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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남소문(南小門)
정의
한양 성곽의 동남쪽에 설치한 소문.
개설
조선초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최초로 성곽을 조성할 때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사대문으로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 정남에 숭례문(崇禮門),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설치했다. 사소문의 경우 동북은 홍화문(弘化門), 동남은 광희문(光熙門), 서남은 소덕문(昭德門), 서북은 창의문(彰義門)이라고 했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후에 홍화문은 혜화문이 되었고, 소덕문은 소의문이 되었다.
한양의 남쪽에는 목멱산이라는 매우 높은 안산(案山)이 가로막고 있다. 이 때문에 정남문으로 설치한 숭례문은 정남에 위치하지 못하고 서쪽에 치우치게 만들어졌다. 또 동남쪽에 설치한 광희문은 정동문인 흥인문과 가깝게 위치시켜서 동남쪽 소문이라기보다 동소문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런 까닭에 한양 남쪽에서 한양으로 출입하고자 하는 경우 매우 먼 거리를 돌아 광희문을 통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한양 성곽 남쪽을 출입할 수 있는 소문을 새롭게 만들자는 의견이 제시됐고, 1456년(세조 2)경에 남산 동쪽에 남소문을 설치했다.
내용
『조선왕조실록』에서 남소문이 등장하는 것은 1456년(세조 2)이다. 왕이 직접 청학동(靑鶴洞)에 거둥해서 남소문을 만들 자리를 살피고 문 설치의 적합성 여부를 점검하는 내용에 나온다. 어떤 자가 “벌아현(伐兒峴) 길이 험하기 때문에 한강을 건너온 사람들이 많이 다치니, 만일 남산 동쪽에 새로 문을 설치하면 왕래에 편리합니다.”고 하여 이곳에 새로운 문을 설치하기로 했다[『세조실록』 2년 11월 20일]. 벌아현은 오늘날 한남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하는데 이쪽 길이 너무 험하기 때문에 남산 동쪽에 성문과 새로운 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후 『세조실록』에서 남소문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아 남소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른 한양의 성문과 마찬가지로 남소문을 건국 초에 설치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소문만 후대에 새로 설치한 것이어서 호사가들의 언급이 끊이지 않았다. 1469년(예종 1) 8월 25일에 남소문 밖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강도들이 한양에 번을 서기 위해 올라온 군사[甲士]들에게 활을 쏴 위협하며 보따리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남소문을 지키던 선전관(宣傳官)에게 칼을 휘둘렀다. 단순한 강도 사건이었지만 이 때문에 남소문 폐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문이 만들어진 지 10여 년 만의 일이었다. 남소문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은 주로 음양설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처음 남소문을 만들 때 이미 남소문의 방향이 흉하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소문은 한양의 손(巽), 즉 동남쪽 방향에 위치하는데 이 방향은 음양가들 사이에서 매우 꺼리는 방향이므로 문을 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를 무시하고 문을 열었기 때문에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었다는 말도 나온다[『예종실록』 1년 9월 14일].
또 다른 음양설을 들고 나온 이도 있었다. 남소문은 정남인 정오(正午) 방향이기 때문에 예종의 생년(生年)과 겹쳐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예종실록』 9월 14일 3번째기사]. 예종은 1450년생인데 경오(庚午)년에 해당한다. 오(午)가 겹치기 때문에 음양설에서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방향에 위치하지만 음양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손 방향으로 파악했고 또 다른 사람은 오 방향으로 파악하였다. 결국 이런 음양설에 따라서 남소문은 폐문됐다.
이후 여러 이유를 들어 남소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적으로 제기됐다. 1553년(명종 8)에는 남소문 밖에 도둑들이 들끓기 때문에 다시 남소문을 열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하지만 예종 때 남소문을 폐문했던 까닭을 살펴본 후에 실현되지 못했다[『명종실록』 8년 4월 16일]. 시간이 한참 지나 1675년(숙종 1)에 다시 남소문을 설치하자는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음양설을 들어 남소문을 열자는 의견이었다. 술사(術士) 김진발(金震發)이 남소문이 닫혀 있어 인재(人才)가 나지 않기 때문에 남소문을 열자고 했다.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4년 후인 1679년(숙종 5)의 논의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남소문이 위치한 방위는 소양(少陽)에 해당하는데 이곳을 닫아 두었기 때문에 왕손 중에 여자만 많고 남자가 적다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남소문을 다시 열어 소양의 기운을 받는다면 국가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병조(兵曹) 판서(判書)김석주(金錫冑)가 “소양의 방위는 정동(正東)에 있고, 또 동남방은 손 방향이지 진(震: 8궤의 동쪽) 방향이 아니다.”고 하며 남소문 열기를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승정원일기』 1679년 6월 23일자 기록에 따르면 남소문 축성이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김석주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남소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1690년(숙종 16)에도 남소문을 열자는 주장이 있었다. 남소문이 경복궁에서는 손방·사방이 되나, 시어소(時御所), 즉 창덕궁에서는 병방(丙方)·정방(丁方)이기 때문에 양명한 쪽이 닫혀 막히니 다시 문을 열자는 것이었다. 『승정원일기』 1690년(숙종 16) 8월 10일자 기록에 따르면 지관을 보내 방향을 측정했더니 남소문은 창덕궁의 병방에 해당했다. 하지만 병방 역시 음양가들이 소위 말하는 삼화방(三火方)에 해당하므로 문을 열지 않기로 했다. 같은 날 『숙종실록』에는 남소문을 열자고 하는 자들은 모두 남인(南人)들로 남소문을 열면 남인이 번창한다는 얘기가 있어 열고자 했던 것이라는 사관의 평이 기록되었다.
