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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칠유 (法華七喩)에 대하여>
* 본 「법화칠유」 게재는 본인이 일전에 게재한 바 있는 대한불교 천태종 발간 『사찰벽화로 배우는 부처님의 지혜』에 이은 두 번 째 게재로 영산불교대학 묘법연화경 강의교재를 중심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인광당仁光堂 5층에 마련된 청신사(男) 안거 수도장 (좌) 가로 1m, 세로 약1.8m 면적이 1인 수도면적이다. 밤샘 기도수행을 마친 처사님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저녁기도는 23:00~다음날 새벽 03:30분까지이다 / 인광당 1층에 마련된 천태홍보관 (우)
부처님 경전 중의 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법화경의 산스크리트어 제목은 '삿다르마 뿐다리까 수뜨라(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입니다. 이를 번역하면 '올바른 법을 가르치는 흰 연꽃과 같은 경전'입니다. 그래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고하고 이를 줄여서 흔히들 「법화경」이라고 합니다.
< 법화경의 핵심은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불과를 증하신 것은 사실,
인도 샤카족의 왕자 고오타마 싯다르타로 태어나 출가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그 법을 펼치신 것이 아니라,
백천 만억 나유타 이전에
불과를 증하신 최초의 부처님이시며
그 이후 몇 번이나 인간의 몸으로 남섬부주, 이 지상에 오셨고 중생구제를 해 오셨다는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대사인연( 一大事因緣) 즉, 일불승(一佛乘)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얻으신 깨달음이 너무나 깊고 깊어서 그 시대 중생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 과거에 여러 부처님께서 쓰신 방편대로 삼승(三乘)으로 나누어 설하셨다고 합니다. 삼승(三乘)은 세 가지 탈 것이라는 뜻으로, 성문승(聲聞乘) · 연각승(緣覺乘) · 보살승(菩薩乘)을 통칭합니다. 승(乘)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탈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한다는 비유적인 뜻에서 승(乘)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삼승이란 곧 세 가지 길(三道)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정진하는 사람을 뜻하며, 연각승(緣覺乘)은 독각승(獨覺乘) 혹은 벽지 불승(辟支佛乘)이라고도 하는데 스승에 의지하지않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살승(菩薩乘)은 육바라밀을 닦아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성문)이나 벽지불(연각)임을 자처하면서,
모든 부처님이 오로지 보살만을 교화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는 불자(佛子)가 아니며,
또 스스로 이르기를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얻었다고 하면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다시 구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라고 설하셨습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이렇게 열반(작은 열반 즉, 부처님의 깨달음이 아닌 성문 연각의 깨달음을 의미합니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아뇩다라삼먁삼보리=위없는 깨달음) 즉 성불(成佛)에 있다면서 모든 불자는 마땅히 그러한 뜻을 향해 발심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세상에 모든 것은 공으로 돌아간다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을 깨달았으면 거기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끊임없는 무아행(無我行)과 두타행(頭陀行)을 몸소 실천하며 보살행(菩薩行)을 해야 한다는 실천의 가르침을 설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러한 실천의 가르침은 중생교화와 불국토 건설이라는 대승불교의 목표로 귀결되는 것이겠지요.
