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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구성헌(九成軒)
정의
덕수궁 서북쪽 끝단에 있었던, 현 석조전 부지에 위치한 2층 규모의 서양식 건물.
개설
구성헌(九成軒)은 덕수궁에서 고종이 외국 사신을 접견한 양관 건물이다. 고종은 1896년(고종 33)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여 머물면서 정동에 위치한 경운궁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1897년(고종 34) 2월에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함으로써 경운궁은 새로운 궁궐로 역할을 시작하였다.
구성헌은 1897년에 사바틴([士巴津], A.I. Sabatin)의 설계로 건립되었다. 1904년(광무 8)에 사바틴의 설계로 건립되었다고 알려진 돈덕전(惇德殿)과 외관이 매우 비슷하다. 구성헌은 정면에 6개의 아치를 형성하고 측면에 5개의 아치를 형성하여 베란다를 갖추었다. 벽돌을 이용하여 조성한 아치의 모습은 돈덕전의 아치와 비슷하다.
구성헌을 비롯하여 돈덕전과 석조전(石造殿) 등은 서양의 건축 양식에 베란다를 갖춘 콜로니얼 건축 양식 건물이다. 구성헌은 석조전의 뒤편에 있었으나, 석조전 완공 무렵에 철거된 것으로 여겨진다.
위치 및 용도
구성헌은 덕수궁 서북쪽 끝단에 있었다. 준명당(浚明堂)의 서북쪽이며 1910년(융희 4)에 완공된 석조전의 위치이다. 구성헌은 건립 초기에는 대한제국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건물이었으나[『고종실록』 36년 11월 14일], 돈덕전 건립 이후에는 황태자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성헌을 사용한 기록은 1899년(광무 3) 7월부터 1907년(융희 1) 9월까지 확인할 수 있다. 구성헌에 대한 첫 기록은 1899년 7월 11일에 궁중 고문관 뺄스가 알현을 청하니 구성헌에서 4시 반에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궁내부안(宮內府案)』에 수록된 『독립신문(獨立新聞)』 1899년 10월 20일자에는 구성헌과 대관정(大觀亭)에서 각국의 공사와 영사가 만나는 행사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성헌의 쓰임은 변하게 되었다. 1901년(광무 5)에 돈덕전이 규모 있게 건립된 이후에는 사신의 접견과 신하를 만나는 일들이 돈덕전에서 이루어졌다. 구성헌은 이후의 기록으로 볼 때, 황태자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 관보(官報)』 1907년 9월 30일자에 “황태자께옵서 10월 1일 상오 11시 30분에 구성헌에서 출어하사 고등학교와 무관학교를 어순람하옵시고, 동일 하오 4시 30분에 환어”할 예정임을 전하는 소식이 실렸다. 이때 황태자는 구성헌에서 외출하여 다시 구성헌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이로써 당시 구성헌은 황태자가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구성헌은 1897년에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 건립되어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을 만나는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01년에 돈덕전이 건립되어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면서 구성헌의 사용이 줄어들었다. 1910년에 구성헌 근처에 영국 건축가 하딩(J. R. Harding)에 의해 설계된 석조전을 대규모로 건립하면서 구성헌이 철거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형태
구성헌은 1899년 3월에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촬영한 2점의 사진을 통해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하나는 미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을 촬영한 사진인데, 오른쪽 끝단에 구성헌의 2층 측면 모습이 세밀히 보인다. 측면에 5개의 아치가 형성되었으며 그 위로 박공을 갖춘 지붕의 모습이다. 아치는 돈덕전의 형태와 유사하다. 1902년(광무 6)~1903년(광무 7)에 중층의 중화전(中和殿)을 촬영한 사진에서는 중화전 뒤편으로 구성헌의 정면 모습이 담겨 있다. 2층 규모로 1층과 2층에 각 5개의 아치가 형성되었는데, 돈덕전과 같이 외관에 아치를 형성한 베란다를 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궁내부안(宮內府案)』
「아펜젤러가 촬영한 각국 공사관 주변 모습」(배재대학교 박물관 소장)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안창모,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덕수궁』, 동녘, 2009.
근정문(勤政門)
정의
경복궁 근정전의 전문(殿門).
개설
근정문(勤政門)은 경복궁 근정전 영역의 문루이다. 중층 구조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집이다. 1395년(태조 4)에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할 때 처음 건립되었다. 현재의 근정문은 1867년(고종)에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조성된 것으로서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 궁궐은 정전(正殿) 영역, 편전(便殿) 영역, 침전(寢殿) 영역을 중심으로 궐내 각사, 왕실 생활에 필요한 제반 시설, 선원전(璿源殿), 후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근정문은 경복궁의 정전 영역인 근정전(勤政殿) 영역의 문루로 근정전 남쪽에 있었다. 근정문의 남쪽으로는 광화문(光化門)과 홍례문(弘禮門, 후에 흥례문), 영제교(永濟橋) 등이 있어 경복궁의 의식적 진입 공간을 구성하였다.
광화문과 홍례문 사이가 첫 번째 마당인데, 여기에서는 조참(朝參) 시의 백관 문외위(門外位)가 설치되었다. 홍례문과 근정문 사이가 두 번째 마당으로서 조참 의례가 행해지고 조하(朝賀) 시의 문외위가 설치되었다. 근정문 안쪽이 세 번째 마당으로서 근정전의 전정이었다.
