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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전집 제6권
●고율시(古律詩) 92수
목차
執徐歲五月日。將遊黃驪。初出東門。馬上有作。
憩施厚館
渡臨津
宿沙平津
江上待舟
泛舟
宿雙嶺
初入黃驪
與鄕黨二三子。遊馬巖。
醉遊下寧寺
李進士大成邀飮。席上走筆贈之。
縣宰邀宴江樓。明日奉贈。
泛小船
六月十一日。發黃驪。將向尙州。出宿根谷村。
黃驪鄕校諸生。爲予具船楫。乘月泛江。至五更方罷。時大醉。不能作長篇以答厚意。明日將向尙州。
出宿根谷村。以記昨日遊賞之樂。以謝鄕黨二三子云。
馬上有作
書聊城驛樓上
六月十四日。初入尙州。
題鳳頭寺
次韻崔書記正份
寓花開寺。贈堂頭。
自花開到故人惠雲師所住龍潭寺。留題。
八月一日。示堂頭。
八月二日
八月三日
漫成次古人韻
八月五日。聞羣盜漸熾。
八月七日黎明。發龍潭寺。明日泛舟龍浦。過洛東江泊犬灘。時夜深月明。迅湍激石。靑山蘸波。水極淸澈。跳魚走蠏。俯可數也。倚船長嘯。肌髮淸快。洒然有蓬瀛之想。不覺沈痾頓釋。江上有龍源寺。寺僧聞之。出迎於江上。固請入寺。予辭之。邀僧至船上。相對略話。因題二首。
舟行
明日放舟不棹。順流東下。舟去如飛。夜泊元興寺前。寄宿船中。時夜靜人眠。唯聞水中跳出之魚鱍鱍然有聲。予亦枕臂小眠。夜寒不得久寐。漁歌商笛。相聞于遠近。天高水淸。沙明岸白。波光月影。搖蕩船閣。前有奇巖怪石。如虎踞熊蹲。予岸幘徙倚。頗得江湖之樂。噫。江湖之樂。雖病中不可以不樂。況乎日擁紅粧。彈朱絃。得意而遊。則其樂曷勝道哉。得詩二首云。
舟中又吟
睡次移船
又泛舟
又吟廻文
江中鸕鷀石
是日入元興寺。見故人珪師贈之。
紅榴始熟。珪公乞詩。
夜聞子䂓
八月十日。珪公請題其院。爲賦一首。
十一日。早發元興。到靈山部曲。
行過洛東江
到龍巖寺。書壁上。
十六日。次中庸子詩韻。
十七日。入大谷寺。
初入龍宮郡
縣宰邀宴。口占一首。
十九日。寓長安寺有作。
二十一日。泛舟河豐江。
是日迷路。夜到脇村宿。
入尙州。寓東方寺。朴君 ,崔金兩秀才携妓酒來訪。口占一首。
朴崔二君見和。復次韻答之。
九日二日。書記開筵公舍見邀。醉贈。一首
憶二兒
一十五日。旅舍書懷。
南窓熟睡。夢到長安。覺而志之。
憶長安
旅舍有感。次古人韻。
九日。訪資福寺住老。留飮。
思家
九月十三日。會客旅舍。示諸先輩。
聞官妓彈琵琶
再遊鳳頭寺
九月十五日。發尙州。
是日。書記出餞新興寺。次崔伯桓首題韻。
書記使名妓第一紅。奉簡乞詩。走筆贈之。
是日日暮。朴君文老邀予往宿漢谷別業。夜歸置酒有作。
明日。見朴君所留壁上詩。次韻。
十八日。馬上有作。示同行道士金之命。
暮入幽谷驛。與金君飮酒贈之。
明日又作
路上又吟
憩聊城驛。次壁上詩韻。
題華封院
十九日。宿彌勒院。有僧素所未識。置酒饌慰訊。以詩謝之。
發忠州。將指黃驪有作。
江頭暮行
復黃驪。示李季才。
宿瀕江村舍
馬巖會賓友。大醉夜歸。記所見。贈鄕校諸君。
遊氷靖寺。示住老。
將發黃驪有作
二十 九日。發黃驪。鄕黨諸公出餞於南亭。李秀才贈以詩。卽次韻答之。
渡沙平有作
十月二日。自江南入洛有作。示諸友生。
答諸公嘲
十月十九日。有所訪。以雨未果。偶成。
送友人之尙州。得嚴字。
次韻全履之,文長老見訪。用吾江南集中詩韻。
池上詠月
○집서(執徐)의 해오월 일에 황려(黃驪)에 가서 놀려고 막 동문(東門)을 나서면서 말 위에서
짓다 황려는 나의 상재(桑梓)이다.
한발한발 고향길을 향하며 / 去去指鄕路
유유히 성문을 나서노라 / 悠悠出國門
떠나는 심정 진정할 길 없어 / 離膓輪百轉
슬픈 눈물 두 뺨에 비 오듯 / 征淚雨雙翻
푸른 나무엔 내 서리고 / 綠樹煙猶重
푸른 언덕엔 해가 돋누나 / 蒼崖日漸暾
사람을 부르느라 꾀꼬리 노래 부르고 / 喚人鶯舌巧
손을 전송하느라 새들 지저귄다 / 送客鳥聲喧
멀리 이별하니 마음 심란하고 / 遠別亂心緖
일찍 길 떠나니 잠이 덜 깼구나 / 早行餘睡痕
돌아가는 말 늦출 수 없으니 / 歸驂不可緩
우거진 풀 도원에 가득하네 / 荒草滿陶園
[주C-001]집서(執徐)의 해 : 집서는 고간지(古干支)로서 십이지(十二支)의 진(辰)에 해당하므로
곧 진년(辰年)을 가리킨다.
[주C-002]황려(黃驪) : 여주(驪州)의 고호. 여강(驪江)에서 누른 말과 검정 말이 나왔다 하여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한다.
[주C-003]상재(桑梓) : 뽕나무와 재나무로 본래 공경하여야 할 물건을 말했으나 뒤에는 향리(鄕里)
에 대한 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시경(詩經)》소아(小雅) 소반(小弁)에 “뽕나무와
재나무를 반드시 공경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부모가 생전에 누에치고 재목으로
쓰는 이 나무들을 담 아래에 심어 자손에게 물려준 것임을 말한 것으로, 전(轉)하여 부모
의 유업(遺業)이 있는 고향을 칭하게 되었다.
[주D-001]우거진……가득하네 : 도원(陶園)은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전원(田園)을
가리킨다.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전원에 장차 풀이 우거지리니 어찌 집으로 돌아
가지 않겠는가.” 한 말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빌려온 말이다.
○시후관(施厚館)에서 쉬면서
전부터 문원의 병이 있었는데 / 舊有文園病
무더운 여름에 다시 멀리 유람하노라 / 盛夏復遠遊
시험삼아 차 한 잔 마시니 / 試嘗一甌茗
시원한 얼음이 목으로 넘어간다 / 氷雪入我喉
소나무 우거진 정자에 다시 잠깐 휴식하니 / 松軒復暫息
온 몸이 가을 기분 느껴지네 / 已覺渾身秋
어린 종은 내 마음 모르고 / 童僕殊未解
오래 머문다 괴이히 여기리 / 怪我久夷猶
내 성품 본래 활달하여 / 我性本曠坦
가는 곳마다 마음대로 머문다오 / 所至任意留
웅덩이 만나면 곧 그치고 / 得坎卽可止
물을 만나면 곧 배 띄운다오 / 乘流卽可浮
여기에 머무른들 무엇이 나쁠 것 있으며 / 此留有何惡
저기에 간들 좋을 것 있겠나 / 彼去有何求
크나큰 천지의 안에 / 大哉乾坤內
내 인생 무한히도 즐겁다오 / 吾生得休休
[주D-001]문원(文園)의 병 : 소갈병(消渴病)을 말한다. 문원은 한(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
그는 일찍이 효문원 영(孝文園令)에 임명되었으므로 이렇게 불렀는데, 늘 소갈병이
있었다. 《史記 司馬相如傳》
○임진(臨津)을 건너면서
조각 배에 순풍 부니 빠르기 나는 듯 / 扁舟駕浪疾於飛
싸늘한 물 기운 옷에 스며든다 / 水氣凄涼逼客衣
푸른 언덕에 해오라기 나란히 섰기도 / 綠岸有時雙鷺立
파아란 하늘 어느 곳으로 돛대 하나 가누나 / 碧天何處一帆歸
산은 붉은 태양 삼키니 마을 나무 나직하고 / 山含紅日低村樹
바람은 은물결 걷어다가 낚시 여울에 부수누나 / 風卷銀濤碎釣磯
처음 동문을 나올 때도 오히려 슬펐으니 / 初出東門尙怊悵
강을 건느매 더욱 연연해짐 어쩔 수 없네 / 渡江無奈益依依
○사평진(沙平津)에서 자면서
노는 계집 몸치장하니 거의 기생인 듯 / 遊女冶容多效妓
사는 백성들 머리 깎으니 반은 중이구나 / 居民祝髮半爲僧
강이 들레니 비로소 조수 소린줄 알겠고 / 江喧始識潮聲漲
땅이 더우니 장기를 어찌 견디랴 / 地熱那堪瘴氣蒸
○강 가에서 배를 기다리며
아침 해 떠오르자 안개 걷히는데 / 朝日初昇宿霧收
채찍을 재촉하여 한강 머리 이르렀네 / 促鞭行到漢江頭
천왕이 돌아오지 않으니 누구에게 물으리 / 天王不返憑誰問
해오라기 한가히 나는데 물만 흐르누나 / 沙鳥閑飛水自流
[주D-001]천왕(天王)이……물으리 : 천왕은 천자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주 소왕(周昭王)을 가리킨다.
소왕이 남쪽 지방을 순수(巡守)하다가 한수(漢水)를 건너게 되었는데, 뱃사공이 미워하여
아교로 풀칠하여 만든 배에 태우니 중류(中流)에 이르러 배가 그만 파선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소왕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는데, 그 후 제 환공(齊桓公)이 제후를 거느리고
초(楚)를 공격하면서 이것을 추궁하자 초에서는 “하수에 물어보라.[問諸河濱]” 하여
책임을 회피하였다. 《史記 周本紀 注 正義》《春秋左傳 僖公4年》
○배를 띄우며
강이 머니 하늘이 낮게 붙은 듯 / 江遠天低襯
배가 가니 언덕이 따라 옮기는 듯 / 舟行岸趁移
엷은 구름은 흰 비단처럼 비꼈는데 / 薄雲橫似素
성긴 비는 실처럼 뿌린다오 / 疏雨散如絲
여울이 험하니 물 흐름 빠르기도 / 灘險水流疾
봉우리 많으니 산이 오래도록 보이누나 / 峰多山盡遲
흥얼거리며 자주 고개 드니 / 沈吟費翹首
바로 고향을 바라보는 때문이라오 / 正是望鄕時
○쌍령(雙嶺)에서 자면서
길이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가니 해지는 것 겁나는데 / 路入荒榛怯日斜
홀연히 개 짖는 소리 들리니 인가 있음 알겠구나 / 忽聞啼犬認人家
외로운 마을에도 도적을 두려워 오히려 창을 비끼고 / 孤村畏盜猶橫戟
옛 사원에서 중을 만나 잠깐 차를 맛본다오 / 古院逢僧暫試茶
만 리에 돌아가는 구름은 한가하게 학을 전송하고 / 萬里歸雲閑送鶴
시내의 높은 버들에는 고요하게 까마귀 깃들였네 / 一溪高柳靜藏鴉
이 몸이 마침내 강산의 주인이 되리니 / 此身會作江山主
황효가 영가와 같단 말 들었노라 / 聞道黃驍似永嘉
황려(黃驪)의 딴 이름이 황효이다.(黃驪一名黃驍。)
[주D-001]황효(黃驍)가……들었노라 : 황효는 중국 절강성에 있는 지명으로 진(晉)의 명사 사영운
(謝靈運)이 일찍이 이곳의 원이 되었으므로 여주에서 늙겠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처음 황려(黃驪)에 들어가면서 2수
나귀 타고 겨우 고개를 넘으니 / 跨驢才度嶺
고을이 푸른 강 머리를 베고 있구나 / 縣枕碧江頭
수국은 봉도를 옮겨 놓은 듯 / 水國移蓬島
인가는 옥주에 살고 있네 / 人家住沃州
지형은 달리는 범인듯 / 地形如走虎
산세는 나는 교룡인듯 / 山勢似騰虯
이미 왕성의 액을 벗어났으니 / 已脫王城厄
객로의 헤맴 쉬겠구나 / 還休客路遊
고향의 친척은 판적에서 찾아내고 / 鄕親尋版籍
농토는 선세의 두둑을 묻노라 / 農畝問先疇
술을 장만하고 늙은 농부 불러다가 / 置酒呼田叟
농사짓는 방법 부지런히 묻는다오 / 勤咨力穡謀
초초히 행장을 수습하여 / 草草事行李
멀리멀리 어려운 길 건너왔네 / 茫茫涉梗艱
수염을 태워가며 병든 누이 시중하고 / 燎鬚隨痛妹
베개에 부채질하며 어머니 얼굴 생각한다오 / 扇枕憶慈顔
이때 어머니가 상주(尙州)에 있었다.(時母在尙州。)
상국에는 풍진이 아득한데 / 上國風塵暗
남쪽 고을에는 세월이 한가하구나 / 南州日月閑
이 고장 오래 살 만하니 / 此邦堪土着
정히 오활한 이내몸에 알맞구나 / 端稱養疏頑
[주D-001]수국(水國)은……놓은 듯 : 수국은 물나라라는 뜻으로 강이나 바다를 말하며, 봉도(蓬島)
는 선인(仙人)이 살고 있는 해도(海島)를 가리킨다.
[주D-002]인가는……살고 있네 : 경치가 아름다운 고지대에 사는 것을 말한다. 옥주(沃州)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신창현(新昌縣) 동쪽에 있는 명산으로 이 위에는 방학봉(放鶴峯)과
양마파(養馬坡)가 있는데, 이것은 옛날 진(晉)의 고승(高僧) 지둔(支遁)이 학을 놓아
주고 말을 기른 곳이라 한다.
[주D-003]수염을……시중하고 : 누이의 병을 몸소 간호함을 말한다. 당(唐)의 이적(李勣)은 복야
(僕射)의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도 그의 누이가 앓자, 반드시 몸소 불을 지펴 죽을 쑤어
먹였는데 한번은 그만 수염을 태우고 말았다. 《新唐書 李勣傳》
[주D-004]베개에……생각한다오 : 부모를 사모함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의 효자였던 황향(黃香)
은 효성이 지극했는데, 9세 때에 어머니를 잃자, 아버지를 잘 받들어 여름이면 아버지의
베개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하고 겨울이면 아버지의 이불 속에 들어가 따뜻하게 해
드렸다. 《後漢書 黃香列傳》
○두세 고향 사람과 마암(馬巖)에 놀면서
두 마리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 雙馬權奇出水涯
이 때문에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 / 縣名從此得黃驪
누른 말 검은 말이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름하였다.(黃馬驪馬出水。故名之。)
시인은 옛을 좋아하여 번거롭게 증거대지만 / 詩人好古煩徵詰
왕래하는 어옹이야 어찌 알 리 있으랴 / 來往漁翁豈自知
○취하여 하령사(下寧寺)에 놀면서
호숫가 절에 우연히 이르니 / 偶到湖邊寺
시원한 바람에 술 기운 깨누나 / 淸風散酒醺
거친 들에는 불길 끌기 알맞고 / 野荒偏引燒
아득한 강에는 구름 일기 쉽구나 / 江暗易生雲
푸른 산은 물에 씻겨 끊겼고 / 碧嶺侵沙斷
달리는 물은 언덕에 부딪혀 나뉘었네 / 奔流來岸分
외로운 배 어느 곳에 대었는고 / 孤舟何處泊
어선의 피리 소리 늦게 들려오누나 / 漁笛晩來聞
○진사(進士) 이대성(李大成)이 초청하여 술 마시는 자리에서 주필(走筆)로 써서 주다
생각하니 옛날에는 서울의 봄 마음껏 즐기면서 / 憶昔放意京華春
백옥 술잔에 곤드라지게 취했었는데 / 白玉樽前爛醉身
지금은 강성에 유랑하며 / 如今浪跡江城裏
푸른 산 만 리에 초라하게 노는 신세라오 / 碧山萬里薄遊人
끊긴 구름 지는 해 차마 볼 수 없구나 / 斷雲落日不忍見
가는 비 비낀 바람 부질없이 마음만 슬프다오 / 細雨斜風空慘神
고마운 그대 나를 맞이하여 나그네 회포 위로해 주니 / 多君邀我慰覊旅
옥 술잔이 철철 넘어 금비늘이 생기누나 / 玉杯瀲灩生金鱗
몇 명의 기생들 시세에 맞는 단장을 하고 / 紅裙數隊時世粧
슬픈 노래 한 곡조 양진을 움직이네 / 哀歌一曲動梁塵
주인은 춤을 추고 나에게 거문고 타라 하기에 / 主人起舞屬我彈
거문고 끌어잡고 한 곡조 타려 하니 눈물이 앞서네 / 把琴欲弄先霑巾
자리에 가득한 손들 각각 서로 돌아보며 / 四筵賓客各相顧
나에게 무슨 일로 그렇게 슬퍼하느냐고 묻기에 / 問我何事多酸辛
나는 대답하길 근자에 왕성 난리로 / 答云近者王城亂
대낮 큰 거리에 검붉은 피가 흐르니 / 白日九街殷血新
나도 겨우 곤강의 태움을 면했으나 / 我亦僅免崐岡焚
유리 간액 이루 다 말할 수 없소 / 離流艱厄難勝陳
불안한 심장 가는 곳마다 목메니 / 危腸觸地卽鳴咽
하물며 이 영외의 연하 새벽이겠소 / 況此嶺外煙霞晨
흠뻑 마시면 이내 한 조금 누그러질 것이니 / 痛飮粗堪寬我恨
그대여 다시 서너 잔 따라주오 / 請君更酌三四巡
[주D-001]금비늘이 생기누나 : 술잔에 가는 파문이 이는 것을 말한다.
