대책 1군단 작전회의가 열렸다.
김백일 소장은
“피난민 보호는 국군의 사명이다. 꼭 데리고 가야 한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이
“국군이 승선할 자리에 피난민을 태우고 수도 사단이 앞장서 육로로 퇴각합시다.”
하자 김백일 장군이
“최악의 경우 1군단이 피난민을 데리고 육로로 철수한다.”
는 비장한 명령을 내렸다.
즉 “피난민이 승선 안 되면 미군만 배를 타고 철수하라”
는 내용에 아몬드 장군은 놀라며 매우 곤란해 했다.
미 10군단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씨의 간곡한 요청도 영향을 주었으나 국군의 피난민에 대한 비장한 각오에 아몬드 장군은 피난민 승선을 결국 허락했다.
국군을 피난민과 같이 놔두고 미군만 철수하면 작전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한국군의 단호한 태도와 민간인 고문관의 적극적인 설득에 감동을 받아 결국은 피난민 승선을 허락했다.
당시는 중공군이 코앞으로 다가왔던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하여 구조작업을 하던 배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국 모여든 사람들 중 수많은 사람들은 구조되지 못한 채 흥남부두에 남겨져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철수 선에 가득 실려 있던 무기와 화물들을 버리고 빈자리를 확보했다.
600톤의 탄약과 폭약, 500발의 포탄과 200여 드럼의 유류는 끝내 배에 싣지 못했다.
유엔군은 철수작전 후 부두를 폭파할 때 이들 군수품들도 모두 폭파했다.
수송선 갑판에는 사람들로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갑판에서 대소변을 보아야만 했다.
배설물로 뒤덮인 갑판에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고생 고생하면서 3일간 항해 끝에 경남 거제도에 도착했다.
“전쟁물자는 또 만들면 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며......”
피난민들을 한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노력한 ‘선장’의 결단으로 결국은 ‘흥남부두 철수작전’의 대장정은 성공하였다.
☞ [선장]의 후일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부두를 떠날 수 있는 마지막 배였다.
그 배는 1950년 12월 20일에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쌍안경으로 해변을 살피던 미국 국적의 화물선 ‘레너드 라루’선장은 인산인해를 이룬 피난민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북한 피난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다.
그들 옆에는 놀란 병아리처럼 그들의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탑승정원이 60명인 화물선이었다.
그런데 승무원 47명이 이미 승선하고 있었다.
더 탈 수 있는 인원은 고작 13명이었다.
하지만 고민하던 그는
“저 사람들을 너의 배에 태우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전쟁 물자를 부두에 버린 후 그물로 된 임시사다리를 만들어 화물선 위에 피난민들을 가득 태웠다.
빅토리호의 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배안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갑판에는 쓰레기와 사람들의 배설물로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물도 화장실도 없는 화물선에 1만 4천명이 들끓는 상황의 불결함을 상상해 보세요!
영하 20도의 강추위를 이기기 위해 아이들을 품속에 넣은 부부가 서로 껴안고 발을 구르는 모습을 보고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 [1.4후퇴]
1950년 11월 북한공산정권을 구출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의 두 차례 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두만강 전선에서 후퇴를 하게 되었다.
12월 말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 전선까지 밀렸으며, 동부전선에서는 12월 24일에 흥남철수를 단행하였다.
1951년 1월초 중공군은 3차 공세에 나서 주공격 방향을 서울에 두고 철원·연천 쪽에서 서울을 압박하였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서쪽으로부터 터키여단·미 25사단·영국 27여단·국군 1사단 등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한군의 중동부전선 돌파로 서울방어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서울이 중공군의 포격 권에 들기 전에 주력군의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서울에서 60㎞ 남쪽의 오산과 삼척까지 후퇴하도록 결정하였다.
따라서 한국정부도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1월 4일에 서울은 또다시 중공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번 1.4 후퇴는 6·25전쟁 초기의 경우와는 달리 미리 준비되어 있던 유엔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국군과 유엔군은 그로부터 2개월 후인 3월 중순 서울을 다시 수복하였다.
첫댓글 흥남부두 피난민들이 어떻게 배를 탈수 있었는지 정확하게 공부 했습니다.
현인은 그냥 가수가 아니라 모든것이 갖추어진 엘리트 가수임도 알았고요.
우리들이태어 나기도 전에 있었던6,25의 비참함을 거울삼아 비장한 각오로 앞으로의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김정은이 오판하지 않도록 우리들의 저력을 보여 줄때라 생각 합니다.
옳으신 말쌈~~~
노래의 배경을 알고 들으면 훠~얼씬 더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