근정문은 정전 문루로서 경복궁 근정전 영역의 입구를 구성하며, 오일조참(五日朝參)에서 왕의 어좌가 놓이는 자리이다. 조참 시에 문무백관은 근정문과 흥례문 사이의 마당에 서며, 조참 이전의 문외위는 흥례문 바깥에 구성된다. 애초에 조참례는 대조하와 같이 근정전에서 설행되는 것으로 정해졌으나, 1440년(세종 22)에 의식을 정비하면서 근정문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음 해 정월에 처음으로 근정문에 나아가 조회를 받았다[『세종실록』 23년 1월 11일]. 또한 근정문에서는 단종, 성종, 명종 등이 즉위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대조하의 설행에서는 근정문을 경계로 의례 공간과 준비 공간이 구분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례(嘉禮)」의 관련 규정에 따르면, 문무백관의 문외위는 근정문 밖에 마련되는데, 문관·무관 1품과 2품은 영제교 북편에 동서로, 3품 이하는 남편에 동서로 각각 자리하며, 왕세자의 막차는 문관의 앞쪽 근정문 가까이에 마련된다. 조하례를 위해 근정전 마당으로 진입할 때 문무관은 3칸의 근정문 좌우의 작은 문으로 출입하고, 왕세자는 근정문 3칸 중 동쪽 칸으로 진입한다. 조하례가 진행될 때에는 근정문을 닫아 의례 공간의 위요감을 형성하였다. 왕의 사자가 궁 밖으로 나갈 때에는 근정문을 경계로 의식이 구분되는 등 근정문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 영역의 입구이자 의식의 경계 요소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
변천 및 현황
근정문은 1395년(태조 4)에 경복궁을 창건할 때 처음 설치되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창건 기사에는 ‘전문(殿門) 3칸’으로만 기록되었고 좌우행랑 각 11칸과 동·서 각루 각 2칸 등이 병기되었다. 이어 경복궁 각 전각의 이름을 정하면서 근정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근정(勤政)의 뜻은 『서경(書經)』에서 차용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께 복구하였다. 중건할 때 상량문서사관은 이돈상(李敦相)이었다[『고종실록』 3월 12월 9일 4번째기사]. 1985년 1월 8일에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조선초기 창건 당시에 근정문의 형태는 명확히 알 수 없고 3칸이라는 규모만 알고 있을 뿐이다. 고종대에 중건되어 현재에 전하는 근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 형식이다. 기단을 석조로 낮게 만들고 3단의 계단을 두었으며, 원형의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상층부까지 그대로 올라가는 통주 형식이며 여기에 상층과 하층의 보가 각각 맞보 형식으로 결구되었다. 기둥머리에는 다포작 형태의 공포를 올렸는데, 하층의 경우 내3출목, 외2출목으로,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구성하여 상하층이 차이가 있다. 주간포작은 각 3개씩 설치되었다. 상층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하층 내목도리 높이에서 우물반자 형태의 천장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의 문루의 보편적 형식과 같이 지붕은 우진각으로 되었으며, 용마루·추녀마루에 양상도회하고 잡상·취두·용두를 얹어 장식미를 살렸다.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다. 전면의 3단 계단의 중앙부에는 봉황무늬를 넣은 답도를 두었고, 좌우에 해태를 조각한 소맷돌을 설치하였다.
근정문의 좌우로는 행각이 연이어 있다. 애초에는 세로 방향 1칸의 단랑이었는데, 중건할 때 2칸의 복랑으로 바꾸었다. 일화문과 월화문이 동서로 연달아 있는데, 처음 창건할 때 남행랑의 끝단에 있었던 것이 바뀐 모습이다. 일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계단을 두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태종대에 근정전에서 연회를 베풀 때 근정문 외정에 불꽃놀이 기구를 설치하여 구경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8년 1월 1일]. 세종대에도 주로 정월 초하루에 사신과 함께 화포 쏘는 것을 근정문에서 구경하였다[『세종실록』 12년 1월 1일]. 1434년(세종 16)에는 보루각(報漏閣)에 물시계를 설치하면서 경회루 남문·월화문·근정문에 금고(金鼓)를, 광화문에 대종고(大鐘鼓)를 세워 시간을 알렸다[『세종실록』 16년 7월 1일]. 근정문에서 단종, 성종, 명종의 즉위식이 거행되는 등[『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인종실록』 1년 7월 6일] 근정문은 대부분의 중요한 궁중의례에서 행례의 공간이나 영역의 경계로 활용되었다.
세조는 근정전과 모화관(慕華館)에서 군사들이 진법(陣法) 연습하는 것을 살폈는데, 근정전에서는 대고(大鼓)를 울렸고 근정문에서는 대종(大鐘)을 울렸다[『세조실록』 6년 6월 2일]. 성종대에는 광화문, 홍례문, 근정문에 이르는 경복궁의 3문에 청기와를 올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보일 수 있어서 취소되었다[『성종실록』 5년 3월 3일]. 중종대에는 근정문에서 생원·진사를 방방(放榜)하기 위해 근정문 어칸 옆에 천막을 쳐 놓고 우의정(右議政)안당(安瑭) 등이 어탑을 마주 보고 지나치게 편히 앉아 예를 갖추지 못하였는데, 이에 대한 추문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중종실록』 14년 2월 22일][『중종실록』 14년 2월 23일][『중종실록』 14년 2월 24일]. 또한 한 백성이 원통한 바가 있어 격쟁하기 위해 광화문 서협, 홍례문, 근정문 동협을 거쳐 정전까지 난입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각 문의 수문장 등을 추고하였다[『중종실록』 38년 2월 20일]. 한편 근정문 동쪽 수각 모퉁이 기둥에 벼락이 쳐서 기둥이 반으로 부러지고 갈라졌으며, 지붕의 기와가 갈라진 일도 있었다[『중종실록』 39년 7월 24일].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근정전(勤政殿)
정의
조선시대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正殿).