대한불교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 발간 묘법연화경전(약칭 '법화경전')
법화경은 아래와 같이 총 28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적문(迹門)14品
서품(序品), 방편품(方便品), 비유품(譬喩品), 신해품(信解品), 약초유품(藥草喩品), 수기품(授記品), 화성유품(化城喩品),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 수학무학인기품(數學無學人記品), 법사품(法師品), 견보탑품(見寶塔品),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 권지품(勸持品), 안락행품(安樂行品)
본문(本門)14品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상불경보살품(常不經普薩品),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촉루품(囑累品), 약왕보살본사품(藥王普薩本事品),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다라니품(陀羅尼品),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佛說觀普賢普薩行法經)
총 28품으로 구성된 묘법연화경 중 특히 중요시되는 4품은 방편품, 안락행품, 여래수량품, 관세음보살보문품이라고 합니다. 또한 법화경의 특징은 비유와 게송을 반복하여 중생에게 그 가르침을 쉽게 전달하도록 합니다. 늘 가슴에 새기도록 각 품의 부처님 말씀 뒤에는 게송으로 다시 한번 정리하며 범인의 뇌리에 자리 잡도록 반복해서 진리의 말씀을 알려주십니다. 그중 특히 법화칠비(法華七譬)라고 하여 7가지의 비유를 들어 설하신 부분이 잘 알려져 있어,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법화칠비(法華七譬) 또는 법화칠유(法華七喩)
삼거화택(三車火宅)의 비유(火宅喩)
장자궁자(長者窮者)의 비유(窮子喩)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藥草喩)
화성보처(化城寶處)의 비유(化城喩)
계중명주(契中明珠)의 비유(契珠喩)
빈인계주(貧人繫珠)의 비유(衣珠喩)
양의병자(良醫病子)의 비유(醫子喩)
1. 삼거화택(三車火宅)의 비유(火宅喩)
많은 재산과 자식이 있는 장자(長者 - 인도에서 좋은 집안에 나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덕을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 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장자의 저택에 불이 났지요. 어린 자식들은 놀이에 정신이 팔려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집 안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오라고 외쳐도 듣지 않았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꽤를 내어 '양이 끄는 수레(羊車)'와 '사슴이 끄는 수레(鹿車)' 그리고 '소가 끄는 수레(牛車)'를 주겠다고 아이들을 회유하였습니다. 그제야 아이들은 좋아하며 '불이 난 집'에서 나와 화를 면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기뻐하며 아이들에게 약속한 수레보다 더 화려하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大白牛車)를 주었습니다.
법화경 제3품 비유품(譬喩品)에 나오는 것으로 '화택(火宅)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요. 불난 집은 곧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중생계, 사바세계를 비유하고 그 안에서 놀이에 빠져 불이 난 줄도 모르는 아이들은 바로 우리들 중생의 모습이며 먼저 밖에 나가서 아이들을 구출해 내는 아버지는 곧 부처님을 의미합니다.
양이 끄는 수레는 성문승(聲聞乘)의 비유이고 이 단계는 중생의 근기가 일천하여 듣고 보고 체험하는 인연을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는 단계라고 합니다. 사슴이 끄는 수레는 연각승(緣覺乘)의 상징입니다.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단계이니 달리 벽지불이라고도 하지요. 소가 끄는 수레는 곧 보살승(菩薩乘)을 의미하는데 부처님 세존을 따라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며 일체의 지혜를 구하며 중생을 가엽게 여기고 제도하여 해탈로 이끄는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大白牛車)를 선물하였는데 이 흰 소를 ‘대백우(大白牛)’라 하며 일불승(一佛乘)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성문, 연각, 보살승의 단계는 결국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이라는 것이 〈법화경〉 비유품에서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인 것 입니다.
출처 : 삼거화택의 비유 - 둔황막고굴 98굴 남벽(오대십국 시대 10세기 전반)-법화경 평화와 공생의 메세지전
2. 장자궁자(長者窮者)의 비유(窮子喩)
장자의 아들이 어렸을 때 가출하여 아버지는 오랜 세월 동안 아들을 찾았습니다. 이후 그 아들은 쉰 살이 넘도록 타향 객지를 방황하며 가난에 찌들어 살았지요. 일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방랑하다가 우연히 본래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살고 있는 대저택으로 일거리를 찾아 기웃거리게 되었지요. 그러나 아들은 고귀한 장자의 기품과 위엄에 기가 눌리고 너무 엄청난 집의 규모에 놀라 뒷걸음질치게 되었습니다. 장자는 한눈에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차리고 불렀지만 오히려 놀란 아들은 너무 놀라서 정신을 잃고 맙니다. 그러자 장자는 정신이 든 아들을 안심시키며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 후 장자는 방편을 써 아랫사람을 시켜 아들을 찾아내어 일자리를 준다고 집으로 불러들여 집안의 거름 치우는 일을 시키게 됩니다.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생활에 적응한 아들이 성실하게 일을 하자 장자는 다양한 일을 시키며 20여 년을 아들과 함께하게 됩니다. 그 사이 가난한 아들은 마음이 착하고 집착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변해갔으며 참으로 맑은 마음으로 맡은 일에 충실하게 일했지요. 그 무렵 장자는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직감한 장자는 친족과 시종들을 모아 놓고 아들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실은 이 청년이 나의 아들입니다. 이제 내가 소유한 일체의 재물을 나의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아들은 놀라며 몹시 기뻐했습니다.