[주D-002]슬픈……움직이네 : 노래가 매우 맑고 구슬픔을 말한다. 양진(梁塵)은 들보 위의 티끌.
옛날 노(魯) 나라의 우공(虞公)은 소리를 발하면 매우 청월(淸越)하여 노래하면 들보
위에 있는 티끌이 움직였다 한다.
[주D-003]곤강(崑岡)의 태움 : 곤강은 중국의 곤륜산(崑崙山). 《서경(書經)》 윤정(胤征)에
“불이 곤강을 태우면 옥과 돌이 모두 탄다.[火炎崑岡 玉石俱焚]” 하였는데, 이는 어떤
큰 환란을 만나면 사람의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모두 피해를 당한다는 뜻이다.
○본고을 원이 강루(江樓)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다음날 받들어 주다
산수가 맑고 고와 십주에 비길 만한데 / 山水淸姸敵十洲
사군이 나를 초청하여 강루에 잔치하네 / 使君邀我宴江樓
고을 사람들 부액해주니 영광스럽기도 하여라 / 郡人扶腋光生路
주옹이 주금으로 노는 것보다 낫구려 / 大勝朱翁晝錦遊
언덕 위의 아름다운 꽃 창기의 자태이며 / 岸上好花倡妓艶
누대 앞의 흐르는 물 사또의 청결이라 / 樓前流水長官淸
옥 술잔 못다 기울여 청산에 해저무니 / 玉樽未倒靑山暮
긴 피리 소리 구슬픈 거문고 소리에 이내 간장 다 녹노라 / 緩管哀鉉尙殢膓
[주D-001]십주(十洲) :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동방삭(東方朔)의 십주기(十洲記)에 십주는
조주(祖洲)ㆍ영주(瀛洲)ㆍ현주(玄洲)ㆍ염주(炎洲)ㆍ장주(長洲)ㆍ원주(元洲)ㆍ유주(流洲)ㆍ
생주(生洲)ㆍ봉린주(鳳麟洲)ㆍ취굴주(聚窟洲)라 하였다.
[주D-002]주옹(朱翁)이……노는 것 : 주옹은 한(漢) 나라 주매신(朱買臣)의 자(字)가 옹자(翁子)
였으므로 그를 가리키며, 주금(晝錦)은 비단옷을 입고 낮에 다닌다는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옴을 말한다. 매신은 집이 무척 가난했으나 책 읽기를 좋아했었는데 뒤에
' 엄조(嚴助)의 추천으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무제(武帝)는 그를 그의 고향인
회계 태수(會稽太守)에 임명하고는 “부귀하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 옷을 입고
밤에 다니는 것과 같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옛말을 인용한 데서 나온 것이다.
《漢書 朱買臣傳》
○작은 배를 띄우며 향교의 여러 생도들이 나를 위하여 배를 마련하여 강에 띄워주었다.
계수 나무 돛대에 목란 배로 푸른 물결 횡단하니 / 桂棹蘭舟截碧漣
기생들 물 속 하늘에서 보니 더욱 예쁘구나 / 紅粧明媚水中天
정두(飣餖)의 소반에서 겨우 배꼽 둥근 게 보았고 / 飣盤纔見團臍蟹
걸린 그물에서 다시 목 쭈그러진 편어를 보았네 / 掛網還看縮項鯿
십 리의 연화 참으로 그림 같구나 / 十里煙花眞似畫
한 강의 풍월 값어치 말할 수 없네 / 一江風月不論錢
갈매기들 피리 소리와 노래 듣고는 / 沙鷗熟聽笙歌響
여울 앞에 날아들어 배 피할 줄 모르네 / 飛到灘前莫避船
○유월 십일일 황려(黃驪)를 떠나 상주(尙州)로 향하면서 근곡촌(根谷村) 내 농토가 있는 곳이다
에서 자다
산에 들어가니 숲 우거져 처음에는 길 몰랐는데 / 入山蒙密初迷路
마을 사람들 고개 넘어 서로 맞아주네 / 村人過嶺相迎去
밭갈이하는 농부들 원숭이처럼 늘어서 절하고 / 畦丁羅拜似獼猴
재잘거리는 말소리 자못 남만의 억양일레 / 嘍囉頗帶南蠻語
전가의 주인 장기에 모발이 노란데 / 田家主人瘴髮黃
반가히 맞이하여 닭 잡고 기장밥 해주네 / 邀我欣然具鷄黍
수염난 종놈 동이 지고 달려가 샘물 길어 오고 / 髥奴舁甕走汲泉
혹난 노파 절구 씻고 힘껏 절구질하네 / 癭嫗洗臼力擧杵
석 자나 되는 술통 허리와 배 크기도 한데 / 三尺山樽腰腹皤
관솔불 켜들고 향기로운 술 잔질하네 / 松明吹火酌芳醑
당 아래서는 허리 굽히며 다투어 조심하는데 / 堂下曲腰爭磬折
당 위에서는 건 벗고 두 다리 뻗는다오 / 堂上脫幘自箕踞
술 취하여 그대로 누워 몇 번 코를 골았는데 / 酒酣徑臥再鼾鼻
마부가 말 먹이니 날이 벌써 샜나 보다 / 僕夫秣馬天已曙
[주D-001]남만(南蠻)의 억양일레 : 남만은 남쪽 오랑캐 지방이란 뜻으로 경상도(慶尙道) 사투리를
가리킨 것이다.
○황려 향교의 여러 생도들이 나를 위하여 배를 마련해서 달밤에 강에 띄웠다가 오경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이때 크게 취하여 장편을 지어 후의(厚意)에 보답하지 못하고 다음날 상주(尙州)로
가다가 근곡촌(根谷村)에서 자면서 어제 유상(遊賞)한 즐거움을 기록하여 고향의 몇몇 분에게
드린다
한 떨기 푸른 산 아래에 / 一簇蒼山根
한강이 푸른 거울 열어 놓았네 / 寒江開碧鑑
눈썹을 그린 듯한 산 빛은 새벽에 더욱 고왔고 / 黛色曉連娟
비단을 짠 듯한 물 무늬는 맑게 아롱졌네 / 縠紋晴瀲灩
즐겁게 몇몇 사람들과 / 肯携二三子
그림배 새벽부터 강에 띄웠었지 / 畫鷁凌晨泛
아득한 포구에 푸른 물 끝이 없으니 / 極浦水漫漫
긴 하늘 멀리 잠긴 듯하였네 / 長天遠如蘸
맑은 병에선 푸른 술이 쏟아졌고 / 淸壺瀉綠醅
가까운 자리에는 예쁜 기생들 둘러 있었네 / 密席羅紅臉
금비녀는 춤추는 앞에 떨어졌고 / 金釵舞前落
보배 부채는 노래하는 밑에 가리었다 / 寶扇歌底掩
슬픈 쟁 소리에 긴 피리 소리 섞이어 / 哀箏雜慢管
멀리 바람을 좇아 흔들린다 / 遠逐風磨颭
늦게야 흰 모래 물가에 배대어 / 晩泊白沙汀
푸른 나무에 붉은 닻줄을 매었네 / 綠樹繫紅纜
지는 해 반쯤 숨었는데 / 落日隱半規
산에 이르러 저녁 범패(梵唄) 소리 들었네 / 到山聞暮梵
때에 배를 대고 한 절에 들어갔다.(時泊舟入一寺。)
밤에 다시 배를 띄우니 / 入夜又放船
달빛이 청아해서 사랑스러웠네 / 月色淸可攬
포구에서 작살질하는 것 구경하니 / 浦口觀叉魚
고기들 어지럽게 서로 베고 있었지 / 銀刀亂相枕
눈 같은 회 칼날 따라 나는데 / 膾雪隨刃飛
배불러 먹을 수 없었다오 / 厭飫不可啖
상인의 피리 소리는 끊겼다 다시 이어지고 / 商笛聲斷續
어선의 등불은 밝았다 다시 어두워지네 / 漁燈影明暗
밤새도록 잔치하여도 피곤하지 않으니 / 終宵寢不疲
부백을 쾌히 마셨네 / 浮白聊快飮
경호수야 잘 있거라 / 好在鏡湖水
어느 때 하지장(賀知章)에게 하사함을 보리 / 何時賜賀監
다시 명년 봄을 기다려 / 更待明年春
기수에 목욕하려던 증점(曾點) 내 허여하리 / 浴沂吾與點
후한 뜻 무엇으로 갚으랴 / 厚意何以酬
짧은 시 부족함 어쩔 수 없네 / 短投無奈慊
[주D-001]부백(浮白) : 벌주(罰酒)를 마신 다음 잔을 들어 고하는 것을 말하는데, 직접 벌주를
칭하기도 한다.
[주D-002]기수(沂水)에……허여(許與)하리 : 기수는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물이름.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말하라 하자, 뜻이 고상한 증점(曾點)은 “봄철에
어른 5~6명과 동자(童子) 6~7명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소풍한 다음 시
읊으며 돌아오겠다.” 하니 공자는 감탄하며 “나는 증점을 허여한다.” 하였다.
《論語 先進》
○말 위에서 짓다
수선의 시골 떠나 / 一別水仙鄕
행장 챙겨 남쪽 변방으로 달려간다 / 騰裝適南荒
유월 염천에 만 리를 가니 / 六月行萬里
땀이 흰죽같이 솟는구나 / 白汗翻如漿
걷다가 피곤하면 다시 말에 오르고 / 行疲又上馬
말에 오르니 졸려서 쓰러지려 하네 / 上馬睡欲僵
목말라 산 밑의 샘물 마시니 / 渴飮山下泉
샘물도 뜨겁기가 끓인 물일레 / 泉水極探湯
아이 종은 헐떡이며 / 童奴喘不息
자주 서늘한 나무 그늘 찾는다오 / 屢擇樹陰涼
다행히 서울에 가는 사람 아니니 / 幸非就國者
걸음을 굳이 바삐할 필요가 없네 / 行李不須忙
○요성(聊城) 역루(驛樓) 위에 쓰다
흥이 나면 말을 몰고 피곤하면 편히 쉬니 / 興來命駕困來安
나를 한가하게 놓아준 천지에게 감사드린다오 / 多謝乾坤放我閑
애석해라 우정의 머리 흰 아전 / 可惜郵亭白頭吏
일생을 모두 말굽에 바쳤구나 / 一生都擲馬蹄間
때에 늙은 아전이 말에서 떨어져 앓고 있었다.(時老吏隳馬有病。 )
○유월 십사일 처음으로 상주(尙州)에 들어가다
상주는 옛날의 사벌국인데 / 尙州古者沙伐國
왕후의 저택 터도 남지 않았네 / 王侯第宅無餘基
수많은 전쟁 있었던 곳인데 / 干戈百戰生死地
오직 강산만이 성쇠를 알리라 / 唯有江山閱盛衰
나라가 망하여 고을이 되고 고을이 다시 나라가 되니 / 國破爲州州作國
예나 지금이나 한 번만이 아니라오 / 古往今來非一時
지형은 참으로 기복하는 호랑이인듯 / 地形眞似虎起伏
천리를 담처럼 둘렀으니 어이 그리 멀던가 / 繚垣千里何逶迤
빨리 오느라 곤하여 눕자 해저무니 / 朅來困臥日正暮
눈을 붙여 기이한 것 구경할 겨를 없네 / 未暇着眼窮搜奇
날이 새자 나가 자세히 보니 / 天明出遊試覼縷
비늘같이 많은 집들 용이 주두에 얽혔네 / 魚鱗萬屋龍纏栭
기생이 일제히 절하니 옥패 소리 울리누나 / 蛾眉齊拜瑤佩鳴
자운이 있다더니 누구인지 / 聞有紫雲知是誰
[주D-001]자운(紫雲)이……누구인지 : 자운은 당(唐)의 사도(司徒) 이원(李愿)의 집에 있던 명기
(名妓). 두목(杜牧)은 어사(御史)가 되어 낙양 분사(洛陽分司)로 있었는데, 이원의
연회석에 명사(名士)로 초대되어 “자운이란 명기가 있단 말 들었는데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이원이 가르쳐주자, 그는 한참 동안 응시하고는 “과연 아름다우니 나에게 빌려
달라.” 하였다. 《唐詩 紀事 杜牧》
○봉두사(鳳頭寺)에 쓰다
절은 오래지만 산은 지금도 푸르고 / 寺古山猶碧
스님 고명하니 경치 더욱 맑아라 / 僧高地更淸
들 구름은 비 올 징조 보이는데 / 野雲含雨意
소나무에 부는 바람 가을인가 의심하네 / 松籟僭秋聲
지는 해는 까마귀 떼에 반짝거리고 / 落日鴉邊耿
지는 놀은 해오라기 위에 밝구나 / 殘霞鶩外明
시인의 기습이 남아서 / 詩人餘習氣
잎을 따서 그윽한 정을 쓴다오 / 摘葉寫幽情
○서기(書記) 최정분(崔正份)의 운에 차하다
지난날 자리에서 누가 나를 알랴 / 舊日筵中誰識我
세 명의 기생들 아직까지 돌아가지 않았네 / 三行粉面不曾廻
왕랑이 임공(臨邛)에 노는 손을 그릇 공경하여 / 王郞謬敬遊邛客
과연 문군이 밤에 따라왔네 / 果有文君夜出來
[주D-001]왕랑(王郞)이……따라왔네 : 최정분이 자신을 잘못 알고 지나친 예우를 베풀어 그의
집에 있던 기생이 따라왔음을 말한 것이다. 왕랑(玉郞)은 임공 영(臨邛令)으로 있던
왕길(王吉)을 가리키며 임공에 노는 손이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상여는 젊었을 때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문장이 뛰어났는데, 뒤에 임공에 와 있자
왕길은 무척 존경하였다. 그리하여 임공의 부호였던 탁왕손(卓王孫)의 연회에 함께
초대되었는데, 이때 마침 탁왕손의 딸인 문군(文君)이 새로 과부가 되어 집에 있다가
상여에게 반하여 마침내 그를 따라 밤에 도망하였다. 《漢書 司馬相如傳》
○화개사(花開寺)에 우거(寓居)하면서 당두(堂頭)에게 주다 이때에 병으로 우거하고 있었다.
잠깐 한가한 즐거움을 얻어 / 暫得休休樂
고생스러웠던 수고를 갚으려 하오 / 聊償役役勞
샘은 급하게 멀리 흘러가고 / 石泉飛趁遠
솔 덩굴은 뻗어서 높은 데로 오른다 / 松蔓走緣高
풀가에 매미는 허물을 남기고 / 草際蟬遺蛻
숲 속의 새는 털을 떨어뜨렸네 / 林間鳥墮毛
선사가 복축하는 것을 용납해 준다면 / 憑師容卜築
잠시 여기에 은둔하여 쑥대로 비녀하겠네 / 小隱此簪蒿
[주D-001]쑥대로 비녀하겠네 : 가난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에 “두림(杜林)이 외효(隗囂)의 땅에 있으면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아 쑥대로 비녀하고 풀로 자리를 깔 정도로 가난하였으나 그의 녹을 먹지 않았다.”