개설
근정전은 조선시대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으로 조선왕조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건축물이다. 근정전은 문무 관료와 왕세자가 국왕에게 올리는 조회가 열리는 곳이자, 왕실의 혼례식과 외교사절을 맞이하는 국가의례 거행의 장소였다. 그리고 조하(朝賀) 의식을 행하거나, 국왕의 생일 등에 큰 잔치를 벌였으며, 근정문(勤政門)에서는 조참(朝參)이라고 하는 조회를 거행하였다.
근정전은 1395년(태조 4)에 최초로 만들어졌다가[『태조실록』 4년 10월 7일]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고종대 왕실의 권위 확립을 위해 복구되었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지나 영제교(永濟橋) 북쪽, 사정전(思政殿) 남쪽에 위치하는 근정전은 정전이며 조회의 공간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을 두 겹으로 하여 외관은 2층으로 보이나 내부 공간은 하나로 된 통층이다. 주변으로 2중의 월대를 놓았고 사방을 행랑으로 둘러쌌다.
변천 및 현황
근정전은 1395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 ‘정전’이라는 이름으로 건축되었으며, ‘조회를 받는 곳’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최초의 정전은 5칸이었으며 동·서·북쪽의 행각이 각 29칸이어서 마당은 정방형에 가까웠다. 이 마당의 상하층 2중 월대 위에 정전이 놓여 있었다. 대체적인 모습은 지금의 근정전과 유사하지만, 근정전 뒤편에서 북행각으로 복도각을 내어 단 것과 동루, 서루의 규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정도전(鄭道傳)은 근정전과 근정문의 이름을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된다.’는 뜻인 ‘근정(勤政)’에서 인용하였다. 근정전에서 즉위한 역대 국왕으로는 정종(1398년), 세종(1418년), 세조(1455년), 중종(1506년), 선조(1567년) 등이 있다.
근정전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조회인 ‘조하(朝賀)’와 ‘망궐례(望闕禮)’ 등이 정기적으로 행해졌으며 교서의 반포, 관례와 혼례, 연회, 과거시험 등 각종 부정기적 행사가 이 전각에서 열렸다. 조하는 정월 초하루와 동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 등에 정기적으로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매 5일마다는 근정문에서 조참례(朝參禮)를 거행하였다.
조하의 경우 왕은 사정전에서 의관을 준비하고 있다가 근정전으로 나오고, 문무백관과 왕세자 등은 근정문 밖, 영제교 주변에서 준비를 마치고 근정전 마당으로 들어와 예를 행하였다. 이 마당에 박석(薄石)을 깔아 포장한 것은 세종대의 일로 알려져 있다[『세종실록』 14년 10월 20일]. 마당에 놓인 품계석은 조선전기에는 없던 것이며, 1777년(정조 1)에 최초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 품계석을 놓은 것을 계기로 고종대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정조실록』1년 9월 6일].
임진왜란까지 근정전에 관한 큰 정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의 형태가 대체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근정전은 1867년(고종 4) 11월에 중건한 것이며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대대적인 지붕 부분 해체 수리 공사가 있었다.
형태
현재의 근정전은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전체 규모는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이며 지붕은 중층 팔작지붕으로 하였다. 외부에서 보면 지붕이 두 겹으로 되어 있어 2층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통해 있다. 상층도 하층과 마찬가지로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되어 있지만 툇간의 크기를 줄여 전체적으로 하층보다 몸체의 크기가 작다. 이렇게 상하 칸 수를 유지하고 상층 양 끝의 칸만을 줄임으로서 건물의 외관이 보다 장중해 보이는 효과를 나타낸다.
사찰의 불전 등 다른 중층 전각의 사례와는 달리 상층의 귀기둥을 하층까지 내려 통주로 쓴 점이 특이한데, 이는 인정전 등 궁궐 정전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상층 가구는 고주에 대량을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얹었다. 하층 처마는 하층 공포의 내목도리 상단에 서까래를 걸어 구성하였는데 내목도리 위치가 상층 기둥열과 일치한다. 어칸의 종도리 장여에는 상량문이 들어 있었으며 도리에는 먹으로 용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형태를 그려 놓았다. 공포는 상하층 모두 외 3출목, 내 4출목이다. 지붕에는 취두와 용두, 잡상을 설치하고 양성바름을 하였다.
내부에는 한 겹의 기둥열이 중앙 공간을 감싸며 배치되었다. 내부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 안쪽 기둥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중앙부로 이곳에서 주요한 행사가 진행되며 그 바깥쪽은 호위군사가 자리한다. 이 안쪽 기둥은 상층까지 연결되어 위쪽 지붕을 받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전돌로 마감되어 입식으로 진행되는 의식에 사용하기 좋은 형태이다.
북측 벽 중앙부에는 어좌가 놓여 있다. 계자난간을 둘렀고 연잎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어좌는 사각형으로 전후좌우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국왕의 자리 뒤에는 오악일월(五嶽日月)을 그린 병풍을 세웠다. 이러한 형태의 병풍은 근정전만이 아니라 편전인 사정전을 비롯해 다른 궁궐의 정전과 편전에도 설치되어 있다. 하늘과 음양을 표상하는 해와 달, 그리고 땅을 표상하는 다섯 봉우리를 그려 넣은 병풍을 배경으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국왕이 그 앞에 앉음으로써 우주를 구성하는 ‘천(天)·지(地)·인(人)’의 세 요소를 완성하는 의미를 담아 두었다. 어좌의 위로는 당가(唐家)를 화려하게 만들어 올렸다.
