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인간은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바다 밑에서 광물을 캐내고, 땅 밑에서 석유를 뽑아 올리는가 하면,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살지 못하고 백곰같이 두꺼운 털과 가죽으로 온몸을 감싼 동물만이 살 수 있는 북극 지방도 인간은 정복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태양의 뜨거운 햇볕이 일 년 내내 내려 쪼이는 사막에서도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지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세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달에는 이미 인간이 갔다 왔을 뿐만 아니라 화성, 목성 등 여러 별에 로켓을 쏘아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는 말을 증명이라고 하는 듯이 인간은 온세계를 지배하면서 그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먼 옛날 인간이 막 생겨났을 때도 인간은 이 세계를 지배했을까요? 옛날에도 인간은 오늘날처럼 힘센 존재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옛날 인간은 ㉠거인처럼 힘센 존재가 아니라 한낱 ㉡난쟁이와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에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숲 속에 사는 짐승이나 하늘의 새처럼 자연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존재로서 아주 조그만 자유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우리’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라, 이 말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 ‘보이지 않는 우리’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새처럼 자유롭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늘을 나는 새는 푸른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기 때문에 정말 자유로운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나는 새가 정말로 자유롭다면 어디든 마음대로 날아갈 수 있고 아디에서든지 살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딱따구리는 전나무나 자작나무의 줄기에 있는 벌레를 먹고 살기 때문에 이러한 나무가 없는 벌판에서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딱따구리는 길고 뾰족한 부리를 가지고 있어서 단단한 나무줄기를 잘 쫄 수 있습니다. 또한 부드럽고 긴 혀를 가지고 있어서 나무줄기 속 깊이 파 들어간 벌레도 쉽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딱따구리를 허허벌판에 갖다 놓아 보십시오. 딱따구리는 곧 죽고 맙니다. 그리하여 딱따구리는 하루 종일 전나무나 자작나무 줄기 주위를 빙빙 도는 것입니다. 이는 도요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요새의 긴 부리는 흙 속의 벌레를 잡아먹는 데 알맞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도요새는 항상 숲의 아래에서 먹이를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꼭대기에 앉아 있는 도요새를 볼 수가 없습니다. 담비의 경우도 생각해 봅시다. 담비는 숲 속에서만 삽니다. 왜냐 하면 담비의 먹이는 숲 속의 다람쥐이기 때문입니다. 다람쥐는 숲 속의 버섯이나 도토리를 먹기 때문에 숲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딱따구리의 경우, 전나무를 먹고 사는 나무벌레를 딱따구리가 다시 먹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전나무-나무벌레-딱따구리’라는 관계가 생깁니다. 담비의 경우는 ‘버섯·도토리-다람쥐-담비’라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관계를 먹이사슬이라고 합니다. 동물은 먹이사슬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우리 속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죽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보이는 새도 실은 보이지 않는 새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식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사리는 그늘을 좋아하고, 소나무는 햇볕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고사리는 어두컴컴한 그늘에서 자라고, 소나무는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자랍니다. 한편 물에 사는 식물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고, 그늘진 바위에서 자라는 이끼는 그곳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식물의 경우도 ‘보이지 않는 우리’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도 역시 옛날에는 이 우리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인간의 조상은 숲 속의 위쪽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수십 미터나 되는 높은 곳에서 여기저기 건너다녔습니다. 숲은 그들의 집이었습니다. 밤에는 줄기가 갈라진 곳에 나뭇가지로 둥우리를 만들어 놓고 잠을 잤습니다. 숲은 그들의 요새이기도 했습니다. 맹수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숲은 창고이기도 했습니다. 과일 같은 식량을 여기에다 저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조상은 이렇게 숲의 위쪽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은 옛날의 인간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우리를 부수어 버렸습니다. 다른 동물이나 식물은 여전히 우리 속에 갇혀 있지만 인간은 그 우리를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생물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이 ‘보이지 않는 우리’에서 벗어나 오늘날과 같은 자연의 지배자가 되어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게 되었을까요? 인간은 어떻게 해서 거인이 되었을까요?