하였다.
○화개사에서 고인(故人) 혜운사(惠雲師)가 머무는 용담사(龍潭寺)에 이르러 쓰다
빈 골짜기는 바람이 오히려 소리를 내고 / 空谷風猶響
찬 시내에는 물이 스스로 방아찧는구려 / 寒溪水自舂
지둔은 말을 사랑하여 기르고 / 養憐支遁馬
섭공은 용을 축원하여 내리네 / 呪下涉公龍
작은 채전의 영출을 물주고 / 小圃流靈朮
그윽한 뜰의 어린 솔을 보호하네 / 幽庭護稚松
맑은 밤 한 번의 경쇠 소리에 / 一聲淸夜磬
반달이 먼 봉우리에 떨어지누나 / 半月落遙峰
[주D-001]지둔(支遁)은……기르고 : 지둔은 진(晉)의 고승(高僧)으로 자는 도림(道林), 지형산
(支硎山)에 은둔하여 수도했으며 세상에서는 지공(支公), 또는 임공(林公)이라 하였다.
뒤에 여항산(餘杭山)에 거했는데, 혹자가 말을 보내 주자. 지둔은 “신준(神駿)한 것을
사랑한다.”하며 길렀고, 학(鶴)을 보내주자 “하늘에 나는 물건이니 어찌 애완 동물로
삼겠는가.” 하며 놓아주었다. 《梁高僧傳 卷4》
[주D-002]섭공(涉公)은……내리 네 : 섭공은 전진(前秦)의 고승인 승섭(僧涉)의 일명(一名).
서역(西域) 사람으로 부견(苻堅) 때에 장안(長安)에 들어와 미래를 예언했었는데 많이
맞았으며, 또 주축(呪祝)으로 비를 내리게 하였다. 《晉書 僧涉傳》
[주D-003]영출(靈朮) : 약명(藥名)으로 삽주 뿌리를 말하는데, 창출(蒼朮)ㆍ백출(白朮) 두 종류가
있다. 사람이 복용하면 좋은 효과를 본다 하여 영출이라 한 것이다.
○팔월 일일에 당두(堂頭)에게 보이다
가느다란 길은 꾸불꾸불하여 푸른 산비탈로 들어가고 / 細路縈紆入翠崖
높은 누대는 우뚝하게 서서 푸른 무지개를 굽어보네 / 危樓突兀俯靑霓
서늘한 새벽에 누른 송아지는 평평한 들로 나가고 / 曉涼黃犢歸平野
한낮에 그윽한 새는 얕은 시내에 미역감누나 / 日午幽禽浴淺溪
집에 가득한 댕댕이는 벽에 얽히어 컴컴하고 / 滿院薛蘿纏壁暗
창 곁에 있는 버들은 처마를 눌러 나직하구려 / 傍窓楊柳壓簷低
땅이 외져 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려면 / 欲知地僻無人到
문 밖의 진흙 위에 사슴 발자국이 있네 / 門外泥深鹿印蹄
청수한 모습 선과 유의 본색인데 / 癯形本是列仙儒
또 산중의 늙은 필추를 배우네 / 又學山中老苾蒭
금압에 향을 불태워 불전에 추창하고 / 金鴨焚香趨佛殿
목어로 죽먹으라 하기에 중의 사발 빌었네 / 木魚催粥借僧盂
솔바람 소슬하니 줄 없는 곡조요 / 松風瑟瑟無絃曲
안개 낀 묏부리 층층하니 색칠한 그림이로다 / 煙峀層層著色圖
세상의 영화와 고락 모두가 꿈이다 / 世上榮枯都是夢
한단에서 푸른 망아지 타는 것을 탄식하지 말라 / 邯鄲休歎駕靑駒
[주D-001]필추(苾蒭) : 불가의 말로 비구(比丘)가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자에 대한
통칭.
[주D-002]금압(金鴨) : 금속으로 오리처럼 주조하여 만든 향로(香爐).
[주D-003]목어(木魚) : 불가의 법기(法器)로 방목탁[梆]이라고도 하는데, 나무를 깎아 고기의
모양을 만든 다음 고당(庫堂)의 옆에 두고는 죽이나 밥을 먹을 때, 또는 중들을 소집할
때 두드린다.
[주D-004]한단(邯鄲)에서……말라 : 한단은 당(唐)의 이필(李泌)이 지은 황량몽(黃梁夢)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노생(盧生)을 가리킨다. 한단의 나그네였던 노생은 허술한 단갈
(短褐)을 입고 푸른 망아지를 타고 다녔는데, 하루는 도자(道者)인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곤궁한신세를 한탄하였더니, 여옹은 주머니에서 베개 하나를 꺼내 주면서
“이것을 베고 자면 자네는 마음대로 부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노생은 그대로 하였
더니 과연 꿈속에 온갖 부귀공명을 누렸다. 깨어나 보니, 자신이 자기 전에 주인이 누른
기장[黃梁]으로 떡을 찌고 있었는데 아직 다 익지 못하였다. 노생은 하도 허무해서 이상
스레 여기자 여옹은 “세상일이 모두 이 꿈과 같다.” 했다. 여기에 한단이 나오므로
한단몽(邯鄲夢)이라고도 하며 침중기(枕中記)라고도 한다.
○팔월 이일
선방에서 밥을 먹고 잠깐 차를 마시었는데 / 食罷禪房暫啜茶
산 중턱의 붉은 햇살이 벌써 서쪽으로 비끼었네 / 半山紅日已西斜
앉아서 뜰가의 사람에게 길든 학을 부르고 / 坐呼階畔馴人鶴
누워서 문 앞의 도적을 경계하는 거위 소리를 듣네 / 臥聽門前警盜鵝
수많은 버들 그림자 속에는 남북으로 길이 갈라지고 / 萬柳影中南北路
한 시내 건너편엔 두세 집이로다 / 一溪聲外兩三家
갑자기 시구를 얻으면 벽에 쓰련다 / 卒然得句聊題壁
사리에게 말을 전하노니 사로 덮지 마소 / 寄語闍梨莫羃紗
[주D-001]사리(闍梨) : 범어(梵語)로 아사리(阿闍梨)의 약칭인데, 고승으로 중들의 모범이 될
만한 자를 가리킨다.
○팔월 삼일
근심을 없애는 것은 진한 술에 의지하고 / 陶愁憑釅醑
병을 부축하는 것은 지팡이에 힘입는구려 / 扶病賴枯藤
돌은 둔한 거북처럼 쭈그렸고 / 伏石頑龜縮
봉우리는 성낸 말처럼 달리네 / 奔峰怒馬騰
바람이 없어도 소나무는 스스로 소리를 내고 / 無風松自籟
개려고 하자 안개가 먼저 오르네 / 欲霽霧先蒸
본래 구름과 물을 사랑하니 / 素習愛雲水
전생이 중이 아니런가 / 前身莫是僧
○옛사람의 운을 차하여 부질없이 짓다
병으로 누워 노선의 집에 우거해 있으니 / 臥痾聊寄老禪居
머리 위에는 부질없이 세월이 가는 것을 놀래누나 / 頭上空驚歲月徂
다리 아파 남여(籃輿)를 타니 도공의 병이요 / 脚待舁籃陶令病
허리는 띠를 이기기 어려우니 심약(沈約)의 야윔이로다 / 腰難勝帶沈郞癯
빈 산에 비 오고 컴컴하니 외로운 원숭이 휘파람 불고 / 空山雨暗孤猿嘯
고죽에 연기 깊으니 새가 우네 / 苦竹烟深一鳥呼
창 밑에 책을 베고 바야흐로 깊이 잠들었는데 / 窓下枕書方熟睡
사미가 불러 깨워 고우를 권하네 / 沙彌喚起勸臯虞
[주D-001]도공(陶公)의 병 : 도공은 도잠(陶潛)이요, 병은 곧 각기병을 가리킨다. 도잠을 매우
존경하던 주자사(州刺史) 왕홍(王弘)이 함께 놀다가 돌아갈 적에 탈 것을 묻자, 도잠은
“나는 본래 다리병이 있어서 그 동안 남여(籃輿)를 탔으니 또한 스스로 돌아갈 수 있다.”
하며 거절하였다. 《晉書 陶潛傳》
[주D-002]심약(沈約)의 야윔 : 양(梁)의 문장가인 심약은 몸이 약하여 늘 앓았는데, 그의 친구인
서면(徐勉)에게 준 편지에 “요즘 병이 더욱 심하여 백여 일 동안에 몸이 야위어 허리띠
구멍이 넓어지고 한 달 동안에 팔목이 반 푼이나 줄었다.” 하였다. 《梁書 沈約傳》
[주D-003]사미(沙彌) : 사미는 범어로 불문(佛門)에 들어가 수행중인 어린 중을 가리킨다.
○팔월 오일에 도적 떼가 점점 치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적떼가 고슴도치 털처럼 모여 / 群盜如蝟毛
생민이 비린 피를 뿌리누나 / 生民灑腥血
군수는 한갓 융의만 입고서 / 郡守徒戎衣
적을 바라보곤 기가 먼저 꺾이네 / 望敵氣先奪
벌의 독도 아직 소탕하지 못했는데 / 尙未掃蜂毒
하물며 호랑이 굴을 더듬을 수 있으랴 / 況堪探虎穴
슬프다 이런 때에 훌륭한 사람 없으니 / 嗟哉時無人
누가 대신하여 와서 쇠를 씹을꼬 / 誰繼來嚼鐵
적의 팔은 원숭이보다 빨라 / 賊臂捷於猿
활쏘기를 별이 반짝이듯 하고 / 放箭若星瞥
적의 정강이는 사슴보다 빨라 / 賊脛迅於鹿
산 넘기를 번갯불 사라지듯 하는구려 / 越山如電滅
사졸들이 추격하여도 미치지 못하여 / 士卒追不及
머리를 모아 부질없이 입만 벌리고 탄식하네 / 聚首空呀咄
어쩌다가 그 칼날에 부닥치면 / 幸能觸其鋒
열에 칠팔은 죽는구려 / 物故十七八
부녀자가 죽은 남편을 곡하며 / 婦女哭夫婿
머리에 삼베 두르고 마른 뼈를 조상하네 / 髽首吊枯骨
황량한 촌락에 일찍 문 닫으니 / 荒村早關門
대낮에도 길가는 나그네 전연 없구나 / 白日行旅絕
금년에는 더군다나 다시 가물어서 / 今年況復旱
비 기다리는 것이 목마른 것보다 심하구려 / 望雨甚於渴
논밭은 모두 붉게 타서 / 田野皆赤土
곡식 싹이 무성한 것을 볼 수 없네 / 未見苗芽茁
부잣집도 벌써 식량을 걱정하는데 / 富屋已憂飢
가난한 사람이야 어떻게 살 수 있으랴 / 貧者何由活
주문에서는 날마다 자리에 술을 토하고 / 朱門日吐茵
백 잔을 마시니 귀가 저절로 더워지네 / 百爵耳自熱
고당에는 옥비녀가 늘어서 있고 / 高堂森玉簪
빽빽한 자리에는 비단 버선을 끼고 있네 / 密席擁羅襪
문호의 융성한 것만 알고 / 但識門燻灼
국가가 불안한 것은 근심하지 않누나 / 不憂國杌
썩은 선비 비록 아는 것은 없으나 / 腐儒雖無知
눈물을 흘리며 매양 목메어 흐느끼네 / 流涕每鳴咽
슬프다 고기 먹는 무리 아니라 / 嗟非肉食徒
직언하는 혀 내두르지 못하였네 / 未掉直言舌
할 수 없다 어찌하면 진달하랴 / 已矣若爲陳
천폐를 뵈올 길이 없구나 / 天陛無由謁
[주D-001]융의(戎衣) : 싸울 때 입는 전투복(戰鬪服)을 말한다.
[주D-002]쇠를……씹을꼬 : 쇠는 말의 재갈에 달려 있는 쇳조각을 말한다. 말탄 자가 이것으로
말을 마음대로 조종하므로 곧 유능한 무장(武將)을 가리킨 것이다.
[주D-003]주문(朱門) : 붉은 칠을 한 문으로 지위가 높은 관리의 집을 말한다.
[주D-004]옥비녀 : 옥관자(玉貫子)를 단 공경대부(公卿大夫)를 가리킨다.
[주D-005]비단 버선 : 기생(妓生)을 가리킨다.
[주D-006]고기 먹는 무리 : 많은 녹을 받아 먹는 관리들을 말한다.
○팔월 칠일 새벽에 용담사(龍潭寺)를 출발하여 이튿날 용포(龍浦)에 배를 띄워 낙동강(洛東江)을
지나 견탄(犬灘)에 대었다. 때에 밤은 깊고 달은 밝은데 빠른 물결은 돌에 부닥치고 푸른 산은
물결에 잠겼으며, 물은 극히 맑아서 굽어 보면 뛰는 고기와 달아나는 게가 세일 정도였다.
배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피부와 모발이 청쾌하여 쇄연히 봉래(蓬萊)ㆍ영주(瀛洲)의 감상이
있어 모르는 사이에 오랜 병이 갑자기 나은 듯하였다. 강가에 용원사(龍源寺)가 있는데 절의 중이
듣고서 강가에 마중나와 굳이 절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내가 사양하고 중을 맞아 배 위에
이르러 서로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인하여 두 수를 짓다
물 기운 싸늘하여 짧은 적삼 엄습하고 / 水氣凄涼襲短衫
맑은 강 전체가 쪽보다 푸르네 / 淸江一帶碧於藍
버들은 도령 문 앞의 다섯이 남았고 / 柳餘陶令門前五
산은 우강의 바다 위 삼산(三山)보다 낮구려 / 山勝禺强海上三
하늘과 물이 맞닿으니 천지가 희미하고 / 天水相連迷俯仰
구름과 안개 비로소 걷히니 동남을 알 수 있네 / 雲煙始卷占東南
외로운 배를 잠깐 평평한 모래 언덕에 매니 / 孤舟暫繫平沙岸
때에 훌륭한 스님 작은 암자에서 나오네 / 時有胡僧出小庵
맑은 새벽에 용포에 배 띄웠다가 / 淸曉泛龍浦
황혼에 견탄에 배 대었네 / 黃昏泊犬灘
교활한 구름은 지는 해를 속이고 / 黠雲欺落日
사나운 돌은 미친 물결을 막는구나 / 狠石捍狂瀾
수촌(水村)에는 가을이 먼저 와서 서늘하고 / 水國秋先冷
배 정자에는 밤이 되니 더욱 차구려 / 船亭夜更寒
강산이 참으로 그림보다 나으니 / 江山眞勝畫
그림 병풍으로 보지 말아다오 / 莫作畫屛看
[주C-001]봉래(蓬萊)……감상 : 신선이 사는 해도(海島)에 온 느낌을 말한다. 봉래와 영주(瀛洲)
는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섬으로 신선이 사는 오도(五島)의 각각 하나이며 또한
삼신산(三神山)에 든다.
[주D-001]버들은……남았고 : 도령(陶令)은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그는 일찍이 오류선생전
(五柳先生傳)을 지어 자신을 말하였는데, 여기에 “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며
또한 성명도 모른다. 집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는 인하여 오류선생이라 호
(號)하였다.” 하였다.
[주D-002]산은……낮구려 : 우강(禺强)은 북해(北海)의 신(神)으로 현명자(玄冥子)라고도 한다.
삼산(三山)은 봉래(蓬萊)ㆍ영주(瀛洲)ㆍ방장(方丈)의 삼신산(三神山)을 말한다.
《열자(列子)》 탐문(湯問)에 “오산(五山)의 뿌리가 매인 데가 없으므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자 선성(仙聖)이 상제(上帝)에게 하소하니 상제는 우강을 명하여 붙여 있게 하였다.”
한 말이 있으므로 마치 두 강이 아름다운 해산(海山)을 옮겨다 놓은 듯하다는 뜻이다.