근정전의 실내는 층층이 쌓인 공포의 첨차들과 단청이 화려한 느낌을 자아낸다. 천정은 소란반자로 장식하여 국왕의 자리를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일체된 공간감을 구성하였다. 소란반자의 한가운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희롱하는 ‘쌍룡희주(雙龍戱珠)’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근정전은 2중의 월대 위에 놓여 있다. 월대는 건물을 위엄 있게 보이는 효과를 나타내며, 의례를 진행할 때에는 품계에 따라 자리를 구분하는 데 사용한다. 2중의 월대는 조선 궁궐 정전의 공통된 형태지만 근정전 월대는 특별히 석조 난간과 연잎 동자를 사용해서 장식하였다. 근정전 월대의 모퉁이와 난간의 법수 머리에는 다양한 종류의 상서로운 짐승[瑞獸]이 올라앉아 있다. 이들을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사신(四神)’으로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고, 둘째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의 열두 동물이며, 마지막으로는 상서로운 짐승에 속하나 그 종류가 명확하지 않은 동물들이다. 이들 중에서 사신은 근정전 월대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정전 월대의 상층부에는 남쪽 계단의 법수 머리로 주작을, 북쪽에는 현무를 세웠다.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두 개의 계단이 있는데, 그 중 북편의 계단에 청룡과 백호가 자리 잡았다. 아래층 월대 난간은 대부분 십이지의 동물로 채워져 있다.
전체 권역은 중심 건물인 근정전과 근정문 그리고 동·서·남쪽의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행각은 중앙에 솟을대문으로 사정문(思政門)이 있으며 행각은 사정전 영역에서 사용하도록 문이 사정전 쪽에 있고 근정전 쪽은 화방벽으로 되어 있다. 남행각은 마당을 향한 면에 벽이 없이 기둥만 있는 월랑으로 구성되었다. 근정전 행각 밖으로 통하는 문으로 동행각에는 계인문(啓仁門), 서행각에는 협의문(協義門)을 두었다. 동·서행각에는 관청과 창고가 배치되었는데 동행각에는 관광청(觀光廳), 양미고(粮米庫), 융문루(隆文樓)가 있고 서행각에는 향실(香室), 예문관(藝文館), 내삼청(內三廳), 충의청(忠義廳), 융무루(隆武樓) 등이 위치하여 용도에 따라 방이나 마루, 창고를 구성하였다.
1867년(고종 4) 중건된 이래 중건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경향이 강한 편이다. 당시 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조선말기의 건축 기술과 조형 의식을 알게 하는 대표작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국권 침탈 이후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 주최로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가 행해졌다. 이때 경복궁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근정전은 건물이 철거되지는 않았으나 근정전의 행각은 전시 공간으로, 전각은 행사 식장으로 이용되었다. 교태전 등 궁궐의 주요 전각들과 함께 새로 마련된 전시관이 수용하지 못하는 물품을 전시하거나 귀빈의 접대, 행사장 등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역대 총독들은 근정전에서 행사를 개최할 때 옥좌에 자리하여 조선왕조의 대리인임을 나타내기도 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궁궐지(宮闕志)』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김동욱, 『조선시대 건축의 이해』,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우동선 외,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효형출판, 2009.
이강근, 『경복궁』, 대원사, 2003.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홍순민,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1999.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금천교(禁川橋)
정의
궁궐에 조성된 금천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다리를 통틀어 일컫는 말.
개설
조선시대 궁궐에는 정문을 지나 다음 영역의 문에 이르는 중간에 금천(禁川)이 있었다. 이에 어구(御溝)를 조성하였는데, 이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설치한 다리를 통칭 금천교(禁川橋)라고 했다. 금천교는 궁궐마다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조선전기에 경복궁과 창덕궁은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은 옥천교(玉川橋), 경덕궁(慶德宮)은 금천교(金川橋), 인경궁은 금천교(禁川橋), 고종 즉위 후 중건된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永濟橋), 경운궁(慶運宮)은 금천교(禁川橋)였다.
위치 및 용도
금천교는 궁의 궐문(闕門)과 외전(外殿) 사이에 흐르는 금천에 설치한 다리로 금천을 건너기 위한 것이다. 경복궁의 금천교는 광화문(光化門)과 흥례문(興禮門) 사이에 설치되었으며,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과 진선문(進善門) 사이에,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과 명정문(明政門) 사이에, 경덕궁은 흥화문(興化門)과 숭정문(崇政門) 사이에, 경운궁은 대한문(大漢門)과 중화문(中和門) 사이에 위치하고 그 가운데 금천교가 설치되었다.
형태
금천교는 하부에 홍예(虹蜺)를 틀고 그 위에 장대석으로 장귀틀과 동귀틀을 짜 올린 다음 장대석이나 박석을 까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금천교 좌우에는 난간을 설치하고, 주변에는 해태·거북·하마·사자 등 악귀를 막는 동물들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문화재청, 2009.
신영훈 글·김대벽 사진, 『조선의 궁궐』, 조선일보사, 1999.
역사건축기술연구소, 『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 (1)』, 돌베개, 2015.
이덕수, 『新 궁궐기행: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운궁·경희궁·종묘의 건축과 역사 읽기』, 대원사, 2004.
