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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포 외삼촌과 외숙모는 마랫들 논4마지와 모시밭 말갓지기를 곧이전해준다
곧해준다 하면서도 2년이 넘어도 해줄생각을 안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했답니다
우리 어머니와 새내이모는 정월 초이튿날 떡국을 끓여드릴 준비를 해가지고
친정 아버지한테 세배를 갔는데 금산외할머니는 세배를 안는다고 하여서
외할아버지께만 세배를 드리고나서 3년간 머슴을 살었어도 그전답은 작만할수
있지안느냐 이제는어서 종옥이 앞으로 이전을 해주라고 좋은말로 사정을
했으나 두분다 입맛만 다시면서 아무말도 안하시 드랍니다
정초부터 입다툼 하기도 그렇고 포도시참고 (간신히) 이모와함께 집에왔더니
외할머니께서는
" 너그둘다 늬애비허고 똑같다 멀라고 그말을 끄집어내서 본전도 못찾고왔냐
아무날 아무시까지 다짐을받고 왔어야허제 "
그날 저녁밥을 먹는데 줄포 외삼촌과 외숙모가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이제는 전부다 포기하고 서울로 가야겠다고 하드랍니다
외할머니께서는
" 잘힛다 참 잘생각힛다 낼이라도 얼렁가그라 멀라고 그것들을 믿었냐
늬앞은 늬가 개려야혀 너는 성제간도없는 사람이여 너혼자 살어야히여 "
하셨답니다
줄포 외삼촌은 줄포로 갔다가 정월보름날 서울로간다고 인사를 하러와서는
눈물을 흘리기에 외할머니와 우리어머니랑 셋이서는 한참을 훌쩍이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부자인 입석양반한테 쌀두말값을 빌려다가 차비하라고
주었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께서 주신차비는 가고나서보니 담배쌈지속에 두고가셨기에
짠해서 또눈물바람을 하셨드랍니다
줄포 외삼촌은 서울에서 좋은사람을 만나서 평양으로가서 철도공사판에
취직을 하였다고 달포만에 (한달반만) 외숙모한테 자기손으로 띠엄띠엄
길게쓴 편지가 왔드랍니다
줄포 외숙모는 껄끄러운 춘수리 시어머니한테는 더이상 구박받을 필요가
없기에 아프다는 핑계를대고 주로 줄포친정과 우리집에서 소일하면서
살았드랍니다
음식솜씨 각종옷등 바느질솜씨가 아주 뛰어나셔서 우리어머니와 아버지는
신세대 인테리인 줄포 외숙모님을 아주좋아 하셨드랍니다
6.25 가났던해 음력으로 8,16일 정읍경찰서 유치장에는 정읍군 14개면에서
좌익들에게 잡혀온 우익인사들로 6개의 감방이 아주꽉 차버렸 답니다
그방에는 우리 소성면 사람들도 여러명이 있었고 우리 큰집해완이 형님도
함께 있었답니다
사돈간이고 두살덜먹은 해완형과는 서로절친한 사이라 옆으로가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으나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움직수가 없었답니다
저쪽끝에 앞쪽에 앉아있는 해완이 형에게 몸은좀 어떠냐고 물으니
" 얼마나 맞었는지몰라 골병들어 버렸네 자네는 어쩐가? "
" 나도 몽댕이로 너댓놈한테 사정없이 뚜들겨 맞아서 성헌디가 없네이 "
이대화가 우리 외삼촌과 해완이형이 사돈간에 나눈 이세상에서의 마지막
대화 였답니다
사람이 너무많고 시끄러워서 무슨이야기를 할수조차 없었답니다
그곳에서는 모두들 불안해 하면서도 조용하게
" 자네는 어디서 잡혔는가 거시기 그잡어먹을놈 그개새끼 "
아무게란놈이 찔러댓지 등등의 여러 이야기를 하는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드랍니다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꼼짝달싹도 못하고 앉아있는데 어둑해질 무렵인데
한방에 두놈씩이 큰깡통에든 (20리터로 추정) 휴발유를 뿌려대드랍니다
외삼촌은 다행히 변소옆 구석에 앉아있어서 휴발류는 안뒤집어 섰드랍니다
휴발유로 벼락을맞은 사람들은 왠일인가하고 멍하니 있었는데 5분쯤 후에는
불붙은 옷뭉치인가를 집어던지니 그곳은 순식간에 아비규완 지옥이되어
버렸답니다
그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불에타 죽으면서 소리지르며 이리뛰고 저리뛰니
말로는 표현할수가 없을것 같았답니다
그뜨거운 불기운과열기 그리고 연기와 옷에불이 붙어서 사람살이타는 냄새는
글이나 말로는 표현할수가 없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옥중에서도 뜨거운 불지옥 이었답니다
외삼촌은 다행히 화장실옆에 앉아있었기에 옷을다벗고 팬티도 벗은체
다른사람들을 밀치면서 간신히 두번째로 화장실 똥통속으로 들어갔답니다
3사람 까지는 안전하게 똥통속으로 들어왔는데 4번째 사람은 발두개만 들어오고
몸둥이는 큰화상을입고 뜨거운 연기에 질식해서 죽었드랍니다
가슴까지차는 똥통속에서 그래도 조금 밝은빛이 드는곳으로 똥을헤치며
가보니 똥을퍼가는 구멍인데 손가락만큼 굵은창살로 막혀있어서 흔들어
봤으나 꿈쩍도 안하드랍니다
다른방에서 똥통속으로 들어온 두사람까지 다섯명은 큰화상도 안입어서
그나마 천만다행 이었드랍니다
한두어시간쯤 있으니 함마같은 것으로 유치장 철문을 부수는 소리가
크게나면서 남자들과 여자들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우는소리가 들리드랍니다
똥통입구의 죽은사람을 밀어올리고 다섯사람이 사람 살려주시요
사람 살려주시요를 외쳤더니 사람들이 알아듣고 몰려왔드랍니다
사다리를 넣어줄수도없고 끈을잡고 올라갈수도 없기에 똥퍼가는곳의
열쇠통을 끌러달라고 하였더니 그쪽으로 오라고 하더랍니다
똥을헤치고 똥퍼가는곳에 갔더니 도끼와 망치로 열쇠를 부수고 창살을열어
주어서 그곳으로 기어나왔더니 사람들이 모두가 도망가 버리드랍니다
몇달에 한번씩 퍼내는 유치장의 썩을데로 썩은똥냄새는 말로는 표현할수없이
고약 했답니다
홀딱벗은 몸둥이에서 몇년이나 썩고묵은 썩은똥 냄새가 진동을하니 누가옆에
올려고도 안하드랍니다
유치장에서 불타죽은 사람들의 비릿하고 느끼한 고기굽는 냄새는 아무것도
아니었답니다
그나마 밤이어서 천만다행 이었답니다
누구인지 경찰들이입던 헌작업복 같은걸 아랫두리옷만 몇벌을 던져주면서
얼른가면서 누집에서 비누를 얻어갖고 대양리 다리밑 으로가서 씼으라고
하드랍니다
다른방에있던 사람둘은 아직도 위험하다고 하면서 아랫두리만 입은체
경찰서 뒷산으로 올라가 버리드랍니다
외삼촌 일행은 경찰서에서 큰길로 한참을오니 불켜진집이 있어서 대문을
두드리니 60대의 부부가 3사람의 몰골을 보더니 깜짝놀래 드랍니다
온통 똥범벅에 아랫두리만입고 웃도리를 안입은 외삼촌 일행이 비누만좀
달라고하니 자기집의 쓰던것과 옆집의 쓰던것까지 두개를갖다 주드랍니다
비누를 얻어가지고 대양리다리 근처를가니 무슨일인지 여자도 보이고
사람들이 7-8명이 웅성거리기에 비누한개하고 헌옷이라도 옷좀달라고
했더니 무슨일로 똥을이렇게 뒤집어 썼냐고 하기에
" 좌익빨갱들이 유치장에 불을질러서 똥통에 들어가서 간신히 살았소 "
했더니 놀래면서
" 다불타서 다죽었다더니 산사람도 있었네이 천만다행 이요이 "
하면서 서둘더니 비누도 새놈으로 두개를주고 입을옷한복 3뭉치를
새끼줄로 잘묶어서 각각 막대기에끼워 주드랍니다
똥으로 법벅된 손으로는옷을 못갖고 가기에 재치있게 만들어준덕에
옷뭉치 막대기를들고 대양리 다리로 갔드랍니다
대양리다리밑 물속에 들어가니 얼마나 추운지 덜덜 떨리드랍니다
똥으로 범벅이된 바지를 던져버리고 이를악물고 물속에 누우니
차라리 따뜻하던 유치장 똥통속이 더낫드랍니다
빨래비누로 머리를 몇번이나감고 온몸을 씻었으나 그고약한 똥냄새는
가시질 안드랍니다
똥통동기 두사람은 북면과 산내면 사람인데 둘다 전주이씨 였답니다
충분히 잘씻었지만 남새는 가시지 안기에 냄새나는 손으로 서로악수를
나누고 헤어졌 드랍니다
부안촌 집으로 가야겠는데 큰길은 위험할것같고 불안해서 당고개재로
안가고 신기마을로가서 작대기 한개를 구해갖고 공평으로 돌아서
산길로만 걸어서 첫닭이 우는소리를 들으면서 집에오니 외숙모가
없으니 맥이풀려서 부억의 나무청에서 볏짚을깔고 잠을잤드랍니다
잡혀가던날 점심부터 4일을 굶었어도 배고픈줄을 몰랐는데 자고나니
배가고파서 죽을것 같드랍니다
우선 밥을먹어야 하겠기에 누님네집인 우리집에오니 조용하드랍니다
" 누님 나왔네이 나왔어 어머니 나왔어라우 어머니 "
하니 작은방문이 열리면서 외숙모와 우리 외할머니가 멍하니 바라만
보드랍니다
우리큰집 해완이형이 어젯밤에 유치장에서 불타서 죽어버렸다고 하면서
"늬 큰뉘와 매양은 (매형) 너를찾는다고 새복에 (새벽) 지게바작에다가
가마니를 뜯어갖고 이불홋청이랑 묶어갖고 정읍경찰서에 갔단다 "
(죽었을 것이니 가마니와 이불홋청 으로싸서 지게로 짊어지고 온다는뜻임)
" 거그 갇힌사람은 싹다 죽었다는디 내새끼는 어쩌다 살아왔당가응 "