본래 인간의 조상은 숲의 위쪽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열매 중에는 호두와 같이 껍질이 단단하여 돌이나 막대기로 그 껍질을 깨뜨려야만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돌이나 막대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돌이나 막대기를 움켜잡은 손은 발과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약간 더 길어지고 힘이 세어졌습니다. 한편 우리의 조상들은 나무 위의 먹이가 부족할 때에는 나무에서 내려와 이전과 다른 먹이를 먹게 되었습니다. 땅 위에 내려와 돌이나 막대기로 먹이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손이 다른 일, 즉 걷는 일에서 해방되어야만 했습니다. 손의 역할이 많아지고 바빠질수록 발만으로 걸어야 할 필요가 커졌습니다. 이처럼 손은 발로 하여금 걸음을 익히도록 움직여 나갔고, 발은 손이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발만으로 걷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인간의 조상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걸음을 배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가 살던 숲 위에서 내려와 땅 위를 걷게 된 것입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인간이 보이지 않는 우리의 일부분을 부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두 발로 서서 걷게 되고, 돌과 막대기를 움켜잡은 손이 점차 자유로워지자 인간의 조상은 전보다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나무꼭대기에만 있지 않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땅 위를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조상들은 어떻게 해서 이처럼 강해지고 대담해졌을까요? 인간에게 이와 같은 대담성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손이었습니다. 그 손에 쥔 돌이나 막대기는 그 자체가 적을 막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해였습니다. 인간 최초의 도구는 동시에 무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떼를 지어 다녔고 위험이 닥치면 한 덩어리가 되어 대항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 협력하기 위하여 서로간의 의사를 전달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노인들의 많은 경험을 젊은이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밖에 벼락으로 생겨난 불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용할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거대한 짐승도 쓰러드리는 승리자로서 등장했습니다. 먹이를 위한 경쟁에서 승리한 인간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으나, 아무 것에게도 먹히지 않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수는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그 수가 자꾸만 늘어나 세계 어느 곳에나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연이 생물을 얽매어 놓고 있는 먹이사슬을 끊어버리고 연장을 사용하여 새로운 먹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자연으로부터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한 무리의 인간밖에 살 수 없었던 곳에 두세 무리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원숭이로서 나무 위에서 살던 인간을 거인으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노동입니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하여 자연을 변화시키는 노동을 하면서 거인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조상인 원숭이가 단단한 과일의 껍질을 깨기 위해 손에 돌이나 막대기를 잡았을 때 그리하여 두 발로 서게 되었을 때 거인의 걸음마는 시작되었습니다. 손에 돌이나 막대기를 잡은 원숭이는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연을 변화시키는 노동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동은 인간 자신도 변화시켰습니다. 인간은 두 발로 서서 손에 도구를 든 거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말하는 것을 배운 것도 생각하는 것을 배운 것도 역시 노동 같이 협동하여 일을 하면서였습니다. 노동은 ‘보이지 않는 우리’를 부수면서 인간을 거인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 출전 : 조우화『인간의 역사』(동녘, 1984)
▣ 독해 도우미
∘사적 유물론 이 글에서 인간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사적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적 유물론은 인간의 역사를 유물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관을 말한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듯이 인간의 삶 역시 변한다. 이것을 인간의 역사라 한다. 이 인간의 역사, 즉 인간 삶의 변화의 원동력은 노동이며, 인간의 삶의 변화는 다양한 생산 관계의 변화라고 보는 것이 유물론에 입각한 역사관이다. 인간이 살아가려면 노동을 하여 필요한 물자를 생산해야 한다. 노동하는 인간이 없으면 인간 사회의 변화, 즉 인간의 역사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노동으로 자연을 지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인간 자신까지도 변화시킨다. 인간의 노동은 인간을 두 발로 서게 하고, 손을 자유롭게 하고, 도구를 이용하거나 말로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두뇌가 발달된 생각하는 인간이 되게 하였다.
