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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통일신라 8세기 중엽에 세워진 역사 깊은 사찰이며 전국의 사찰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거대한 중층 금당이자 국보로 지정된 각황전으로 유명하다.
2. 역사와 설화
2.1. 창건부터 중창
구례군이 현재 전라남도이기 때문에 화엄사가 백제와 연관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화엄사는 신라 고승들이 창건하고 중창한 절이다. 오늘날의 구례와 광양, 순천 지역은 6세기까지 가야의 영토였고,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가야의 전 지역을 신라에 완전히 병합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광주대구고속도로 경로를 따라 남원시에 있는 아막성까지 신라의 영역이었고 화엄사는 남원에 인접한 지리산 자락의 길지에 지어졌다.
이 지역을 신라에 편입한 진흥왕은 화엄사를 세움으로써 해당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아울러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라의 전통적인 정복지역 유화정책과 신라 불교 고유의 중요한 특징인 호국불교사상과 연관되는데, 실제로 화엄사는 화랑의 정신교육 장소로 이용되는 등 군사 교육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신라의 고승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 이 분은 신라에 대승 불교를 도입했으며 진흥왕의 총애를 받았던 승려였다. 절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붙었다. 이후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에는 신라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건의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법사가 절을 증축하고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 7층탑, 석등롱(石燈籠) 등을 지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677년(신라 문무왕 17년) 당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긴 것을 화엄사에 보관한다. 이 기록은 조선 정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전라도 구례현의 읍지인 『봉성지(鳳城志)』에 적혀있다. 그리고 의상은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 사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경덕왕 때에 8원(院) 81암자(庵子)로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는 도선대사가 다시 증축했다고 한다.
고려 때에도 꾸준한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943년(고려 태조 26년)가 도선대사의 유지에 따라 중수를 한 이후, 광종, 문종, 인종, 충숙왕 때에 중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인 만큼 고려시대 전시대에 걸쳐 절이 지속적으로 유지보수, 관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화엄사 연기 조사의 진영에 참배하고(華嚴寺禮緣起朝師影)
偉論雄經罔不通 웅위한 경과 논에 모두 통달하여
(조사는 평소에 『기신론』과 『화엄경』을 강연하였다. 師平昔講演起▣花嚴)
一生弘護有深功 일생 동안 널리 알린 공이 깊어라.
三千義學分燈後 3천 의학이 법등을 나눠 받은 뒤로
圓敎宗風滿海東 원교의 종풍이 해동에 가득해졌도다.
(본전에서 가르침을 전한 의학의 수가 3천이었다고 하였다.)
『대각국사문집』
또한 대각국사 의천이 화엄사에 방문하여 화엄사를 처음 세운 연기 조사의 초상화를 보고 남긴 시가 전해진다.
화엄사는 지리산 산록에 있다. 승려 연기(煙氣)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지었다. 그중에는 불전이 하나 있는데 네 벽에 흙을 바르지 아니한 청벽(靑壁)으로 그 위에 화엄경을 새겼는데, 세월이 오래되니 벽이 무너지고 문자는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다. 석상(石像)이 있는데 어머니를 이고 서 있다. 세속에서 이르기를, “연기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절 앞에는 큰 시내가 있고, 동편의 일류봉(日留峯) 서편에 월류봉(月留峯)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화엄사의 모습이다. 이 기록은 화엄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2.2. 임진왜란 이후 현재까지
그러다가 임진왜란의 와중인 1597년(조선 선조 30년) 인근 석주관에서 일본군과 대치할 때 승군과 군량을 지원해 준 보복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고, 살아남은 승려들은 지리산과 주변 동굴에서 은신하다가 다시 모여 이 절의 폐허를 본 뒤 분개하고는 이 '대화엄종주'를 다시 세우기로 맹세하고 절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1630년(조선 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중심이 되어 재건을 펼쳐서 대웅전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건물들은 1636년, 각황전은 1703년(기록에 따라서는 1643년)에 완료했다.
이러한 재건을 거치면서 화엄사는 1701년(조선 숙종 27년)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가람(大伽藍)(큰 절)으로 정했다. 선교양종이란 불교의 일파인 선종과 교종을 가리키는데 선종은 참선을 통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교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두 일파를 다 갖춘, 요즘 식으로 절 중의 절이라는 뜻.