궁자유로 잘 알려져 있는 장자궁자의 비유는 법화경 제4품 신해품(信解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께 올린 비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부장자는 부처님이고, 그 아들은 성문들 즉 그 당시 부처님의 제자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오랜 기간의 방랑생활은 성문들이 소승의 가르침에만 의존하여 해탈을 얻고자 하였고 더 높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지 않고 안주한 것을 의미합니다. 청소부가 되어 일하는 동안 점점 마음이 열리어 마침내 장자의 아들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바로 성문들이 부처님의 참다운 불제자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성문들(제자들)이 부처님께 고백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출처 : 장자궁자의 비유 - 둔황막고굴 98굴 남벽(오대십국시대 10세기 전반)-법화경 평화와 공생의 메세지
3.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藥草喩)
삼초이목의 비유는 법화경의 제5품 약초유품(藥草喩品)에 등장하는 법화칠비 중 세 번째 비유입니다. 약초유(藥草喩)라고도 하지요. 신해품에서 제자들이 부처님께 올린 장자궁자의 비유를 받으시고 크게 기뻐하시며 다시 아래의 비유를 이어나가십니다.
가섭아,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 속의 산과 강과 계곡과 땅에서 나서 자라는 모든 풀과 나무와 숲과 약초가 종류도 많고 이름과 모양도 각각 다르니라. 짙은 구름이 가득하게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큰 비가 고루 내려 적심이 흡족하였느니라. 이렇게 비가 내리니 모든 풀과 나무와 숲과 약초들의 작은 뿌리, 작은 줄기, 작은 가지, 작은 잎새와 중간 뿌리, 중간 줄기, 중간 가지, 중간 잎새와 큰 뿌리, 큰 줄기, 큰 가지, 큰 잎새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상, 중, 하를 따라서 제각기 비를 받느니라.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나 그 초목의 종류와 성질에 맞추어서 자라고 크며 꽃이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느니라. 비록 한 땅에서 나고 한 비로 흡족하게 적셔 주고 축여주지마는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각각 차별이 있느니라.
출처 : 삼초이목의 비유-둔황막고굴 23굴 북벽(당나라 8세기)-법화경 평화와 공존의 메세지전
이 비유는 중생을 초목에 비유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출현은 큰 구름이 일어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자비를 대상을 분별하지 않고 내리는 빗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생의 근기와 능력은 초목의 상, 중, 하의 크기에 비유하여 부처님께서는 대상에 맞추어 법을 설하심을 뜻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작은 크기의 초목은 성문승, 중간 크기는 연각승, 큰 크기의 초목은 보살승에 비유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초목의 비유를 네 가지 뿌리, 줄기, 가지, 잎을 가리켜 신(信), 계(戒), 정(定), 혜(慧)로 나누어 볼 수도 있지요.
뿌리는 믿음이며, 신심을 키워나가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신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며 시작입니다. 줄기는 뿌리가 튼튼하면 저절로 잘 자라서 나오는데 줄기가 가지런히 곧게 뻗어가려면 계행을 잘 지켜 실천해야 하고 그리하면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 듯이 정이 생깁니다. 정(定)은 마음을 일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치는 방향으로 일향(一向), 결정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의심하거나 미혹에 빠지거나 하는 등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일심으로 수행하다 보면 자연히 가지에서 잎이 돋아나듯 지혜가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지혜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가르침을 지켜 실행하여 마음을 굳건히 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가섭아 이러하다 부처님이 설하신 법
비유하면 큰구름이 같은맛의 비를 내려
꽃과 사람 적시어서 열매 맺음 같으니라
가섭아 바로알라 여러가지 인연들과
가지가지 비유로써 불도 열어 보이지만
이는 나의 방편이요 여러부처 또한 같다
내가 이제 너희위해 참다운 법 설하나니
여러 성문 대중들은 멸도가 다아니요
오직너희 행할바는 보살도 뿐이러니
점점 닦아 다 배우면 모두 모두 성불한다
4. 화성 보처(化城寶處)의 비유(化城喩)
화성보처의 비유는 화성유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법화경 제7품인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등장하는 법화칠비중 네 번째에 해당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보물을 찾으러 험난한 여정을 떠난 수 많은 무리의 일행이 있었습니다. "도중에 지친 사람들은 그만 돌아자" 고 하였지요. 그때 인도자는 신통의 힘으로 화성을 만들어, "저기까지 가면 편하게 쉴 수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일행이 화성에 도착해 피로를 풀자, 지도자는 화성을 없애고 다시 격려했지요. "그럼 출발하자.보물이 있는 장소(寶處)는 가까이에 있다." 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목적지로 이끌었습니다.