인간은 생산 수단을 이용하여 자연을 변화시키고 물질을 생산한다. 여기서 노동할 수 있는 인간과 노동하여 만든 생산 수단을 합하여 생산력이라 한다. 그래서 생산력의 발전은, 생산활동에 필요한 인간의 노동력과 생산 수단의 발전에 달려 있다. 생산 수단은 쟁기, 기계 같은 노동 도구와 원료나 토지 같은 노동 대상을 포함한다. 이러한 생산 수단의 소유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간 관계가 생산 관계이다. 생산 관계는 주인과 노예, 봉건 영주와 농노, 지주와 소작인, 자본가와 노동자 등 생산 수단을 가진 지배 계급과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피지배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시대에 따라 소유한 핵심 생산 수단의 종류와 그 관계가 다를 뿐이다. 인간의 역사는 생산 수단의 소유가 구분되지 않은 무계급 사회, 즉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인간까지 생산 수단으로 소유한 고대 노예제 사회, 중요한 생산 수단인 토지의 소유에 따른 중세 봉건 사회, 온갖 생산 수단을 살 수 있는 재화 즉, 자본의 소유에 따른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구분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면, 생산 수단인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 계급인 노동자가 혁명을 일으켜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고, 이어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별이 없는 무계급 사회인 공산 사회가 실현된다고 한다. 다만 무계급 사회인 원시 공동체 사회와 다른 점은 생산 수단의 발달로 인한 생산력의 발달이 극대화된 사회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 이후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견은 소련을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로 일단 잘못된 예견으로 판단되지만, 그의 유물론적 관점은 인간의 역사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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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글에서 글쓴이가 설득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 한 대상을 다른 대상과의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② 현상으로 주어진 결과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③ 유사한 상황에 빗대어 말하여 개념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④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중심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⑤ 주어진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 아래 시의 밑줄 친 부분과 동질적인 것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
① 인간은 돌이나 막대기를 사용했다.
② 인간은 숲을 창고처럼 이용하며 살았다.
③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노동을 했다.
④ 인간은 두 발로 걸으면서 손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⑤ 인간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말을 만들어 사용했다.
3. ㉠‘거인’과 ㉡‘난쟁이’의 문맥적 의미를 간략하게 정의해 보시오.
ꋯ거인 : [ ] 인간
ꋯ난장이 : [ ] 인간
•주제 ‘보이지 않는 우리’의 개념과 인간이 거인이 된 이유
•해제 이 글은 인간이 먹이 사슬이라는 보이지 않는 우리를 부수고 나와 어떻게 거인, 즉 자연의 지배자로서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전개한 글이다. 단순히 객관적인 지식만을 전달하는 설명문으로 보기도 어렵고, 글쓴이의 개인적인 의견을 근거를 통해 주장하는 논설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설득적 설명문 또는 설명적 논설문이다.
• 정답 및 해설
1. 정답 ⑤ / 해설 이 글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를 부수고 나온 인간의 특징을 다른 동물과의 차이를 통해 밝히고 있으며(①), 자연의 지배자인 오늘날의 인간이 어떻게 지금의 결과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파헤치고 있으며(②), 인간의 ‘보이지 않는 우리’를 딱따구리나 도요새 등 동물들의 먹이사슬에 비추어 풀이하고 있으며(③), 중요한 부분마다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전개하여 핵심 내용을 강하게 전하고 있다.(④) 이런 전개 방법들은 모두 인간이 어떻게 만물의 영장이 되었는가에 대한 글쓴이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묘사의 방법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설득력을 강화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
2. 정답 ② / 해설 김수영의 시에서 ‘피의 냄새’와 ‘고독’은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유 획득의 토대를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 ‘보이지 않는 우리’를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는 데 바탕이 된 것을 찾아내야 한다. 도구 사용, 직립 보행, 말의 사용, 손을 이용한 노동 등이 바로 인간을 ‘보이지 않는 우리’에서 벗어나게 해 준 바탕이다. ‘숲의 이용’은 ‘보이지 않는 우리’ 속에 갇혀 살아가는 모습을 말한다.
3. 정답 거인 : ‘보이지 않는 우리’를 벗어나 자유를 쟁취한 인간, 난장이 : ‘보이지 않는 우리’ 속에 갇혀 산 인간 / 해설 거인과 난장이는 서로 대조적인 인간의 모습을 비유한 말이다. ‘보이지 않는 우리’ 속에 갇혀 살던 인간이 ‘난장이’라면, 노동을 통해 ‘보이지 않는 우리’를 부수고 자연의 지배자가 된 인간은 ‘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