1925년 수해 복구를 위해 화엄사 청년회에서 53원 30전을 보냈다.
1931년 정병헌이 주지가 되었다.
1934년 정병헌이 화엄사 주지 재선에 성공하였다. 63표 중 33표를 받았고 소병선은 24표로 낙선되었다.
6.25 전쟁때 '빨치산들이 지리산의 절에 숨을 수도 있으니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당시 이를 받은 차일혁 초대 경찰 총경이 "태우는 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 하면서 대신 빨치산이 숨기 힘들도록 문짝만 모두 떼어 태울 것을 건의하여 살아난 이야기가 유명하다. 심지어 당시 차일혁 총경이 담당하던 지역은 전라북도였다. 한 마디로 경계를 넘어서 일을 벌인 것. 이 때문에 차일혁 총경은 감봉 조치를 당했지만 후일 화엄사를 비롯해 지리산의 문화유적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3등급)이 추서되었다.
2.3. 각황전 중건 설화
본래 각황전의 이름은 장육전이었다.
장육전 중건불사를 마음으로 결심하고 백일기도를 올리던 계파 선사는 문득 지난 밤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백일기도를 드리던 지난밤 비로소 잠깐 잠자리에 들었는데 언뜻 하얀 옷을 입은 신령스런 노인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 계파여! 그대가 지금 세운 장육전 중건불사에 대한 대발원은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니라. 그렇게 큰 일을 이루려면 복 있는 화주를 내어 큰 시주자를 얻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러려면 대웅전에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 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 빼보았을 때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가 능히 될 수 있을 것이니라! 내 말을 명심하거라, 계파여!"
이렇게 말을 마친 신령스런 노인은 문득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눈을 번쩍 뜬 계파 선사는 이상스런 꿈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날짜를 짚어보니 마침 다음 날이 드디어 백일기도 회향일이었다. 자신의 백일기도에 드디어 부처님이 답을 주신 것을 알아차린 계파 선사는 묵묵히 그 꿈에서 준 계시를 실행하여 장육전 중건 불사를 할 수 있는 화주를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파 선사는 대중 스님들이 아침 공양을 마치자 대웅전 마당으로 모두 모이게 했다. 산내 스님들과 대중에게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한 계파선사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대웅전에 차려놓고 차례차례 스님들이 들어가 먼저 물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은 다음 그 물 묻은 손을 다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넣어 하얀 밀가루가 묻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벌써 승려 열댓 명이 그렇게 해보았으나 손에는 하얀 밀가루가 묻어있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었다. 구름처럼 많은 스님들이 마당 가득 줄줄이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끊고 맑고 밝은 부처의 마음을 깨달아 고통 지옥에 시달리는 중생구제의 대원력을 세우고 출가한 수행자들이기에 누군들 장육전 대불사의 화주를 맡을 주인공이 결코 없지는 않을 듯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천여 대중을 넘는 산내의 모든 사람들을 다 실험해 보았으나 화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망의 빛이 얼굴 전면에 감도는 계파선사는 자신의 장육전 중건불사를 위한 백일기도가 이렇게 맥없이 끝나 버리는가 하고 깊은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실험을 아직 안 한 누가 없을까?'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헤아려보는 순간 공양간 앞에서 중년의 공양주 보살이 캐온 봄나물을 다듬고 앉아있는 것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에게 일러 나물을 다듬고 앉아 있는 공양주보살을 불러오게 했다.
계파선사의 말에 공양주보살은 마다하지 못하고 대웅전으로 들어가 먼저 물 묻은 항아리에 손을 푹 넣었다. 그런 다음 물 묻은 손을 그대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푹 넣었다. 그리고는 그 넣은 손을 대중스님들 앞으로 내밀었다.
"아! 이럴 수가……."
"밀가루 하나 묻지 않았다니!"
대중스님들이 공양주보살의 손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화엄사 공양간에서 오직 밥 짓고, 나무 해 불 때고, 나물 캐 나물 만들고, 국 끓여 올리고 설거지하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 그런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대불사의 화주가 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이적입니다. 이로써 장육전 중건불사의 대화주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정해진 것입니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들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선사님 저는 아닙니다. 일자무식인 저는 오직 밥밖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거두어 주소서 선사님!"
