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를 따라 (추천의 글)
할렐루야!
진 목사님의 오랜 시간에 걸친 강해의 노고를 경하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헬라어 원전 강해서 ⌜마가를 따라⌟의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제가 이 추천의 글을 쓰게 된 것은 40여 년 전에 머리속에 찍혀진 한 장의 사진 때문입니다.
1980년 봄 대학교 기숙사 개방의 날에 친구랑 함께 남자 기숙사에 갔습니다. 그 때 진 목사님의 방을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룸메이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어서면서 인사를 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 나올 때까지 마치 우리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대하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긴 얼굴에 꾹 다문 고집스런 입이 차갑고 인정머리가 없게 보였습니다. 참으로 교만하고 방자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그 방을 나오면서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무엇 하러 신학교로 불렀어요? 아버지! 이런 사람이 졸업하고 바로 교회로 가면 양들이 시험에 빠지고 불행해져요! 양들이 너무 불쌍해져요! 그러니 교회로 보내지 마시고 혼자 수도하는 광야로 보내세요. 정말로요!” 라고 하나님께 아뢰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며 그 영혼이 참으로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부터 그를 위해 기도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졸업하고 십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찾아볼 생각은 없었고 다만 어디서든지 언젠가는 주님께서 귀하게 쓰실 것이라고만 믿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여신도회에서 일하는 어느 간사님을 통하여 인천에서 개척교회를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반가워서 한달음에 달려가서 만났습니다. 그는 산전수전 겪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귀한 종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1980년 4월 이래로 목사님을 위해 계속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고 사모님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고통스런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습니다.
같은 고향 출신도 아니고 같은 노회에서 일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 진 목사님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주었으므로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저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진 목사님과의 만남이 이어져 추천의 글을 부탁받았지만 헬라어를 전혀 모르는 저로서는 너무 난감하여 거듭 사양을 하였습니다.
400쪽이 훨씬 넘는 편집 본을 읽고 나니 제가 추천의 글을 쓴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코와 앞다리 하나를 만지고 코끼리를 품평하는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임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께서 마가복음을 헬라어로 사역하고 원전강해를 시도하였다는 사실을 경하하기 위하여 의기소침해지는 저 자신을 격려하며 추천의 글을 씁니다.
⌜마가를 따라⌟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오기 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헬라어 성서를 소설처럼 읽는 꿈을 꾸었고 운동권 15년의 세월이 흐르고 46세 되는 나이에 드디어 헬라어 문법에 도전을 하였고 공부를 한지 20년의 세월이 흘러 강해를 시작하였고 그것이 책이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목사님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집념, 열정이 하나님께서 목사님께 주신 카리스마였습니다. 진 목사님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재야 신학자의 탄생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성서 원전 강해로 성서의 말씀을 풍성하게 일구어주시는 목사님께 마음의 꽃다발을 보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할렐루야!
본서는 여느 강해와 다르게 읽기가 수월합니다.
전반적으로 신학적인 전문용어가 많지 않고 문장 호흡이 길지 않아서 이해가 쉽습니다.
신학을 위한 강해가 아니고 신앙을 위한 강해라서 단언적이며 선포적인 케리그마 입니다.
강단 신학자의 강해가 아니고 재야 신학자의 글이어서 복잡하고 난해하지 않고 간단명료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신학자들의 학문적인 토론이나 비판을 염두에 두지 않으므로 형식이나 논리전개, 사용하는 언어에 제약이 없습니다. 박진감이 있는 선악의 대립, 운동권 청년들의 어투와 거친 표현들이 여과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상과 유추와 비약이 많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책이 지루하지 않고 활기찬 느낌을 줍니다. 재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곳곳에서 다른 복음서의 특징을 열거해주어서 마가복음의 무색무취의 독특성을 거꾸로 깨닫게 되는 묘미를 맛보기도 합니다.
본서는 마가복음을 새롭게 흥미를 가지고 읽게 해줍니다. 저는 본서에서 마가복음에 대한 좋은 안내를 많이 받았지만 특별히 세 가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너무 구태의연한 서두의 선언이 당시 유대사회를 흔들며 로마제국의 기저를 흔드는 위험한 역사적 혁명적 선언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서두의 선언은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 삶,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죽음의 길, 부활의 길로 나설 것을 강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마가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에게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기에 이 서문은 딴소리 하지 말라는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신학 선언이다. 그의 주장은 이 케리그마를 믿고 세례 받으면 구원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정죄를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는 곧 다시 올 종말론적 메시아이기 때문이다.”18쪽
“그가 향하는 목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종말론적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은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래서 마가의 신학은 역사적인 종말론으로 …혁명적 정치신학이라는 것이다.” 19쪽
저자는 마가는 십자가를 지고 죽은 예수를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하여 서두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과 신학, 그리고 잇대어서 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종말과 하나님 나라 도래라는 종말론 신학, 곧 부활의 신학을 대명제로서 전개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마가의 신학은 과학과 다원주의 신학에 의해 큰 도전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유효합니다. 과학과 다원주의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린 사회와 시대에서 교회와 신학은 마가의 서두 선언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임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 나라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변화산 사건을 부활의 예시로 보는 해석입니다.