하면서 외할머니가 두손을잡고 우니까 외숙모는 그때야 정신이 돌아와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듬으며 만져 보드랍니다
똥냄새고 지랄이고 외숙모나 외할머니나 울면서도 좋기만 했드랍니다
" 어머니 나재펴 (잡혀) 가든날부터 여태 굶었응게 얼릉 밥좀줘 밥 "
" 금방 밥을 해줄것인게 우선 이것이나 먹어라이 "
하면서 송편과 식혜를 한사발주니 금방게눈 감추듯이 금방 먹어버리고
외숙모한테 똥냄새를 어떻게하면 안나게할까 물으며 걱정 하드랍니다
죽은줄로만 알았던 외삼촌이 살아서 돌아오니 줄포 외숙모에게는
그까짓 똥냄새는 아무걱정도 아니드랍니다
줄포 외숙모는 정신을 못차리것는데 외할머니께서는 얼른밥도 하시고
국도끓이고 생선도 구워서 외삼촌에게 밥을먹이 드랍니다
그후에 양잿물을 약하게 물에타서씯고 식초를 물에타서씯고 했의나
모두별로 였는데 쑥을뜯어다가 절구통에넣고 찧어서 맛사지하듯
바른것이 제일로 효과가 있었답니다
그똥냄새는 한달반 만에야 잡히드랍니다
우리 외할머니와 우리 어머니와 새내 이모는 항상 저렇게 이쁘고 솜씨도
좋은것이 시집온지 10년이 넘어가는데도 왜설태를 (임신을) 못하는가를
무척이나 걱정을 하였습니다
줄포 외숙모가 있는곳에서는 조심스러워서 말을안해도 셋이서는 만날때마다
설태문제로 걱정들만 하였드랍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전방에서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여름에 줄포 외숙모 둘째동생인 홍종오란 사람이 권총을들고 우리집에 왔습니다
우리 어머니한테
" 너이 씨벌년 왜 작은각시를 얻어주었냐 이개같은년아 이씨벌년아 "
" 이썩은놈아 그러면 새끼도없이 평생을 둘이만 살아야허냐 이밥통 같은놈아 "
그때 5살인 나는 울면서 우리 어머니와 싸우는 홍종오씨를 발로차면서
" 너그집 가버려 이새끼야 씨벌놈으 새끼야 "
라고 울면서 욕을 했었습니다
" 이씨벌년을 당장에 팍쏘아서 죽여버려 씨벌년 "
" 어서 쏴봐라이 썩은놈아 늬놈은 으런도 몰라보냐 이잡아 먹을놈아
우리도 아들이 셋이되는디 나를 죽이면 늬놈을 살려둘것같냐 "
하면서
" 줄포서 피난온것들을 맥여서 살려농게 은공도 모르냐 이썩은놈아
엇다데고 나한티 이년저년 하냐이 잡녀리 자식아 "
" 씨벌년을 팍 죽여버려 "
하면서 홍종오씨는 겁을주느라고 권총의 노리쇠를 후퇴전진 하면서
실탄을 재장전을 하였습니다
그바람에 누렇고 번쩍번쩍 빛나는 권총실탄 한발이 마당에 떨어지기에
내가얼른 실탄을 줏었습니다
홍종오씨는
" 아가 막둥아 그것 이리주어 "
하면서 권총실탄을 빼앗아 갔습니다
홍종오씨가 권총을 들고와서 쏴죽인다고 설치니 옆집인 풍천댁네나
대나실댁네 동천댁네 집에서도 싸움을 말릴려는 엄두를 못냈습니다
홍종오씨가 권총을들고 있으니 모두가 겁이낫던것 이었습니다
그런걸보면 우리어머니 고부댁은 참으로 대단한 여장부 였습니다
다른사람들 같았으면 사실데로 이야기하거나 벌벌떨고 잘못했다고
빌엇을 것인데 당당히 정면으로 맞선것을보면 참으로 우리 어머니는
대단하고 장한 고부댁 이었습니다
줄포 외삼촌에게 작은각시를 소개한것은 새내 이모였으나 우리어머니는
대가약한 자기동생이 벌벌 떨것을 생각해서 맞서서싸워 버렸드랍니다
홍종오씨는 누님이 소개 했다고하니 무조건 우리어머니 인줄알고
죽인다고 권총을들고 우리집으로 쫓아온것 이었습니다
홍종오씨는 자기형이 당시에 육군소령 이었기에 (홍종고 육사8기) 권총을
자기형한테 빌려갖고 우리집에 쫓아온것 이었답니다
그시절 줄포 외숙모네 친정식구들은 전라북도 빨치산의 유일한 해방구이고
지리산에서 토벌대에 쫒겨오는 발치산들의 안전한 휴식지겸 피난처였던
변산과 가까운 빨치산 점령구역 줄포에서 우리동내 부안촌 외숙모네 집으로
피난을 왔드랍니다
그때 그집식구들은 우리집에도 자주들왔고 밥도많이 얻어먹었으며 곡식과
반찬등 우리집 신세를 아주많이 졌었답니다
그홍종오씨도 우리집에도 여러번왔고 우리어머니가 해주시는밥도 여러번
얻어먹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줄포 외숙모네 집에가면 언제나 아주하얀 반바지가 한두개가 꼭빨래줄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때 홍종오씨는 지금의 하얀테니스 반바지같은 멋진반쓰봉과 하얀반팔
샤스를입고 이마에는 하얀수건을 두르고 마라톤 연습을 하는데 코스는
부안촌 - 주천삼거리 - 고부 - 영전 - 흥덕 - 성내 - 소성삼거리 -부안촌까지는
약30Km 정도 였답니다
88올림픽 직전인데 어느날 아침에 조회중인데 나를찾는 전화가 왔습니다
" 어이 나홍종오네 나알것는가 오늘 틈나면 도당동 중앙파출소 옆에있는
우리공장 남양잉크로좀 와주소이 파출소에 물어보면 잘아네이 "
하셨습니다
줄포 외숙모님과 두영이한테 여러번 들어서 부천에서 잉크공장을 한다는것은
진직부터 잘알고 있었지만 사돈이고 찾아가 보기가 좀그래서 안가보았습니다
" 참으로 오래간만 이네이 자네가 점잔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내가진직부터
우리공장에오는 정보과 형사들한테 들어서 잘알고 있었네 참으로 반갑네이 "
우리 어머니한테 권총들고 쏴죽인다고 욕하던일 하얀 반쓰봉을입고
부안촌앞에서 마라톤하던일 등등 옛날이야기를 한시간도 넘게하였습니다
싸리제 외숙모를 중매한 사람이 우리어머니가 아니고 새내 이모란것도
우리어머니와 싸운이튿날 저녁에 자세히 알았는데 그때는젊고 철없는때라
사과를 못드린게 우리어머니께 참으로 죄송했다고 하셨습니다
그싸움후에 새내 이모님은
" 우리 성이나됭게 그놈허고 해봤제 그놈이 나한테 권총들고 죽인다고 새내로
왔으면 어쨋것는가 지금도 그생각허먼 가슴이 벌렁벌렁 떨리네이 우리성이
나기는 났어잉 "
하면서 언니인 우리 어머니한테 고마워 했답니다
홍종오 사돈이 나를 보자고한 이유는 14년간이나 근무한 경리아가씨가
근1억정도를 빼먹었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것 이었습니다
전주사람 변호사와 서울의 잘아는 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자세히 물어보니
무조건구속 시키고나면 돈을 회수할수 있다고 하드랍니다
어머니와 여동생과 셋이사는데 어머니가 보통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자세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나서 부도맞은셈 치시고 여러가지
치부가 드러나고 후유증도 클것이니까 사건화를 안하는게 좋을것
같다고 말렸더니 내말이 100% 옳은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 진직이 자네하고 상의할것을 공연히 이사람 저사람 들하고 헛지랄만 했네이
우리누님 두영이 어머니는 자네 어머니를 친정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산것을
자네들도 잘알제이 친척들중에서 자네 어머니를 제일로 좋아했다네 "
하시면서 서랍속에서 하얀 봉투를하나 께내서 주시기에 정중하게 사양
하였습니다
" 남도아니고 친척같이 가까운 사돈간이데 절대로 안받겠습니다
사돈이지만 삼촌같은 어르신인데 외숙모님으로 봐서도 그렇고
절데로 안된다고 했습니다
외숙모님을 모시고 소요산 자제암과 한탄강을 건너서 전곡 갈비집에 갔던일
사돈과 홍종후사돈 두분이 북한산 산속에 잘만들어놓은 외숙모님네 친정
부모님산소를 다녀온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고마워 하시면서
" 우리 누님한테 그이야기를 서너번 들었네 자네가 어머니를 닮아서 그렇게
인정이 많다고 하드만 참고맙네이 "
하시면서 손을잡고 흔들어 주셨습니다
" 어이 그러면 휴가때든 무슨경비가 필요할때는 언제든 개념치말고 자네형사를
보내소이 그러고 자네가 데리고있는 형사들을한테 언제 갈비를한번 잘살라네이
언제든지 전화만 허소이 "
점심을 사주신다고해서 제차로 제관할인 도당파출소옆 정육식당으로
모시고 갔더니 홍종오사돈은 탐탁찮하게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아주 맛있는 돼지고기 항정살을 구어서 쌀뜻물에씻은 묵은지와
데친껫잎 으로 싸서 잡수시면서 몇번이나 맛있다고 좋아 하셨습니다
항정살이 맛있다는말은 여러 사람들한테 여러번 들었어도 이렇게
맛있을줄은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고기를 잡수고 나서는 돼지고기 목살과 3년된 묵은지로 기막히게
맛있게끓인 새콤한 김치찌게를 잡수어 보시고는 아주좋아 하셨습니다
" 여기에 이렇게 맛있는집이 있는것을 몰랐네이 오래간만에 맛있는
점심을 잘먹었네이 아주 감칠맛이나고 맛있그만이 식당주인 양반이
전라도사람 인갑네이 "
정육식당 아주머니는 장성 사거리가 고향이고 10년이넘는 단골이