출처 : 화성보처의 비유-둔황막고굴 61굴 남벽-법화경 평화와 공존의 메세지전 (좌) / UNESCO지정 세계문화유산 둔황막고굴 (우)
화성유에 등장하는 인도자는 바로 여래 즉, 부처님을 뜻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생로병사와 번뇌의 괴로움에서 여의게 하고 제도함을 말씀하십니다. 중생이 부처님의 위없는 지혜를 깨닫는 것이 너무나 멀고 험한 여정임을 알게 된다면, 범인들은 더 이상 부처님 공부를 하지 않고 선근공덕을 쌓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라 여기시고, 방편으로 성문과 연각의 두 열반을 말씀하셨지요. 비유 속에 화성은 즉 환영으로 만들어진 성은 성문과 연각의 깨달음의 경지를 뜻합니다. 그리고 보처 즉 보물이 있는 곳은 바로 성불(=부처님의 깨달음)을 비유하고 있지요. 그리하여 중생이 성문과 연각의 두 경지에 머무르면서도 부처님의 열반에 도달했다고 여기면, 그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할 바를 아직 다하지 못하였노라. 너희가 머물러 있는 경지는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우니 반드시 관찰하고 헤아려 보아라. 너희들이 얻은 열반은 진실이 아니요 다만 여래가 방편의 힘으로 오직 하나의 깨달음의 길인 일불승을 분별하여 삼승으로 설한 것이니, 마치 저 인도자가 쉬어가게 하기 위하여 신통력으로 큰 성을 만들었다가 휴식이 다 된 줄을 알고 말한 것과 같으니라.
5. 빈인계주(貧人繫珠)의 비유(衣珠喩)
빈인계주는 제8품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에 나오는 비유로 의주유 혹은 의리주(衣裏珠)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오백의 아라한이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고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비유를 부처님께 올려 지금껏 성문과 연각의 가르침에 안주하였음에도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부하였음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오면 어떤 사람이 친한 친구의 집에 갔다가 술에 취하여 누워 자는데, 이때 주인인 친구는 갑자기 관청 일로 집을 나가면서 값진 보배 구슬을 그의 옷 속에 넣어주고 나갔나이다. 그 사람은 술에 취하여 자고 있었으므로 전혀 알지 못하였고, 깨어난 뒤에는 다시 길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두루 다니면서 의복과 양식을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버느라고 모진 고생을 하면서 살려고 있는 힘을 다하였으나 매우 어렵고 곤란하였으며, 조그마한 소득이 있어도 그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하였나이다. 먼 훗날 친구는 우연히 그 사람을 다시 만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나이다.
"이 친구야, 참으로 가련하구나. 어찌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이 모양이 되었느냐. 내가 예전에 너의 행복을 위하여 마음대로 오욕락을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값진 보배구슬을 너의 옷 속에 넣어 두었는데 아마 지금도 그대로 있으리라. 너는 그것도 알지 못하고 이렇게 고생하고 걱정하며 가난에 지쳐서 구차하게 살다니 매우 어리석고 불쌍하구나. 네가 이제라도 이 보배구슬을 팔아서 필요한 물품을 바꾼다면 평생 동안 모든 것이 뜻과 같이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으리라."