파리하게 얼굴이 질린 공양주보살은 계파선사의 말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공양주보살님이 10년을 공양주로 열심히 일한 복력이 천여 대중스님들보다 뛰어나니 이렇게 오늘의 실험에서 신비로운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실험한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보살님께서 꿈에 나에게 지시한 것이니 공양주보살님을 화주로 선택한 것은 바로 문수보살님입니다. 그러니 이제 대시주자를 얻어 장육전 중건불사를 잘 이루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계파선사는 공양주보살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대중스님들도 공양주보살이 화주로 정해진 것을 알고는 공양주보살에게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의 중임을 맡기게 되었다.
꼼짝없이 그날 화주의 중책을 맡은 공양주보살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직 밥 짓고 부처님 앞에 조석으로 공양 올리는 일밖에 모르는 자신이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장육전 대불사의 책임을 맡다니 자다가도 기절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화주로 정해진 바에야 어떻게든 부처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엄하신 계파선사가 화주 소임을 딱 맡겨버린 판이라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저녁 공양을 지어 올리고 공양시간이 끝나자 공양주보살은 대웅전으로 들어가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았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 소임으로 맡은 화주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맡은 바 소임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며 자꾸 머릿속으로 되뇌며 기도를 하는 공양주보살의 눈꺼풀이 어느덧 스르르 감겨 내렸다.
그러더니 그 눈앞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홀연 나타나는 것이었다.
"공양주보살, 그대는 화주를 맡은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일 아침 일찍 화주 소임을 실행하러 길을 떠나거라. 그리고 길을 가다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거라. 알았느냐!"
공양주보살은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노인은 없었다. 대신 부처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촛불 앞에서 반짝이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내일 아침 길을 떠나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고? 아! 이는 지리산의 주인인 문수보살님의 현몽이구나.'
공양주보살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음 날 아침 공양을 마친 후 비로소 화주 소임을 위해 길을 떠났다. 꿈에 노인의 말처럼 길을 가다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무조건 붙잡고 장육전 대불사의 시주자가 되어 달라고 다짜고짜 부탁을 할 참이었다. 사실 그 방법 외에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의 좋은 방법도 없을 듯 싶었다.
맑은 지리산 물이 굽이쳐 흘러내리는 길 따라 내려가면서 공양주보살은 진달래 꽃이 피고 진자리에 파릇하게 돋아난 새순들을 바라보면서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며 여러 생각들을 자유로이 해보았다.
어젯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했으니 사실 그 일도 다 풀린 일이 아닌가. 적어도 천석지기나 만석지기 큰 벼슬을 사는 대감을 만나게 되어 무사히 일이 풀리게 되겠지하고 낙관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간절히 고대하며 길을 가는데 진짜 멀리서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이제 저 사람이 장육전 불사를 해 줄 어마어마한 재물을 가진 훌륭한 시주자이겠거니 하고 공양주보살은 들뜬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가갔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다가가던 순간 공양주보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공양주보살은 열린 입을 닫지 못했다. 공양주보살 앞에 나타난 이는 놀랍게도 누더기를 걸친 거지 할머니였던 것이다. 화엄사 앞에 움막을 치고 살면서 가끔씩 화엄사 공양간에 와서 나물도 캐주고, 불도 때주고, 잔심부름을 거들어주면서 한 끼 공양을 얻어먹고 가거나 누룽지나 과일을 얻어가던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거지 할머니였다.
돈 많고 권력 많은 대 시주자를 만나겠거니 했는데 저런 거지 할머니라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머리가 어지러워진 공양주보살은 그 자리에 짚단처럼 맥없이 풀썩 쓰러질 지경이었다.
절망의 순간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공양주보살은 지난밤 꿈만을 믿고 안되겠다 싶어 다짜고짜 엎드려 말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우리 화엄사 장육전을 크고 훌륭하게 지어주소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이제 실성을 했나보네 그랴. 새로 장육전 불사를 한다고 계파선사님이 그러시더니 이제 아주 실성을 했어 그랴!"