금호문(金虎門)
정의
조선시대 창덕궁 서쪽 행랑의 출입문으로 주로 관료들이 이용한 문.
개설
금호문은 창덕궁이 건설되면서 함께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호문이라는 명칭은 이미 중국 당나라 서쪽에 위치한 궁성문을 지칭하던 것이었다. 창덕궁 금호문의 경우 당초에는 별도의 이름이 없었으나, 1475년(성종 6) 국왕의 지시로 서거정(徐居正)이 대궐의 문 가운데 호칭이 없는 문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금호문이라 불렸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금호문을 열고 닫을 때에는 도총부(都摠府) 낭청(郞廳) 1명과 겸사복(兼司僕) 1명, 중궁 사약(司鑰) 1명이 관장하였다[『성종실록』12년 1월 12일]. 이후 1784년(정조 8)에 제정된 감문절목(監門節目)에서는 변동이 되어 금호문은 주서(注書)가 관장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8년 5월 22일]. 금호문을 지키는 군사는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병조(兵曹) 소속의 기병(騎兵) 13명,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의 파총(把摠) 1명, 초관(哨官) 1명, 보군(步軍) 100명 등이 수비하였다.
위치 및 용도
금호문은 창덕궁 서쪽에 위치한 행랑의 출입문으로, 조정 관원들이 주로 출입하는 문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정조 연간에 이르면 궁궐의 각 문에 출입하는 대상자가 관행적으로 고정되기도 하였는데, 창덕궁 소재 궁문의 경우 돈화문(敦化門)은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관리인 대간(臺諫)이, 금호문은 조정 관리인 조신(朝臣)이, 단봉문(丹鳳門)은 내시부 소속의 관리들인 중관(中官)이, 선인문(宣仁門)은 궁중의 말이나 가마를 담당하던 사복시(司僕寺) 관원들만이 출입해야 하는 것이 관행화되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를 금지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정조실록』 13년 1월 19일].
야간에도 관원의 출입문으로 사용되었고[『인조실록』 17년 10월 15일], 흉서가 투입되기도 하였으며[『광해군일기』 10년 3월 24일], 과거 시험 때에는 응시자의 출입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숙종실록』 24년 9월 9일].
변천 및 현황
연산군대에는 금호문의 수비를 강화한다는 취지하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의 예에 따라 수직군사 60여 명에게 창과 칼 등을 소지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2월 10일]. 1645년(인조 23)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 인근에 있는 서연청(書筵廳)에서 세자가 강독을 하기 어려울 정도이므로 폐쇄하고 대신 단봉문을 개방한 적도 있었으나[『인조실록』 23년 10월 22일], 일시적인 조치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개방되었다[『인조실록』 26년 10월 17일]. 금호문은 이후에도 몇 차례 일시적으로 폐쇄되기도 하였다.
형태
금호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솟을 대문 양식이다. 홑처마 맞배지붕이고, 용마루 양쪽 끝에는 용두를 놓았다.
관련사건 및 일화
금호문은 정치적으로도 주목되는 문이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들이 창의문(彰義門)을 지나 궁궐로 들어간 문이 금호문으로, 당시 금호문 수문장박효립(朴孝立)이 문을 열고 반정군을 맞이했다. 금호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간 반정군은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른 것은 반정군들이 가족들에게 “궁중에서 불이 나지 않으면 모두 달아나서 빠져 죽으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밖에도 1721년(경종 1) 노론 측에 의해 왕세제의 대리청정이 시도되었을 때, 소론 측에서 이 시도를 막기 위해 창경궁에 있는 국왕을 면대할 때 이광좌(李光佐) 등이 이곳을 통해 들어가 청대(請對)하여 노론 측의 시도를 막은 적이 있었다[『경종실록』 1년 10월 17일]. 또는 관원들이 대명(待命)할 때도 금호문 앞이 활용되었다[『정조실록』12년 2월 12일].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대동야승(大東野乘)』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만기요람(萬機要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임하필기(林下筆記)』
주남철, 『한국의 문과 창호』, 대원사, 2011.
금화문(金華門)
정의
창덕궁 대조전 서쪽에 위치한 월랑문.
개설
광해군대 창덕궁 중수 과정에서 대조전(大造殿)의 서쪽 월랑문(月廊門)을 금화문(金華門)이라고 했다. 하지만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 이후 금화문에 대한 기록이 여러 문헌에서 보이는데, 이를 살펴보면, 창덕궁 내각 왼편 후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추정된다.
내용
1611년(광해군 3)에 광해군은 “대조전의 서쪽 월랑문을 금화문으로, 동궁(東宮)의 북쪽 별당을 사경당(思敬堂)으로 이름을 정하였으니, 지난번에 계하했던 읍취문(挹翠門)의 편액과 함께 속히 현판을 걸게 하라.”고 지시했다[『광해군일기』 3년 11월 23일].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금화문이 등장하는 유일한 사례이다. 명확하게 대조전의 서쪽 월랑이라는 위치까지 기술했기 때문에 내용에 오류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궁궐지(宮闕志)』에는 대조전에 대해 “희정당(熙政堂) 북쪽에 있는데 대내(大內)의 곤전(坤殿)이며 정당(正堂)이다. 무량각(無樑閣)으로 남문은 선평문(宣平門), 동문은 함광문(含光門), 서문은 경극문(慶極門)이다.”라고 했다. 즉 대조전 서쪽 월랑에는 경극문이 위치하며 금화문은 보이지 않는다. 「동궐도(東闕圖)」에도 경극문이 기록되었고, 『궁궐지』에도 대조전의 서행각은 10칸인데, 이 안에 관리합(觀理閤)이 있고 남쪽에 경극문이 있다고 했다. 창덕궁과 관련한 대부분의 고문헌에서 금화문은 보이지 않는다.