『승정원일기』 1725년(영조 1) 1월 11일자에는 경기도 선비인 안탈(安梲)이 남소문을 열어야 한다고 상소한 일이 기록되었다. 한양에서 남소문이 위치한 동쪽은 경제적으로 낙후되었고 오히려 한양 서쪽이 크게 번창하니 균형이 맞지 않으므로 남소문을 열어 경제적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서울특별시, 『서울건축사』, 서울특별시, 1999.
내탕고(內帑庫)
정의
경복궁, 창덕궁 등 궁중의 재화를 간수하는 창고.
개설
내탕고(內帑庫)는 궁중의 재화를 간수하는 창고로 내장(內藏), 내고(內庫) 혹은 줄여서 내탕이라고도 한다. 장소를 이르지 않고 왕이 사유한 재산이라는 뜻으로도 쓴다.
위치 및 용도
내탕고는 특정 장소를 지칭하기보다는 궁중의 재산, 혹은 재산을 간수하는 창고 등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내수사(內需司)가 왕실 사유 재산을 관리하였으므로 내탕고와 내수사가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상의원(尙衣院)도 대표적인 내탕에 속한다. 경복궁 사정전 앞 행각에 내탕고가 있었다.
형태
경복궁 사정전(思政殿) 앞의 내탕고는 근정전(勤政殿) 영역과 사정전 영역을 구분하는 행각에 설치되었다. 남쪽 근정전을 향해서는 벽을, 반대쪽 사정전을 향해서는 문을 설치하여 편전 영역에서 출입하도록 하였다. 천자고(天字庫)·지자고(地字庫)·현자고(玄字庫) 등의 이름을 붙였다.
사정전의 남행각은 중앙에 사정문을 두고 동행각 사현문, 서행각 숭현문을 면하였다. 동서 단부의 각 2칸은 근정전 동서 행각의 구성이 연이어졌다. 행각의 간살이는 평균 3,070㎜이고 측면은 4,760㎜이다. 전체적으로 창고로 조성되었으며 정면 37칸 중 사정문 3칸 및 근정전 행각을 속하는 단부 각 2칸을 제외하고 동서 각 15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다. 북편으로 퇴칸을 둔 구조이다.
천자고, 지자고, 현자고, 황자고, 우자고, 주자고, 홍자고, 황자고, 일자고, 월자고 모두 10개의 창고는 각 3칸의 규모로 모두 30칸이 된다. 가구는 1고주 5량가로 하였고 전후 평주에 익공을 걸었다. 익공의 형상은 수서형으로 하고 양면에 당초문을 새겼다. 내단은 연화두형으로 보아지의 역할을 겸한다. 3분변작으로 지붕을 꾸렸으며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04년(연산군 10)에 왕의 행행 시 경회루, 내탕고, 사정전, 충순당, 중궁 합문에 입직하는 군사를 다 내보내도록 하여 도성 큰길의 통행을 금지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13일]. 중종대에는 내탕고에 있던 주관(珠冠), 옥대 등을 도난당했다[『중종실록』 2년 11월 11일][『중종실록』 23년 1월 27일]. 임진왜란으로 궁궐에 불이 나자 백성들이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훔쳤고, 난민이 일어나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다[『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참고문헌
문화재청, 『경복궁사정전일곽 정밀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4.
냉천정(冷泉亭)
정의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의 육상궁 내에 있던 영조의 어진 봉안소.
개설
육상궁(毓祥宮)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제향을 위해 건립된 궁묘이다. 육상궁 내에는 제향과 궁방전(宮房田)의 관리를 위한 건물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영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해 사용된 건물이 냉천정(冷泉亭)이다. 궁궐 밖에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던 곳으로는 창의궁(彰義宮)의 장보각(藏譜閣)이 있지만 순조대에는 육상궁의 냉천정에도 봉안하기 시작했다. 1908년(순종 1)에 냉천정에 봉안하던 영조의 어진을 선원전(璿源殿)으로 옮기면서 냉천정의 어진 봉안소 기능은 상실되었다. 현재 냉천정 건물은 칠궁 내에 남아 있다.
위치 및 용도
냉천정은 육상궁 내에 있던 영조의 어진 봉안소이다. 육상궁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었는데,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이다.
변천 및 현황
육상궁은 영조의 사친(私親)인 숙빈최씨에게 제사 지내던 곳으로 1725년(영조 1)에 완성되었다[『영조실록』 1년 12월 23일]. 영조는 재위 기간 중에 자주 육상궁에 전배(展拜)하며 효성을 드러냈다.
이 육상궁 내에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809년(순조 9)에 처음으로 순조가 냉천정에 사배례(四拜禮)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그 즈음부터 냉천정에 어진을 봉안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순조는 냉천정에 어진을 봉안하고 별분향(別焚香)을 위하여 향을 전하기도 하고, 건물을 수시로 살펴서 개수하기도 했다[『순조실록』 11년 8월 11일][『순조실록』 25년 4월 29일].