출처 : 빈인계주의 비유-둔황막고굴 61굴 남벽-법화경 평화와 공존의 메세지전
가난한 친구의 옷 속에 보배구슬을 넣어준 이는 바로 부처님을 뜻하며, 중생이 위없는 지혜를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도록 그들을 교화하고 제도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보배구슬이 자신의 옷 속에 있는지도 모르고 고생을 하는 미련한 친구는 바로 성문과 연각의 깨우침을 얻고도 마치 열반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얻었다고 기뻐하며 거기에 안주해온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보배구슬은 곧 부처님의 지혜를 뜻하지요. 이 비유는 중생이 이미 부처님의 지혜라는 무상의 보물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리석음(무명)이라는 술에 취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계속 괴로워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6. 계중명주(契中明珠)의 비유(契珠喩)
법화경 제14품 안락행품(安樂行品)에 나오는 비유로 계주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읽고 외우며 받아지니는 공덕과 과보에 관하여 아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문수사리야, 비유하면 힘이 강한 전륜성왕(轉輪聖王: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이상적인 왕)이 위엄과 세력으로 여러 나라를 항복받으려고 할 적에 작은 나라의 모든 왕들이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전륜성왕이 많은 군대를 일으켜 가지고 가서 토벌하느니라. 왕이 군사들 중에서 싸움에 공이 많은 이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공에 따라 상을 주는데, 혹은 논밭과 집과 마을과 고을을 주기도 하고 의복과 몸을 단장할 물건들을 주기도 하고 혹은 여러 가지의 귀중한 보물인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산호, 호박과 코끼리, 말, 수레, 노비와 백성들을 주기도 하지만, 오직 상투 속에 있는 밝은 구슬만은 주지 않느니라. 왜나하면 이 구슬은 세상에서 전륜성왕의 이마 위에 있는 단 하나뿐이기에, 만일 이것을 주면 왕의 여러 권속들이 반드시 크게 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니라. 전륜성왕이 여러 병사들 가운데서 큰 공을 세운 이를 보고 마음이 매우 기뻐서 이 믿기 어려운 구슬을 오랫동안 상투 속에 감추어 두고 함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다가 비로소 그 병사에게 주었느니라.
계중명주의 비유에서 전륜성왕은 곧 부처님을 의미하며 부처님께서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법의 국토를 얻어 삼계의 왕이 되었으나, 여러 마왕들이 순종치 않고 항복하지 않으므로 여래의 어질고 훌륭한 모든 장수들이 이들과 함께 싸우되, 공이 있는 이를 보면 여래의 마음이 매우 기뻐서 사부대중에게 여러 가지 경전을 설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러 가지 경전은 전륜성왕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여러 가지 보물과 상을 내린 것으로 비유됩니다. 그럼에도 즉 비유 속의 구슬은 법화경을 뜻하며 전륜성왕이 상투 속의 귀중한 구슬은 보여주지 않은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도 이 <법화경>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한번 부처님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며 법화경을 보고 듣고 지니는 인연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일깨워 주십니다.
전륜성왕이 여러 병사들 가운데서 아주 큰 공을 세운 이를 보고 비로소 귀중한 구슬을 보여준 것처럼 여래께서도 또한 이와 같아서 삼계 가운데 대법왕이 되어 바른 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하되, 어질고 훌륭한 군사들이 오음의 마구니와 번뇌의 마구니와 죽음의 마구니들과 싸워서 큰 공을 세워 삼독을 소멸하고 삼계에서 벗어나 마구니들의 그물을 깨뜨리는 것을 보시고는, 이때 여래께서도 크게 기뻐하며 이 <법화경>이 능히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지혜에 이르게 할 수 있으나, 그동안 온갖 세간의 원망이 많고 믿지 아니하여 지금까지 말하지 아니하던 것을 이제야 말하느니라.
출처 : 계중명주의 비유-둔황막고굴 61굴 남벽-법화경 평화와 공생의 메세지전
7. 양의병자(良醫病子)의 비유(醫子喩)
제16품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등장하는 비유로서 의자유라고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설하시며, 아래와 같은 비유를 들어 부처님은 실은 열반에 들지 않고 중생을 교화해오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제15품 종지용출품(從地踊出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화경 설하심을 칭송하며 땅으로부터 쏫아 올라온 다보탑과 그 안에 정좌하고 계신 다보여래부처님과 또한 땅 아래 허공으로부터 나타난 수많은 본화보살들이 석가모니부처님께 예를 갖추며 찬탄과 공경을 올렸습니다. 이를 본 미륵보살이 무량 무수한 보살들을 부처님께서 어떻게 교화하셨을까 하고 의심을 하고 부처님께 청을 올립니다.