"아닙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장육전을 새로 짓게 시주를 해주옵소서!"
거지 할머니가 그 말을 들으며 보니 공양주보살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거지 할머니는 순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말했다.
"지리산의 문수보살님이시여!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면 장육전 불사를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저에게 가피를 내려주소서!"
거지 할머니는 수십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외더니 순간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지리산 깊은 계곡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 거지 할머니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아스라이 저 아래로 몸을 던졌으니 죽었을 게 틀림없었다. 공양주보살은 어쩌다가 장육전 화주가 되어 애매한 생목숨 하나를 죽게 하였구나 생각하고는 큰일이다 싶어 마구 달아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그새 육 년이 지났다. 한양 땅으로 도망가 주막집에서 막일을 하고 살던 공양주보살은 어느 부인의 심부름으로 창덕궁 앞에 나가게 되었다. 손님 하나를 만나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침 궁 안에 살던 어린 공주가 유모와 함께 창덕궁밖에 나와 놀고 있었다.
다섯 살이나 먹었을까 하는 어린 공주는 길가를 아장아장 달려 다니며 뛰어 놀았다. 그 옆에 서있던 공양주보살은 그 어린 공주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린 공주가 공양주보살을 알아보고 낡은 옷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우리 공양주보살님!"
그 어린 공주의 눈빛은 정말 공양주보살을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며 그 어린 공주를 안아 주었다. 그런데 이 어린 공주는 이상하게도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손이 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린 공주의 손을 공양주보살이 만지자 그대로 펴지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공주의 펴진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써져 있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숙종대왕에게 전해졌다. 숙종은 공주를 낳고 손이 펴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몹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공양주보살의 손이 닿자 펴지고 그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다는 것을 보고는 그 내력이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숙종은 공양주보살을 곧 내전으로 불러 들였다. 숙종 앞에 나선 공양주보살은 절을 올리고 나서 지금까지의 일을 소상하게 말했다.
"참으로 장하도다! 거지 할머니의 진실된 원력이 결국 공주로 환생하게 하였구나! 내 공주를 위하여 모든 비용을 내겠도다!"
숙종은 감격하여 말했다. 그러면서 장육전 중창을 할 비용을 바로 하사하였다. 장육전이 완성되자 숙종은 직접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었다. 각황전이라는 사액의 뜻은 부처님을 깨달은 왕,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양주보살은 각황전 건물이 완성되는 날 먼 옛날 그 거지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혼자만 아는 깊은 미소를 짓고 물끄러미 각황전 처마 위로 펼쳐진 지리산과 파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물론 숙종에겐 슬하에 공주가 없었고 실록에 기록되지도 않은 민중의 야사이다.
법철스님에 따르면 공양주보살은 거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관아에 쫓겨 청나라까지 흘러가게 되고 저 공주는 청나라 강희제의 딸이라고 한다. 강희제가 시주를 하고 숙종 임금이 도왔다는 설. 그래서 각'왕'전이 아니라 각'황'전이라 한다.
3. 가람 배치와 문화재
3.1. 이상한 가람 배치
화엄사가 일반적인 다른 사찰들과 차이점을 든다면, 보통 절이라면 탑이나 대웅전이 가장 큰 건물이기 마련인데, 이 화엄사는 각황전이 압도적으로 크다. 물론 각황전 역시 부처상이 있는 금당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러한 크기 차이 때문에 가람의 배치가 지나치게 비대칭적으로 변해 좀 이상해졌다. 게다가 각황전 앞의 석등과 그 아래의 서 오층석탑은 삐뚤게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앞 아래에 있는 동 오층석탑 역시 정 중앙에 있지를 않고 삐뚤게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 더 이상한 점은, 중문(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과 각황전을 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보제루를 여느 절과 달리 밑으로 못 지나가고 동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단한 의도가 숨어있다.
절의 방문자가 보제루를 오른쪽으로 멀리 돌게되면 각황전은 멀어지고 대웅전은 상대적으로 가깝다. 그렇게 되면, 원근감에 의해 각황전과 대웅전의 크기 차이가 많이 줄어든다! 또한 보제루를 돌아 삐뚤게 배치되어 있는 각황전과 대웅전, 탑과 석등 전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 마치 일직선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서 오층석탑-석등-각황전이 일렬로 놓이고, 동 오층석탑과 대웅전이 일렬로 놓이게 되는 탁월한 시각적 배치를 보여준다.