1866년(고종 3)에 창의궁 장보각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영조의 어진을 의정부(議政府)에 옮겨 봉안했다가 같은 날 냉천정으로 옮겼다[『고종실록』 3년 12월 20일]. 1882년(고종 19)에는 육상궁에서 화재가 발생해 냉천정의 어진을 송죽정(松竹亭)으로 옮겨 봉안했다가 개수한 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고종실록』 15년 10월 15일].
냉천정에 봉안하던 영조의 어진은 1908년에 국가의 제사 제도를 정리하면서 선원전으로 옮겼다. 이로써 냉천정의 어진 봉안소 기능은 막을 내렸다[『순종실록』 1년 7월 23일]. 육상궁 내에 선희궁(宣禧宮)·연호궁(延祜宮)·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賓宮)·경우궁(景祐宮)·덕안궁(德安宮)이 합사(合祀)되어 칠궁(七宮)이라 불리며 냉천정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형태
현재 남아 있는 냉천정은 좌우 퇴가 있는 정면 3칸, 전면 퇴가 있는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좌측 2칸은 온돌방이며 측면의 퇴는 상부에 다락을 두고 아래쪽에 함실아궁이를 시설했다. 우측 1칸 반은 마루를 깔고, 후면과 측면에는 만살청판창[滿箭廳板窓戶]을, 전면에는 세살청판창을 달았다. 전면 퇴에는 모두 마루를 깔고 풍혈(風穴)이 있는 난간을 둘렀으며, 지붕은 기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 좌우 끝에 용두를 올려 격식을 높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내각일력(內閣日曆)』
『대동지지(大東地志)』
농산정(籠山亭)
정의
조선시대에 창덕궁 후원의 옥류동에 조성한 살림집 형태의 정자.
개설
농산정(籠山亭)은 창덕궁 후원의 깊은 계곡에 위치하여, 왕이 쉬어 가거나 재숙하던 곳이었다. 단순한 휴식 공간뿐 아니라 신하들의 학문을 시험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농산(籠山)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라는 뜻으로, 정자 주변의 산세를 묘사하였다. 농산정의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깊은 계류인 옥류천(玉流川) 계정에 위치하였다. 헌종 때 편찬한 『궁궐지(宮闕志)』에는 농산정이 취한정 서북쪽에 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취한정은 농산정과 마찬가지로 옥류천 계정에 위치한 정자들 중 하나이다.
옥류천 계정에는 농산정을 비롯하여 청의정(淸漪亭),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취한정(翠寒亭)의 5개 정자들이 서로 어우러져 선경(仙境)을 형성하였다. 그중 농산정은 일반적인 정자와 달리 온돌방과 마루를 함께 갖추어 잠을 잘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작은 부엌이 있어 간단한 음식을 준비할 수도 있었다. 이는 왕이 후원 깊숙이 나들이 나와 예상치 못한 궂은 날씨를 만났을 때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세 차례나 농산정에서 재숙하며 밤을 보냈으며[『정조실록』 16년 3월 18일], 신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정조실록』 19년 2월 25일]. 순조대에 농산정에서 임시시험의 일종인 응제(應製)를 실시한 것으로 보아, 농산정은 단순한 휴식 공간을 떠나 왕이 신하들의 학문을 시험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농산정을 언제 지었는지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연산군이 미희(美姬)와 노닐던 곳으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연산군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대에 옥류천 일대의 정자들이 지어져 그 이후로 활발하게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1828년(순조 28)에 그린 「동궐도(東闕圖)」에서 농산정은 남쪽이 취병(翠屛)으로 둘러싸여 있다. 농산정은 산울타리로 둘러싸여 독립된 외부 공간을 분명히 확보하고 있어 주변의 정자들과 달리 왕이 일정 기간 머물 수 있는 별당의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동궐도형(東闕圖形)」에 취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순종대 무렵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옛 분위기를 상실한 상태이다.
형태
두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돌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로 엮은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로, 행랑채처럼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직사각형 모양이다. 2칸은 대청, 2칸은 온돌방, 1칸은 부엌으로 구성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이곳에서 재숙하고, 다음 날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기신제를 지냈다.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부터 8일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惠慶宮)과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회갑을 기념하여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화성(華城)에 행차를 다녀왔다. 정조는 화성으로 떠나기 며칠 전인 2월 25일에 궁 안에서 자궁(慈宮) 혜경궁의 가마 메는 연습을 몇 차례 실시했는데, 이 예행연습이 끝난 뒤 연습에 참가한 신하들을 농산정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순조는 농산정에 나아가 입직한 음관의 응제를 행했으며[『순조실록』 11년 윤3월 14일], 이해 8월 19일에는 춘당대(春塘臺)에서 내금위 시사(試射)를 한 후 농산정에 나아가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의 응강을 행했다[『순조실록』 11년 8월 19일]. 순조의 아들 익종도 농산정을 주제로 시를 많이 지었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이광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최종덕,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눌와, 2006.
한국전통조경학회, 『동양조경문화사』, 대가, 2011.
한영우,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열화당, 2006.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단봉문(丹鳳門)
정의
창덕궁 남쪽 궁장에 설치한 문.
개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돈화문(敦化門)의 남쪽 바른편을 단봉문(丹鳳門)이라 하고, 동쪽 문을 건양문(建陽門)이라 했으며, 바로 이 문 밖 동편이 창경궁(昌慶宮)이라고 했다.