『궁궐지』에는 창덕궁에 대해 “1592년(선조 25)에 병화로 인해 불탔는데 1609년(광해군 1)에 이르러 중수했다. 1623년(인조 1)에 반정 후 병화로 인해 대내가 연달아 불타고 수정당(壽靜堂), 충묵당(沖默堂), 인정전(仁政殿), 익각향실(翼閣香室)만 남았다. 1647년(인조 25) 가을에 왕명으로 인경궁(仁慶宮) 전각을 철거해 중건했다. 전각의 명칭은 고치지 않았지만 구조는 모두 바꿨다.”고 기록되었다. 즉 1611년(광해군 3) 창덕궁 중수 과정에서 광해군이 대조전 서월랑문을 금화문이라고 했지만, 1623년 인조반정 때 소실됐고, 1647년(인조 25)에 다시 대조전을 건립할 때 다른 이름으로 변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47년에 창덕궁 중건 및 대조전 건립 내용을 수록한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에서도 금화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의 기록들을 통해 창덕궁 다른 곳에 금화문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668년(현종 9) 9월 4일자 기록에 세자가 도총부(都摠府), 홍문관(弘文館) 근처로 옮기게 됐으니 진선문(進善門) 북쪽에서 시작해 금천교(禁川橋) 서쪽, 금화문(金華門) 동쪽까지 전면 마당에 기둥을 세우고 휘장을 쳐서 안쪽을 가리라는 지시가 있다. 또 1690년(숙종 16) 10월 14일에는 세자가 내의원(內醫院)으로 옮기게 되어 금화문 서편과 내의원 부근에 잡인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즉 금화문은 도총부, 홍문관, 내의원 인근에 위치한 문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궁궐지』에서는 홍문관에 대해 이문원의 동쪽, 내의원의 남쪽에 있는데 옛날의 사인사(舍人司)라고 했고, 도총부에 대해 창경궁 광정문 밖에 있는데 옛날에는 금호문(金虎門) 안, 지금의 이문원(摛文院)에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인정전 서쪽 행각의 서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금화문은 금천교 정면 마당에 위치한 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금화문 서변 궁장’, 또는 ‘금화문 북변 궁장’, ‘금화문 상변 궁장’이 허물어져 수리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금화문은 창덕궁 서쪽 궁장과 연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내용을 검토하면, 금화문은 내각 왼편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궐도」에는 단칸의 문만 그렸을 뿐 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동궐도형(東闕圖形)」에도 문의 위치만 그렸을 뿐 이름을 적지 않았다. 한편 고종 대에 경복궁 후원의 서쪽 궁장에도 같은 이름의 금화문이 있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궁궐지(宮闕誌)』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1, 서울학연구소, 1994.
##그림1_00017961_「동궐도」, 창덕궁 내각 서쪽 담장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금화문(金華門)
정의
경복궁 후원 서쪽 궁장의 소문.
개설
금화문(金華門)은 고종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북쪽 마당 서편에 있었다. 유생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 경복궁에 들어올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위치 및 용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소장된 「북궐도형(北闕圖形)」을 살펴보면, 금화문은 신무문 북쪽 마당을 감싸는 서쪽 궁장에 위치한다. 서쪽 궁장 남쪽에는 2칸의 추성문(秋成門)이 있고, 북쪽에 단칸의 금화문이 있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1872년(고종 9) 2월 3일에 고종이 경무대(景武臺)에 나가서 유생들이 시험 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날 유생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 문을 통해 들어오는데, 선전관(宣傳官)의 잘못으로 유생들이 추성문을 통과했다. 추성문은 왕이 출입하는 문이며 유생들은 금화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 일로 문의 개폐를 담당하던 선전관이 처벌을 받았다. 위계에 따라 사용하는 문을 명확히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중수할 때 대조전(大造殿)의 서쪽 월랑문(月廊門)을 금화문이라고 하였는데[『광해군일기』 3년 11월 23일],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불타 버렸다. 그 후 창덕궁 내각 왼편 후원으로 통하는 문을 금화문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북궐도형(北闕圖形)」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1, 서울학연구소, 1994.
낙선당(樂善堂)
정의
저승전, 시민당과 함께 동궁 권역의 서연(講筵)하던 장소.
개설
낙선당의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47년(인조 25) 저승전(儲承殿) 중수 때 함께 보수된 기록이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에 남아 있다. 광해군대에 다시 지은 ‘동궐’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연이어 겪으며 소실되었다. 이후 1633년(인조 11)에는 창경궁을, 1647년에는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동궁 권역도 복구가 이루어졌다.
1756년(영조 32) 5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머물러 있던 낙선당 온돌에서 촛대가 넘어지며 화재가 일어났다[『영조실록』 32년 5월 1일]. 이 때문에 가까이 있던 양정합(養正閤)까지 소실되었으며, 이후 낙선당은 동궁의 부속 건물로는 다시 복원되지 못하였다.