저는 1장 11절의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듣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과 변화산 사건 맨 뒤에 나오는“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는 음성을 비교하면서 전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출발을 지지하며 격려하였듯이 후자 또한 공생애 초반부를 열심히 살아온 아들이 갈릴리를 벗어나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한 모험과 도전의 행위를 지지하며 격려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강해를 읽으면서 변화산 사건이 부활의 예시라는 주장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아 논쟁과 변화산 이야기는 마가복음 전체 중 한 가운데 배치되어 있다. 이 두 사건은 마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담고 있다. 메시아 논쟁의 초점은 십자가 죽음에 맞추어져 있고 변화산 사건의 초점은 부활에 맞춰져 있다. 마가의 십자가와 부활 신학이 이미 여기에 계시되어 있다. 마가의 이야기는 메시아 논쟁을 통하여 변화산을 향하여 올라가 정상에 도달했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사상 논쟁과 영광의 계시는 이제 땅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그의 육체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것이다.” 213쪽
“변화산에서 나사렛 예수의 몸은 영광의 본체로 변화한다.”213쪽
“다시 말해서 나사렛 예수의 몸은 사람의 육체를 벗어 버리고 그의 본래의 영광의 본체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로써 나사렛 예수의 존재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러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나사렛 예수와 더불어 이야기 한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가 예언자와 율법의 증거를 받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219쪽
“제자들에게 땅은 더 이상 정을 붙이거나 집착할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영원한 영광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세 명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자신들의 옛 세계관이 깨지고, 나사렛 예수가 말한 부활의 세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과의 연속성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단절을 통해서만 건너갈 수 있는 하나님의 초월적 세계다.” 220쪽
셋째는 복음의 본질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희망의 약속인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마가의 신학이 ‘신 죽음의 신학’이라고 주장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신의 아들이고 그의 죽음은 신의 죽음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영광의 신이다. 만약 그가 신이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마가복음은 나사렛 예수의 신성을 여러 군데서 증거하고 있다. 더 나아가 마가복음 전체가 그의 신성을 증언하는 글이다. 나사렛 예수의 신성의 계시는 변화산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마가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마가에게 부활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해 놓으신 종말론적 구원의 길이다.” 9쪽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불신앙과 완악한 마음을 꾸짖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 일어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431쪽
저자는 밥을 먹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 불신앙과 완악함을 꾸짖는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약속인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부활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면서까지 가르치려고 했던 복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제자들이 온 세계에 나가서 선포해야할 케리그마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희망의 약속인 부활이라는 것이다.”고 합니다. 433쪽
십자가신학, ‘신 죽음의 신학’이 곧 ‘신 부활의 신학’임을 공감하며 귀한 책을 써주신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옥에 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 ‘복음 전파’, ‘복음 전도’등을 ‘하나님 나라 운동,’과 ‘하나님 나라 운동권’으로 표현하면서 나오는 생경하고 부자연스런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그렇습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가 되지만 예수님을 모택동이나 체 게바라와 같은 반열로 오해하기 쉬운 표현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 가지는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관한 것입니다. 본서 72쪽에서 저자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특징을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인간의 주체성 해방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창조질서의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현대의 온갖 종교들과 뉴에이지와 교육단체들이 앞세우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선진국들의 법 정신이기도 합니다. 굳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더라도 계몽주의 철학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존엄성 회복과 주체성 확립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 성서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엄성 회복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주체성이 에덴동산을 해체하였기 때문입니다.
진 목사님의 탁월한 어학 능력이 청년의 시절에 나타났으면 우리 한국 교회가 ‘한스 큉’이나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를 배출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십 년의 농익은 목회경력으로 목회현장과 동떨어진 학문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목회자를 위한 강해서를 써주시니 그것이 도리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 운동권 출신의 재야 신학자의 화산처럼 뜨거운 가슴에서 갓 나온 뜨거운 책이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진 목사님! 이제 제 머리 속에 있는 옛 사진이 사라졌습니다. 성서를 붙들고 묵상하며 씨름하는 아름다운 노신학자(老神學者)의 사진이 찍혔습니다.
2024년 3월 20일 수요일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