3.2. 문화재
화엄사는 역사적·학술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 절 자체가 2009년 사적 제505호와 명승 제64호로 지정되었으며, 경내에는 2022년 2월 현재 국보 5건, 보물 8건, 천연기념물 2건이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 '대웅전'의 편액은 선조의 여덟째 아들 의창군 이광이 쓴 것이다.
의창군이 쓴 화엄사 대웅전 편액은 이후 번각(飜刻)되어 인근의 하동 쌍계사, 서울 조계사, 진관사, 완주 송광사 등 여러 사찰에도 걸렸다. 예산 수덕사, 정읍 내장사에도 걸렸으나 이쪽은 나중에 교체되었다.
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보관했는데, 임진왜란 때 절이 전소되면서 파편으로 남았고 색도 검게 그을렸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올벚나무는 벚나무의 종류 중 하나로 일반적인 벚나무보다 꽃이 잎보다 일찍 핀다고 한다.
이 나무는 병자호란 이후 군수물자로 쓰이던 벚나무를 심으라는 인조와 효종의 명에 호응하여, 근처에서 잘 자라던 올벚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는데, 그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한 그루로서 현재 가장 수령이 오래된 벚나무 단목이다. 사찰 경내에는 자리하지 않고, 사찰 입구에서 개울 건너에 있는 일지암이라는 암자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혹시 모르면 사찰 분들께 한 번 물어보길.
원래는 화엄사 경내에서 구층암을 지나 길상암으로 가기 전 길가에 피어있는 이 '백야매(白野梅)'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고, 2024년에 화엄사 각황전 옆에 자라고 있는 '홍매화(紅梅花)'도 천연기념물로 같이 지정하였다.
참고로 문화재는 아니지만, 전통 건축을 연구 혹은 관심이 있는 분들이 화엄사에서 찾는 곳이 '구층암(九層庵)'이라는 암자인데, 이 암자의 요사채 건물의 기둥은 일반적인 가공된 목재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목재. 그것도 모과나무의 기둥을 그대로 건물에 쓰였다. '한국 건축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건물이니 해당 암자에서 길상암 가는 길에 자리한 천연기념물 매화나무를 구경하는 김에 같이 보는 걸 추천한다.
3.2.1. 도난 문화재
금강역사상 및 녹사 - 나한전 안에 있던 유물이다.
지장탱화, 시왕탱화 - 명부전 안에 있던 불화이다.
지장암 보광전 불상 - 화엄사 산내 암자인 지장암에 있던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3.2.2. 벽암대선사비
1663년 세워진 벽암 각성을 기리는 비로 비지정 문화재이다. 앞면과 뒷면을 클릭하면 비문의 해석문을 볼 수 있다.
3.3. 전각
일주문
불이문
금강문
천왕문
운고루
보제루
종각
영산전
각황전
나한전
원통전
영전
대웅전
명부전
삼전
원융료
범음료
만월당
덕장전
광학장
화엄원
탑전
3.4. 산내 암자
구층암
봉천암
금정암
연기암
보적암
지장암
내원암
청계암
미타암
남암
묘향암
4. 화엄사를 거쳐간 스님
아래에 나온 스님들은 화엄사에서 머물렀거나 인연이 있는 스님들이다.
연기 - 화엄사를 창건한 스님이다.
선각 도선(先覺 道詵, 827~898) - 화엄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낭원 개청(朗圓 開淸, 835~930) - 화엄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선각 형미(先覺 泂微, 864~917) -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관혜(觀惠) - 후삼국시대 승려로 견훤을 지지하였다.
동진 경보(洞眞 慶甫, 869~948) - 태조 왕건의 왕사였던 스님으로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윤눌(潤訥)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수군으로 참전하였다.
