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능력을 위한 의식변화실습<내면작업 12일째>
○ 오늘 나는 일어나는 것 어느 것에도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Today I will judge nothing that occurs.
내 비전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내 삶에서의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
판단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어렵거나 비참하다고
인식해온 많은 경험들이
내 인식을 바꾸게 하는
주요한 기회들을 제공해주었다.
각각의 기회가 나에게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 교훈들을
배울 다른 기회를 주고 있음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오늘, 나는 판단없이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볼 것이며,
스스로에게 종종 상기시키리라:
모든 이는 나와 함께 존재한다.
그들은 사랑받기 위해 있지
판단받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성찰: 우리는 비유에 있어서 삶이라는 스크린에 출현하는 실재들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영사기가 어떤 에너지로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른바 투사에 의해 내가 만나는 실재가 출현한다고 한다면, 그 투사에 있어서 어떤 에너지를 방출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이것은 영사기라는 내면의 진정성에 대한 자각이 필요한 부분이다.
반면에 영사기와 스크린이라는 비유를 넘어 실재는 영화관이라는 더 큰 공간으로도 존재한다. 자기 내면의 진실성과 더불어 영화관이라는 전체성(wholeness)은 나와 타자를 포용하고 있고, 그 전체성은 각각의 개별체들 간의 관계, 거리, 움직임, 관심 등에 있어서 영향을 준다. 현대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개별자라는 부분과 드러난 질서는 숨겨진 전체성에 연결되어 있으며, 각 개별자는 자신의 질서를 그 숨겨진 전체성으로부터 공급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자신의 내면이 투명한 렌즈처럼 되고, 전체성이라는 실재의 빛이 그 투명한 렌즈를 비추게 될 때 우리는 유기체적인 세상에서 빛나는 조화와 균형을 볼 수 있게 된다. 불교의 말을 인용하자면 화엄의 세계, 곧 개별 구슬들이 다른 개별구슬들과 전체를 비추어 빛나고 장엄한 실재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러한 실재로의 경험에 대한 핵심 열쇠는 자신의 투명성, 곧 판단없음으로서의 관찰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는 ‘사고없이 아는 자’라고 표현한 그 투명성, 쉽게 말해서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음의 주관적 해석이 사라진 상태에서 맞이하는 실재에 대한 경험이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삶이라는 실재는 자기 조직화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유기적인 소통을 통해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 에너지, 공명으로서의 상호조율을 통해 집단지성을 지니고 스스로 펼쳐진다. 개별자들이 단위세포로서 자신을 열어 신경조직망처럼 연결되어 스스로 지성을 발생시키면서 시너지 작동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서로에게 유익하고 최선의 것을 주고 받는다. 그러므로 타자와 낯선 사건을 만나고 이에 자신을 연다는 것이 성장과 배움의 요소가 된다. 전체성의 수용을 통해 “각각의 기회가 나에게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 교훈들을 배울 다른 기회를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유대기독교전통에서는 모든 존재는 신의 “가라사대 ‘있으라’”라는 창조사건을 통해 만물들이 출현하였고 그 존재들을 “보시고 좋았더라”라는 재귀적인 신께로의 감흥을 각 존재들이 불러 일으켰다고 진술한다. 선한 창조주의 의지가 각 존재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부여받게 되었다. 따라서 그 모든 존재와 사건은 본래 선함과 아름다움을 함유하고 있다는 이해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판단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똑같이 ‘보면서 좋았더라’의 내적 상태에서 일어난다. “오늘, 나는 판단없이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볼 것이며, 스스로에게 종종 상기시키리라:
모든 이는 나와 함께 존재한다.
그들은 사랑받기 위해 있지
판단받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