많다고하니 홍종오 사돈도 단골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밥값을 낸다고 일어나니 주인아주머니가 진직이 계산되었어요 하시니
" 인자 자네를 따라서 어디든지 함께 댕겨야 허것네이 "
하시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형들과 부안촌 줄포와 정읍의 이야기도
한참동안 하셨습니다
1927년생인 홍종오 사돈은 고대 출신으로 마라톤으로 헬싱키와 영국등
올림픽을 두번이나 출전했던 우리나라 마라톤계에서는 솔차니 대단한사람
이었다고 했습니다
손기정선수 서윤복선수등 원로들과는 행사때마다 만나고 지금도 자주만나서
밥도잡순다고 하셨습니다
평상시에는 기록이 아주 좋았으나 올림픽이나 큰대회만 출전하면 왠일인지
실적이 저조해서 빛을 못보았다며 운이야기를 하시면서 아쉬워 하셨습니다
2010년 가을 홍종오 사돈의 큰아들 홍명로 아우의 전화를받고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으로 홍종오 사돈의 조문을 다녀왔었습니다
6.25 전쟁 시절에 농사만짓던 부안촌과 춘수리 사람들이 모두들 부러워 하면서
쳐다보았던 그렇게 자랑스럽게 잘나가던 홍종오님도 때가되니 하늘나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나버리 셨습니다
6.25가 나면서 군산 외할머니가 무슨 큰병으로 크게고생을 하신다는
소식을들은 줄포 외삼촌과 외숙모님은 군산에가서 군산 외할머니를
부안촌으로 모셔왔습니다
외삼촌과 외숙모님은 주로한약을 가지고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셨습니다
전쟁이 한창인때라 외삼촌께서는 촉진대라는 (우익단체)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있기에 항상 불안한 나날을 보냈드랍니다
우리 동내에도 좌익활동을 하는사람이 K. L. E. 등 3명이나 있었기에
언제 어느때 좌익들한테 잡혀갈지 모르기때문 이었습니다
그당시에는 권력을갖은 (자생 지방 공산주의자들) 그것들한테 잡혀가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는시절 이었습니다
외삼촌은 주로지서가 가까운 춘수리나 삼거리에서 지내고 줄포 외숙모는
언제나 우리집으로 피난와서 외할머니 방에숨어서 지내셨습니다
군산 외할머니의밥은 주로 작은형이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갖고 갖다드렸습니다
그다음 끼니는 손잡이가있는 대나무 바구니에다 밥을갖고가서 소쿠리에든
빈밥그릇을 가지고 왔습니다
작은형이 집에없을때 밥심부름 때문에 어머니는 고만고만한 동내 아이들이
많이 모여서노는 모정을 향해서
" 해팔아 해팔아 "
하고불러 댔습니다
집에온 작은형은
" 늬가좀가먼 동티나냐 내가 봉낫냐 나만가게 에이씨벌 "
하면 어머니는
" 늬가 더킁게 너를 보내제 어링것이 들고가다가 몬자처럼 (먼저) 넘어지먼 쓰것냐
지외숙모가 빵떡쪄오면 제일로 잘퍼먹는놈이 지랄허고있네 "
하였습니다
어쩌다가 작은형이 다른곳에 있어서 안오면 작은누나를 보내기도 하지만
어떤때는 어머니가밥을 갖고갈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다섯살인나는 누가 가든지 무조건따라 다녔습니다
어쩌다가 줄포 외숙모가 계실때는 사탕이나 과자도 한개씩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갈때는 언제나
" 군산네 좀어쩐가이 밥을잘먹어야 얼렁 일어낭게 밥을 억지로라도 먹어이 "
군산에 두고온 것들을 걱정하는 군산 외할머니에게
" 거그 새끼들은 저그아부지가 있응게 거두제 (보살피제) 안거두것는가
그것들 걱정은 허지말고 우선 군산네 몸댕이나 얼렁 낫소이 "
군산으로 시집가서는 남매를 낳았는데 아들은22살이고 딸은20살인데
딸은 작년에 시집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갈때는 군산 외할머니의 요강도 비워다놓고 수건을 빨아다가
군산 외할머니의 배위에있는 3개씩인지 4개씩인지 두줄로된 뜸뜬재
자국을 깨끗이 닦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손을잡고 한참씩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큰소리로 웃기도하고
둘이는 무슨 이야기를 많이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물묻은 수건으로 군산 외할머니의 얼굴과 손도닦아 주는것을
나는 여러번 보았습니다
사람좋은 줄포 외삼촌은 초등학교도 못다녔지만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왔고
남에게 웬수짓고 살일을 안했지만 그시대의 시대상황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져 있기에 우익편에선 죄밖에 없었답니다
제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요즈음의 로타리 클럽이나 라이온스 클럽같은
방위대와 촉진대라는 우익단체에 가입되어 있기에 빠져나올 수도없고
그렇다고 좌익으로 갈수도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외삼촌네 집에는 언제나 저녁에는 불을켜지 안았습니다
불이켜져 있으면 부안촌이나 춘수리의 좌익들이 잡으러 오는게 겁이나서
였답니다
그좌익들도 그래도 안쓰러워서 였던지 병든어머니가 누어있는 외삼촌집에는
불을지르지는 않았답니다
한번은 작은형이밥을 갖고가니 외삼촌이 옆집인 방주간댁네 큰사다리를
빌려갖고 오더니 지붕의 처마밑으로 손을깊이 깊이넣으면서 M1실탄을
처마밑에다 깊이깊이 박아서 넣드랍니다
" 간두깨로 (긴대나무) 건들어서 이것빼면 큰일난다이 누구한티 이것본것
이야기를 절대로 허지말아라이 "
하였으나 초등학교 6학년인 작은형은 중학교 3학년인 큰형한테 그이야기를해서
큰형과 작은형은 우리집의 사다리를 둘이 들고가서 장독대 옆에서 M1실탄
두발을 빼갖고 왔드랍니다
큰형은 나무로만든 화약권총에 그실탄으로 비들기나 꿩이나 산토끼를
잡는다고 하였답니다
큰형이 우리집 큰방에서 총을만지던중 총을방바닥에 놓는걸 보았는데 고무줄이
저절로 퉁겨지니면서 파앙하는 큰소리와함께 온방안이 화약연기로 가득찼습니다
총알이 방문턱응 뚤고나갔기에 방문턱이 절반이 없어지고 절반만 남았습니다
한참후 총소리와함께 도망갔던 큰형이 오더니
" 너괜찮혀 아픈디없어 어디 이리와봐 "
하기에 마루로 나가니 큰형이 손이랑발을 만져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어디선가 뛰어오시니 형들은 벼락같이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 이런 썩은놈의 새끼들봐 손모가지를 콱 분지러버려 "
하면서 마루와 토방에서 부서진 문턱의 조각들을 들고는 이리저리 도려보면서
한참을 쳐다보고는 외양간 부억에 던지셨습니다
그리고는 방에있는 큰형의 보물덩어리인 나무를 깍아서만든 권총을 들고 나가더니
헛청옆 똥통 큰항아리에넣고 똥바가지로 젓어 버렸습니다
큰형은 학교에 갈때도 책가방속에 넣어갖고 학교에도 갖고다니던 보물같은 권총이
똥통속에 들어가 버린것 입니다
그날저녁에 큰형과 작은형은 늦게와서 어머니한테 욕을들으면서 밥을 먹었습니다
저녁밥을 먹고난 큰형은 나에게
" 야 아버지가 총을 엇다두디 너봤냐 "
하기에 헛청옆또망 (변소인분) 3개중 가운데 것에넣고 똥바가지로 졋어버렸다고
했더니 작은형과함께 그권총을 똥바가지로 건져가지고 대나무아래 숨겼습니다
줄포 외삼촌은 죄익들이 자기집에 불을지르면 그실탄이 폭발하면서 터지면
불지른 놈들을 맞혀서 죽여버리 겠다는계산 이었던것 같습니다
참 모진세월 그시절의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들 같습니다
지금의 주사파 전교조 강성노조등 50몇개나되는 친북 단체들이 김정은의
서울방문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리산과 백운산 황매산 황석산 거망산 기백산 금원산 괘관산 등지에서
20000여명의 빨치산들은 북한의 인민공화국을 위해서
토벌대의 총에 맞아서 죽고
겨울에는 추워서 얼어서 죽고
토벌대에 포위되어서 배고파서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그들의 입산시 각오이고 입산선서
이기도 했답니다
지리산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의꿈
지리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의꿈
지리산 백야전사 사령관 백선엽 소장의꿈은 각각 얼마나 달랐을까요?