○배가 가다
강과 바다 끝없이 넓어 / 江海浩無際
연기 물결 천 리가 푸르구나 / 煙濤千里碧
종일토록 호수 가운데 있어 / 終日在湖中
오래도록 배 띄우는 역사를 통솔하였네 / 久統泛舟役
예전에는 병풍 그림 속의 사람을 부러워했는데 / 舊羨畫屛人
지금은 병풍 속의 사람이 되었구려 / 今作屛中客
물결이 흔들리니 밝은 달이 부서지고 / 波搖碎明月
물이 줄어드니 외로운 돌이 드러나네 / 水落出孤石
저기 가는 저 외로운 상선 / 商船一葉去
아득히 어느 곳으로 가는고 / 杳杳何處適
행하여 갈대 꽃 핀 섬으로 들어가니 / 行入蘆花洲
숲의 안개 푸르게 뚝뚝 떨어지네 / 林霧翠滴滴
정신이 상쾌하고 피부와 모발이 서늘하니 / 頭輕肌髮涼
나도 모르게 오랜 병이 나은 듯 / 不覺沈疴釋
○다음날 배를 띄워 삿대질 하지 않고 흐르는 대로 동으로 내려가니 배 가는 것이 나르듯 하여
밤에 원흥사(元興寺) 앞에 대었다. 배에서 자는데 때에 밤은 고요하고 사람은 자고 오직 물 속
에서 고기가 뛰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나도 팔뚝을 베고 조금 자는데 밤 공기가 추워서 오래
자지 못하였다. 고기잡이 노래와 상선 피리 소리가 멀고 가까운 데서 서로 들리는데 하늘은 높고
물은 맑으며 모래는 밝고 언덕은 희다. 물결 빛과 달 그림자는 뱃집에 출렁대고 앞에는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풀이 있어 마치 범이 걸터앉고 곰이 쭈그린 것 같았다. 나는 두건을 벗고 비스듬히
기대어서 매우 강호(江湖)의 낙을 얻었다. 아! 강호의 낙은 비록 병중이라도 즐겁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날마다 기생을 끼고 주현(朱絃)을 타며 마음대로 노니 이 즐거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
는가? 시 두 수를 지었다
푸른 하늘이 먼 물에 떴으니 / 碧天浮遠水
구름 섬이 봉래인가 짐작되누나 / 雲島認蓬萊
물결 밑에는 붉은 고기가 잠겼고 / 浪底紅鱗沒
안개 속에는 백조가 오네 / 煙中白鳥來
여울 이름은 땅을 따라 바뀌고 / 灘名隨地換
산빛은 배를 쫓아 돌아오네 / 山色逐舟廻
강성의 술을 가져오라 하여 / 喚取江城酒
유유하게 한 잔을 마시네 / 悠然酌一杯
밤에 모래 강변에 다다르니 푸른 바위 가까운데 / 夜泊沙汀近翠巖
뜸 밑에 앉아 읊조리며 성긴 수염을 비비네 / 坐吟篷底撚疏髥
물빛은 출렁대어 선각을 흔들고 / 水光瀲瀲搖船閣
달 그림자는 희미하여 모자 차양에 떨어지누나 / 月影微微落帽簷
푸른 물결 창일해 오니 외로운 언덕이 묻히고 / 碧浪漲來孤岸沒
흰 구름 끊어진 곳에 짧은 봉우리가 뾰족하구나 / 白雲斷處短峰尖
새 소리 같은 피리 소리 들을 수 없으니 / 管聲哳嘲難堪聽
쟁 타는 섬섬옥수를 불러야겠네 / 須喚彈箏玉指纖
때에 한 아전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다.(時使一吏吹笛。)
[주D-001]봉래(蓬萊) : 신선이 산다는 해도(海島)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배 안에서 또 읊다
붉은 고기 여울에서 잡아오고 / 紅鱗得自灘流
막걸리는 모랫가 집에서 사왔네 / 白酒賖來沙戶
이 몸이 점점 어옹과 친하여져서 / 此身漸狎漁翁
연기 자욱한 강 밤비에 취하여 누웠네 / 醉臥煙江夜雨
○조는 사이에 배가 옮겨갔다
갠 호수에 물결 고요한데 팔을 베고 졸다가 / 晴湖浪靜枕肱眠
뱃사공이 이미 배를 놓은 줄 깨닫지 못하였네 / 不覺篙工已放船
꿈을 깨고 머리를 드니 모래 언덕이 달라졌어라 / 夢罷回頭沙岸異
푸른 버들 가에 옮겨 맨 것에 홀연히 놀랐네 / 忽驚移繫綠楊邊
○또 배를 띄우다
한 삿대로 흐르는 강물 휘저어가니 / 一棹漾流去
쓸쓸한 가을 팔월이로다 / 蕭然八月秋
청초의 언덕에 돛을 내리고 / 落帆靑草岸
흰 마름 물가에 닻줄을 매었네 / 繫纜白蘋洲
등불이 어두우니 바람은 장막을 흔들고 / 燈暗風搖帳
차가운 강엔 달빛 배에 가득하구려 / 江寒月滿舟
마부는 응당 나를 괴이하게 여기리라 / 僕夫應怪我
병중에도 한가하게 노닌다고 / 病裏亦閑遊
○또 회문체(廻文體)로 읊다
느린 피리 소리 바람에 끌리어 멀고 / 笛慢牽風遠
가는 배는 물결에 춤추어 가볍네 / 舟行舞浪輕
푸른 하늘에 가을 밤이 고요하니 / 碧天秋夜靜
찬 달이 호수에 잠겨 맑구나 / 寒月浸湖淸
[주C-001]회문체(廻文體) : 시사(詩詞)의 별체(別體)로 회문(回文)이라고도 하는데, 진(晉) 나라
때 소백옥(蘇伯玉)의 아내가 지은 반중시(盤中詩)에서 비롯되었으며. 전진(前秦)의 두도
(竇滔)의 아내가 선기도(璿璣圖)를 지으면서 체제가 크게 갖추어졌다. 이 시체는 시구
(詩句)를 바둑판의 눈금처럼 배열하여 끝에서부터 읽거나 중앙에서 선회(旋回)하여
읽어도 시가 되며 평측(平仄)과 운(韻)이 서로 맞는데, 여기서는 뜻만 통할 뿐, 운은
맞지 않는다. 직금체(織錦體).
○강 가운데의 노자석(鸕鶿石)
가벼운 배 출렁대며 물결 따라 가는데 / 輕舟溶漾信漣漪
강 가운데 기이한 돌 있으니 이름이 노자란다. / 中有奇石名鸕鶿
나는 생각건대 노자가 고기와 게를 찾아 / 我恐鸕鶿覓魚蟹
떠들어 부르며 깊은 강가에 날아와 모였다가 / 喧呼翔集深江湄
훌쩍 날아 잘못 풍이의 집을 범하니 / 翻翻誤觸馮夷宅
풍이가 노하여 부르짖어 천둥과 번개를 일으켰네 / 馮夷怒吼雷電作
바람에 꺾이고 물결에 부딪쳐 두 날개 부러져 / 風摧浪打兩翼折
물결 위에 반쯤 나오고 날지 못하누나 / 半出波間飛不得
살과 뼈는 썩어 녹아 동쪽으로 흘러가고 / 肌分髓爛隨東流
부질없이 야윈 뼈만 중주에 남아 있네 / 空有瘦骨留中洲
이끼 끼고 모래 붙어 굳은 돌로 화하여 / 蘚侵沙澁化堅石
꼬리는 진흙 속에 묻히고 머리만 반쯤 떴구나 / 尾入泥蟠頭半浮
그렇지 않다면 어찌 물결 속에서 / 不然安肯煙濤裏
기세가 죽지 않고 날아 일어날 것 같은가 / 氣勢不死如昂起
기이한 것을 고증하고 힐문하는 것이 모두 꿈이요 / 徵奇詰異皆夢耳
억지로 시를 짓는 것도 장난일세 / 穿鑿成詩亦一戲
술을 사서 금잔에 채우고 / 不如買酒盈金罍
너를 빌어 술잔을 만들어서 앵무배로 짝짓는 것만 못하리니 / 借汝爲杓副以鸚鵡杯
날마다 아무 일 없이 마시어 나의 시름 쏟으면서 / 日飮無何寫我憂
티끌 같은 만사를 한 번 웃으리라 / 一笑萬事如浮埃
[주D-001]풍이(馮夷) : 하백(河伯)으로 수신(水神)의 이름인데 빙이(氷夷)ㆍ풍수(馮修)라고도
한다.
○이날 원흥사(元興寺)에 들어가 친구(親舊) 규사(珪師)에게 주다
장안에서 함께 놀던 옛날을 생각하니 / 憶昔共遊長安中
열 네 해가 되었구려 / 算來一十四春風
군은 그때 혈기 왕성한 삼십 이전이어서 / 君時氣壯未三十
나는 기러기라도 따를 수 있다고 했었네 / 一身謂可趁飛鴻
나 역시 검은 머리에 가장 연소하여 / 我亦鬢綠最年少
번개처럼 번쩍이는 눈동자 왕융 같았지 / 眼電爛爛如王戎
이별한 뒤론 구름처럼 흩어져 각각 어느 곳에 있었던가 / 別來雲散各何處
사해 풍진에 쌍으로 굴러다니는 쑥대였구려 / 四海風塵雙轉蓬
서로 만나자 한 번 웃고 동적을 어루만지며 / 相逢一笑撫銅狄
솟는 눈물에 말 못하니 뜻만 무궁하구려 / 逬淚無言意不窮
대사는 이미 옛날 얼굴이 아니라 / 師今已非昔日容
소나무 위에 늙은 학처럼 여위었네 / 瘦與松頭老鶴同
나 역시 늙고 의지 또한 좁아져서 / 我亦老大心轉縮
다시는 무지개같은 옛날 기개가 없다오 / 無復昔日氣如虹
정을 다 토로하지 못하고 각각 슬퍼하여 / 論情未終各悽惻
산 중턱에 해지는 줄 몰랐네 / 不覺半峯斜日紅
인생의 한 평생 잠깐이거니 / 人生一世須曳爾
일찍 명리를 사절하고 지공을 따르리라 / 早謝名利從支公
[주D-001]번개처럼……같았지 : 왕융(王戎)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로 자
(字)는 준충(濬沖)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신채(神彩)가 뛰어나 태양을 보아도
현란하지 않았다. 배해(裴楷)는 “왕융의 눈동자는 바위 밑에 번쩍이는 번갯불과 같다.”
하였다. 《晉書 王戎傳》
[주D-002]동적(銅狄)을 어루만지며 : 동적은 구리로 주조하여 만든 인형. 후한(後漢) 때의 신선술
(神仙術)을 배웠던 계자훈(薊子訓)은 장안(長安) 동쪽 패성(霸城)에서 한 노인과 동적을
어루만지며 “이것을 만들 때 보았는데 벌써 5백년이 되었다.” 하였다. 《神仙傳 卷5》
[주D-003]지공(支公)을 따르리라 : 은둔하겠다는 뜻. 지공은 진(晉)의 고승 지둔(支遁)으로 자는
도림(道林), 지형산(支硎山)에 은둔하여 수도했으며 세상에서는 지공(支公), 또는 임공
(林公)이라 하였다. 뒤에 여항산(餘杭山)에 거했는데, 혹자가 말을 보내 주자. 지둔은
“신준(神駿)한 것을 사랑한다.”하며 길렀고, 학(鶴)을 보내주자 “하늘에 나는 물건
이니 어찌 애완 동물로 삼겠는가.” 하며 놓아주었다. 《梁高僧傳 卷4》
○붉은 석류가 막 익었는데 규공(珪公)이 시를 청하다
가지에 달린 붉은 알 몇 개나 되는가 / 赬卵撑枝幾許枚
취한 볼이 숲에 가득히 드리웠네 / 滿林欹倒醉中腮
붉은 주머니 속에 붉은 쌀낱을 감추었으니 / 紅綃囊裏藏紅粒
서리 바람 만나 남김없이 터뜨리리라 / 要見霜風罄拆開
○달밤에 자규(子規)가 우는 소리를 듣다
적막한 밤 달빛은 물결처럼 잔잔한데 / 寂寞殘宵月似波
빈 산에 울음 소리 편만하니 날이 새면 어이하랴 / 空山啼遍奈明何
십 년을 통곡한 궁도의 눈물 / 十年痛哭窮途淚
너의 붉은 입술과 누가 더 많은가 / 與爾朱脣血孰多
[주D-001]궁도(窮途)의 눈물 : 이규보 자신의 곤궁한 눈물을 말한다. 궁도는 길의 끝이란
뜻으로 아무런 방편(方便)이 없는 곤궁한 환경을 가리킨다.
○팔월 십일에 규공(珪公)이 그의 원(院)에 제하기를 청하므로 한 수를 짓다
만 리 창공 외기러기 나는 가을 하늘에 / 萬里高天斷雁秋
푸른 물결 머리에서 한가히 옛 절을 찾았네 / 閑尋古刹碧波頭
떠들썩한 문 밖에는 수많은 배가 모이고 / 喧喧門外千帆集
적적한 바위 모퉁이에는 장실이 그윽하구나 / 寂寂巖陬丈室幽
스님의 부귀는 원에 가득한 소나무와 대나무요 / 滿院松篁僧富貴
절의 풍류는 강에 비친 연기와 달이라네 / 一江煙月寺風流
숲 아래서 못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林下何曾見
부질없는 명예 버리고 물러와 쉬련다 / 擺却浮名欲退休
[주D-001]장실(丈室) : 사방이 한 길쯤 되는 좁은 거실인데, 장로(長老)들이 거처하는 방을
방장(方丈)ㆍ방실(方室)이라고 한 데서 온 것이다.
○십일일에 일찍 원흥사를 출발하여 영산부곡(靈山部曲)에 이르다 운을 찾다가 인(人) 자를
얻었다.
영산은 가장 궁벽한 고을이라 / 靈山最僻邑
오가는 길이 아직도 황무하구려 / 客路尙荒榛
흉년이 드니 도망하는 가호가 있고 / 歲儉有逋戶
백성이 순박하니 노인이 많구려 / 民淳多老人
누른 닭은 꼬끼요 하고 울고 / 黃鷄啼呢喔
푸른 쥐는 찍찍 소리를 내누나 / 蒼鼠出嚬呻
몇 명의 검은 옷 입은 아전이 / 數箇緇衣吏
놀라 달리기를 손 맞는 것처럼 하네 / 驚馳似迓賓
○낙동강(洛東江)을 지나다
백 겹으로 두른 푸른 산 속에 / 百轉靑山裏
한가로이 낙동강을 지나네 / 閑行過洛東
풀은 우거졌어도 오히려 길이 있고 / 草深猶有路
소나무가 고요하니 저절로 바람이 없네 / 松靜自無風
가을 물은 오리 머리처럼 푸르고 / 秋水鴨頭綠
새벽 놀은 성성이 피처럼 붉도다 / 曉霞猩血紅
누가 알랴 게으르게 노니는 손이 / 誰知倦遊客
사해에 시짓는 한 늙은이인 줄을 / 四海一詩翁
○용암사(龍巖寺)에 이르러 벽 위에 쓰다
몸이 용암에 이르니 신선의 경지인 듯 / 身到龍巖疑玉境
입으로 구정을 맛보니 얼음물인 듯 / 口嘗龜井認氷漿
문 앞에 구정이 있는데 맛이 매우 좋았다.(門有龜井。味甚佳。)
천금으로도 승창의 맛을 사기 어려워 / 千金難賭僧窓味
산 비가 낭랑한데 한바탕 잠을 잔다 / 山雨浪浪睡一場
○십육일에 중용자(中庸子)의 시운을 차하다
기반(羈絆)이 이르지 않는 곳에 / 羈紲不到處
흰 구름 속의 스님 스스로 한가하여라 / 白雲僧自閑
연기 빛은 황혼의 나무에 쌓이고 / 煙光愁暮樹
솔빛은 가을 산을 호위하누나 / 松色護秋山
지는 해에 찬 매미는 어지러이 울고 / 落日寒蟬噪
긴 하늘에 게으른 새는 둥우리로 돌아가네 / 長天倦鳥還
병중에 매우 손을 두려워하여 / 病中深畏客
대낮에 솔 문을 잠가버렸네 / 白日鎖松關
○십칠일에 대곡사(大谷寺)에 들어가다
돌길이 높고 낮아 울퉁불퉁한데 / 石路高低平不平
한가하게 과하마(果下馬) 타고 채찍질해 간다 / 閑騎果下彈鞭行
가벼운 바람은 조용히 연기 빛을 쓸어가고 / 輕風靜掃煙光去
지는 달은 새벽 빛과 함께 밝구나 / 落月時兼曉色明
짧은 기슭 앞 머리에서 절 방(榜)을 보고 / 短麓前頭看寺榜
비낀 배 곁에서 여울 이름을 묻는다 / 橫舟側畔問灘名
외로운 마을 어느 곳에서 부는지 쓸쓸한 피리 소리 / 孤村何處吹寒笛
타향에서 병을 앓으니 쉽게 슬퍼지는구나 / 抱疾他鄕易惱情
[주D-001]과하마(果下馬) : 키가 작은 조랑말 따위로서 타고서 과실나무 밑으로 지날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었다.
