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T.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기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삼위일체‘ 이심을 고백하는 날 인 것입니다.
‘삼위 일체’에서,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 을 뜻하는데,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서로 구분되시면서도, 하나 라는 것입니다.
‘서로 구분되는 '셋' 이 '하나'’ 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떠나,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대축일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하는‘,
입으로만 하는, 신앙고백을 위한 날인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를 정확히 이해하고 정확히 설명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지만, 그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정 이라는 공동체가 바로 그렇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가 서로 구분되지만,
아버지, 어머니, 자녀가 한 가정을 이룹니다.
굳이 ‘셋’이라는 숫자에 국한시키지 않는다면,
‘모든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축하하는 오늘,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 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지만,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고,
‘상대방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실제로 움직이는 것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나의 것을 내어 놓을 마음의 준비 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실제로 나의 것을 내어 놓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너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좋은데,
너의 행복을 위해, 나의것을 내어 놓아야만 한다면,
너의 행복을 위해, 나의 몫이 작아진다면,
나는 과연 행복할까?
너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의미 없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만을 위해 사용할 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은
곧 싫증을 느끼게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너를 포함하여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사용할 때에,
바로 그 때에만,
비로소 충만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쉽게 지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삶을 살수록,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의 삶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이루시는 친교 안에 머무는 것인데,
그 삶이야 말로,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세례를 통해,
사랑으로 서로 하나 되어 계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삶을 살도록 초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또 배워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서로 다르게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투기를 바라시지 않고,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다툼을 통해서도, 사랑을 배워나갈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서로 다른 너를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도, 다름을 통해, 때로는 다툼을 통해,
사랑을 알고, 배우고, 키워나갈 수 있도록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