이현상 (1905-1953.9.18)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와부리에서 4남2녀중 4남으로 출생
부친 이면배는 (진사 진산면 면장10년 1000석꾼등 여러설이 있음)
당시 전북 금산군 진산 국민학교를 다닐때 항상 1등을 하였던 수제였기에
국민 학교동창인 전국회의원 유진산도 (국회의원 신민당대표) 공부를
퍽잘했으나 공부를 더잘하는 이현상 때문에 항상 2등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당시 전국적으로 명문인 고창고보를 2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을가서 중앙고보를 졸업하였고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중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제고향 정읍 근처에서는 이현상이 다녔던 고창고보 출신들은 6.25.전부터
자생 타생 공산주의자들의 못자리 였다고 했습니다
이현상의 사망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1.군벼락부대 오상사팀 6명의 매복조가 사살
2.차일혁 전투경찰대가 이현상이 경남도당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미리알고
빗점골에서 잠복해서 사살
3.북에서 남한출신인 박헌영과 이승엽을 숙청후 북에서 급파된 저격병이 사살등
여러설이 있으나 전투경찰대가 이현상의 시신을 확보했기에 국방부에서는
전두경찰대가 사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고창고보 출신은 근90%는 좌익 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당시에 지방의 좌익은 면직원이나 초중고 선생님등 거의가 식자층 이었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토지개혁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잘산다고하니
가난한 소작농이나 일꾼출신들이 너나없이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동조하여
빨치산들을 따라서 아무것도 모르고 순창 회문산이나 고창 방장산으로
입산하였다가 그들도 빨치산이 되어서 산속에서 활동하다가 토벌대에 의해서
거의가 사살되어 버렸드라고 했습니다
자수를 하고싶어도 자수를해도 지은죄가 있으니 자수하면 국군들이 빨치산들은
전부죽여 버린다고 교육하니 자수도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까운 젊음이
토벌대의 타켓트가 되어서 사라져가 버린것 입니다
방장산 봉수대아래 신림면 용소골짜기 에서는 대낮에 비행기가 휴발류를 뿌리고
가기에 산속이 빨치산들이 손으로 휴발류를 문지르면서 무슨일일까 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는데 전투기가 지나가면서 소이탄을 갈겨버리니 불바다가
되어버렸 드랍니다
저도 초등학교 다닐때 방장산 용소골에서 불벼락을 맞은사람중 앞동내 안틀사는
머리가 많이타서 조금밖에없고 얼굴에 큰화상 흉터가있는 사람과 아꼬라실에사는
사람은 양손과 목과 얼굴까지 흉터가심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제고향 정읍 소성면 면직원이든 면당위원장 한주수란 사람도 붉은완장 덕분에
모가지에 힘을주고 설치며 나대다가 전세가 기우러지니 숨어다니다 51년겨울
눈이왔을때 두승산아래 소성면 만수동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고 했습니다
(31년생 소성면장역임 이종형 이상문님)
이현상은 간호병 (비서겸 산중처) 하수복이 임신하여 8개월이되어 배가많이
불러오니 토벌대의 L-9 비행기에서 살포한 자수권유 삐라를 쥐어주면서
젊은너는 내려가서 꼭 살아야하니 자수를 하거라 하였답니다
절대로 안내려 가겠다는 하수복에게 토벌대에게 쫒겨다닐때 캄캄한 밤중에
산속에서 있었던 일이라 누가 임신을 시켰는지 모른다고 하거라
학교에 다니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인민공화국이 좋다고해서 산으로 들어왔다
등등 교육을 시켜서 귀순증이 인쇄된 삐라를 들려서 산아래로내려 보냈답니다
하수복은 임신덕에 형무소에도 안가고 훈방조치 되어서 1953년 초여름에
아들을 낳았드랍니다
이현상이 그해 9월18일에 사살되었으니 유복자는 아닌샘입니다
그 아들의 성은 이씨가아닌 하씨로 호적에 올렸다고 했습니다
수재인 이현상의 DNA덕에 그아들은 공부를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법고시 공부를 하였는데 하수복이 이현상의 아들이란걸 알려주어서
합격해도 연좌제로 신원조회에서 걸러진다는걸 알기에 선생님이 되었고
40대 중반에 울산인근의 중학교에서 교감을 하였다고 함니다
(부산 국제신문 故최화수 기자)
지리산에서 항상 이현상을 견제하면서 괴롭히고 덕유산 송치골 회의에서
남부군 사령관이던 이현상을 평당원으로 강등시켜 버렸던
박영발 전남도당 위원장 ( 1911-1954-2.21.경북 봉화 대구 철도노동자 )
만주에서 항일운동 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었다고
하였습니다
지리산 함박골상단 묘향대옆 비밀 은거지에서 여비서 간호원 보위병 무전사 의사등
8명이 은거하다가 식량문제로 이동 한다고하니 큰부상을 당해서 이동이 불가능한
경성의대출신 (서울대) 의사박갑수가 다같이죽자고 하면서 30발들이 카빈총을
난사하여 박영발등은 다죽었으나 부상입은 여비서 이정례가 의사 박갑수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박갑수도 죽었다고 합니다
이튿날 식량을 구해갖고온 이주현덕에 이정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그진상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박영발의 연락병인 소년빨치산 김영승은 토벌대에 검거되어서 38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후 만기출소한후 2005년 2월에 광주시민단체와 기자들을 데리고 그곳에 갔기에
박영발비트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은밀한 그곳에는 그당시쓰던 삐삐선 구급약품 등사판 건전지 고무신 등등이 있었으나
등산객들과 기자들과 여러 방송국에서 다가져가 버리고
2010.10.15. 제가 여러 사람들의 산행기를읽고 도상연구를 하여서 어렵게 찾아갔을때는
새로만든 5m 높이의 사다리밖에 없었습니다
2010.10.14. 영등포역 (22:50분) - 구례구역 (03:30분) - 구례터미널 (04:00시)
터미널옆 단골 김밥집에서 김밥을 3줄사서 배낭에 넣었습니다
오전에4번 오후에4번 다니는 피아골에가는 버스가 07:30분에야 있기에 06:00시
하동가는 버스를타고 가다가 피아골 삼거리에서 내렸습니다
이른아침 시간이지만 피아골로 들어가는 승용차들이 여러대가 있었습니다
혼자탄차 둘이탄차도 있었습니다
나는 빈차로 갈때는 걸어가는 사람들을 꼭태워다 주는데 속으로는 서운하고
괫심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만 이것은 그져 부질없는 제희망 이었을것 같습니다
나는 아기를 데리고있는 엄마들이나 할머니나 할아버지 수녀님 남여스님과
내팔이나 필리핀의 외국인 근로자 들을보면 꼭원하는 곳까지 태워다주고
있습니다
3박4일을 지내야 하기에 45리터 배낭은 퍽묵직 했습니다
근2km 지점에서 1.4톤 화물차가 오기에 손을들었더니 피아골 입구까지
태워다 주셨습니다
구례 토지면에서 녹차밭과 농사를 짓는다는 박종선님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제 파란 반지를보고 묻기에 사창리 27사단 에서근무 했다고하니 자기도 인근의
명월리 15사단출신 이라며 반가워 하면서 명월리를 꼭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외제차는물론 에쿠스나 그랜져등 고급차들은 등산객을 절대로 안태워 주었습니다
천왕봉 - 치밭목 - 대원사로 내려와서 유평리에서 주차장 까지의 지칠데로 지치고
힘들때에도 그런차를보면 지친 등산객들도 손을들지도 안는답니다
그들은 너그덜 X빠지고 있구나 더X빠져 버려라하고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거라 나도 99년식 중고인 5259 가있단다 당신들 차만은 못해도 다양한 사람들이
힘들게 신에서 힘들게 내려오는 사람들이 어떤 박탈감 같을걸 갖지안고 흐뭇하게
태워다주고 우리집 사람한테도 칭찬도 가끔받고 산단다
우리 집사람과 선운사 도솔암에서 문근이조카 중학교 동창들 지리산 피아골에서
구례군청 직원들 청학동에서 진주사람 형제들 등등을 태워다 주고나서 칭송받았던
생각을 하면서 지쳣지만 터덜터덜 혼자서 묵묵히 혼자서 위로하면서 내려온답니다
언제나 등산객들에게 차를태워주는 사람들은 화물차나 봉고차나 소형차들 이었답니다
피아골로 단풍 구경가는 등산객들은 어디서들 무엇을들 타고왔는지 여기 저기서
많이도 나왔습니다
울긋불긋 값비싼 명품 등산복에 삼삼오오 가는걸보니 초등학교때 소풍갈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환갑진갑 다지난 중늙은이가 혼자서 퉁퉁한 배낭을메고 혼자서 가는게 조금은
안쓰러운 것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웠 습니다
표고막터와 삼홍소를 지나니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피아골 산장이 보이는곳 바위에 앉아서 안부도 전할겸 송동선
동생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 동선아 재작년가을에 수정엄마랑 김수훈씨랑 하룻밤잣던 피아골 산장이다
12월달에 천왕봉에서 나지리산 100번 기념행사때 수정엄마랑 꼭와야 한다이 "