○처음으로 용궁군(龍宮郡)에 들어가다
처음으로 용궁군에 들어서니 / 初入龍宮郡
누각이 숲 속에 우뚝 솟았네 / 林端出麗譙
관기의 웃음은 와수(渦水)처럼 둥글고 / 渦圓官妓笑
현리(縣吏)의 허리는 경쇠처럼 꺾이었네 / 磬折縣胥腰
출렁대는 물은 차갑게 언덕을 흔들고 / 激水寒搖岸
늘어진 버들은 푸른 그늘 다리에 비치네 / 垂楊綠映橋
주민은 모두 토착한 사람들 / 居民皆地着
뱁새도 유유자적하게 노니누나 / 斥鷃亦逍遙
[주D-001]와수(渦水) : 웅덩이에 소용돌이 모양으로 빙빙 도는 물.
[주D-002]경쇠처럼 꺾이었네 : 경쇠는 악기(樂器) 이름인데 굽게 생겼으므로 경쇠 모양처럼 허리
를 굽히는 것을 말한다.
○용궁현 원이 맞아 잔치하므로 한 수(首)를 구점(口占)하다
하양에 가득한 복숭아꽃 오얏꽃을 구경하며 / 喜看桃李滿河陽
현가를 들어보니 뜻밖에 호성에 이르렀다 / 不意絃歌至虎城
섬섬옥수야 비파 타기를 사양하지 말라 / 纖玉莫詞彈錦瑟
병중에도 풍정은 줄어들지 않았단다 / 病中猶未減風情
[주D-001]하양(河陽)에……구경하며 : 하양은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의 서쪽에 있는 고을.
진(晉)의 반악(潘岳)은 일찍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곳곳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를
심었으므로 뒤에 전하여 미담(美談)이 되었다.
[주D-002]현가(絃歌)를……이르렀다 : 현가는 거문고나 비파 등으로 시나 노래를 읊는 것이며
호성(虎城)은 무성(武城)으로 고려 혜종(惠宗)의 이름을 휘(諱)한 것임.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의 원이 되었었는데 공자가 그 고을에 가자, 곳곳에서 현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자는 자유가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린다 하여 매우
기뻐한 일이 있었다.《論語 先進》
○십구일에 장안사(長安寺)에 묵으면서 짓다
산에 이르니 진금을 씻을 수가 있구나 / 到山聊得滌塵襟
하물며 고명한 중 지도림을 만났음에랴 / 況遇高僧支道林
긴 칼 차고 멀리 떠도니 외로운 나그네 생각이요 / 長劍遠遊孤客思
한잔 술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 一杯相笑故人心
맑게 갠 집 북쪽에는 시내에 구름이 흩어지고 / 天晴舍北溪雲散
달이 지는 성 서쪽에는 대나무에 안개가 깊구려 / 月落城西竹霧深
병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잠만 즐기며 / 病度流年空嗜睡
옛 동산의 소나무와 국화를 꿈속에서 찾네 / 古園松菊夢中尋
[주D-001]지도림(支道林) : 진(晉)의 고승 지둔(支遁)으로 자는 도림(道林), 지형산(支硎山)에
은둔하여 수도했으며 세상에서는 지공(支公), 또는 임공(林公)이라 하였다.
○이십일일에 하풍강(河豐江)에 배를 띄우다
푸른 호수에 목란 배를 가볍게 노질하니 / 碧湖輕棹木蘭舟
눈에 가득한 연기 물결이 모두가 시름일세 / 滿月煙濤摠是愁
금년에는 점점 작년 모양이 아니라 / 今歲漸非前歲貌
타향에서 도리어 고향에서 놀던 것을 생각하네 / 異鄕還憶故鄕遊
용추에 날이 저무니 구름이 모이고 / 龍湫日暮腥雲合
난령에 가을이 차지니 장기가 걷히누나 / 鸞嶺秋寒瘴氣收
길이 끊어져서 방호에 갈 계책이 없으니 / 路斷方壺無計往
옥지가 창주에 늙는 것을 어찌할 수 없구려 / 玉芝無奈老滄洲
[주D-001]방호(方壺) : 신선이 산다는 섬으로 일명은 방장(方丈).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오도(五島)의 하나로 첫째는 대여(岱輿), 둘째는 원교(員嶠), 셋째는 방호, 넷째는
영주(瀛洲), 다섯째는 봉래(蓬萊)라 한다. 《列子 湯問》
[주D-002]옥지(玉芝)가……없구려 : 옥지는 신선이 먹는다는 신초(神草)이며, 창주(滄洲)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섬. 곧 신선이 오지 않아 옥지가 그대로 늙고 만다는 뜻이다.
○이날 길을 잘못 들어 밤에 협촌(脇村)에 이르러 자다
골짜기에 들어오니 주린 범이 두렵고 / 入谷畏飢虎
숲속을 뚫고 가니 자는 까마귀가 놀라누나 / 穿林驚宿鵶
서너 집 있는 산촌에서 자니 / 三家村裏宿
굳이 뉘 집이냐고 물을 것 있으랴 / 何必問誰家
○상주(尙州)에 들어와 동방사(東方寺)에 묵는데, 박군 문로(朴君文老)와 최 수재(崔秀才)와
김 수재가 기생과 술을 준비해 찾아왔기에 한 수를 구점(口占)하다
술 들고 푸른 산 찾은 그대 고맙소 / 感君携酒訪靑山
눈으로 보는 사이 무한한 감회가 복받치는구료 / 無限襟懷目擊間
아직도 미친 마음 예전 버릇 그대로 남아 있어 / 尙有狂心餘舊習
자주 눈을 들어 미인을 주시하네 / 屢擡雙眼注紅顔
○박군과 최군이 화답하기에 다시 차운하여 답하다
마치 가을 산처럼 벌건 민둥머리가 부끄러워 / 羞看禿髮似秋山
병후의 여생이 꿈꾸는 사이로세 / 病後餘生夢寐間
한 해를 삼분하면 이분은 누웠으니 / 一歲三分二分臥
가련하다 차츰 늙어가는 것이 / 可憐從此換朱顔
○구월 이일 서기(書記)가 공사(公舍)에 자리를 베풀고 맞이하였는데 취하여 한 수를 주다
서진에서 화려한 잔치 화당에 베푸니 / 犀鎭紅筵闢畫堂
아름다운 귀인들 많이도 모였네 / 綺羅交鬪玉簪光
광대는 신이 나서 많은 웃음 이바지하고 / 優人得意多供笑
기생은 뜻 맞추느라 화장 자주 고치네 / 官妓承歡屢整粧
석죽 치마 펄럭이니 버선목 살며시 드러나고 / 石竹裙飜微露襪
앵두빛 귀여운 입술 가냘프게 피리 불어 / 櫻桃口小細調簧
자운이 자리에 있으니 누가 먼저 묻느뇨 / 紫雲在席誰先問
홀연히 생각한다 분사어사가 미친 것을 / 忽憶分司御史狂
[주D-001]서진(犀鎭)에서……화당(畫堂) : 서는 무소의 가죽으로 견고하다. 따라서 크고 견고한
진영(鎭營)을 가리킨다. 화당(畫堂)은 단청한 큰 집.
[주D-002]석죽(石竹) 치마 : 석죽은 패랭이꽃으로, 곧 이 꽃의 무늬가 놓인 치마를 말한다.
[주D-003]자운(紫雲)이……미친 것을 : 자운은 이원(李愿)의 집 기생이며, 분사어사(分司御史)는
두목(杜牧)을 가리킨다. 이원의 연회석에 명사(名士)로 초대되어 “자운이란 명기가
있단 말 들었는데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이원이 가르쳐주자, 그는 한참 동안 응시
하고는 “과연 아름다우니 나에게 빌려달라.” 하였다. 《唐詩 紀事 杜牧》
○두 아이를 생각하다 2수
나에게 어린 딸 하나 있는데 / 我有一弱女
벌써 아빠 엄마 부를 줄 안다네 / 已識呼爺孃
내 무릎에서 옷을 끌며 애교부리고 / 牽衣戲我膝
거울을 대하면 엄마 화장을 흉내낸다 / 得鏡學母粧
이별한 지 이제 몇 달인가 / 別來今幾月
홀연히 내 곁에 있는 것 같구나 / 忽若在我傍
나는 본래 방랑하는 선비로서 / 我本放浪士
외로이 타향에 붙여 있다 / 落魄寓他鄕
수십 일을 술에 취하기도 하고 / 沈醉數十日
한 달이 넘도록 병으로 눕기도 했다네 / 病臥三旬强
머리를 돌려 대궐을 바라보니 / 廻首望京闕
산천이 푸르러 아득하구나 / 山川鬱蒼茫
오늘 아침 홀연히 너를 생각하니 / 今朝忽憶汝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누나 / 流淚濕我裳
마부야 빨리 말을 먹여라 / 僕夫速秣馬
돌아갈 마음 날로 더욱 바빠지는구나 / 歸意日轉忙
내게 사랑하는 아들 하나 있으니 / 我有一愛子
그 이름은 삼백이란다 / 其名曰三百
내가 오 낭중(吳郞中)의 삼백운(三百韻) 시를 화답하였는데, 이날 이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삼았다.(予和吳郞中三百韻詩。是日兒生。因以爲名。)
장차 이씨(李氏)의 가문을 일으킬 것이고 / 將興指李宗
태어나던 저녁엔 강을 놀라게 했네 / 來入驚姜夕
네가 태어나자 골격과 이마가 기이하고 / 爾生骨角奇
눈이 번쩍번쩍 빛나고 얼굴도 희었었다 / 眼爛面復晳
고명한 세 학사가 / 磊落三學士
너의 탕병의 손님이 되었다 / 作爾湯餠客
아이를 낳은 지 칠일에 낭중(郞中) 오세문(吳世文)ㆍ원외(員外) 정문갑(鄭文甲)ㆍ동각(東閣)
유서정(兪瑞廷)이 와서 방문하고 시를 지어 서로 하례하였다.(兒生七日。吳郞中世文,鄭員外文甲,
兪東閣瑞廷來訪。作詩相賀。)
시를 지어 농장을 축하하니 / 綴詩賀弄璋
사와 운이 금석같이 쟁쟁하였다 / 詞韻鏘金石
바라노니 네가 그 사람들 닮아서 / 願汝類其人
재명이 원백을 초월하기를 / 才名轥元白
내 평소 얼굴 펼 날이 적었는데 / 我生少展眉
너를 얻고 나서는 언제나 웃고 희롱한단다 / 得汝長笑謔
가끔 남을 대해 자랑도 하여 / 往往向人誇
비로소 아이 칭찬하는 버릇이 생겼다 / 始得譽兒癖
중하인 오월에 / 仲夏五月天
처음으로 장안에서 이별하였지 / 初別長安陌
세월만 보내며 만 리의 객이 되어 / 遷延客萬里
홀연히 붉게 물든 단풍잎을 보았네 / 忽見霜葉赤
시절은 날로 바뀌는데 / 時節日遷代
내 병은 날로 깊어만 가누나 / 我病日云劇
서뢰를 어루만질 길이 없으니 / 無由撫犀顱
슬퍼서 가슴이 아프다 / 惻惻傷胸膈
[주D-001]오 낭중(吳郞中)의 삼백운(三百韻) 시 : 본집 고율시(古律詩) 권5에 ‘차운오동각세문
정고원제학사 삼백운 시(次韻吳東閣世文呈誥院諸學士三百韻詩)’라 보인다.
[주D-002]장차……것이고 : 이씨(李氏)임을 말한 것이다. 옛날 노자(老子)는 성이 이씨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임신한 지 81년 만에 거닐면서 오얏나무 아래에 이르자 왼쪽 겨드랑을
뚫고 나와서 오얏나무를 가리켰기 때문에 이씨로 성을 삼았다 한다.
《史記 老子列傳 注》
[주D-003]태어나던……놀라게 했네 : 태아(胎兒)가 출생할 때 이상 출산으로 인하여 산모가 몹시
고통을 받은 것을 말한다. 강(姜)은 정 장공(鄭莊公)의 어머니 무강(武姜)을 말한다.
무강이 장공을 낳을 때 출산이 어려워 놀랐기 때문에 한 말이다. 《春秋左傳 隱公 元年》
[주D-004]탕병(湯餠)의 손님 : 탕병은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말하는데, 아기가 출생한 지 3일째
되는 날 친척과 친지들이 모여 국수를 먹으며 축하하기 때문에 이름으로 세삼(洗三)이라
고도 한다.
[주D-005]농장(弄璋) : 생남(生男)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남자를
낳으면 구슬[璋]을, 여자를 낳으면 기왓장[瓦]을 가지고 놀게 한다.” 한 말이 있으므로
아들을 농장(弄璋), 딸을 농와(弄瓦)라 한다.
[주D-006]원백(元白) : 당(唐)의 문장가였던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
[주D-007]서뢰(犀顱) : 이마뼈가 서골(犀骨)로 된 것을 말하는데, 귀인의 상(相)이라 한다.
○십오일에 여사(旅舍)에서 회포를 쓰다
강성에서 날마다 술만 마시고 / 江城連日飮
황려(黃驪)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指言黃驪。)
만국에서 반년을 머물렀네 / 蠻國半年留
이불이 얇으니 고향 꿈이 드물고 / 衾薄疏鄕夢
옷이 점점 헐렁해지니 나그네 시름 때문이네 / 衣寬洩旅愁
서릿발은 차가운 달과 빛을 다투고 / 霜華寒鬪月
쌀쌀한 산색은 가을이 깊어가네 / 山色冷磨秋
임공 원에게 알리노니 / 爲報臨卭令
사마상여가 오랫동안 벼슬하기를 싫어했다오 / 相如久倦遊
[주D-001]만국(蠻國) : 여기서는 경상도 상주(尙州)를 가리킨다. 위의 6월 11일 황려를 출발하여
상주로 간다는 시에 “재잘거리는 말소리 자못 남만의 억양일레.[嘍囉頗帶南蠻語]” 한
말이 있다.
[주D-002]이불이……드물고 : 이불이 얇아 추워서 잠을 잘 자지 못하므로, 고향꿈도 따라 꾸지
못한다는 뜻이다.
[주D-003]임공(臨邛) 원 : 임공 영(令)으로 있던 왕길(王吉)을 가리킨다.
○남창에 깊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 장안에 이르렀다가 깨어 기록하다
남창에 한나절 틈을 타서 졸다가 / 南窓半日偸睡
꿈에 낙양 성시에 이르렀네 / 夢到洛陽城市
깨어보니 그대로 한 침상에 누워 있는데 / 覺來猶臥一床
벌써 수많은 산과 물을 지냈구려 / 已度千山萬水
[주D-001]낙양 성시(洛陽城市) : 중국의 낙양과 장안(長安)은 오랫동안 수도(首都)가 되었으므로
여기서는 개성(開城)을 가리킨 것이다.
○장안(長安)을 생각하다
만리 강산에 병든 이내 몸 / 萬里江山一病身
동화문의 향기로운 티끌을 꿈속에 밟았네 / 東華夢踏軟香塵
장안이 하늘에 오르기처럼 가기 어려운 곳은 아닌데 / 長安不是天難到
장포에 병들어 눕게 하여 지체하게 하네 / 漳浦沈嬰泥殺人
[주D-001]동화문(東華門) : 서울의 동문을 동화라 하고 서문을 서화(西華)라 한다.
[주D-002]장포(漳浦) : 옛날 삼국 때 위(魏)의 유정(劉楨)은 병이 있어 늘 장포에 누워 있었
으므로 앓고 있는 시골을 가리키게 되었다.