내용
창덕궁에 드나드는 여러 문 중에서 남쪽 궁장에는 오직 단봉문 하나만 설치되었다. 돈화문 동쪽에 단봉문이 있고, 돈화문 서쪽 궁장에는 금호문(金虎門)이 있어, 각 문마다 출입할 수 있는 관리들의 자격이 정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경지략』에는 대부분의 신하는 금호문을 이용해 출입하며 사헌부(司憲府) 관원만 꼭 정문인 돈화문으로 출입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자격 구분은 신하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맺어진 것이며, 실제로 정해진 규정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여러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 1731년(영조 7) 4월 20일자 기록에는 이광보(李匡輔)가 왕에게 “궐문 중 선인문(宣仁門)과 금호문은 조사(朝士)들이 출입하는 곳이고, 단봉문과 통화문(通化門)은 여인 및 액례배(掖隷輩)들이 출입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번 죄인은 통화문을 통하게 하는 것이 무방합니다.”라고 전하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영조는 선인문, 금호문, 개양문(開陽門) 모두 조신들이 출입하는 곳이며, 단봉문 역시 조신들이 출입하는 곳이라는 하교를 내렸다. 비록 영조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지만 신하들은 단봉문에 대해 궁궐의 여인들 및 아전급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궐문의 출입에 신분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은 정조 연간에도 찾아볼 수 있다. 대궐문은 저녁이 되면 한 곳을 제외한 모든 문을 닫는다. 이를 제외한 다른 문은 왕이 직접 내주는 표신이 있어야만 일시 개방할 수 있었다. 1789년(정조 13)에 병조(兵曹) 당상관이 당직 교체를 위해 금호문 출입 표신을 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대궐 안의 각 문을 유문(留門: 문을 개방하는 것)했을 때 조정 신료가 드나들지 못할 문은 원래 없다. 체통이 막중한 대신(臺臣)들이 근래에는 궁인(宮人)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 요금·통화 두 문도 구애받지 않고 출입했던 사실을 『당후일기(堂后日記)』를 보면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몇 해 전부터 막중한 대궐문을 마치 각 부서에서 나누어 맡은 것처럼 돈화문은 대간(臺諫)에, 금호문은 조신(朝臣)에, 단봉문은 중관(中官)에, 선인문은 사복시(司僕寺)에 각각 소속시켜 마치 서로 어겨서는 안 될 무슨 정해진 한계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유문할 때에도 열린 문을 놔두고서 유문 표신을 따로 청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유문할 때뿐만 아니라 아침과 낮에 공사로 들어올 때에도 따로 출입하는 문을 정하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정조실록』 13년 1월 19일]. 하지만 정조의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와 유사한 내용이 『승정원일기』 1793년(정조 17) 9월 28일자에 다시 기록되어 있다.
단봉문 출입에 관한 것들 중 눈에 띄는 내용은 여성과 관련한 것이 많다. 1778년(정조 2)에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사를 위해 후궁을 간택한 일이 있다. 6월 10일에 초간택(初揀擇)을 실시할 때 처녀들이 입궐하는 문로를 어디로 할지에 대한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이때 문로는 단봉문으로 결정했다.
궁궐 안에서 사망한 여성들의 시신이 단봉문을 통해 궁궐 밖으로 나간 경우도 많았다. 『승정원일기』 1673년(현종 14) 4월 27일자에는 명혜공주(明惠公主)의 상차(喪次)가 단봉문을 통해 나간 일이 기록되었다. 1786년(정조 10)에는 의빈(宜嬪)의 상구(喪柩)가 단양문(端陽門)을 거쳐 단봉문을 나가 견여(肩輿)에 옮겨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으로 봉안했다는 내용이 있다[『정조실록』 10년 9월 16일]. 1832년(순조 32)에도 복온공주(福溫公主)의 상례 때 출궁하는 문로로 단봉문이 기록되었다[『순조실록』 32년 5월 12일].
1701년(숙종 27)에는 숙종의 빈인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창경궁 취선당(就善堂)에서 자결했다. 이때 그녀의 시신이 어느 문을 통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숙종실록』 27년 10월 10일]. 앞서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장희빈(張禧嬪)의 시신은 건양현(建陽峴)을 거쳐 단봉문으로 나가는 것이 마땅한 출궁로였다. 하지만 건양현은 창덕궁 협양문이 위치한 곳으로 차비문이 있는 곳이었다. 숙종은 자신이 있는 곳 바로 정면으로 장씨의 시신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결과 장씨의 상여는 선인문을 통해 나갔다. 선인문은 2칸으로 만들어졌는데 정문은 북쪽의 대문이며 남쪽에는 격을 낮춘 소문(小門)이 있다. 장씨의 상여는 남쪽의 소문을 통해 출궁했다.
궁궐에서 친국(親鞫)을 진행할 때 경희궁은 금상문(金商門), 창경궁은 내사복시(內司僕寺), 창덕궁은 숙장문(肅章門)에서 실시하였다. 『은대편고(銀臺便攷)』「형방고」 친국조에 따르면 친국을 진행할 때 궁궐 밖에 있던 죄인이 입궁하는 문로로 경희궁은 흥원문(興元門), 창경궁은 통화문, 창덕궁은 단봉문을 이용한다고 기록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당시 창덕궁으로 진입할 때 모든 궁궐문이 닫혀 있어 김류(金瑬)가 단봉문을 열고 들어왔으며 잇달아 인조가 구굉(具宏), 심명세(沈命世), 홍진도(洪振道)와 더불어 단봉문을 통해 창덕궁에 들어왔다. 이후 김류가 인조를 인도해 인정전 서쪽 마당에 가서 동향하여 호상(胡床)에 앉았다[『광해군일기』 15년 3월 12일].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은대편고(銀臺便攷)』
『한경지략(漢京識略)』
대군청(大君廳)
정의
왕의 직계 아들만이 모이던 곳, 또는 그 일을 맡아 보던 관아.