" 예 둘이 꼭 갈께요 토요일날로 잡은것 이지요 제가가야 형님가오가 서지요이 "
하였습니다
2014년에 하늘나라로간 초등학교동창 송기찬의 막내동생인 송동선은 키도크고
힘도좋고 요리학원을 안다녔어도 음식도 아주 맛있게 잘하기에 송동선 아우와
지리산이나 덕유산 그리고 설악산을 함께갈때는 아무런 걱정이 없답니다
용변보고 있으면 무거운 내배낭을 500-600m 씩까지 자기앞 가슴에메고 간답니다
산장에서 한소곰 자고나면 맛있는 찌게와 밥을해놓고 형님 밥잡수시고 주무세요
하면서 깨운답니다
작년봄에 함태식 선생님 후임자로 피아골 산장지기로온 구례사람 김대장은
나를보더니 아주 반갑게 웃으면서
" 오선배님 돈내라고 안하니까 가끔오셔서 주무시기도 하세요 "
하였습니다
배낭에서 오징어 두마리와 햄을하나 꺼내서주고 임걸령으로 향했습니다
200g 정도인 그것을 덜었다고 배낭이 퍽가벼워진것 같았습니다
어디서 얼마나 빨리왔는지 피아골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비켜주면서 서있다가는 한이없겠기에 땀을흘리면서 급경사 비탈길 통나무계단을
땀을 흘리면서 오르다보니 노고단 - 천왕봉 으로가는 등산로가 나왔습니다
배낭뒤에서 이자를 뽑아서앉아 땀도식힐겸 찬왕봉 쪽으로가는 등산객들을 구경했습니다
모두들 힘은들어 하면서도 모두가 밝고 즐거운 표정들 이었습니다
임걸령 샘터에는 등산객들이 100명도 넘는것같고 시장터 같았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시원한 임걸령 샘물로만든 냉커피를 마시면서 갈길이 멀기에
김밥 두줄을 든든하게 먹었습니다
반야봉 오름길에 노루목 까지는 배가불러서 처음에는 거북스러 웠으나 땀흘리면서
한참 오르니 곧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힘들게 땀을뻘뻘 흘리면서 반야봉에 (1732m) 올라갔더니 언제나 만나서는 안되는
반갑지안은 손님인 관리공단 직원이 둘이나 바위에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가야할 비지정 등산로인 반야중봉 (1722m) 로가다가 저사람들한테 걸리면
벌금을 50만원을 내야합니다
이곳에서 걸리면 장흥 법원에서 구례군으로 벌금통보가 되어서 구례군에서는
수시로 벌금을 납부하라고 독촉하고 볶아댄 답니다
지리99 산사나이란 하동 화력발전소 직원은 비지정 등산로인 문수대에서
돼지평전으로 나오다가 바위에 앉아서 쉬는데 관리공단 직원들이 오기에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하니 인사도 안받고
" 안녕 못하네요 주민등록증좀 주세요 "
하드랍니다
그후에 두달쯤 있으니 하동군청에서 50만원을 납부하라는 통지서가 몇번이나
날라오드 랍니다
너무나 화도나고 억울해서 벌금을 안냈더니 나중에는 직장으로 독촉장이 오기에
별수없이 벌금을 납부할수밖에 없었답니다
얼마나 섭섭했으면 나보다 3살덜먹은 지리99의 강호원님은 벌금 50만원을
납부한 영수증 사진을 경각심겸 산행기에올려 놓으셨습니다
저도두번 걸렸는데 2005년 여름에는 태극종주 정찰을 하면서 뱀사골 산장에서 나오다가
태풍으로 통제되었는데도 남원인월 덕두봉아래 흥부 마을까지 갈길이머니 노고단으로
오다가 노고단 초소에서 걸렸는데 30살도안된 젊은직원이 나를보더니 겁주느라고 실눈으로
째려보면서
" 응 당신 잘걸렸어 통제 되었는데 왜다녀 "
하면서 반말을 짓거리기에 하도 화가나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면서
" 야이사람아 자네지금 환갑지난 사람에게 반말할수있는 권한도 갖고있는가 ? "
" 여러소리말고 빨리 주민등록증이나 주세요 "
하기에 서울에서온 초중고 검도 수련생들 50여명이 천왕봉가는 사진을 기념으로 찍은걸
보여주면서 이애들말고도 수십명이 가드라 그래서 나도 이쪽으로 왔다했더니
그사람들은 그사람 들이고 당신하고 무슨상관 이냐고 하기에 그때부터는
" 야이 무식한놈아 헌법에도 모든국민은 평등하고 법도 평등하게 적용된고 했어임마 "
" 당신이뭔데 근무자인 나한테 욕을하고 시비를해요 "
" 너말잘했다 젊디젊은 근무자가 환갑지난 사람한테 당신잘걸렸어 하고 반말해도되냐
너이새끼 일본놈 헌병이냐 이세끼야 "
하였더니 멍하고 쳐다보드니 그러면 나하고 사무실로 가자고해서 500m 거리의 노고단
대피소에 갔더니 소장님께서는 그者한테 이야기를 듣고나더니 자기들이 불리할것
같으니 나에게 공손하게 절을하면서 이해하시고 가시라고 하기에 나오면서 그者의 얼굴을
쳐다봤더니 빤히 보면서도 잘가라는 인사도 안하드군요
2008년 초가을에는 칠선계곡에서 이영진님 박찬선님 송동선과 넷이서 걸렸는데
앞에선 박찬선님에게 핸드폰 번호를 물어본후 바로 전화를하니 바로벨이 울리니
" 정직한분들 이시네요 미안하지만 주민등록증들 주세요 "
하면서 빨간적발 통지서를 꺼내기에 늙은내가 칠선계곡이 어떻게 생겼는가 가보자고
사정을해서 나때문에 이곳에 왔으니 저하나만 적발해 가세요 하면서 벌금이 나오면
집에서 쫒겨난다고 사정사정 했더니 20리터 쓰레기 봉투를 한개 주면서 쓰레기를
가득담아서 장터목산장의 이종화님께 갔다주면 적발 보고서를 진주 법원으로
안넘긴다고 하였습니다
착실한 송동선 동생이 과자봉지 라면봉지 소줏병등 여러가지 20리터를 장터목 산장의
이종화님께 갖다주니 그분은 바로 적발팀에 전화를 해주기에 해결 되었습니다
백무동으로 내려오다가 이영진님이 아주 비경이고 절경이 라고하셔서 그러고도 속없이
또비지정 등산로인 한신지곡으로 내려왔습니다
가을이라 해가짧으니 가내소 폭포에오니 어두워 졌습니다
내또래의 진주산다는 늙어보이는 영감둘이 밤눈이 어둡다고 더듬거리니 송동선 동생은
자기 해런턴을 그분들에게 쓰워주고 그영감들을 데리고 내려왔답니다
오늘 50만원 벌었다고 자기 배낭에서 비닐봉지를 꺼내서 쓰레기를 줏으면서 오는걸보고
너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1등국민이고 모범산꾼 송동선이다 하고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다른사람들과 품앗이해서 정상사진을 찍고나서 의자에 앉아서 쉬고있는데
" 연세도 퍽있어보이 시는데 배낭을 너무나 무겁게메고 다니시네요 어디서
오셨어요 "
하면서 관리공단직원중 나이가좀 든사람이 배낭을 들어보면서 물었습니다
이야기하는 폼새로 보아서 쉽게 내려갈것 같지가 안아서 등산로로 내려오다가
우회전 하여서 잡목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땀은나지 갈수록 우거진 잡목과 미역줄기 때문에 참으로 혼이나면서 숲속을
헤치면서 빨치산들처럼 전진 또전진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하동바위 위에서 이영진님과 현대자동차 신입사원들이 극기훈련을
하는 긴대열을 피해서 빨리간다고 등산로가아닌 산속으로 오르다가 혼났던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한시간이 훨씨넘게 고생하고 나서야 반야중봉 으로가는 등산로를 만났습니다
숲속에서 배낭을베고 누운체로 땀을 닦으면서 한참을 쉬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높은 곳에서 잠들어계시는 연안김씨 할머니
묘소에 (1722m) 공손하게 목례 두번으로 성묘를 드리고 묘향대로 내려갔습니다
묘향대에가니 호림스님이 밖에나와 계시다가 나를보더니 웃으시면서 반겼습니다
몇년전부터 인사를하고 지내고 있기에 합장하고 인사를 드리고 악수도 하였습니다
묘향암 (148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곳의 암자이고 호림스님이 주지입니다)
호림스님은 10수년 전부터 이곳에서 누렁이 개한마리와 둘이살고 있답니다
등산화를벗고 법당에 들어가서 약소한 시주를하고 정성들여서 7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희근이를 올해 1차년도에 소령진급을 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년에는 큰처남 서석주가 삼성화재에서 꼭 임원으로 승진하게 해주십시요 등등
시주는 조금하고 소원 청탁은 많이부탁 하였습니다
마루에 귤3개와 쌀과자와사탕 몇개를 놔두고 오늘 목표인 박영발 비트로 갔습니다
나보다 7-8세 아래로 보이는 호림스님은
" 샘터 아랫길로 길이잘나 있어요 두어달 전에는 누가 이정표도 만들어 놨어요 "
하셨습니다
박영발 비트에 가보니 정말로 기똥찬 비트 (숨어사는 자리) 자리였습니다
은폐엄폐 되어있고 사다리만 없으면 밑에서봐도 모르게된곳 이었습니다
사다리 5칸을타고 올라가서 한참을 구경하고 내려왔습니다
지리산을 근100번 다니면서 칠선계곡 한신지곡 초암능선 선녀굴 통천문근처등
지리산에서 험하다는 곳곳을 거의살펴 보았지만 이런곳은 처음 보았습니다
박영발 비트를 구경하고 3km 이상빠른 직선길로 빨리가야 하기에 묘향대아래
험한 함박골로 내려오다가 등산로를 못찾아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40대의
남여2쌍을 만났습니다
대전사람들 이라고하며 여자하나가 일행여자에게 남자들이 안듣게 조용히 늦게
들어가면 머시기 아빠한테 디지게 혼날것인데 큰일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노프를잡고 내려가는 이곳 함박골이 등산로라고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먹을것도없고 렌턴도없고 로프도없는 아마츄어 엉터리 산꾼들 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자세한 지형설명과 로프사용 안전교육을 시키고나니 골짝을 헤멧더니
허기가져서 죽것다고 하기에 옛날 큰눈깔사탕을 한개씩주고 부천 화성식당에서
얻어온 누릉지도 한웅쿰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음부터는 물과 먹을것은 충분히 갖고다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안전하게 내가 내려가는 곳으로만 내려오라고 하면서 로프를잡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야기 소리를 들었는지 산위 능선에서 누가 큰소리로