○여사(旅舍)에서 감회가 있어 고인(古人)의 운에 차하다
적막하게 남의 집에 붙여서 / 寂寞寄人宅
오래 머물러 세월만 보내누나 / 淹延費歲華
메밀꽃은 흰 눈을 펼치고 / 麥花鋪白雪
단풍잎은 붉은 놀이 물들었네 / 楓葉染丹霞
나무가 늙으니 버섯이 주렁주렁 / 木老看垂菌
못이 차가우니 연잎이 시드누나 / 池寒吊敗荷
언제나 장안에 갈까 / 長安何日到
멀리 푸른 하늘만 바라보노라 / 目斷碧天涯
○구일에 자복사(資福寺)의 늙은 주지를 찾아 머물러 마시다
문 앞에 찾아오는 백의가 없어 / 門前不見白衣來
홀로 절을 향하여 술을 찾는다 / 獨向僧家索酒杯
머리엔 꽃가지 가득 꽂고 입엔 향기 넘치니 / 枝揷滿頭香滿口
황하로 하여금 헛되게 핀 것을 한하지 않게 하였네 / 免敎黃花恨虛開
[주D-001]문 앞에……없어 : 술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다는 뜻. 백의는 동복(僮僕)을 가리키
는데 옛날에는 천한 심부름을 맡은 자는 백의를 입었으므로 이르게 된 것이다. 진(晉)의
도잠(陶潛)이 9월 9일 술이 없어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백의 입은 사람이 오고
있었다. 이른 다음 보니 자사(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도잠은 즉시 따라 마시고 취하였다. 《續晉陽秋》
○집을 생각하다
편지는 이제야 세 번 이르렀는데 / 雁信方三到
달은 이미 다섯 번이나 기울었네 / 蟾輪已五虧
허물어진 울타리에는 이슬 젖은 국화요 / 荒籬殘露菊
차가운 나무에는 서리 맞은 배가 익었으리 / 寒樹爛霜梨
머리가 까맣게 윤빛나는 딸이 매우 그립고 / 最憶鵶頭女
이마가 헌칠한 아들놈도 생각나누나 / 還懷犀角兒
성 동쪽 외로운 집 한 채 / 城東一區宅
누가 즐겨 지붕을 이어 주리 / 誰肯葺茅茨
○구월 십삼일에 여사(旅舍)에 손을 모아 놓고 여러 선배에게 보이다
우리 이씨는 본래 신선의 자손이라 / 我李本仙枝
집이 자하동에 있다네 / 家在紫霞洞
사물과 본래 기(機)가 없어 / 與物本無機
일찍이 한음의 항아리를 안았는데 / 曾把漢陰甕
어찌하여 인간 세상에 / 胡爲人間世
뜻을 잃고 또 조급해 하는가 / 失意翻憁恫
옷을 퇴색시키는 낙양 티끌이 싫고 / 化衣厭洛塵
신을 떨치니 상성(商聲)이 나는구나 / 振履作商頌
도마뱀은 거북과 용을 조롱하고 / 蝘蜓嘲龜龍
올빼미는 난새와 봉황을 비웃는다 / 鴟鴞笑鸞鳳
어찌 차마 내 허리를 굽히어 / 何忍折我腰
둥글둥글하게 용렬한 사람을 섬기랴 / 突梯事傝䢇
길게 휘파람 불고 국문을 나서니 / 長嘯出國門
세차게 흐르는 큰 강을 무시하누나 / 大江凌洶湧
걸음은 날쌘 원숭이를 따르고 / 步趁嶺猿輕
읊조림은 산새의 지저귐을 대답한다 / 吟答山鳥哢
진실로 돌돌한 은호(殷浩)와 다르니 / 咄咄固殊殷
차라리 황황한 공자에 비기리 / 遑遑寧比孔
백리후를 고루 보았으나 / 歷干百里侯
한산하고 용렬한 사람 기억하는 이가 없네 / 無人記閑冗
어찌 기로 중의 기로를 한하랴 / 何恨歧中歧
또한 꿈속의 꿈이로다 / 亦是夢裏夢
술을 얻으면 매양 부르짖어 / 得酒每呼叫
미친 말이 자주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네 / 狂言屢驚衆
조육은 진훤을 사모하고 / 糟肉慕陳暄
정병은 장송을 비웃었네 / 井甁笑張竦
고생스럽게 상주에 이르니 / 間關到尙原
두 발이 몇 번이나 부르텄던가 / 兩足幾繭尰
자리에 있는 손이 모두 시호라 / 坐客皆詩豪
재명이 심송보다 높구려 / 才名輕沈宋
향기로운 두주를 잔질하여 / 聊斟杜酒香
완적(阮籍)의 궁도(窮途)의 아픔을 씻어보세 / 爲洗阮途痛
피리와 노래는 오열하여 떠들썩하고 / 笙歌咽喧塡
좌우에는 미인이 끼었네 / 左右紅粧擁
옥 거울에는 열 눈썹이 열렸고 / 玉鏡十眉開
금 술잔은 천 손가락으로 받드누나 / 金盃千指奉
내가 취하여 옥 거문고를 타서 / 我醉拂玉琴
쾌히 두어 소리를 짓노라 / 快作數四聲
이 놀이가 참으로 즐거운 것이라 / 此遊眞可樂
뜻을 얻어 스스로 방종하였네 / 得意聊自縱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내 고장은 아니다 / 信美非吾土
고삐를 날리며 돌아갈 시기가 임박하였네 / 歸期迫飛鞚
장부는 뜻에 맞게 하는 것이 귀하거니 / 丈夫貴適志
가고 머무는 것을 어찌 모름지기 개의하랴 / 去駐何須栙
[주D-001]자하동(紫霞洞) : 원래 중국의 장산(長山) 양모동(楊謨洞)에 있는 골짜기로 신선이 살고
있다 하는데, 이규보가 살고 있는 곳과 이름이 같았으므로 한 말이다.
[주D-002]사물과……안았는데 : 기(機)는 기사(機事)와 기심(機心)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자공(子貢)이 남쪽으로 초(楚) 나라에 놀다가 한음(漢陰)
이란 땅을 지날 적에 한 장인(丈人)이 계단을 만들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에 물을 길어
다가 밭에 주고 있었다. 자공은 노력은 많으나 효과가 적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길고
(桔槹)라는 물푸는 기계를 사용하라고 하였더니 그는 성을 내면서 “나는 스승에게
들으니 ‘기계를 사용하는 자는 반드시 기사가 있고 기사가 있는 자는 반드시 기심이
있게 마련인데, 기심이 있으면 순백(純白)한 마음이 갖추어지지 않고 정신이 정해지지
않아 도(道)가 실리지 않는다.’ 하였다. 나는 기계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용함을 부끄럽게 여겨 하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주D-003]신을……나는구나 : 시골로 들어가 글을 명랑하게 읽는 것을 말한다. 상성(商聲)은 오음
(五音)의 하나로 금석성(金石聲)을 가리킨다. 옛날 공자의 제자였던 증자(曾子)는 시골에
있으면서 며칠 동안 끼니를 굶었는데도 글 읽는 소리가 쩌렁쩌렁하였다 한다.
[주D-004]진실로……다르니 : 돌돌(咄咄)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소리. 진(晉)의 도독(都督)
이었던 은호(殷浩)는 환온(桓溫)에게 미움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자 종일토록 공중에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를 썼다 한다. 《晉書 殷浩傳》
[주D-005]차라리…… 비기리 : 황황(遑遑)은 마음이 몹시 급하여 허둥대는 모양. 《후한서(後漢書)
소경전(蘇竟傳)에 “중니(仲尼)는 황황하였고 묵자(墨子)도 황황하였으니 매우 사람을
걱정해서이다.”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국가나 백성을 위하여 몹시 노력한 공자를 닮겠
다는 뜻이다.
[주D-006]백리후(百里侯) : 백리는 공후(公侯)의 나라로서 곧 한 고을의 원을 가리킨다.
[주D-007]조육(糟肉)은……사모하고 : 절제없이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진훤(陳暄)은 진 후주(陳後主) 때 사람으로 아주 술을 좋아하여 절제없이 많이 마셨는데
한번은 그의 조카가 진훤의 친구를 통해 그의 무절제한 음주를 풍간하자 진훤이 자기
조카에게 “너는 간섭하지 말라. 나는 술이나 먹으면서 늙으리라.”고까지 하였다.
조육은 즉 술과 고기라는 뜻이다. 《南史 卷61 陳暄傳》
[주D-008]정병(井甁)은…… 비웃었네 : 아주 신중하고 법도 있는 선비를 비웃는다는 뜻이다.
정병은 우물가에 매달린 두레박이란 뜻으로 즉 법도 있는 선비를 상징한 말이다.
양웅(揚雄)이 주잠(酒箴)을 지어 주객(酒客)이 법도 있는 선비를 힐난하는 내용으로
물건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자네는 마치 두레박[甁]과 같다. 우물[井] 꼭대기에 걸려
있어 항상 위태롭고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들어오지 않으며 외로이 새끼줄에만 매달려
있으니, 술부대[鴟夷]만 못하다. 술부대는 하루종일 술이 담겨 있고 항상 공가(公家)의
쓰임을 받으니 이렇게 따지면 술이 뭐가 나쁜가.”고 한 데서 온 말인데, 한(漢) 나라
때 장송(張竦)과 진준(陳遵) 두 사람은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으나 장송은 아주 근신
하며 법도가 있는 선비였고, 진준은 이와 반대로 아주 술을 좋아하여 매일같이 빈객들
을 모아 놓고 주연을 베풀며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으므로, 진준이
양웅의 주잠을 보고 스스로 우물의 두레박과 술부대를 들어 친구인 장송과 자신에게
비유한 고사이다. 《漢書 卷92 陳遵傳》
[주D-009]재명(才名)이……높구려 : 심송(沈宋)은 당(唐) 나라 때 유명한 시인(詩人)인 심전기
(沈佺期)ㆍ송지문(宋之問)의 병칭으로, 즉 시재(詩才)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뜻이다.
심전기ㆍ송지문의 시체(詩體)를 심송체(沈宋體)라고 한다.
[주D-010]향기로운……씻어보세 : 술이나 마시면서 빈곤의 슬픔을 잊는다는 뜻이다. 두주(杜酒)는
집에서 빚은 박주(薄酒)라는 뜻이고, 궁도(窮途)의 아픔이란 진(晉) 나라 죽림칠현
(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완적(阮籍)이 놀러 나갔다가 수레가 통과하지 못하는 곳에
이르러 통곡하고 돌아온 고사(故事)에서 온 말인데, 즉 빈곤의 슬픔을 말한 것이다.
《晉書 阮籍傳》
○관기가 타는 비파 소리를 듣다
분포의 배 가운데서 듣는 것보다 처절하고 / 切於湓浦船中聽
오손이 말 위에서 타는 것보다 슬프구나 / 哀却烏孫馬上彈
이제야 줄 가운데 혀가 있는 것을 알겠다 / 始信絃中眞有舌
소리마다 이별하기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것 같구나 / 聲聲似訴別離難
[주D-001]분포(湓浦)의……처절하고 : 몹시 애처로움을 말한다. 백거이의 비파행(琵琶行) 서에
“원화(元和) 10년에 내가 구강군 사마(九江郡司馬)로 좌천되어, 다음 해에 분포구
(湓浦口)에서 손을 전송하는데, 배에서 밤에 비파 타는 소리가 나기에 한참 듣다가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는 본디 장안(長安)의 창녀로 일찍이 비파를 배웠고
젊은 시절에는 홍등가(紅燈街)에서 호화롭게 지내다가 늙어지자 어쩔 수 없이 장사꾼
아내가 되었는데, 이제 이 남편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이렇게 강호(江湖)를 떠돌아다
닙니다.’ 하기에 느낌이 있어 비파행을 지어서 주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오손(烏孫)이……슬프구나 : 몹시 슬픈 것을 표현한 말이다. 오손은 한(漢) 나라 강도왕
건(江都王建)의 딸인 오손 공주(烏孫公主)를 말하는데, 무제(武帝) 때에 그를 서역
(西域)인 오손국(烏孫國)에 시집보내자, 그가 고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 가게 된 슬픔
을 달래기 위해 음악에 밝은 사람을 시켜 비파를 만들어 타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무척 애원성(哀怨聲)이 많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石崇 王明君辭》 오손 공주란
오손국에 시집을 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두 번째 봉두사(鳳頭寺)에서 놀다
한 번 양주의 청루몽을 깨고 / 揚州一覺靑樓夢
거듭 여악의 백련사(白蓮社)를 찾았네 / 廬嶽重尋白社栖
화류를 놓아버릴 적에 붓도 던져버렸다 / 花柳放時兼放筆
산승은 어찌 머물러 쓰기를 바라는가 / 山僧何苦乞留題
[주D-001]한 번……깨고 : 높은 관직에 앉아 호화롭던 지난 시절을 깨끗이 잊는다는 뜻이다.
양주의 청루몽(靑樓夢)은 즉 양주몽(揚州夢)과 같은 말인데, 양주몽이란 중국의 가장
번화한 양주(揚州)에서 호화롭게 놀던 옛 추억이라는 뜻이다. 두목(杜牧)의 시에
“십 년 만에 양주몽을 한 번 깬다.[十年一覺揚州蒙]” 하였다.
[주D-002]거듭……찾았네 : 심신을 수양하기 위하여 절을 찾았다는 뜻이다. 백련사(白蓮社)는
동진(東晉) 때 고승(高僧)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자신의 명망을 듣고 찾아 온 여러 승도(僧徒) 및 명유(名儒)들과 함께 미륵불상(彌勒
佛像) 앞에서 맹세하고 수도하기 위해 설치한 결사(結社)인데, 이 결사로 말미암아
불교가 가장 융성하여졌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여악(廬嶽)은 여산과 같다.
○구월 십오일에 상주(尙州)를 출발하다
듬성한 별은 빤짝빤짝 하는데 / 耿耿殘星在
새벽에 까막 까치를 따라 일어났네 / 曉隨烏鵲興
나그네 창자는 박주로 씻고 / 旅腸消薄酒
병든 눈은 찬 등불에 침침하다 / 病眼眩寒燈
행리는 촌 늙은이와 같고 / 行李如村老
괴나리봇짐은 야승과 같도다 / 囊裝似野僧
전리로 돌아가는 계획은 이루지 못하고 / 歸田計未遂
대궐을 생각하는 뜻은 이기기 어렵구나 / 戀闕意難勝
세상을 피하는 데는 고봉에게 부끄럽고 / 避世慙高鳳
기미를 아는 것은 계응에게 사례하노라 / 知幾謝季鷹
이슬이 많이 내리니 건의 뿔이 쭈그러지고 / 露深巾塾角
바람이 세차니 소매에서 모서리가 생기누나 / 風勁袖生稜
돌 사다리에는 서리가 오히려 깊고 / 石棧霜猶重
구름 낀 산에는 해가 오르지 않았구나 / 雲崖日未昇
어버이를 하직하는 두 줄기 눈물 / 辭親兩行淚
날이 다 새도록 가슴에 젖어 있네 / 到曙尙霑膺
[주D-001]세상을……부끄럽고 : 고봉(高鳳)처럼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여 명유
(名儒)가 되지 못한 것을 탄식한 말이다. 고봉은 후한(後漢) 때의 명유로서 항시 공부
에만 열중하였으므로, 일찍이 자기 마당에 널어 놓은 보리가 큰비에 떠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공부만 했었다. 그 뒤에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後漢書 卷73 逸民列傳 高鳳》
[주D-002]기미를……사례하노라 : 계응(季鷹)이 기미를 알아서 선뜻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간
것을 추앙하는 말이다. 계응은 진(晉) 나라 오군(吳郡) 사람 장한(張翰)의 자이다.