개설
조선시대 왕자들은 부친이 국왕이나 세자라면 궁궐에서 태어났으며, 만약 출생 당시 부친이 국왕이 아니라면 궁궐 밖 부친의 사저(私邸)에서 태어났다. 왕실에서는 왕자들의 출생 뒤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인식했던 지역에 태실(胎室)을 조성하였는데, 조선전기 왕자들의 태실은 경상도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전기 왕자들은 세자의 경우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 이외의 왕자들이 경우 종학(宗學)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보통 6~12세에 군(君)으로 봉해졌고, 11~14세에는 명문가의 자제와 혼인하였다. 혼인 뒤 왕자들은 궁궐 근처의 사저에 거주하였으며, 일부 왕자들은 한강 인근에 개인 정자를 소유하였다.
대군청은 이러한 왕자, 특히 직계 아들만을 위해 설치한 관아로 세조대 이후로는 왕실 기관에 합치되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및 용도
종실(宗室)의 왕자 출신의 대군(大君)들만이 모이던 청사로, 대군들의 업무를 관할한 곳이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새로운 왕실과 외척이 나타났고 그들은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며 새로운 권력구조의 중심에 서서, 건국 초의 정치적 변혁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왕자의 난을 통해 태종이 집권하는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됨에 이르러, 종친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종친불임이사(宗親不任以事)’의 원칙이 강조되고 외척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왕실과 외척에 대한 일정한 예우를 함과 동시에 그들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친부(宗親府)와 더불어 돈녕부(敦寧府)가 설치되었다. 이후 종친부와 돈녕부는 개정을 거듭하다가 성종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어 조선의 주요 관서로서 자리잡았다.
한편 대군청은 대군들만이 모이던 청사였는데, 세조대 이후로는 그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종친부와 돈녕부의 개정 중 이속되어 폐지된 듯 보인다. 아직 법제가 완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종대와 세조대에만 설치되었다가 이후 종친부에 병합된 듯 보인다.
관련사건 및 일화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할 때, 세조가 단종에게 대보(大寶)를 받고 대군청에 이르니 사복관이 시립하고 군사들이 시위(侍衛)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세조실록』 1년 윤6월 11일], 대군청이 대군들만 모였던 장소였기 때문에 세조가 선위를 받았을 때 상징적으로 이곳에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김성준, 「宗親府考」, 『사학연구』18, 한국사학회, 1964.
박진, 「朝鮮初期 敦寧府의 成立」, 『한국사학보』18, 고려사학회, 2004.
홍재석, 「조선전기 왕자들의 사회적 기반과 정치, 외교활동」, 건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대조전(大造殿)
정의
창덕궁의 중궁전.
개설
내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 대비와 후궁들의 전각, 왕실의 생활을 시위·보좌하는 대소인원이 모여 사는 곳이다. 창덕궁 내전의 대표적 전각은 대조전이며 왕비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왕비의 영역은 왕과 왕비의 사적 생활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왕실, 내명부를 다스리는 집무 공간이기도 하였다.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 경덕궁의 융복전(隆福殿)이 보통 왕비의 전각으로 통용되거나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동일한 상황의 중궁전이 아니고 왕대마다 항상 이 전각들이 중전의 시어소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워 왕비의 처소를 대표하는 특징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보통 대내(大內), 내전(內殿)이 왕실의 사적 생활이 병행되는 곳인데, 대내는 주로 외전인 정전의 안쪽에 들어 있는 전각들을 말한다. 왕이 어떤 의식을 행하고 내전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의 내전은 침전으로 운용되는 전각이 놓여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대조전은 희정당(熙政堂)의 북쪽에 있는 대내 곤전의 정당으로 무량각 집이다. 현재의 대조전은 1917년 대조전의 화재로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 와 지은 것이다[『순종실록부록』 10년 11월 10일]. 순조시기에 만들어진 「동궐도(東闕圖)」상에 보이는 대조전의 영역 안에는 집상전(集祥殿)·경훈각(景薰閣)이 북편 좌·우에 들어 있었고 부속 건물로 흥복헌(興福軒)·융경헌(隆慶軒)·양심각(養心閣)·관리각(觀理閣) 등이 대조전을 감싸고 있었다.
왕과 왕실 가족이 어떤 사적 행위를 한 장소, 특히 여성 공간인 내전을 어떻게 운용하였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출생이나 사망 등 의례 관련 기록으로 추정해 보자면, 대체로 대비의 경우 집상전·경복전·수정전(壽靜殿)·통명전을 사용하였고 왕비는 대조전·경춘전(景春殿)을 사용하였으며, 세자빈은 경춘전·저승전(儲承殿) 등을 처소로 삼았다.