" 나좀 살려주세요 나좀 살려주세요 나좀 데리고 가주세요 "
하였습니다
" 무조건 우리쪽으로 내려오세요 여기서 기다릴께요 "
하였더니 대전팀 남자들이 자기들은 먼져가겠다고 하면서 내려갔습니다
여자들은 망설이면서 안갔으면하는 눈치였지만 따라갈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자들은 대충 여자들은 아주 고맙게 인사를하며 악수도하고 내려갔습니다
함박골에는 로프가 없으면 다닐수가 없는험로 이기에 바위절벽 난코스에는 곳곳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데 비지정 등산로 이기에 1-2년에 한번씩 관리공단 에서는
그로프들을 전부 잘라가 버리기를 반복적으로 합니다
그러고나면 지리99의 답지선생님 (순천고출신 목포외고 영어선생님) 같은분은
자기돈으로 작업용비닐 싸구려 로프를사서 배낭에 넣고가서 난코스 곳곳에 로프를
메어놓는 답니다
나는 서북능선 세걸산에서 팔랑치쪽에 의정부 산사랑 산악회에서 얻은 오래된
아주좋은 무지게색 로프를 2곳에 설치하여 놓았습니다
그로프는 신품때는 1m에 20000원짜리 펵좋은로프 였습니다
한20분 있으니 산에서 키큰남자가 내려왔는데 거으다 죽어가는 폼새였습니다
길도없는 곳에서 헤메면서 얼마나 힘들었던지 바지도 한쪽이 터지고 털썩주저
앉아서 숨을몰아 쉬면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 습니다
양쪽 입가에는 침이 마르고 또말라서 굳어가지고 국수가닥이 붇어있는것 같았습니다
티타늄 컵으로 물을한컵 드리고 배낭에서 큰눈깔사탕을 한개를주니
" 아이고 이제는 살았네요 시례지만 사장님 몇살이세요 "
하기에 47년생 이라고하니 자기는 48년생이고 인천사는 김진 이라고 하면서
죽을때까지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인천 연수동에서 종업원 8명을 데리고 제조업을 하는데 자기동내와 옆동내의
산악회 회장도 5년을했고 지금은 고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진님도 렌턴이나 물등 먹을것등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기는 원래 밤눈이 어두워서 밤에는 봉사가 되는데 어둡기전에 내려가야
할것인데 큰일났다고 했습니다
내배낭에는 프랑스제 좋은 해드렌턴도 있으니 걱정말라고 안심을 시켰습니다
김진님은
" 아이고 이제는 살었네요 내가 이렇게 죽을고생을 할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
그러면서 앞으로는 등산로로만 다녀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김진님에게 비상약품 하루정도먹을 몇가지 먹을것들 렌턴 호르라기 비닐우의
비상용 라이타 정도는 꼭 배낭에 비닐봉투로 잘싸가지고 넣어두라고 하였더니
꼭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성삼제 - 노고단 - 반야봉 - 화개재 - 뱀사골 - 반선 코스인데 자기는 등산로를
잘알고 산도 잘타기에 자기혼자서 반야봉에서 반야중봉을 거쳐서 묘향대 까지는
잘왔는데 묘향대에서 주능선으로 가는길을 못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그능선 뒷능선 아래로 등산로가 잘나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려가는데 4-5m 짜리 절벽에서 대전 사람들을 또 만났습니다
이들은 4명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축구선수들이 전반전을 뛰고난모습 같았습니다
난코스 두개는 힘들게 바이페스를 했는데 이곳에서는 못내려가고 헤메고 있었습니다
내가 조고만 바위에 로프를 두르고 두줄을 꼭잡고 양발을 사용해서 사뿐히 내려서는걸
보더니 다섯사람이 모두다 박수를 치면서 환호해 주었습니다
우선 여자들부터 배낭을 나한테 던지라고해서 한쪽에 받아놨습니다
로프 두줄을잡고 양발을 사용하면서 천천히 내려오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로프두줄울 내허리에 꽉감고 내려오는 그들을 코치했습니다
한사람이 내려올 때마다 화이팅 하면서 박수를들 쳐주기에 고마웠습니다
다내려온후 로프한쪽을 잡아당기니 20m짜리 로프가 스르르 전부다내려 왔습니다
또한번 박수가 나왔습니다
여자들이 소변본다고해서 남자들이 먼져내려 갔을때 여자들에게 조용하게
나는 작은 아버지같고 삼촌같으니 먼저 양해를 구하고 한마디 한다면서
" 저까짓 놈들이 젊은 엄마들이 병이난다면 병원을 데려가서 치료해주냐 앞으로는
저런 애들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마세요 하늘같은 내남편과 내새끼들이 보석인것을
명심하고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내가정을 꾸려야 합니다 "
하면서 기분좋게 나무랐더니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어둑해질무렵 화개재에서 뱀사골로 내려오는 주등산로를 만나니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좋아 했습니다
이곳에서 여자들과 두번째로 악수를하고 남자들과도 악수를하고 헤어졌습니다
대전 사람들은 주등산로 에서는 완전히 구보를하듯 모두들 뛰어서 갔습니다
밤눈이 어두운 김진님에게 헤드렌턴을 쓰워주고 나는 뒤를따라서 가는데 김진님의
한참을가니 통화권 지역인지 전화기 에서는 계속벨이 울렸으나 통화는 안되었습니다
김진님이 019인 내전화로 산악회버스 운전수와 통화를 하고나더니 와운마을이
어딘가요 그마을 입구까지 식당차가 온다고 하네요 하였습니다
함박골 입구에서 반선 (뱀사골마을) 까지는 6.5 km 라고 쓰여있기에 약1.5km 만가면
와운마을 입구라고하니 김진님은 아주 좋아했습니다
지리산을 20번넘게 다녔어도 와운마을은 처음들어 본다고 하셨습니다
지리산을 한100번쯤 다니면 나같이 지리산길 눈이떠질 것입니다 했더니 자기도
눈이 떠질때까지 다녀보고 싶은데 될란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름도 누워서 넘는다는 와운마을 입구에 내려오니
전주 광속단과 지리99 와 나와절친한 내사랑지리의 공용철님의 단골인 일출식당차가
와있어서 3km 는 그차를타고 반선 일출식당에 갔습니다
운전기사님이 김진님과의 통화내용을 중계방송 했기에 식당밖과 안에서 43명이
모두들 우리에게 우뢰같은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그런 박수를 받아보고 나는 혼자서 속으로는 황홀 했습니다
김진님을 데리고온덕에 산체비빔밥을 잘얻어먹고 8km 거리인 인월까지 그산악회
버스를 타고왔습니다
내릴때에도 인천 분들한테 박수를 받으면서 내렸기에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저는 인월모텔 에서자고 내일 새벽에 전주에서 나를 데리러 오시는 지리산 선생님인
이영진 전무님을 따라서 왕시루봉에 약속이되어 있었습니다
서울에는 안내산악회가 (돈받고 관광버스로 아침에는 그산앞의 등산로 입구에 실어다주고
오후에는 그산뒤의 등산로 출구에서 서울로 싣고옴) 1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해올산악회와 산수산악회는 값이아주 저렴하면서도 장거리를 뛰어주기에
저는 그두산악회의 오랜단골 입니다
2012년 초가을에 피아골 - 반야봉 - 뱀사골 산행이기에 약25Km 장거리 산행인데
오후에는 일기예보에 없었던비가 많이왔습니다
노루목에서 반야봉에 안올라가고 곧바로 화개재에서 9km인 뱀사골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여러번 다닌길이기에 자신감을갖고 반야봉에서 반야중봉 까지는 잘갔는데
반야중봉에서 심마니능선을 타고간다는게 가다보니 달궁능선을 타고 내려가 버렸습니다
비는오고 짙은운무는 끼어서 길은 잘안보이지 우의때문에 땀은나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먹을것이 충분하고 우의가있고 언젠가 초봄에 강화 보문산 에서는 소나기를
맞으면서도 불을피운 나인데하는 자신감을안고 내려갔습니다
다행히 큰비는 아니었기에 무릅정도의 달궁계곡은 건널만 했습니다
남원 산내 - 구례 천은사에 이르는 관광산간 도로에서 내려오는 차가좀 태워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랜져 쏘나타 에쿠스 들에게 비를맞으면서 손을들어보는 내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약속된 시간안에 도착을 못하면 달궁 민박집 에가서 40000원 을주고 민박을해야 했습니다
18: 10분 뱀사골다리앞 집합시간이 7-8분밖에 안남았습니다
조금있으니 검정스타렉스 봉고차가 오기에 손을들었더니 서주었습니다
봉고차에는 남자3명 여자2명 이타고 있었으며 구미 에산다고 하면서 암벽도 하기에
좋은 로프도 여러동이 실려 있었 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가시다가 휴게소에서 커피라도 사드시라고 빗물에젖은 20000원을
드렸더니 나이도 드신것 같은데 무슨말씀 이냐고 극구사양 했습니다
이야기중에 해올산악회 범생대장님이 내번호가 여러번 찍힌걸보고 전화가 왔습니다
" 오해봉 선생님 말고도 4명이 아직 안와서 회의결과 30분을 연장하기로 했어요 "
했습니다
구미분들 에게는 제가 10몇년만에 구해서 배낭에 갖고다니는 독사예방 특효약인 석웅황을
드리면서 망치로 잘게부수면 다섯분이 갖을수 있을것 이라고 했더니 운전하시던 리더분은
귀한 석웅황의 전설을 들었고 하면서 아주좋아 하셨습니다
방준표 전북도당 위원장 ( 1906-1954-1.31. 경남 통영 대구 여중교사 )
박영발과함께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코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을 나온인테리
공산주의자 입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여중 교사를 하던중 1948년 10월 여순 반란사건후에