그가 일찍이 대사마 동조연(大司馬東曹掾)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세상이 혼란하여 화란
이 곧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자기 고향 오군의 순채와 농어회 등을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인생이란 뜻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내 어찌 고향 떠나 수천 리 밖에 와서
부질없이 명예와 작위를 구하겠는가.” 하고는 수레를 재촉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이날 서기(書記)가 신흥사(新興寺)에 나와 전송하자 최백환(崔伯桓)이 첫머리에 쓴 운을 차하다
강남의 쓸쓸한 갈대꽃 가을 / 江南蕭洒荻花秋
멀리 노는 사람 전송하는 낭관에 감사하오 / 多謝郞官餓遠遊
섬섬옥수는 쟁 한 곡조를 타지 말라 / 纖玉莫彈箏一曲
줄마다 온갖 근심을 띠었도다 / 絃絃揔帶萬船愁
○서기가 명기(名妓) 제일홍(第一紅)을 시켜 서찰을 보내어 시를 빌기에 주필(走筆)로 써 주다
구름으로 쌍환을 만들고 달로 눈썹을 만들었구나 / 雲作雙鬟月作眉
어느 때나 돌아와서 다시 서로 만나볼까 / 刀頭相見更何時
십 년이 지나도 호주 원이 되지 못하였으니 / 十年不作湖州守
다정한 두목지가 길이 가소롭네 / 長笑多情杜牧之
남자의 마음이 여자처럼 약하여 / 男兒心作女兒心
이별에 임하니 은근하여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 臨別殷勤淚洒襟
나그네 낭탁이 비어 장물이 없으니 / 旅橐空來無長物
이 시 한 수가 천금을 당하리라 / 投詩一首當千金
[주D-001]십 년이……가소롭네 : 당(唐) 나라 두목지(杜牧之 두목(杜牧))가 약속이 늦어 미녀를
남에게 빼앗긴 것을 조롱한 말이다. 두목이 호주(湖州)에서 노닐 적에 그곳 자사(刺史)
와는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그의 주선에 의해 여러 미녀들을 두루 보았는데, 그 중에
10여 세 되는 절세미녀를 만났다. 그러자 두목은 ‘내가 지금은 데려갈 수 없고 뒤로
미뤄야겠는데, 10년 뒤에 내가 와서 데려갈 터이니 그때 만일 내가 오지 않으면 다른
데로 시집을 가도 좋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왔는데, 14년 만에 가 보니 그녀는
이미 삼년 전에 출가하여 아이를 낳고 살더라는 고사이다. 《張君房 麗情集》
○이날 해가 저물자 박군 문로(朴君文老)가 나를 맞아 한곡 별업(漢谷別業)에 가서 잤는데 밤에
술자리를 베풀고 짓다
단풍 길에 고삐를 나란히 하여 / 並轡丹楓路
미인을 조랑말에 실었네 / 靑蛾細馬駄
이때에 두 기생이 따랐다.(時二妓從之。)
안장을 내리니 마구의 말이 들레고 / 卸鞍喧櫪馬
횃불을 드니 숲 까마귀가 떨어지네 / 擡炬落林鵶
손을 사랑하여 비녀장 던지기를 기약하고 / 愛客期投轄
신선 놀이를 하다가 도끼 자루가 썩어 버렸네 / 遊仙到爛柯
나그네 정이 느끼고 붙이는 것이 많아 / 旅情多感寓
무릎을 치며 스스로 미친 듯이 노래하네 / 擊節自狂歌
[주D-001]손을……기약하고 : 집에 온 손을 가지 못하게 만류한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 때 진준
(陳遵)이 매우 빈객(賓客)을 좋아하여 항상 빈객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였는데,
빈객이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빈객이 타고 온 수레의 비녀장을 빼서 우물에 던졌
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92 游俠列傳》
[주D-002]신선……썩어 버렸네 : 바둑 두는 놀이에 열중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왕질(王質)이라는 나무꾼이 신안(信安)의 석실산(石室山)에서 바둑 두는 두
동자(童子)를 만나 이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 도끼자루가 썩어버렸고, 마을에 돌아가
보니 아는 사람은 죽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述異記》
○다음날 박군이 남긴 벽 위의 시를 보고 그 운에 차하다
집은 푸른 산 짧은 기슭에 의지하고 / 家依靑山短麓隅
갑 속에는 거문고와 칼을 넣어 두고 탁자에는 서적을 간직하였네 / 匣藏琴釰庋藏書
근래에 공경의 묻는 것에 대답하기 싫어하여 / 邇來懶答公卿問
오히려 화양에서 은거라고 칭탁한 것을 가소롭게 여기네 / 猶笑華陽押隱居
[주D-001]공경(公卿)의……여기네 : 산중에 은거하면서도 매양 국사를 자문받았던 양(梁) 나라
때의 도홍경(陶弘景)을 힐난하는 말이다. 도홍경은 은사(隱士)로서 자호가 화양은거
(華陽隱居)이며, 일찍이 제 고제(齊高帝) 때에 제왕시독(諸王侍讀)을 지냈고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다. 그는 특히 음양(陰陽)ㆍ오행(五行)ㆍ선술(仙術)ㆍ의술
(醫術) 등에 뛰어났는데, 양 무제(梁武帝) 때에는 모든 국가의 대사(大事)를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으므로 당시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南史 卷76 隱逸下》
○십팔일 마상(馬上)에서 지어 동행하는 도사(道士) 김지명(金之命)에게 보이다
고삐를 늦추고 느릿느릿 역정을 가리키니 / 緩轡悠悠指驛程
귓가에는 오히려 관현 소리가 들리네 / 耳邊猶帶管絃聲
차마 붉은 소매 미인(美人)을 가게 하고 / 忍敎紅袖佳人去
기생이 따르고자 하기에 굳이 금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妓欲從之。固禁。故云。)
홀로 황관도사와 짝지어 가네 / 獨伴黃冠道士行
안개 너머 먼 산은 시름에 젖은 눈썹같이 단정하고 / 煙外遠山愁黛歛
바람 앞의 늘어진 버들은 춤추는 허리가 가볍구료 / 風前垂柳舞腰輕
안장을 연하여 심중의 일을 얘기하려 하는데 / 聯鞍欲話心中事
말 위에서 무단히 졸음이 오려 하네 / 馬上無端夢易成
○저물게 유곡역(幽谷驛)에 들어가 김군과 술을 마시고 시를 주다
전생에 일찍이 좋은 인연 맺어 / 多生曾結好因緣
천 리 밖에 함께 논 지 반년이 지났네 / 千里同遊僅半年
문 밖의 푸른 솔은 여윈 나의 모습 같고 / 門外靑松如我瘦
뜰 앞의 푸른 대는 어진 그대와 같구료 / 階前綠竹似君賢
쓸쓸한 군사에 가을 내내 누웠고 / 蕭條郡舍三秋臥
적막한 우정에 하룻밤을 졸았네 / 寂寞郵亭一夜眠
다행히 집에 돌아갈 남은 힘이 있기에 / 幸有還家餘喘在
돌아갈 길이 먼 것을 근심하지 않노라 / 不愁歸路亘綿綿
○다음날 또 짓다
한곡에서 가인(佳人)을 이별하고 / 漢谷別佳人
유곡에서 좋은 친구를 이별하였네 / 幽谷別良友
떠남에 임하여 다시 안장을 풀고 / 臨行復解鞍
서로 대하여 오랫동안 말을 잊었네 / 相對忘言久
이별의 슬픔을 억지로 참으려고 / 强欲寬離愁
이 한 잔 술을 잔질하노라 / 酌次一盃酒
술은 박하고 근심은 더욱 깊어져서 / 酒薄愁轉深
옷깃과 소매에 맑은 눈물 떨어지네 / 淸淚滴襟袖
남에게 주기론 말처럼 좋은 것이 없는데 / 贈人莫如言
내 말을 그대는 듣고 있는지 / 我言君聽否
부귀는 뜬구름과 같고 / 富貴如浮雲
세상은 내 소유가 아니라네 / 身世非我有
그대 다행히 몸을 온전히 하여 / 子幸全其身
삼가 명예의 제물이 되지 말게나 / 愼勿爲名累
내 이제 서울로 향하는 것은 / 我今向玉京
공경(公卿)을 바라서가 아니니 / 非爲靑紫取
혼가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 待當婚嫁畢
다시 이 밭두둑을 갈리라 / 復此耕一畝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으리니 / 相見必有時
어찌하여 이별을 슬퍼하랴 / 胡爲恨分手
○노상에서 또 읊다
만 리 먼 길에 홀로 가는 몸 / 萬里長途獨去身
말 머리에서 자주 마시니 누구를 위한 것인가 / 馬頭頻啑爲何人
아침에 쇠하고 저물게 떨어지는 흐트러진 두 귀밑머리요 / 朝衰暮落雙蓬鬢
남으로 갔다가 동으로 돌아오는 한 갈건이로세 / 南去東還一葛巾
고을을 둘러싼 푸른 산은 성처럼 비껴 있고 / 繞縣靑山橫似郭
두둑에 가득한 누른 벼는 창고같이 쌓였도다 / 滿畦黃稻積如囷
가는 사람 노래하며 웃고 있는 사람 즐거워하니 / 行人歌笑居人樂
이것이 태평세대 몇 년째던가 / 此是昇平第幾春
○요성역(聊城驛)에서 쉬다가 벽 위에 있는 시의 운을 차하다
하룻밤은 유곡에서 술에 취해 자고 / 幽谷一霄中酒宿
한나절은 요성에서 안장 풀고 머물렀네 / 聊城半日解驂留
돌아오는 완적은 부질없이 길게 휘파람 불고 / 歸來阮籍空長嘯
적막한 사마상여는 짐짓 놀음에 게을렀네 / 寂寞相如故倦遊
보내고 맞는 역리(驛吏)는 어느 날에나 쉬며 / 郵吏送迎何日息
분주한 사신은 어느 때나 쉴꼬 / 使華奔走甚時休
나는 다행히 한가하게 다니는 사람 / 唯予幸是閑行者
오는 데도 남을 괴롭히지 않고 가는 것도 자유롭다 / 來不煩人去自由
[주D-001]돌아오는……불고 :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이
일찍이 소문산(蘇門山)에서 손등(孫登)을 만나 신기(神氣)를 수양하는 방법 등을 물었
으나 손등이 모두 응답하지 않자 완적이 길게 휘파람을 불며 물러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49 阮籍傳》
[주D-002]적막(寂寞)한……게을렀네 : 벼슬하기가 싫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
(司馬相如傳)에 “장경(長卿 사마상여)이 노는 데 게으르다.[倦游]” 한 고사에서 온
말인데, 그 주에 “이는 벼슬하기를 싫어한 것이다.” 하였다.
○화봉원(華封院)에 쓰다
온갖 인연이 재처럼 차가운 늙은 거사 / 萬緣灰冷老居士
아직도 단심이 있어 성명을 사랑하네 / 尙有丹心愛聖明
천하의 창생이 모두 빌기를 청하니 / 天下蒼生皆請祝
어찌하여 화봉의 이름을 혼자 차지하리 / 如何獨占華封名
[주D-001]재처럼 차가운 : 불교의 용어로, 즉 아무 욕심도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화봉(華封) : 요(堯) 임금 때에 화봉(華封) 사람이 요 임금에게 ‘수(壽)ㆍ부(富)ㆍ
다남자(多男子)’의 세 가지 일로 축수했다는 화봉삼축(華封三祝)의 준말로, 곧 임금
에게 축수하는 것을 뜻한다. 《莊子 天地》
○십구일에 미륵원(彌勒院)에서 자는데 본래 모르는 중이었으나 주찬을 베풀고 위로하므로 시로
사례하다
멍에를 풀고 고원에 들어가니 / 稅駕入古院
마른 입술을 축일 길이 없구려 / 燥吻無由澆
시인의 어깨는 가을 산처럼 솟고 / 詩肩秋山聳
나그네 한은 펄럭이는 깃발처럼 흔들리네 / 旅恨風旌搖
우리 대사를 예전에 알지 못하였는데 / 吾師舊未識
기쁘게 맞이하여 주누나 / 欣然肯相邀
푸른 빛 계피주 잔질하여 향기롭고 / 桂酒酌碧香
가을 배의 붉은 빛은 깎여서 사라지네 / 霜梨剝紅消
이미 영첩의 주린 것을 치료하고 / 已療靈輒飢
다시 상여의 소갈증을 위로하였네 / 復慰相如痟
그대는 지금 사람들의 사귀는 것을 보라 / 君看今人交
나부끼는 가을 구름과 같다네 / 有似秋雲飄
어제는 한마음으로 찰떡같이 맹세하고 / 膠漆誓昨日
오늘은 서로 원수처럼 본다네 / 胡越視今朝
장하다 대사는 예전 풍도가 있어 / 多師有古風
이름이 원공과 함께 드러나리 / 名與遠公超
본래 아는 사이 아닌 선비를 만났더라도 / 遇士雖非素
뜻이 합하면 멀게 여기지 않네 / 意合不謂遼
나를 보고는 예전 친구와 같이 여겨 / 見我如舊執
은근하게 무료함을 묻는구나 / 殷勤訊無憀
이 뜻을 어떻게 갚으랴 / 此意何以報
좋은 시로 보답하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答瓊瑤
[주D-001]영첩(靈輒)의……위로하였네 : 배부르게 밥 먹고 취하도록 술 마셨다는 뜻이다.
영첩은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사람인데, 조 선자(趙宣子)가 수산(首山)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영첩이 배가 고파 기진맥진한 것을 보고 밥을 주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春秋左傳 宣公2年》 상여(相如)의 소갈증이란 곧 한(漢) 나라 때 문장가인 사마상여
(司馬相如)의 지병인 소갈증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이규보 자신도 소갈증이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02]원공(遠公) : 중국 동진(東晉) 때 여산(廬山)에 백련사(白蓮社)를 세우고 수도했던
혜원 법사(慧遠法師)를 말한다.
○충주(忠州)를 떠나 여주(驪州)를 향해 가면서 짓다
동남의 길을 두루 밟았으니 / 踏遍東南遊
내 고향에 가서 쉬련다 / 吾鄕欲去休
다시 송경(松徑)의 즐거움을 찾으리 / 更尋松逕樂
장기 낀 곳에 노는 것이 매우 싫어져 / 深厭瘴天遊
산마루 지나며 붉은 햇살 만지고 / 過嶺捫紅日
강을 따라 푸른 흐름을 굽어보네 / 循江瞰碧流
어젯밤엔 충원에서 잤는데 / 忠原昨夜宿
미녀가 애교를 부려도 머무르기 어려웠네 / 越女笑難留
○저물녘에 강가를 가다
길은 둘러 있고 긴 내는 멀고 / 路抱長川遠
구름은 나직하고 빈 들은 평평하다 / 雲低曠野平
하늘이 차가우니 가는 기러기 괴롭고 / 天寒征雁苦
모래톱에 물 불으니 잠자던 갈매기 놀라누나 / 沙漲宿鷗驚
도깨비 불은 숲 속에서 푸르고 / 鬼火林間碧
고기잡이 등불은 비 밖에 밝다 / 漁燈雨外明
돌아가는 배 늦도록 대이지 못하니 / 歸舟晩未泊
빠드득빠드득 노 젓는 소리 아직도 난다 / 鵶軋櫓猶鳴
○여주(驪州)에 돌아와서 이 수재(李秀才)에게 보이다
반년 동안 동에서 놀고 세말에 돌아오니 / 歲半東遊歲杪還
세월을 부질없이 길바닥에 던져버렸네 / 光陰空擲道途間
가을 서리는 오 나라 나무를 모두 물들이고 / 秋霜染盡吳中樹
저문 비는 초 나라 산에 컴컴하게 내리네 / 暮雨昏來楚外山
자루 속의 술 살 돈은 다 써버리고 / 槖底酒錢渾罄倒
상자 속의 시권은 다시 가려 산삭한다 / 篋中詩卷更追刪
고맙게도 그대 홀로 나그네 위로하여 / 多君獨唁羇離客
술을 베풀고서 두 기생을 불렀구나 / 置酒仍呼兩小鬟
○강가 마을에서 자다
강가에 방랑하여 스스로 형체를 잊고 / 江邊放浪自忘形
날마다 갈매기와 친하여 물가로 가네 / 日狎遊鷗傍渚汀
묵은 서적은 다 흩어지고 약보만 남았고 / 散盡舊書留藥譜
남은 저축을 점검해 보니 《다경》이 있네 / 檢來餘畜有茶經
흔들리는 나그네 마음 바람 앞의 기와 같고 / 搖搖旅思風前纛
떠다니는 외로운 종적 물 위의 마름이로세 / 泛泛孤蹤水上萍
장안의 예전 친구에게 부쳐 사례하노니 / 寄謝長安舊知己
객중의 두 눈이 누구를 위하여 푸르렀더뇨 / 客中雙眼爲誰靑
[주D-001]《다경(茶經)》 : 서명(書名). 당(唐) 나라 육우(陸羽)가 찬하였다. 이 책이 차(茶)에
대한 일을 기록한 서책(書冊) 중에 가장 우월하다고 한다.