조선전기에는 중전이 머무는 대조전에서 왕이 신하들을 불러 야대(夜對)하거나, 연회를 즐기는 일도 있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현상은 점점 사라졌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의 재결속을 위한 유교화의 추세 속에서 남녀유별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왕을 제외한 내전 사용 인원은 모두 여성이었고, 내전의 일을 아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변천 및 현황
왕과 왕비의 침전은 궁궐의 중심에 있어 ‘중전’이라 한다. 중전은 왕비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한데 이곳이 왕비의 주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이 따로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창덕궁은 대조전을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삼았다. 처음 만들어진 당시의 창덕궁에는 ‘양의전(兩儀殿)’이라는 침전이 있어 정침청(正寢廳), 동서침전(東西寢殿)으로 칭했다가, 세조대에 비로소 양의전이라는 전호를 만들었다[『세조실록』 7년 12월 19일]. 이후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은 때에 이 전각을 대조전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하였다. 양의전은 왕비의 정전이 아닌 침전을 뜻하는 전각명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창덕궁은 처음부터 내전의 정전을 왕과 왕비가 함께 거처하는 전각으로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의 대부분이 소실되고 대조전은 1609년(광해군 1)부터 복구하였으나, 인조반정시 반군의 방화로 대조전과 많은 전각이 파괴되었다. 반정 이후 인조는 대조전과 전각들의 수리를 위해 광해군이 세웠던 인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다가 복구하였다. 당시 인경궁에서 이건해 온 건물은 인경궁 침전 중 하나인 경수전(慶壽殿)이었다. 경수전은 광해군 때 대조전과 같은 제도로 지으라고 했던 건물이었다. 이때 개건된 대조전은 큰 변화 없이 17~19세기 중궁전의 정당으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1833년(순조 33)의 대화재로 다시 한 번 내전을 잃었지만 곧 복구되었다. 이때 복구된 대조전은 주변 상황을 포함해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45칸 규모, 본채의 형태를 대체로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에도 화재로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 전체를 잃었다[『순종실록부록』 10년 11월 10일].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와 복구하였는데, 이때의 대조전은 순조시기의 대조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다. 중앙의 지붕이 솟아올라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던 본채는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되었고, 월대와 전정(殿庭)은 훤히 열렸다. 본채는 물론 동·서 행각까지 전체를 쪽마루로 연결하고 난간을 둘러 화려하게 꾸몄다. 실내는 서양풍으로 꾸며져 문짝 위에는 커튼 박스를, 천장에는 샹들리에를 달았고 대청 내부의 문짝에는 유리문을 달았다. 대청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분합 위, 벽체에는 봉황도와 군학도가 그려져 있다.
형태
대조전의 형태를 말할 때, 현재 창덕궁에 존재하는 대조전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이건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대조전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궁궐 건축의 역사 속에서 이건의 사례는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대조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고 참조만 할 뿐이다.
17~18세기 중궁전의 정당으로 유지되었던 대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청마루와 정면 2칸, 측면 3칸 규모의 온돌방을 마루의 양쪽에 놓아 동·서 익실, 좌우 대칭의 구조를 하고 있다. 여기에 다시 툇간을 4면에 둘러 본채의 평면을 완성시켰다. 다시 말해 정면에서 보면 9칸, 측면에서 보면 5칸, 총 45칸 규모의 집이다. 여기에 연달아 동·서 익각인 흥복헌과 융경헌이 좌우에 연결되어 있다. 이들 건물의 전퇴마루는 대조전 본체의 전퇴마루와 높이를 달리하고 나란히 연결되어 계단으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정면에서 보면 중앙 대청마루 3칸의 지붕이 솟아 있고 온돌방이 되는 좌·우 익실부의 지붕은 한단 낮게 처리되어 있다.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지붕이고 이익공 겹처마의 팔작지붕 집이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동서 온돌이 대칭을 이루게 하고, 기단을 높였으며 월대를 놓아 장대하게 꾸몄다. 네모 모양의 전정(殿庭)을 두고 어도(御道)를 설치했으며 둘러싼 행각과 복도각, 합문 등이 여타 전각들과 상호 작용하는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로써 대조전은 침전의 역할만이 아닌 내전의 권위를 드러내는 장소로 작용하였다. 즉, 궁궐 건물의 위계를 높이는 시각적 의장 요소와 왕과 왕비의 침전이 갖추어야 할 구성 요소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국조보감(國朝寶鑑)』
『궁궐지(宮闕志)』
『만기요람(萬機要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한중록(閑中錄)』
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내전건물의 실내구성에 관한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48, 1992.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연구: 17~18세기 동궐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대한문(大漢門)
정의
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의 정문.
개설
경운궁은 오늘날의 덕수궁으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정궁으로 삼은 곳이다. 경운궁의 정문은 본래 중화전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1902년 인화문 대신에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에는 대안문의 명칭을 대한문으로 변경하였다[『고종실록』 43년 4월 25일].
위치 및 용도
대한문은 경운궁 궁역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대한문이 경운궁의 정문이 된 것은, 대한문 외부가 광화문 육조 거리에서 흥례문에 이르는 거리와 연결되고 환구단을 마주하는 광장이 있어서 국가의례를 거행하는 것은 물론 황제의 행차를 대내외에 선전하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차와 근대적 교통기관을 사용하는 대한제국기에 인화문의 접근성이 대한문에 비해 떨어졌다.