지리산에 들어가서 빨치산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현상과 리승엽의 합의로 전북도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자기와 러시아유학 동기인
박영발과함께 이현상 남부군사령관의 유격활동 저조등을 문제삼아서 덕유산 송치골
간부회의에서 이현상을 평당원으로 격하시킨 인물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덕유산 송치골이 궁금하여 저와절친한 최화수기자와 (ROTC9기) 덕유산아래 장수
계북면이 고향인 지리산 덕유산의 고수인 이영진님에게 문의했으나 모른다고했음)
방준표에게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키도크고 아주예쁜 여비서 신단순이 있었는데
이동중에는 몸이약한 신단순이 산길을 잘못걸으니 젊은 빨치산들한테 신단순을
교대로 업고다니도록 하였기에 아주 웃음꺼리고 불만이들 많았드랍니다
덕유산에서 토벌대에게 포위되어서 도저히 살수있는 가망이없어 보이자 자기보다
25살 덜먹은 산중처인 신단순과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했다고 합니다
이현상처럼 젊고어린 산중처인 애인은 귀순을 시키고 살만큼산 자기나 죽을일이지
참으로 비열하고 더러운 공산당들 같습니다
평양 애국열사 묘역에는 이현상처럼 방준표의 가묘와 비석이 있어서 그사진이
간첩과 좌파들덕에 여러곳에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차일혁 (1920.8.20.-1958.8.9.)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 출신인 차일혁 총경은 중국 중앙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팔로군으로 항일운동을 하였다고합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50 12월에 팔로군출신 경력덕에 경감으로 특채되어서 18전투경찰
대대장이 되었고 전투경험이 풍부하여서 큰전과를 여러번 올렸다고 합니다
51.7.11. 전북 장수에서 이현상의남부군 빨치산 부대와 첫전투 승리
51.8.15 - 9.25. 전북 순창 가막골 탈환 (전북도당 빨치산 보급창고 빨치산 훈련소)
그후에 정읍 칠보발전소 탈환과 방어작전 등등
여러 전투에서 빨치신들을 많이격퇴 시키면서 승승장구 하였다고 합니다
53.5.15. 총경으로 승진하여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2연대장
53.9.17. 차일혁 전투경찰대에가 빗점골에서 이현상을 사살하여서 택극무공훈장이
3개가 수여되었다고 구전으로는 전해지는데 근거는 없습니다
차일혁 총경의 훈장포상 기록은 화랑훈장과 충무무공훈장 으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리산 주위의 살아있는 빨치산들과 아주 우호적이고 제일로 많이 교류하고 지내는
부산 국제신문의 최화수 논설고문겸 부산여대 창작문학과 교수는 이현상을 사살한
벼락부대 출신의 오상사와 부산 남구 용호동에서 점심을 먹어가면서 근하룻동안
인터뷰를 했는데 이현상을 사살했기에 빨치산 출신들이 자기를 죽이러 찾아올까봐
10년 이상을 나환자들의 빈민 재활촌인 용호동에서 숨어서 살았다고 하드랍니다
부산국제신문 최화수기자가 인터뷰한 오상사 이야기는
벼락부대의 오상사일행 6명은53. 9.18. 오후에 빗점골에서 매복근무중 왼골에서
빗점골로 내려오는 공비4명을 사살하고난후 철수하여 부대로돌아 왔드랍니다
그후에 차일혁 총경네 2연대 전투경찰들이 총소리를듣고 빗접골에 왔는데 그중에는
빨치산을 하다가 자수하여서 빨치산들의 은거지를 안내해주던 빨치산 출신이
있었는데 이현상의 얼굴을 보더니 늙수구래한 시체가 이현상 이라고 하였답니다
허름 하지만 미제 사지의 좋은옷을입고 있었으며 소련제권총1정 일기와한시
염주와 가래2개를 갖고있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상사는 이현상의 모가지를 떼어갖고 오지안았다고 상관한테 발로 차이면서
매를많이 맞았다고 하더랍니다
그당시에는 그져 평범한 빨치산 인줄알고 철수했다고 하드랍니다
그바람에 전투경찰 2연대에는 태극무공훈장이 3개가 수여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이 얼마나 유명하고 대단했으면 시체가 썩지안게
처리한후 서울로 올려보내서 청경원 앞에서 이현상의 시체를 3일간 전시한후에
하동으로 내려 보냈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내무부장관과 치안국장을
크게 치하했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알튼이가한개 빠졋다고 좋아하셨다고 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도 창경원앞에 가셔서 이현상의 시신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금산 이현상의 고향에서는 숙부등 친척들이 모두들 시신인수를 거절했기에
10.8.일 차일혁 총경은 화개장터 근처의 섬진강가에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칠불암에서 빨치산 첩자인줄알고 잡아온 스님이 독경을 드리면서 죽은적장인
이현상에게 예를 갖추어 주면서 하늘을향해 권총도 3발을 발사해주고 시신을
화장해준후 자기철모에 M1으로 뼈를찧어서 섬진강에 뼛가루를 뿌려주었다고
합니다
전시에 참으로 대단한 자랑스러운 전투경찰대 2연대장 차일혁 총경 이었습니다
그당시에 공군의 김영환 대령은 (김정렬 공군참모총장 동생) 전투기의 강력한
폭탄으로 합천 해인사를 폭파해 버리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절했다고 큰징계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구속위기에서 친형인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대통령께
8만대장경등 국보급 여러문화재가 많이있는 해인사에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구속은 면했다고 했습니다)
10여년전 조선일보에는 미국에사는 김영환 공군준장 (54년도 장군진급후 강릉
상공에서 기체결함 추락사망함) 부인의 인텨뷰가 실렸는데
" 자기의 양심으로는 8만대장경이 보관되어있는 해인사를 폭파하고 칭찬을
받는것보다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처벌을 받는길을 택했다 "
라고 실려있었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선배님들이고 호국의 영웅들 같습니다
당시에는 겨울추위에 빨치산들이 지리산 주위의 화엄사나 천은사 상계사 등지에서
겨울을 나기에 상부에서는 군에서 지시한 견벽청야작전 이라며 화엄사에 불질러서
소각시켜 버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었 답니다
그것은 동절기에 빨치산들이 따뜻한 곳에서 지내지 못하게 하기위함 이었습니다
차일혁 총경은 천년고찰을 불태우는것은 한나절이면 되지만 문화재와 보물을 누가
언제복원 하겠냐고 하면서 감독관이나 다름없는 8사단의 대대장인 방득윤 중령을
설득하고 보물인 각황전과 대웅전등 여러곳의 문짝만 뜯어다 싸놓고 불을 질렀답니다
그후에도 상부에서는 계속 여러곳의 절들을 소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나 귀중한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후에도 천은사 쌍계사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도
살려냈다고 합니다
화엄사에서는 매년 가을에 차일혁 경무관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고 합니다
해마다 48년생인 아들 차길진님이 참석했는데 몇년전 암으로 사망해서 지금은 손녀인
차소영님과 손자 차현석님이 참석한다고 합니다
차일혁님은 상관들에게 아부를 못했기에 한직인 무주 충주 진해 공주 경찰서장을 하던중
아들 차길진과 금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38세의 나이로 익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시체를 수습하러 가서보니 6.25.때 물에 빠져있는 탱크를 끌어안고 있었드랍니다
차일혁 총경은 사망한후 2011년에 경무관 으로추서 되었습니다
차일혁님이 진해경찰서장 을할때 박정희 중령이 육군대학을 왔는데 집을못구하고 있을때
같은만주군출신 이란걸알고 월세집을 구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백선엽 (1920.11.23.-2020.7.10.) 평남 강서군 덕흥리 출신
내가 제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백선엽장군 입니다
백선엽장군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대장을(53,1,)달았던 분이고
육군 참모총장도 7대(중장) 10대(대장) 2번을 하였습니다
19대 교통부장관때 지하철 1호선 착공
10여개 나라의 대사와 국영기업체사장
여수 14연대 반란사건당시 육군 정보국장 을하면서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군사총책임자 인것이 들통나서 체포되어 사형직전에
특무대 김안일 소령과 해남출신 김점곤 중령의 아까운 인재라는 건의를듣고
살려준 장본인 으로도 유명한 장군입니다
박정희 소령은 공산주의자인 둘째형 박상희의 (김종필 전총리의장인)
영향으로 좌우 양쪽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군부내의 남로당 전체를
폭로한후 전향 하였습니다
박정희 소령의 자백으로 좌익이지만 명석한 두뇌의 김종석 중령등