○마암(馬巖)에서 빈우(賓友)를 모아놓고 크게 취하여 밤에 돌아와 본 것을 기록하여 향교(鄕校)
제군에게 주다
서울을 떠난 슬픔 창자가 자주 끊어지려 했는데 / 去國魂頻斷
고향에 돌아오니 반년이 지났구려 / 還鄕歲半徂
하늘에 닿은 물결 가이 없고 / 拍天波蒼茫
성을 두른 길 얽히었도다 / 遶郭路縈紆
현맥은 산을 의지하여 다하였고 / 縣脈依山盡
민풍은 지세 따라 다르도다 / 民風逐地殊
처음에는 호두에 노는가 하였더니 / 初疑遊鄠杜
점점 상오에 들어오는 것 같구려 / 漸訝入湘吳
어촌(漁村)에는 고기로 세를 내고 / 沙戶魚爲稅
사냥꾼은 사슴으로 조를 대신하네 / 畋師鹿爲租
물 위엔 연잎이 기울어져 서로 의지하고 / 水荷欹競倚
소나무엔 넌출이 매달려 서로 붙드누나 / 松蔓倒相扶
들 배에는 순채와 농어의 흥미요 / 野艇蓴鱸興
선인의 행장은 대와 학의 그림이로다 / 仙裝竹鶴圖
먼 마을에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 遠村聞吠犬
오래된 벽에는 주린 박쥐가 매달려 있네 / 古壁吊飢鼯
시는 우뚝하게 성벽(性癖)을 이루었고 / 兀兀詩成癖
술은 혼혼하게 어리석음을 조장하였네 / 昏昏酒泥愚
시골 국은 토란을 삶았고 / 村羹烹土卵
손의 밥상에는 나물이 풍족하구나 / 客俎厭山膚
자요채는 가늘어서 좋아하고 / 細愛子腰菜
아비고는 향기로와 좋아한다 / 香貪兒臂菰
눈처럼 도는 초무를 보았고 / 雪回看楚舞
구슬이 부서지는 듯한 파유를 들었네 / 珠碎聽巴歈
너무 많이 마시니 창자가 응당 썩으리라 / 劇飮腸應腐
미쳐서 떠들어대니 담이 더욱 거칠어지네 / 狂呼膽益麤
풍속이 순박하여 헐뜯고 칭찬하는 일 없으니 / 俗淳無毁譽
정작 파리한 선비 살기에 합당하구료 / 正合着癯儒
[주D-001]처음에는……하였더니 : 경치 좋은 곳에서 논다는 뜻이다. 호두(鄠杜)는 중국 부풍
(扶風)에 있는 호현(鄠縣)ㆍ두양현(杜陽縣)을 말한다. 《한서(漢書)》 원후전(元后傳)
에 “여름에는 어숙현(篽宿縣)ㆍ호현ㆍ두양현의 사이에서 노닌다.” 하였다.
[주D-002]점점 상오(湘吳)에……같구려 : 좋은 술을 마시게 되었다는 뜻이다. 상오는 곧 미주
(美酒)의 이름인 상오주(湘吳酒)의 약칭인데, 상천(湘川)의 영릉현(酃陵縣)에는 물이
좋아 술을 빚기로 유명하고 오흥(吳興)의 오정현(烏程縣)에는 약하주(若下酒)가 유명
하므로, 상천(湘川)의 상(湘) 자와 오흥(吳興)의 오(吳) 자를 합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謝惠連 雪賦注》
[주D-003]눈처럼……초무(楚舞) : 눈[雪]이 돌며 내리듯 기생들이 빙빙 돌면서 춤추는 것을
말한다. 초무는 옛날 초(楚) 나라에서 추던 춤을 말한다.
[주D-004]구슬이……들었네 : 파유(巴歈)는 파유가(巴歈歌)의 약칭으로 가곡(歌曲)의 이름이니,
즉 기생들의 노래 소리가 마치 구슬이 구르는 소리처럼 아름답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남만전(南蠻傳)에 “풍속이 가무(歌舞)를 좋아했는데, 고조(高祖)가
그를 관찰하고 말하기를 ‘이는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하던 노래이다.’ 하고
악인(樂人)에게 명하여 익히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파유가이다.” 하였다.
○빙정사(氷靖寺)에 놀면서 주로(住老)에게 보이다
한 식경 번화한 것 빈 꿈이라 / 一餉繁華夢已空
고향에 돌아와서 고인과 어울린다 / 故鄕還與故人同
안개낀 봉우리는 화창한 눈썹처럼 푸르고 / 煙巒遠似粧眉綠
서리 맞은 잎사귀는 술취한 볼보다 더 붉구료 / 霜葉濃於醉臉紅
지난날에는 미쳐서 금곡기를 끌었더니 / 往日狂携金谷妓
오늘에야 비로소 설산동자에게 예를 하네 / 今朝始禮雪山童
도잠의 기습이 아직도 전과 같아 / 陶潛習氣猶依舊
눈썹을 찡그리고 원공을 대할까 두렵구나 / 尙恐攢眉對遠公
[주D-001]미쳐서……끌었더니 : 정신 없이 술과 기녀(妓女)에 빠졌었다는 말이다. 금곡기(金谷妓)
는 곧 진(晉) 나라 때 석숭(石崇)이 금곡원(金谷園)에서 주연(酒宴)을 하면서 데리고
놀던 애기(愛妓) 녹주(綠珠)를 말한다.
[주D-002]설산동자(雪山童子)에게……하네 : 절에 들어와서 수도한다는 뜻이다. 설산동자는 곧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설산(雪山)에서 수도할 때의 이름이다. 《열반경(涅槃經)》에
“내가 그때 설산에 가니 산이 맑고 깨끗하며, 수림과 약초가 가득하였다.” 하였다.
[주D-003]도잠(陶潛)의……두렵구나 : 절을 뛰쳐나가 버릴까 염려된다는 뜻이다. 동진(東晉) 때
고승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에 백련사(白蓮社)를 설치하고 고사(高士)인
도잠에게 백련사에 들어와 수도하기를 권유하자, 도잠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뿌리치고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원공(遠公)은 혜원법사를 말한다. 《廬山記》
○황려(黃驪)를 떠나면서 짓다
가을이 다하도록 남쪽 나라에 손노릇하고 / 窮秋客南國
오늘은 장안으로 향하는구나 / 今日向長安
도연명의 동산 국화를 보호하지 못하고 / 未護陶園菊
부질없이 초 나라 밭두둑의 난초를 엮었네 / 空約楚畹蘭
해바퀴는 읊조리는 밖에 구르고 / 日輪吟外轉
하늘 장막은 취한 가운데 너그럽네 / 天幕醉中寬
쌀쌀한 구월이니 어찌하랴 / 胡奈授衣月
홑적삼으로 진정 추위가 겁나누나 / 單衫正怯寒
[주D-001]도연명(陶淵明)의……못하고 : 도연명처럼 고상하게 벼슬에서 은퇴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때 도연명이 뜻이 고상하여, 전원(田園)에 돌아가 유유자적할 생각으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
는데, 거기에 “내 전원이 묵어가는데 왜 돌아가지 않으랴……삼경(三徑)이 다 묵었으나
송국(松菊)은 그대로 있구나.” 한 데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歸去來辭》
[주D-002]부질없이……엮었네 : 쫓겨난 굴원(屈原)처럼 떠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초 회왕(楚懷王)
때 굴원이 소인들의 참소를 당하여 쫓겨난 뒤, 임금을 생각하여 근심스런 심정을 읊은
이소경(離騷經)에 “가을 난초를 엮어 차노라[紉秋蘭以爲佩]” 한 데서 온 말이다.
《楚辭 離騷經》
○이십구일 황려를 출발하니 그 고장의 여러분이 남정(南亭)에 나와 전송할 때 이 수재(李秀才)가
시를 주기에 곧 차운하여 답하다
붉은 치마를 지적하여 이별의 술잔 권하니 / 指點紅裙勸別鍾
외로운 연기 지는 해 모두 조심스런 모습일세 / 孤煙落日揔秋容
열 손가락 섬섬옥수는 나그네를 끌지 마소 / 十條纖玉休牽手
여섯 자 떠도는 이몸 자취를 변하기 쉽다 / 六尺飄蓬易轉蹤
붉은 단풍 늦가을에 우선 잠깐 이별하고 / 紅葉九秋聊暫別
푸른 버들 춘삼월에 다시 만나기 약속하세 / 綠楊三月約重逢
맹세를 찾는 훗날에 무엇을 증거하랴 / 尋盟異日知誰證
눈 이고 있는 뜰 앞의 소나무를 기억하라 / 記取庭前戴雪松
○사평(沙平)을 건너면서 짓다
오랫동안 학발을 하직하니 눈물이 옷을 적시고 / 久違鶴髮淚沾衣
아미를 이별한 뒤부터 허리띠가 줄어들었네 / 自別蛾眉帶減圍
서울로 향하면서 가진 것 하나 없다고 웃지 마소 / 莫笑向京無一物
백 가지 근심을 배에 가득 싣고 왔네 / 滿船猶載百愁歸
○시월 이일에 강남으로부터 서울에 들어와 지은 것이 있어 여러 우생(友生)에게 보이다
집은 궁성(宮城) 남북쪽 사이에 있는데 / 家在鳳城南北傍
몸은 삼천리 밖 만령에서 놀았네 / 身遊蠻嶺三千里
반년 동안 아지랭이와 장기에 얼굴빛이 변하여 / 半年嵐瘴換顔華
얼굴 검고 귀밑 누래 남만의 자식 같구료 / 面黑鬢黃似蜒子
쇠잔한 몸이 더구나 병을 치른 뒤라서 / 何況殘軀是病餘
푸른 살가죽 터지고 쭈그러져 더욱 부끄럽네 / 蒼皮皴皺尤可恥
오직 여윈 뼈만 앙상하게 튀어나왔는데 / 唯存瘦骨高於山
시월에 홑적삼이 겨우 엉덩이만 가리누나 / 十月單衫纔掩髀
친구와 서로 만나니 알아보지 못하였고 / 親舊相逢定未知
처자도 처음 보고는 서로 피하였네 / 妻兒一見初相避
쇠미한 시골의 연화 보기 싫다 / 厭看村邑煙火微
쓸쓸한 두어 집 거북 껍질처럼 헐었네 / 數屋蕭條龜殼毁
보기 좋다 날로 아름다와지는 서울의 풍경 / 喜見京都風日佳
수많은 집 연접하여 고기 비늘처럼 가지런하네 / 萬家邐迤魚鱗比
이옹이 낙양에 들어오니 전과 다름이 없고 / 李邕入洛故依然
마경이 임공에서 놀던 것도 도리어 꿈이었네 / 馬卿遊邛還夢耳
이번 일이 우습기만 하고 자랑할 것 못 되느니 / 此行可笑不可誇
친우에게 부탁컨대 비웃고 희롱하지 말라 / 寄語交遊勿嘲戲
우리 집 새로 빚은 술 지금 용수에 가득찼으니 / 我家新釀方壓槽
다시 불러 맞아서 한 번 취하리라 / 聊復招邀容一醉
[주D-001]이옹(李邕)이……없고 : 좌천하여 지방에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서울에 돌아오게 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 나라 때 이옹은 문명(文名)이 천하에 드높았고 성품이 아주 강직
하였는데, 일찍이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너무 과격한 말로 왕을 간한 것이 화근이
되어 좌천되어 여러 지방관으로 돌아다니다가 뒤에 다시 서울에 돌아와 현달하게 되었다.
《舊唐書 卷190 李邕傳》
[주D-002]마경(馬卿)이……꿈이었네 : 지방에 돌아다니면서 아름다운 기녀(妓女)들과 놀던 것도
이젠 지난 일이라는 뜻이다. 마경은 한(漢) 나라 사마장경(司馬長卿 사마상여(司馬相如))
을 말하는데, 즉 사마장경이 임공현(臨邛縣)에 가서 미인 탁문군(卓文君)과 서로 연애
했던 고사에 비유한 말이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傳》
○제공(諸公)의 조롱에 답하다
거사가 근년에 쇠로 간을 만들었으니 / 居士年來鐵作肝
어찌 미인으로 말미암아 넋을 잃으랴 / 肯緣紅臉也消魂
옷에 가득한 것 모두 어버이 하직하는 눈물이어늘 / 滿衣渾是辭親淚
그릇 무산의 저문 비 흔적으로 짐작하누나 / 誤認巫山暮雨痕
[주D-001]쇠로……만들었으니 : 의지가 철석(鐵石)처럼 견고하여 외물(外物)에 의해 동요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철심석장(鐵心石腸).
[주D-002]무산(巫山)의 저문 비 : 남녀의 정사(情事)를 비유한 말이다. 초 양왕(楚襄王)이 일찍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자가 와서 “저는 무산의 여자로
임금님이 여기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침석(枕席)을 같이 해 주십시오.” 하므로
임금은 하룻밤을 같이 잤는데, 다음날 그 여자가 떠나면서 “저는 무산의 양지쪽 높은
언덕에 사는데, 매일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에 비가 됩니다.”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玉 高唐賦》
○시월 십구일에 누구를 방문하려다 비 때문에 가지 못하고 우연히 짓다
초겨울엔 지기가 폐장되었으니 / 孟冬地閉錮
눈이 내려야 할 때에 도리어 비가 내리누나 / 可雪乃反雨
닭은 움츠려 둥우리를 떠나지 못하고 / 鷄縮未離巢
새는 젖어서 깃을 떨치기 어렵다 / 鳥霑難振羽
나와 뜻이 맞는 사람을 생각하여 / 有懷同心人
상상하기를 경수처럼 여기노라 / 想像如瓊樹
화로는 갖옷 한 벌을 대신하여 끼고 / 地爐擁一裘
비자나무 궤에는 두 팔뚝을 괴고 있네 / 棐几閣雙肘
비록 손톱이 잠길만큼 넘치는 술잔은 없으나 / 雖無蘸甲杯
또한 수염을 비비며 시구를 읊는다네 / 亦詠撚鬚句
[주D-001]경수(瓊樹) : 옥과 같이 아름다운 나무라는 뜻으로, 고상하고 결백한 인품을 비유한
말이다.
○상주(尙州)로 가는 벗을 전송하면서 엄(嚴) 자를 얻다
장기 나라에 멀리 천주(天柱) 남쪽으로 들어가니 / 瘴國迢迢入柱南
그대 매서운 새벽 추위를 범하는 것이 가엾구나 / 憐君輕觸曉寒嚴
친구의 정이 중하니 산에 올라 전송하고 / 故人情重登山送
자모의 은혜가 깊으니 기에 올라 바라보네 / 慈母恩深陟屺瞻
어머니가 상주에 있다.(母在尙州。)
재를 넘을 때 눈은 기러기를 따라 괴롭고 / 渡嶺雪愁隨雁苦
강을 지날 때 바람은 오방(烏榜)으로 점친다 / 過江風信掛烏占
옥 같은 얼굴이 나를 기억하여 만일 서로 묻거든 / 玉顔記我如相問
형용이 점점 야위고 약해졌다고 말하여 주오 / 爲說形容漸瘦纖
[주D-001]기(屺)에 올라 바라보네 : 효자(孝子)가 집을 떠나면서 어머니를 사모한 데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위풍(魏風) 척고(陟岵)에 “저 기(屺)에 올라 어머니를 바라
보네.” 하였다. 기(屺)는 초목이 무성한 산을 말한다.
[주D-002]오방(烏榜) : 호수(湖水)에서 노는 배를 말한다.
○전이지(全履之)와 문 장로(文長老)가 찾아와서 쓴 나의 강남집(江南集) 중의 시운을 차하다
문을 닫고 손의 옷을 끌어당겨 만류하고 / 閉閤留賓手挽衫
빚은 술을 살며시 잔질하니 쪽처럼 푸르구나 / 細斟家醞綠如藍
한가히 옥 말판을 가져다가 쌍륙놀이하고 / 閑呼玉局爭雙六
취하여 비파를 잡고 열세 줄을 희롱하네 / 醉把朱絃弄十三
반드시 문을 논하여 위북을 기약할 것이 아니라 / 不必論文期渭北
성남에 모여 시구를 연하는 것이 합당하리 / 端合聯句會城南
은근하게 가장 사랑하는 조계 늙은이 / 殷勤最愛曹溪老
나와 함께 푸른 산에 암자 짓기를 약속했네 / 約我靑山共結庵
[주D-001]반드시……합당하리 : 문장은 논할 것 없이 시(詩)나 짓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다.
문(文)을 논하여 위북을 기약한다는 말은 두보(杜甫)의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 시에
“위북에는 일천 나무에 봄이요, 강동에는 해 저문 구름이라. 어느 때나 술잔 마시면서
거듭 문장을 논할까.[渭北春千樹 江東日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 한 데서 온
말이고, 성남(城南)에 모여 시구(詩句)를 연(聯)한다는 말은 곧 한유(韓愈)가 성남에서
맹교(孟郊)와 읊은 연구(聯句) 즉 성남연구(城南聯句)를 말하는데, 연구로는 이때가
맨 처음이라고 한다. 《韓昌黎集 卷8 聯句》
○못가에서 달을 읊다
하늘 위 여러 신선 모임에 / 天上群仙會
항아가 단장을 하려다가 / 姮娥欲點粧
문득 티끌이 거울 가린 것을 싫어하여 / 却嫌塵掩鏡
내려와서 푸른 장류수에 씻는다 / 下洗碧流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