위치 및 용도
낙선당을 동궁의 정당이라고 하면서도[『영조실록』32년 5월 1일],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한중록(閑中錄)』에서는 왕세자가 서연하는 장소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왕세자의 서연 장소이기도 하였지만, 왕실의 서책 및 여러 기록물을 보관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낙선당의 본래 장소는 지금의 낙선재 자리라고 추정되기도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동궐도(東闕圖)」상에 보이는 수강재(壽康齋)·진수당(進修堂)·시민당(時敏堂) 터는 17~18세기 창경궁 내 동궁 권역의 각 위치를 추정하는 단서이다. 낙선당이 존재하던 시기의 주변 전각으로는 저승전·낙선당·관희합(觀熙閤)·덕성합(德成閤)·양정합·시민당·손지각(孫志閣) 등이 있었다. 저승전과 낙선당은 동서로 좌우에 배치되어 있었고 관희합과 덕성합은 낙선당의 부속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정합은 낙선당의 남쪽에 있었고, 시민당은 손지각이 부속 건물로 딸려 있는 양정합 동남쪽의 전각이었다고 보인다. 시민당의 뒤편에는 진수당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영조의 첫 번째 세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머물던 곳이다.
『한중록』은 낙선당 화재의 정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낙선당의 온돌에서 춘당과 사도세자가 입대하던 중, 화를 내는 상황에서 촛대가 쓰러지며 남창에 불이 붙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이 번졌지만 화가 난 세자는 춘방을 쫓아 덕성합으로 내려가는 문 앞에 달려갔다. 이때 창덕궁 동문에서 사도세자를 찾아가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진수당으로 들어가는 집현문이 닫혀 있자 시민당 앞으로 돌아 보화문 쪽으로 갔다. 덕성합을 지날 즈음 이 난리를 만났고, 관희합은 한일자로 놓여 있었지만 화재를 피했다는 등의 정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낙선당과 관희합은 하나로 이루어진 전각이고 덕성합은 그 아래쪽에 배치되었던 건물로 볼 수 있다.
『일성록』에는 저승전 앞마당에 우물이 있어 낙선당 화재 후 사도세자가 이 우물로 달려가[禁井之變] 빠지려 했다고 전한다. 「동궐도」에서 보면, 수강재와 담을 사이에 두고 꽃과 나무가 무성한 전각의 빈터에서 우물이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이 자리가 건양문(建陽門) 밖, 저승전의 옛터인 것 같은데 1764년(영조 40)에 저승전 역시 소실된다.
정조 때, 그 건물들이 들어 있던 영역 안에 수강재가 조영된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을 풀어 보면 낙선당은 수강재 뒷마당, 즉 북쪽에 나란히 놓인 두 단의 빈 기단만 남아 있는 그 장소가 될 것이다.
변천 및 현황
낙선당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불타 없어지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다가 1756년(영조 32) 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국조보감(國朝寶鑑)』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창덕궁]저승전의궤([昌德宮]儲承殿儀軌)』
『한중록(閑中錄)』
『홍재전서(弘齋全書)』
낙선재(樂善齋)
정의
창덕궁의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와 함께 일곽을 이루어 조영된 궁궐 내 반가(班家) 형식의 집.
개설
헌종이 사랑했던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를 위해 1847년(헌종 13)에 마련한 건축물이다. 1756년(영조 32) 사도세자(思悼世子)에 의해 일어난 화재로 소실된 낙선당과 연관해 거론되는 집이기도 하다. ‘낙선(樂善)’은 『맹자(孟子)』에서 “인(仁)·의(義)·충(忠)·신(信)으로 선(善)을 즐거이 여기고[樂] 게으르지 않는 것을 천작(天爵)이라 한다.”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국왕에게 삶의 방식을 깨우쳐 주는 의미를 지녔다. 원래 낙선당은 동궁의 영역에 있어 세자가 강연하는 장소였다.
영조대에 낙선당이 불에 타 없어진 후, 약 90여 년 만에 헌종대 ‘낙선’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렇지만 같은 집, 같은 제도대로 복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옛 낙선당의 자리에 세워진 것도 아니라 여겨진다. 이때의 수강재 중수 역시 낙선재와 수강재를 함께 들여놓기에 협소했던 터를 넓게 잡기 위해 옆으로 이전되었다고 판단된다. 「동궐도(東闕圖)」와 「동궐도형(東闕圖形)」에 나타난 우물 등을 기준으로 비교해 보면, 1848년(헌종 14)에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가 일곽을 이뤄 한자리에 놓였다. 이렇게 조성된 낙선재는 헌종이 책을 읽으며 편안히 쉬는 집으로 마련하려 했던 건축 의지를 “포죽남산곽거안지심댁(苞竹南山廓居安之心宅)”이라고 상량문에 쓰고 있다.
위치 및 용도
낙선재는 창덕궁의 동남쪽에 있으며, 궁궐의 전각답지 않게 단청이 없다. 「동궐도」상에서는 연영합(延英閤)의 남쪽 수강재의 서쪽에 있다. 지금은 인정전(仁政殿)의 숙장문을 지나 어차고에서 바라보았을 때, 동쪽에 놓여 있다. 원래 창덕궁의 동궁 영역에 놓여 있는 셈이다. 낙선재를 가장 먼저 짓고 석복헌, 수강재를 동시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변천 및 현황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에 조영되어 약 2년간 사용되다가 이후 30년 이상 방치되었다. 그러다 갑신정변 이후인 1881년(고종 18)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이곳을 주요 시어소로 사용하였으며[『고종실록』 21년 10월 23일], 일제강점기 이후 왕실 주요 인물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순종실록부록』 5년 6월 14일]. 1910년(융희 4) 8월 일본에 국권을 넘겨준 순종은 창덕궁에서 생애를 보내는데, 1912년부터 1919년까지 낙선재와 창덕궁의 여타 전각을 오가며 거처를 옮겨 지냈다. 1926년 순종이 대조전(大造殿)에서 생애를 마감하자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가 낙선재에 머물러 살았다. 이후 낙선재가 좁아 불편하다고 하여 1929년 3월 증축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피난했다가 이승만이 낙선재에 귀가하는 것을 거부하자 정릉에 임시로 살았다가 1960년 5월 박정희에 의해 돌아왔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 낙선재에서 승하하였다. 그리고 1963년 귀국하여 순정효황후와 함께 거처하던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1989년, 1962년 귀국한 덕혜옹주(德惠翁主)가 1989년 낙선재에서 영면하였다.