중관 해안(中觀 海眼, 1567~?) -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 이후 화엄사사적이라는 역사책을 썼다.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
계파 성능(桂坡 性能)
명곡 현안(明谷 玄眼)
자운 처관(慈雲 處寬)
용담 조관(龍潭 慥冠, 1700~1762)
진응 혜찬(震應 慧燦, 1873~1941)
포월 영신(抱月 永信, ?~1941)
동헌 완규(東軒 完奎, 1896~1983)
이산 도광(璃山 導光, 1922~1984)
5. 교통
어떻게 오든 과거에는 '문화재 관람료' 명목으로 4,000원(성인 기준) 정도 받아갔지만, 2023년 5월 4일 이후 없앴다. 다만 어떻게 오든 사찰 내 매화와 벚꽃이 피는 3월 말 ~ 4월 초에는 사찰 바로 아래의 주차장과 도로는 만원 사례이니 가급적이면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올라가는 걸 추천한다.
5.1. 자가용
어느 쪽에서 오느냐에 따라 다르다.
서울 등 수도권이나 북쪽에서 오는 경우는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 나들목에서 19번 국도를 따라서 가면 된다.
부산이나, 순천 쪽에서 오는 경우는 황전 나들목에서 17번 국도를 이용해서 온다.
양 쪽 모두 거리가 약 20분 정도로 비슷하며, 18번 국도의 종점으로 사찰 입구로 들어오는 길의 도로명은 화엄사로인데, 왕복 2차로에다가 마을과 학교가 있기 때문에 안전운행은 필수이다. 하지만 2023년 4월 우회도로가 개통되었다. 애초에 우회도로 건설 목적이 화엄사를 편하게 진입하기 위함이다.
5.2. 대중교통
구례공영버스터미널에서 화엄사 입구 정류장까지 가는 농어촌버스를 운행하며 5회는 성삼재까지 운행한다. 버스 정류장에 내린 후 화엄사까지 20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만약 그 지점에서 택시를 타고 화엄사 불이문까지 온다면, 5,000원 정도 나온다.
철도의 경우 구례구역이 가장 가깝지만, 역에서 화엄사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 1일 1회 운행하지만, 새벽 시간에만(02:40)에만 운행하고 이 마저도 구례구역 - 구례, 구례 - 성삼재가 타 노선으로 취급된다. 때문에 철도 대신에 택시를 이용하거나, 구례구역에서 구례 읍내까지 가는 버스를 타서 환승해야 한다.
시외버스는 구례, 곡성 경유 광주행, 구례, 곡성, 남원 경유 전주행, 하동 경유 부산서부행이 있다.
6. 여담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 있기에 입장료를 받는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지리산 국립공원은 2007년 부로 무료로 개방이 된 상태이다. 다만, 여기서 노고단으로 가든 안 가든 절에서 '문화재 관람료' 명목으로 성인 기준 4,000원의 입장료를 내야만 햇다. 물론 상술했듯이 2023년 5월 4일 이후로는 무료. 그리고 구례군이 대중교통이 좀 부실한 편이라 사찰에서 나가는 교통편을 생각하고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사찰에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는데, 성삼재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거리가 길고 등산로가 험하긴 하지만, 겨울에는 성삼재로 가는 노고단로가 통제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엄사에서 등산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돈 내는 건 양 쪽이 비슷하다.(성삼재에서는 주차비). 과거에는 천은사에서 입장료도 받아먹어서 논란이 많았었다. 자세한 건 노고단로 문서 참조. 노고단 이후로는 지리산 주능선에 합류한다.
이름과는 달리 화엄종이 아니라 조계종 소속이며, 화엄종의 총본산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만월산에 자리한 약사사이다.
2012년 10월 5일, 누군가가 방화를 저절렀으나, 다행히 이미 목재에 내화성을 가진 보호제를 발라놓았기 때문에 큰 피해가 없었다. CCTV에 신문지에 불 붙이고 달아나는 사내가 찍혔다.
한때 템플 스테이 한다고 절 아래에 건물을 늘렸는데, 이 와중 목조건물 아래에 무단으로 콘크리트 지하실을 만들다가 관공서에 걸리는 흑역사를 찍기도 했다. 그래서 화엄사 앞 목조건물 밑에 있는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공사가 중단된 채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이후 마무리되어 현재는 외부 직원들의 기숙사로 쓰이고 있다. 그 위에 화엄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