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풀잎도 그런 것을 하물며 사람에서랴.
그저 눈물로도 모자란 것을 가만히 바라보면 측은도 한 것을
정호승의 동시(童詩), 그 말없는 사랑법이 좋다.
김용규는 저서 <숲에게 길을 묻다>에서 숲의 나무가 그러하듯이
삶은 모색과 버림과 상실을 통해 이어지는 것이며
그들이 쌓은 모색과 버림과 상실 중 아름다움이 깃들지 않은 것은 없다,했다.
과연 그렇다.
겨울 나기 위해 단풍 들어 낙엽 지우고
빛을 저장하기 위해 때로 잎새 대신 가시를 선택하는 처절.
가을숲을 향하며 그 걸음에 묻는다.
내려 놓을 무엇 하나 마음 두었는가.
아미타불의 정토에 들거든 한가지는 해우(解憂)할 것.
■ 산행지 : 지리산
1일차(8시간) : 지리산휴양림 - 비린내골 - 덕평봉안부 - 오공능선 - 휴양림
2일차(4시간) : 영원사 갈림길 - 상무주암 - 문수암(회귀)
<가을숲의 잔치, 처절한>
만년을 두어 천이(遷移)된 숲, 설핏 바람이 불면
소슬한 물소리 위로 가을빛 듣는다.
멈추어 가만히 눈감고 귀 기울이니
어쩔거나. 낙화인 양 애틋한 한방울 눈물.
광대골의 상류가 되는 비린내골을 찾는다.
머리 위 익어가는 가을이 가슴 에인다.
하물며 한그루 나무도 버려 삶을 잇는 바인데
사람의 모습으로 어이 연연일텐가.
내려 놓고 또 내려 놓아야 하는데
미처 그러지 못하고 하노니 미련스레 세상 탓.
여름, 초록으로 곱게 치장했던 골은
이제 누군가 내려 놓은 낙엽의 옷을 입고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원래 그런 것임을 잘 아는 것이다.
낙엽의 소(沼)에서.
흡사 밟고 지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볼까.
차츰 단풍이 물들어 간다.
나무들의 겨울채비가 차분하고도 치열하다.
단풍에 물든 사람들
그 속 나도 그저 한그루 나무인 듯
그 속 나도 그저 한떨기 꽃잎인 듯
가을 계곡, 졸졸졸 물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저리 좋으니 어이 두고 떠날텐가.
엄두를 내지 못한 숲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
이제 비린내골을 버리고
좌측의 오공산능선으로 사면을 헤쳐 나아갈 것이다.
낮은 구름 속 볕이 지나는 곳에 아무렇게나 앉는다.
낙엽 식탁이 식욕을 돋운다.
숲의 향에 더하여 사람향, 가을이 살가운 이유.
오공산능선을 올라 덕평봉(1522m) 아래 주능에 닿았다.
손에 잡힐 듯 주능의 연봉이 단풍옷 입고 반긴다.
좌측으로 안당재와 바깥당재 우측으로 봉우리 너머 벽소령
그리고 너머 너머 저 멀리 반야.
오공산능선으로의 하산 길, 마음에 담기는 구비구비 주능.
좌측의 구름 바다 닿은 상봉이 아스라 하다.
전망바위의 소나무.
생존의 몸부림이 저리도 처연하다.
필사적으로 빛을 쫓았을 것이다.
그리 잎을 내고 가지를 뻗었을 것이다.
무심한 단풍 내게도 물든 듯 건듯 얼굴 붉다.
저 무언의 가르침에 얼굴 붉다.
숲의 처절한 삶의 몸짓이 눈물난다.
그 속 찰나의 번뇌, 가을비 모양 스친다.
순간, 가을비가 내렸다.
맞아도 좋을 비였다.
몇 병 되지 않는 술이 절반이나 남았지만
빗소리에나마 숲의 고통을 잊을까 애써 외면.
<해우의 길>
소슬한 바람과 색색의 단풍,
청아한 물소리와 애애한 빗소리.
내려 놓아야 할 것도 한 짐인데
어이 이리 욕심만 더하는지.
이 길엔 가을 처럼 각오할 수 있을까.
이 길엔 가을 처럼 해우할 수 있을까.
도량(道場)에 한걸음 내딛는다.
보살들의 군무가 정성스럽다.
넘어서면 아미타불의 정토일까.
여전한 세와 계일까.
그것은 부처의 마음일까.
그저 내 마음일까.
상무주암 곁 좌대에 오른다.
앉아 마음의 문 열면 사바세계 너머 정토가 펼쳐질 것을,
그에는 승속(僧俗)이 달리 없을 것을
속인은 차마 앉지 못하고 저기가 빛이요 꿈인 것을, 하며 그저 섯다.
비록애 미처 마음 두지 못였으나 세상에서도 때로 정토는 있는 법이라며
그 피안의 개오를 벅차한다.
피안의 꿈.
청춘의 심사로 근심 없이 자유롭게 날고픈 꿈.
저 걸음의 끝, 정토에 닿아 해우하는 꿈.
문수암.
저 멀리 가을 내린 산사, 스님의 미소가 무릇 자비요 부처인데
행여 속세의 티끌이나마 남길까 차마 내려서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렇다면 이곳이 정토가 맞구나.
암자 마당의 조망.
앞서의 금대산(847m)과 뒤로 삼봉산(1186m)이 멋진 가을 하늘 아래 시원하다.
햇살 좋은 무렵, 한 켠의 밭에서 배추를 수확하는 도봉스님.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말씀을 남긴 해인사 혜암스님의 상좌로
문수암에 머문지는 30년 가까운 불심이란다.
천인굴 석간수로 마른 목을 축이고
가을볕을 맞는 양 반가워 하며 권하는 스님의 오미자차를 음미하며 잠시 세상을 잊는다.
미련치 않은 사람이라면 그로도 해우한다 하련만 나로서는 언감생심.
나만의 공간에서 바라보는 창 속 세상에서야 찰나 해우.
피안(彼岸).
경계의 외줄 창살이 너머의 시선 막아선다.
아직은 경계에 머무는 내 시선이 그닥 밉지 않다.
차츰 비워내면 너머도 담아낼 테니.
꿈이라면
한용운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出世)의 해탈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
문수암 해우소(解憂所).
들러 나오는 길, 내려 놓은 근심이 어언 걱정이다.
어쩔 것인가. 이리 생긴 것을.
도봉스님의 자비.
씨 뿌린지 두어달의 싱싱한 무우며 정성으로 담근 오미자주며
내어 안기는 스님의 '인연'에 대한 다정이 여간 아니다.
붉은 오미자주 한잔에 달아 오르더니
정토를 몰래 빠져나온 보살이 선계에 닿은 듯, 그 속에서 노니는 듯 하더라.
노스님의 자비에 신실한 합장하고 돌아서는 길,
저마다 한가지의 해우는 하였을까.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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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근심일랑 서글픈 듯 단풍 지어 떨구고
천이(遷移)의 순리를 구해야 할 때.
정토에 든 듯 맑은 심신으로
자비의 마음 나누어야 할 때.
그런 가을의 하루,
살아냄의 처절함을 배운다.
그것은 가짐이 아니라 버림.
그것은 혼자가 아니라 더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