변천 및 현황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을 새롭게 조성할 때 경운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다. 인화문은 경운궁의 남쪽 궁장(宮墻)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화문의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897년 1월 19일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인화문을 거쳐 수안문(壽安門), 의록문(宜祿門)을 통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인화문이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한국외교문서』 제15권에는 ‘독일 상인이 인화문 건축 인부를 구타한 데 대한 항의’라는 문서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새롭게 건립한 인화문을 개와(蓋瓦)하는 도중에 골레즈키(Kalitzky)의 상점으로 흙괴석편[土塊石片]이 떨어진 일이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1897년 11월경에 인화문의 기와 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다. 대안문은 경운궁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원래는 경운궁의 정문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 1899년(광무 3) 2월 13일 자 관보 1183호에는 1898년 6월 26일에 대안문의 현판서사관으로 의정부 참찬 민병석을 임명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대안문은 1898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경운궁의 출입은 대부분 정문인 인화문을 통해 이루어졌고, 주 건물인 함녕전과 경효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화문을 지나고 금천교를 건너 돈례문(敦禮門)을 통과해야만 했다.
대안문이 경운궁의 정문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02년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을 건립하면서부터이다. 기존의 궁장에다가 중층의 거대한 중화전을 건립하다 보니 정전 앞마당이 너무 좁아졌다. 이런 연유로 인화문 좌우의 궁장을 남쪽으로 옮겨 쌓았고, 정문인 인화문은 철거하였다. 이때 인화문 내부에 흐르던 금천도 은구(隱溝)의 형태로 가리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인화문을 철거하면서 남쪽 궁장에는 단칸의 건극문(建極門)을 세워 통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인화문을 철거하고 대안문을 정문으로 사용하면서 중문으로 조원문(朝元門)과 중화문(中和門)을 새롭게 만들었다. 조선의 궁궐은 대부분 3문 체제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은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의 3문을 갖추고 있으며, 창덕궁은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을 갖추고 있다. 이때에 비로소 경운궁도 대안문, 조원문, 중화문의 3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904년 경운궁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의 중요 전각이 대부분 피해를 받았다. 조원문과 대안문은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경운궁 재건 과정에서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시일」조에 따르면 조원문이 원래 자리에서 손(巽)방 즉, 동남쪽 방향으로 옮겨졌다. 대안문의 수리 역시 진행되었다. 음력 1906년 4월 2일 자 『일성록』의 기록에 따르면 대안문은 4월 13일 정시(丁時)에 상량했다. 또한 1906년 4월 25일에는 대안문이라는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꾸었고, 5월 1일에는 대한문 상량문제술관으로 영돈녕사사 이근명, 서사관으로 종1품 윤용구, 현판서사관으로 특진관 남정철을 임명하였다.
대한문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이승만 정권기에는 덕수궁이 시민공원으로 이용되면서 그 면모를 상실해 갔는데, 서울의 도시화와 더불어 시청 앞 도로 확장이 진행되면서 경운궁의 궁장은 도시 계획과 마찰을 일으키곤 하였다. 태평로 확장이라는 현실적인 필요성과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당위성의 충돌이었다. 여러 논의 끝에 1961년에는 경운궁의 담장을 헐어 내고 궁궐 내부를 밖에서 볼 수 있도록 투시형 울타리로 대신했다. 1968년에 이르러서는 기존 궁장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6미터 후퇴하여 궁장을 다시 쌓았다. 이때 기존의 대한문은 궁장과 분리된 채 확장된 도로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한문 역시 문제가 되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궁장에 연결하였다.
형태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을 하고 있다. 다른 궁궐의 정문과 다르게 단층으로 구성된 것이 독특하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꾸몄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궁궐의 정문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개칭한 것에 대해 『매천야록』에서는 하나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전 비서승 유시만(柳時萬)이란 사람은 겸암(謙庵)유운룡(柳雲龍)의 사손으로, 그는 유운용의 비결을 얻어 300년이나 된 묘소를 이장한다고 하면서 또 허위 첨서를 조작하여 남모르게 옛 광내(壙內)에다 묻어 놓았다가 그것을 파내어 은밀히 고종에게 바쳤다. 그 첨서를 대충 말한다면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안동(安東)의 신양면(新陽面)으로 천도를 하면 국운이 연장된다는 것이다. 고종은 이 말에 현혹되어 꿈에 그런 징조가 있었다고 말하고, 즉시 대안문의 이름을 바꾸고 또 많은 금전을 유시만에게 주어 행궁을 짓도록 하였다. 이에 유시만은 그 돈을 자루에 담아 가지고 와 졸부가 되었으나 고종은 그것을 불문에 부쳤다는 것이다.
『매천야록』에 수록된 일화 외에도 대한문으로 대문의 명칭을 개칭한 것에 대해 여러 이설이 전하고 있으나 대부분 낭설에 불과하며 사실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로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 수록된 「대한문 상량문」에 따르면 대한(大漢)은 소한(霄漢)과 운한(雲漢)의 뜻을 취한 것이니, 덕이 호창에 합하고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 내용이 사실에 적합하다고 본다.
참고문헌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2009.
이민원,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이민원, 「일본의 침략과 대한제국의 경운궁」, 『한국독립운동사연구』22, 2004.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대현문(待賢門)
정의
창덕궁 선화문과 협양문 사이 동쪽 행각에 위치한 협문.
내용
『궁궐지(宮闕誌)』에 대현문(待賢門)은 “협양문(協陽門)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1칸이며 남쪽으로 2칸의 행각이 있다. 북쪽으로 8칸 반의 행각이 있으며 행각에는 오정간(午正間)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대현문은 성정각(誠正閣)에 들어가기 위한 문으로 판단된다. 성정각의 남쪽에는 행각이 있는데, 이곳에 단칸의 영현문(迎賢門)이 위치하고, 영현문 바깥 서쪽 행각에 대현문이 위치하였다.