많은장교와 하사관들이 총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백선엽장군은 6.25.때 1사단장을 하면서 칠곡의 다부동 전투에서 아주 대단한
리더쉽으로 승리하였기에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지 안했던 덕으로 국군이 북진
할수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백선엽장군의 친동생인 백인엽 중장은 1군단장을 하면서 6살이나 더먹은
부군단장인 박정희 준장이 비상이 걸렸을때 술먹고 늦게나 왔다고 철모쓴
머리를 지휘봉으로 여러번 때렸다고 합니다
그런 악연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백인엽 중장에게는 국영기업체의 사장이나
기타 어떤 혜택도 주지 안았다고 합니다
2009년 봄에 전쟁기념관 에있는 한국 군사학회 사무실에 갈일이 있었습니다
군사학회 회장인 문두식 ( 육사27기 예비역중장 기무사령관 역임 ) 장군과는
27사단 77연대 3중대에서 소대장을 함께했었고 월남에서도 같은연대에서
헬기장교와 소대장으로 함께근무를 했었습니다
이야기중 우연히 백선엽 장군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군사학회와 20m 거리에
백선엽 장군님의 사무실이 있다고 하면서 절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육군에서 사무실과 현역대령과 에쿠스차량과 운전병을 지원해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올해 90세 이신데도 매일 사무실에 나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점심때 백장군님을 모시고가서 점심을 하자고 했습니다
문두식 회장과 백장군님의 사무실에가니 문회장님을 아주 반가워 하시면서
맞아주시고 저에게도 " 내가 후퇴하면 나를쏴라 " 라는 자기의 저서 1.2.권을
친필로 싸인해 주시면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문두식 회장이 점심을 모시겠다고 하니까
" 몇년전에 성우회 회원들과 미국갈때 신세진것도 많은데 오늘은 친구분도
왔으니까 절대로 내가 사야혀 "
그곳에 간김에 전쟁기념관에 근무하는 고향마을 친척 동생인 유을규 아우에게
내가지금 전쟁기념관에 왔으니 얼굴좀 보자고 전화를 했더니 금방왔는데
백선엽 장군님께서 유을규아우를 ( 공사25기 대령예편) 아주 반갑게 맞으셨습니다
" 이사람이 현역때 내보좌관을 6년이나 했어요 "
하셨습니다
승용차 조수석 부관 자리에는 문두식 군사학회 회장이앉고 저와함께 뒷자리에
앉아서 미8군 식당으로 가면서 손으로 헬기프로펠라 모형을 돌리시면서 나에게
유대령 저사람이 아주 성실하고 능력있는 장교인데 헬기를 안몰고 전투기를
몰았어야 별을다는데 참아까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점심은 백선엽 장군님덕에 평생 처음으로 미8군 식당에서 아주 잘먹었습니다
그후에 제가 점심을 대접한다고 보좌관 이왕우 대령에게 약속을하고
백선엽 장군님을 모시고 용산역근처의 식당에 갔는데 이번에는 무두식 회장이
미리 계산을 해버렸답니다
몇년후 서울시청앞 코리아나 호텔에서 두시간동안 백선엽 장군님의 특강에초대
되어서 실감나는 6.25.강의도 잘듣고 맛있는 비프스틱도 잘얻어먹고 왔습니다
그후 서너번 보좌관 이왕우 대령에게 (육사 37기) 복집에가서 간단하게 점심을
할수있도록 이야기를 했으나 선약이있다 몸이불편 하시다등 미루어 지다가
2020.7.10. 돌아가셔서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조문가서 큰절만 두번하고 왔습니다
내가 70년여름 27사단 77연대에서 소대장을 하면서 무장공비 소탕작전때
밤에는 공비들이 지나다닐것같은 접근로에 크레모아와 수류탄과 조명지뢰
등으로 브비츄렙을 설치할때마다 외삼촌 생각이 났었습니다
병기병과로 1년간 미국으로 유학도 다녀온 연대병기관 오세영 준위에게
그것을 물었더니 껄껄 웃으면서 불이나면 폭발만하고 소리만나지 사람을
살상하지는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장교 식당에서 만날때마다 같은오씨라고 다정하게 지내던 황해도가 고향인
오세영준위는 국민학교 5학년때 피난왔기에 해주오가 만알지 무슨파 인지를
모른다고해서 내가 병사공파 29대손이니 (족보 수정으로 지금은 학정공파)
종씨도 병사공파 29대라고 하세요 했더니 그래야 겠다고 하였습니다
77연대에서 헤어진후 파월장병을 한달간 교육시켜서 한달에 한번씩 월남에
보내는 오음리 7보단 1대대 C지구 부관을 하고있는데 77연대 인사과에서
내가 7보단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오세영 준위가 찾아왔습니다
백마부대로 월남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대대 인사장교인 4년선배 김무남 대위님께 부탁하여 휴가도 1주일 얻어주고
반갑게 사창리 이야기를 하면서 오음리에 나가서 저녁밥을 사드리면서
꼭살아서 돌아오세요 했습니다
백마 29연대에서 병기관을 한다면서 편지가 왔기에 답장도 해주고 했는데
그후로는 소식이 끈겨서 궁금했습니다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7보단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전후방 각지에서 한달간씩
교육을 받으러오는 장교 하사관 사병들 중에는 아는사람도 여럿을 만났습니다
중학교동창 은동기 이름을 잊어먹은 북면사는 호남중학교 2년후배 27사단에서
소대장을 함께했던 문두식중위 (육사27기 후에 기무사령관 중장에편) 등등
여러사람들을 만났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밥을 못사주었던 은동기친구와 몇몇
사람들 에게는 지금도 빚을진것 같아서 미안하답니다
줄포 외삼촌과 줄포 외숙모님은 우리어머니와 우리아버지를 서로가 아주
좋아하시고 아주 정답게 잘지내셨습니다
자기 어머니한테 생명의 은인인 우리 어머니와 우리 외할머니의 고마움을
잘들었기에 언제나 한뱃속 에서나온 오누이처럼 잘지냈습니다
아주 어릴때는 우리집에서 자랐었고 도움을 받은걸 거의가 그때일들을
잊어버리지만 줄포 외삼촌은 참으로 인정이 많으시고 의로운 분이셨습니다
줄포 외삼촌은 국민학교 문턱에도 안가봤지만 당시는 신세대인 외숙모님과
인테리들인 처남들한테 듣고배워서 세상돌아가는 물정에도 밝았고 언제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계몽 하셨습니다
외삼촌은 서울에가면 처남인 홍종오씨가 항상 극장구경을 시켜주기에 언제나
우리집에와서 자기 누나와 매형께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싸리제 외숙모 사건때는 우리집 작은방에서 배를짜던 우리 어머니가 욕을하면서
배틀에서나온 대막대기 여러개로 몇번씩을 때리면서 혼을내는것도 보았습니다
내가 어릴때 이지만 맞으면서도 당연히 받아들이는 외삼촌이 아주 고마웠습니다
요리솜씨가좋은 줄포 외숙모님은 소다와 삭가리를 넣어서 부풀린 맛있는
밀가루 빵같은것을 만들면 언제나 대바구니에 담아갖고 오셨습니다
외삼촌은 6.25.때 지방좌익 부역자 들한테 무지막지한 몽둥이 찜질을 많이당해서
골병이 들어서 골골라기에 매년 여름에는 외숙모님이 개를 한마리를 잡아서
다리3는 개소주를내서 잡수고 다리하나는 우리 아버지와 함께잡순다고 삶아서
고기로도먹고 보신탕을 끓여서도먹고 하였답니다
외삼촌이 개고기를 삶아놓고 우리집대문 근처에서 우리 아버지께 손짓을하면
아버지는 일하러 가는척하고 지게를지고 외삼촌을 따라서 갔드랍니다
고기가 귀하던때라 배부르게먹고 집에와서는 끼니때 밥생각이 없다고 하면서
밥을 안먹으니 개고기를 먹고온게 들통나서 어머니한테 욕을많이 얻어먹었답니다
우리어머니 께서는 줄포 외숙모님께 개고기를 주지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지만
줄포 외숙모님은 개고기를 좋아하시는 우리아버지가 안쓰러워서 계속 드렸답니다
외할머니 때부터 범적굴절에 지극 정성으로 다니시는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에게 개고기는 절대로 먹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답니다
그러나 개고기를 좋아하시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개다리 한개를 외삼촌과
다먹을때까지 어머니한테 욕을먹고 혼이나면서도 어머니몰래 외삼촌을 따라서
외숙모네 집에가서 외삼촌과함께 개다리 한개가 없어질때까지 다먹었드랍니다
1952.7월에 싸리재 외숙모가 아들 두영이를 낳았습니다
줄포 외삼촌과 외숙모는 결혼한지 13년만에야 아들을 얻은것 입니다
줄포 외삼촌보다 애기를 못낳았던 줄포 외숙모가 더좋아 했답니다
우리 외할머니 께서는
" 참 잘힛다 참잘힛어 우리 종옥이가 유치장에서 안타죽고 살어서 나온것
만큼이나 좋다이 "
하셨답니다
줄포 외숙모는 아들을낳은 싸리재 외숙모의 산후조리도 친정 어머니
이상으로 잘해주었으며 두영이가 싸리재 외숙모한테 젖만먹고나면
자기품에안고 얼리면서 길렀답니다
그후로 두영이의 여동생을 넷을더 낳았는데 그때마다 줄포 외숙모님은
친정 어머니처럼 산후조리를 잘해주셨답니다
두분은 본처와 후처간 이었지만 서로가 양보하고 조심 하셨기에 아무런
다툼이나 갈등이없이 비교적으로 잘지내셨답니다
두영이가 소성초등학교에 다닐때는 3학년때까지 학교를 함께다닌
열렬한 어머니 였습니다
5학년과 6학년때에는 소성학교의 김영성 선생님을 숙식을 제공하고
용돈을 주면서 가정교사로 모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자란 두영이는 친엄마보다 길러준 어머니를 더좋아하고 따랐습니다
그두영이는 전주 교대를 졸업하고 전북과 경기도와 서울등 여러곳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2014년말에 정년퇴직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