어떤 훌륭한 의사가 있었는데 지혜가 총명하고 의약에 통달하여 좋은 처방을 잘해주고 좋은 약을 만들어 여러 가지 병을 잘 치료하였습니다. 그 의사에게는 많은 자식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볼 일이 있어서 먼 타국에 간 동안에 여러 아이들이 잘못 알고 독약을 마시니 그 독약의 기운이 온몸에 퍼져 정신이 어지러워 땅에 쓰러져 뒹굴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보고 여러 가지 처방에 따라 좋은 약초의 빛과 향기와 맛이 다 갖추어 있는 것을 구해다가 약을 지어 주었지요. 자식들 중 독약의 기운을 아직 이겨낼 만큼 정신이 온전한 이들은 그 약을 먹고 곧 좋아졌지만, 이미 정신이 혼미한 이들은 아버지가 주는 약을 오히려 독이라고 생각하고 먹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 자식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방편을 써 "좋은 약은 여기 두고 갈 테니 먹도록 하여라" 하고는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를 보내어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자식들은 모두 놀라고 슬퍼하며 아버지를 진심으로 그리워하며 혼미해진 마음에서 깨어나 생전에 남기신 치료 약을 그제서야 먹었습니다. 곧 독약의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병증도 좋아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곧 자식들에게 돌아왔지요.
훌륭한 의사는 곧 부처님을 뜻하며, 독에 중독되어 괴로워하는 자식은 곧 중생을 의미하지요. 아버지의 죽음은 즉 부처님의 열반과 동일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께서 시성정각(始成正覺) 즉,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금생에 성불했다는 관점이, 사실은 "늘 이 사바세계에 머무시며 설법하시며 중생을 교화한다"는 가르침으로 전환이 됩니다. 부처님은 현실 세계에서 늘 민중을 계속 구제하지만, 열반의 모습을 보여주여 중생에게 연모하게 하고 깨달음으로 이끄신다는 것이지요. 다음의 부처님 말씀을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선남자들아, 너희들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이 이 의사가 거짓말을 하였다고 허물을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부처를 이룬 지가 한량없고 가이없는 백천 만억 나유타 아승지 겁이지만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방편으로 "반드시 멸도 하리라."라고 말한 것이므로, 이 역시 가르침과 같아 내가 거짓말을 하였다고 허물을 말할 사람은 없으리라.
출처 : 양의병자의 비유-둔황막고굴 61굴 남벽-법화경 평화와 공생의 메세지전
< 의의와 평가 >
『법화경』의 핵심 사상은 ‘회삼귀일(會三歸一)’이나 ‘개권현실(開權顯實)’이란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회삼귀일(會三歸一)이란 삼승을 모아 일승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며, 개권현실(開權顯實)이란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결국 삼승과 일승, 방편과 진실이란 대칭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삼승은 방편이나 작용, 일승은 진실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두 핵심 단어의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법화경』을 대표하는 일곱 가지의 비유는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전의 대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부연 설명하면 불타의 자비와 본질로의 회귀를 설명하는 비유와 불성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비유로 구분할 수 있다. 불난 집의 비유, 방황하는 가난뱅이 아들과 부자 아버지의 비유, 약초의 비유, 화성의 비유, 훌륭한 의사의 비유는 불타의 자비가 어떻게 중생들에게 다가가고 있는가를 설하는 비유에 해당한다. 반면에 옷 속의 보배 구술에 대한 비유와 이마 속의 보배 구술에 대한 비유는 불성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세친(世親)은 『법화경론』에서 『법화경』의 일곱 가지 비유를 일곱 가지의 교만함을 치유하기 위해 전개되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 더 쉽고 자세한 해설은 대한불교 천태종 구인사 홍보관에 설치된 법화칠유(부처님의 가르침)을 영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정초에 접한 부처님의 가르침 <법화칠유 (法華七喩)에 대하여>|작성자 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