대현문 바깥쪽에는 다른 궁궐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공간이 있다. 남북으로 길게 마당이 놓였는데, 남과 북에 각각 출입하는 문이 만들어져 있다. 북문은 선화문(宣化門)이며 남문은 협양문이다. 선화문 북쪽에는 대조전(大造殿)이 위치하여 왕이 출궁할 때 선화문을 통해 외부로 나온다. 선화문 서쪽에는 대령차비처소(待令差備處所)가 위치하여 이곳에서 왕의 출궁을 준비한다. 왕은 이곳에서 여(輿)를 타고 협양문을 통해 출궁하거나, 혹은 대현문 인근에서 여를 바꿔 타고 출궁하였다.
1794년(정조 18) 정조는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몇 년 동안 유배되어 있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을 석방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반대한 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전교에 따라 대신들이 국왕의 허락 없이 합문(閤門)을 밀고 들어오자 정조는 대현문을 잠그고 액례(掖隷)들이 지키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8년 4월 10일][『정조실록』 18년 4월 10일].
『승정원일기』 1794년(정조 18) 4월 14일자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협양문에서 신하들과 만났는데, 협양문은 대현문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를 타고 대현문을 나와 협양문에 이르러 여에서 내렸다.”고 한다.
『승정원일기』 1880년(고종 17) 5월에서 1881년(고종 18) 3월까지의 기록에 집중적으로 대현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대부분 “여를 타고 대현문을 출발했다.”거나 “대현문을 통해 환내(還內)했다.”는 내용이다. 왕이 창덕궁에서 출궁할 때는 대조전을 출발해서 대현문과 선화문, 협양문을 지나며, 동쪽으로는 건양문(建陽門)·동룡문(銅龍門)을 거치고, 서쪽으로는 숙장문(肅章門)·진선문(進善門)을 거치게 된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궁궐지(宮闕誌)』「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그림1_00017969_「동궐도형」, 대현문 부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그림2_00017969_「동궐도」, 대현문 부분,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덕유당(德游堂)
정의
경희궁 회상전 서북쪽에 있는 건물.
개설
덕유당(德遊堂)은 경희궁의 침전 서북쪽에 있는 전각이다. 1720년(경종 즉위)에 숙종비 인원왕후(仁元王后)가 머물렀으며, 경종비 선의왕후(宣懿王后)가 거처하기도 하였다. 1767년(영조 43)~1776년(영조 52)에는 영조가 신하를 만나고 강론하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며, 백성들 중 기로에 든 노인이나 어린이들에게 쌀을 베푸는 곳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덕유당의 후면에는 2칸 규모의 사물헌(四勿軒)이 붙어 있다. 사물헌은 1760년(영조 36)에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사물(四勿)이란 『논어(論語)』에서 금하는 4가지로,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는 의미라고 한다.
위치 및 용도
덕유당은 경희궁의 회상전(會祥殿)의 서북쪽에 있으며 그 서쪽에는 자정전(資政殿)이 있다. 회상전 뒤편에 형성된 높은 축대 위에 지어졌다. 영조의 어머니 인원왕후와 형수 선의왕후가 머물던 곳으로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다. 또 지형이 높아 서편의 교외가 내려다보여, 서오릉의 명릉(明陵)에 모셔진 숙종과 인원왕후의 회상을 일으키는 장소가 되었다. 영조는 덕유당에서 명릉에 올릴 향을 지영하기도 하도 명릉으로 향을 전하기도 하였다. 경희궁 북쪽에 위치한 육상궁에 향을 전할 때에도 덕유당에서 행하였다[『영조실록』 51년 3월 23일][『영조실록』 51년 11월 6일].
영조는 덕유당에서 문신과 무신들을 모아 강론하기를 자주 하였으며, 문신이나 유생들을 모아 제술 시험을 보거나 문신과 무신의 활쏘기 시험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무신들에게 능마아강(能魔兒講)과 같은 병서 강독 시험을 보고 합격자들에게 상을 주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3년 12월 19일][『영조실록』 43년 8월 8일]. 또 인근에 살고 있는 노인들을 불러 쌀을 하사하거나 음식을 내려주어 위로하였다. 이처럼 영조는 덕유당을 신료들과 유생들뿐 아니라 백성을 만나 소통하고 격려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덕유당은 영조대에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었으며, 순조가 경희궁에 이어했을 때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경희궁의 활용이 줄어들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경희궁에는 빈터만 남게 되었다. 현재 덕유당의 모습은 「서궐도안(西闕圖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형태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 양 끝에 치미로 장식하였다. 건물의 좌향은 동향이며 후면에는 연달아 2칸의 작은 건물이 있는데, 사물헌이라 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덕유당의 서북쪽에는 암석이 있는데, 이것을 서암(瑞巖)이라 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영조는 덕유당에서 신하들과 『대학(大學)』을 강론하고 서암을 살펴본 후 서암송(瑞巖頌)을 지어 올리라 하였다. 영조가 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서암의 유래가 상세히 담겨 있다. 광해군이 덕유당 서북에 위치한 암석이 왕암(王巖)이라는 말을 듣고 그곳에 궁궐을 세웠는데, 그것이 경희궁이다. 왕암이 자리한 곳은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옛집이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희궁에 임어하였으며, 숙종은 암석의 이름을 서암이라 고쳐 짓고 어필로 써서 사방석에 새겼다[『영조실록』 49년 11월 12일].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