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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임계정
 
 
 
카페 게시글
역사 이야기 스크랩 회봉 하겸진 生涯(생애)
대산 강원기 추천 0 조회 38 15.03.18 22: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진주시 수곡면 덕곡마을에 ‘덕곡서당(德谷書堂)’이 있다. 서당 편액은 백범 김구의 글씨로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서당은 진주 서쪽 50리 수곡산 가운데 있으니, 고(故) 대한국(大韓國) 처사(處士) 회봉(晦峯)

하선생(河先生)이 학생들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처음 선생께서는 구강정사(龜岡精舍)

라는 곳이 있었지만 너무 좁아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학생들이 이를 염려하여 선생의

맏아들 영윤(泳允)으로 더불어 의견을 모아 이곳에 이건하였다. 규모는 전일에 비해 조금 넓어지고 나무가 울창하며 시내가 그윽하여 경치가 아름다웠다. 선생이 들어와 거처하며 즐기더니 그 지명을 따서 덕곡서당이라고 이름하였다. 선생은 서구의 물결이 밀려오고 유학의 운수가 장차 망하려는

시기에 태어나 한 몸으로 대임을 짊어지고 어지러운 소용돌이 가운데서 항쟁하였으니 그 마음의

괴로움과 형세의 고단함이 어떠하였겠는가”

덕곡서당의 기문 앞부분이다. 망국의 선비로서, 실날같은 우리나라 도학을 면면히 계승하기 위해

온 몸으로 노력한 회봉 하겸진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글이다. 해방 후 위당 정인보 등 당대 최고의 국학자들이 주인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 덕곡서당을 방문했다.
면우 곽종석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로서, 당송팔대가들의 문장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문장을

인정받은 회봉은 어떤 선비인가.
1870년 진주 수곡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형(叔亨)이니, 본관은 진주인이다. 조선중기 남명선생

사숙인으로 도덕과 문장으로 명성이 높아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한 송정(松亭)하수일( 河受一)이 바로 회봉의 11대조이다. 고조는 함와(涵窩) 이태(以泰)이며, 증조는 정현(正賢)이며,

조부는 만취헌(晩翠軒) 학운(學運), 부친은 재익(載翼)이니, 모두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회봉은 어려서부터 자질과 성품이 남달라 5세 때는 조부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고, 6세때에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이 두류산에 왔다가 만취공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회봉을 한번 보고

심히 기특하게 여겨 두류산이란 제목으로 시를 읊게 하였더니, 즉석에서 읊기를, “천왕봉을 우러러 보니(仰看天王峯)하니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것 같구나(疑是撑天柱)” 라고 응하였다. 이를 본

만성이 매우 놀라며 “이 아이는 장래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13세 때에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널리 학습하고 식견을 넓혀 문사(文思)가 크게

드러나니 명성이 유림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27세 때 가을에는 거창(居昌)의 다전(茶田)으로 나아가 면우 곽종석을 배알하고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진수와 성현심학(聖賢心學)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하고 마침내 평생 스승으로 섬겼다.
면우도 그의 자질을 인정하면서 앞으로 크게 될 인물로 허여(許與)하였으며, 다시 삼가 선비

후산(后山) 허유(許愈)을 스승으로 삼아 식견을 넓히고 심학(心學)의 개발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더욱 학문의 폭을 넓히고자 만성 박치복,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교우(膠宇) 윤주하(尹胄夏), 약헌(約軒)

하용제((河龍濟), 사촌(沙村) 박규호(朴圭浩), 매당(梅堂)이수안((李壽安) 등 당시 강좌 강우 지역의 석학들과 널리 교유하면서 혹은 강론(講論)하고 혹은 문질(問質)하며 구도(求道)에 심혈을

기울였다.회봉은 언제나 경학(經學)을 근본으로 삼고 퇴계의 학문을 스승삼아 따르려고 노력했다. 회봉은 방대한 주서(朱書)를 분석하여 긴요한 부분을 간추려 주어절요(朱語節要) 10권을

편찬했으며, 다시 퇴계의 저서들을 독파하여 ‘도문작회(陶文酌海)’ 6권을 지어, 이 두 책을 좌우에

비치하여 진리 탐구에 여념이 없었으니 회봉의 학문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학(史學)에도 조예가 깊어 ‘명사강목(明史綱目)’ 18권을 저술하여 세상에 폈으며, 만년에는 동시화(東詩話)를 엮어 우리나라 시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학문과

연원을 체계 있게 정리한 ‘동유학안(東儒學案)’ 30권을 완성하였으며, 해동명장열전(海東名將列傳)을 저술하여 민족정신 계발에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압제속에서 사는 국민들의 진로를 명시코자 ‘국성론(國性論)’ 3편을 완성하였고, 당시 주기론자(主氣論者)가 주창한 성사심제론(性師心弟論)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한편 심위자모설(心爲字母說) 5편을 지어 심성론(心性論)을 조리있게 설명하고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조리 있게 비판하였다.

회봉은 일찍이 숭양(崧陽) 임고(臨皐) 도산(陶山) 옥산(玉山) 덕천(德川) 남계(藍溪) 병산(屛山)

고산(高山) 서계(西溪) 등 여러 서원을 둘러보면서 선인들의 학덕을 본받으려고 노력했으며

목은영당(牧隱影堂)과 개성 선죽교(善竹橋)에 들러서는 충신들의 절개를 시로 남기기도 했다.

또한 두류산 금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 묘향산 등 명승지를 둘러보면서 아름다움을

역시 시로 남겼다.

회봉은 평생 도학의 계승과 광복을 간절히 바랐다. 여러 문인(門人)들에게 언제나 민족혼의 계도를 주장했으며, 이를 몸소 실천하기도 했다. 1919년 스승인 면우 곽종석이 전국유림대표(全國儒林代表)로 137인을 창솔(倡率)하고 파리평화회의에 독립호소를 하게 되자, 회봉은 8순 노부모를 모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거사에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아들은 불러 이르기를, “어버이 모시는

일과 뒷일를 너에게 일임하고 나는 나라을 위하여 투신하니 너는 더욱 힘쓰라.” 고 명령을 하였다.

마침내 파리장서사건으로 인하여 수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1926년 봄에는 다시 제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에 연루되어 대구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4년 면우 곽종석의 제자 심산 김창숙이 이회영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교섭해 만주·몽고

접경지에 황무지를 무상 조차,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1925년

8월 이곳의 개간자금 마련을 위해 김화식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모금활동을 펼쳤으나 계획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모금운동으로 600여명 유림들이

투옥되었는데, 이를 제2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한다.

회봉은 거듭된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쇠해져 병석에 눕자 제자들을 불러 세 가지 한(三所恨)이 있다고 말하기를, “일생동안 주공(周公) 공자(孔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를

숭모하였음에도 그 성현의 유적을 살피지 못하고 죽음에 임하였으니 이것이 한가지 한스러운

것이요, 선배들의 분분한 성리설(性理說)을 통일하여 불멸의 진전(眞詮)을 후생들에게 명시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두가지 한스러운 것이요, 이 나라가 왜로(倭虜)의 학정에 시달린지 30년이

넘었건만 생전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으려 하니 이것이 세번째 한스러운 것이라.”하였다.

후에 다행히 자리에서 일어나 광복을 맞아 그 한스러움을 풀게 되었지만, 이듬해인 1946년 7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니 많은 선비들은 국사(國士)가 세상을 떠났다고 개탄하였다.(계속) 

        [출처] 회봉 하겸진(상)|작성자 청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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