현재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일곽을 통틀어 낙선재라고 부르고 있다. 낙선재 현판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깊이 교유했던 청나라 사람 섭지선(葉志詵)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대청 앞 주련에는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의 글씨가 있다.
형태
낙선재 일곽은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행각으로 연결되어 연이어 배치되어 있다. 낙선재 본채는 세벌대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웠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에 건물의 양쪽 끝이 앞뒤로 돌출된 형태이다. 서쪽 끝 1칸이 전면으로, 동쪽 끝 2칸이 후면으로 돌출되었고 부속칸이 연결채로 석복헌과 연이어 있다. 건물의 서쪽 끝은 두 칸의 누마루와 한 칸 방으로 구성되었고 그 동쪽으로 대청 두 칸, 방이 세 칸, 후면으로 두 칸의 방이 덧달려 있다. 건물 전면 4칸은 툇간으로 마루를 놓았고 마지막에 부엌이 달려 있다. 익공집으로 부연을 단 겹처마에 막새기와로 마감한 팔작지붕이다. 파련대공과 초각 등을 써 집의 섬세한 꾸밈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앞마당을 행각이 둘러싼 ‘口’ 자형으로 만들었다.
헌종은 중전에게서 후사가 없자 경빈김씨를 맞아들이고 다음 해에 영건 역사를 시작하여 석복헌을 조성했다. 낙선재를 조성한 다음 해에 마련된 석복헌 상량문에는 “오색 무지개 용마루에 걸려, 상서로운 기운이 있고, 꿈을 점치니 하늘이 장차 난실에 대인을 주려는 것[文虹繞棟, 卽生祥下瑞之期, (중략) 天將啓於蘭室, 大人占之夢態)]”이라는 내용으로, 내조 잘하는 후비(后妃)와의 금슬을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마련된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았고 마치 사대부 집의 안채와 사랑채를 옮겨놓은 듯 소박하고 섬세하게 꾸며 놓았다.
관련사건 및 일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인 순정효황후, 이방자 여왕, 덕혜옹주, 이구 등이 생활하였던 곳이며, 그들과 영친왕의 장례가 치러진 장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원헌고(元軒稿)』「동궐도형(東闕圖形)」
문화재청, 『궁궐 현판의 이해』, 문화재청, 2006.
창덕궁 관리소, 「창덕궁 안내 책자」
서우학회, 『서우(西友)』제13호, 서우학회, 1907.
난각(煖閣)
정의
궁궐의 침전 또는 온돌방이 설치된 건물.
개설
난각(煖閣)은 온돌이 시설된 건물로 궁궐에서는 왕이나 왕비의 침전(寢殿)을 말한다. 특별히 2층 누각의 아래층에 설치된 온돌을 지칭하기도 한다.
변천 및 현황
조선전기에 궁궐에서 온돌방을 설치한 곳은 왕과 왕비의 침전 정도였다. 정전(正殿)과 편전(便殿)의 바닥에는 방전(方塼)을 깔고 기타 상궁과 나인 및 내시들의 처소는 마루 판방(板房)이었다. 조선전기에 온돌은 대부분 겨울철에는 환자 치료용, 여름철에는 중요한 문서를 건조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온돌 시설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 설치된 온돌에서는 불길이 새어 나와 목조 건물에 옮겨 붙는 일이 부지기수여서 온돌이 쉽게 보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궁궐에 상궁과 나인 처소에까지 온돌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대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면서이다[『인조실록』 2년 3월 5일]. 이후 땔감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회의(懷疑)도 있었지만 이미 따뜻한 온돌방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다시 이전과 같이 마루방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난각이라는 용어는 『현종실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현종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를 살피지 못하자, 부응교(副應敎) 김만기(金萬基)가 “승지가 편전과 난각에 구애받지 말고 자주 입시하여 문서와 상소를 바치고 이에 대한 재가를 받는다면 조섭(調攝)하는 데 방해되지도 않고 사무도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라며 올린 상소에서 나온다. 여기서 난각은 방전이 깔린 편전과 달리 온돌이 설치되어 있어 병을 치료하기에 적합한 따뜻한 공간, 즉 침전 건물을 의미한다[『현종개수실록』 6년 1월 7일].
『정조실록』에서 보이는 난각은 주합루 아래에 시설된 온돌방을 뜻한다. 주합루는 1776년(정조 즉위)에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어제(御製)를 봉안(奉安)하기 위하여 건립한 건물이다. 2층에는 주합루(宙合樓)라는 편액을 걸고 어제를 봉안하고, 아래층에는 규장각(奎章閣)이라는 편액을 걸고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건립할 때 여름철에 어진에 스민 습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규장각에는 온돌을 시설하였는데, 이를 난각이라 지칭하였다[『정조실록』 5년 9월 19일].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궁궐지(宮闕志)』
『규장각지(奎章閣志)』
『내각일력(內閣日曆)』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