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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일요일 법령, 안식일, 그리고 십자가
“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31:13)
서론 - 그 때 그 결심
1985년 1월1일 철야기도회로 맞이한 새해의 결심은 안식일 준수와 침례였다. 이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나의 신앙적 결심이요 용기였다. 그해 3월 부산의 배정고등학교 (인문고) 입학하였고 결심한 바대로 안식일 준수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매주 월요일 근신처분으로 도서관에서 자습을 하며 학교생활을 이어갔고 참 고달팠다.
1985년 6월29일 문현교회에서 성선재 목사님의 집례로 침례를 받았다. 새해 아침의 결심 2가지를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신앙가정 출신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힘든 점들이 많았다.
1984년 2월 십일조에 대한 극심한 갈등과 흔들림 - 안식일준수와 십일조는 나의 생존본능에 극심한 도전을 주는 기별이었다.
1. 안식일의 의의
1) “창조의 기념일로서의 안식일의 중요성은 그 날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항상 가르쳐 주는데 있다”(각시대의 대쟁투, 437). 안식일을 통해서 우리는 피조물이 모든 것에 대해 그의 창조주를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2) 출애굽기 20:8-11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영원히, 우리 자신 밖에,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권능에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독립적이며,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안식일은 인간에게, ‘자수성가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3) 신명기 5:15은 안식일을 히브리 노예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출애굽의 기념일”일, 해방의 기념일로 소개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일 뿐 아니라 출애굽의 기념일도 된다.
4) 에스겔 20:12은 안식일의 부가적 의미를 공개한다.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즉, 안식일은 성화의 기념일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셨으며, 이제 그들을 더 큰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기를 갈망하셨다. 주님은 그들이 죄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도록 만드시기를 원하셨다. 에스겔은 창조주만이 성취하실 수 있는 우리 속에서의 재창조의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인류를 창조로 존재케 하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오로지 그분만이 인류를 재창조하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이다. 이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안식일은 오직 그분만이 홀로 성화시키는 창조주와 이 성화를 받아들이는 피조물 사이의 구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성화의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성화이시다(고전 1:30). 안식일의 쉼은 우리의 성화가 오로지 그분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분 안에서 쉬는 것이 곧 성화이다.
5) 예수님은 안식일에 치료 기적을 행하셔서 재창조하셨다. 그분께서는 나음을 입은 사람들이 기적적인 재창조를 안식일과 항상 결부시킬 것을 아셨다. 영원히 그는 안식일을 그리스도의 회복시키는 임재와 연관지을 것을 아셨다. 안식일의 경험은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내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체험이다.
6)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 재창조 구속을 경축하는 십자가의 기념물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구원하려는 노력이 헛됨을 발견한다. “다 이루었다”, 구원의 값이 “완불”되었다. 더 이상 치를 값이 없다. 더 이상 요구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인류를 위해 완수하신 그리스도의 일 안에서 쉴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비할 바 없는 완성된 구속 사역을 경축한다.
7)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일을 그치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기초하여 안전하게 쉴 수 있다. “그런즉 안식할 때[안식일의 쉼]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여기서 믿음으로 안식일 안식 안에서 산다. 그리스도인 구원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일을 그치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기초하여 안전하게 쉬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려는 (그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이든 환난으로부터의 구원이든) 헛된 노력을 그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안에서 쉬는 것, 안식일이 상징하고 있는 쉼이다. 그같이 하여, 안식일은 창조, 출애굽, 성화 그리고 십자가의 표징이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분이 하신 일 안에서 쉬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들여오신 분도 하나님,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분도 하나님, 우리를 성화시키는 분도 하나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환난에서 구출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은 그 속에 모든 의미를 담고 있다.
2. 일요일 법령의 진정한 계쟁점
“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계 13:11-17)
놀만 갈리가 지은 <예수께서 오신다>라는 책에 일요일 휴업령과 관련하여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안식일 준수자가 되기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요일 준수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친구가 물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안다는 전제 위에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7:3을 읽어 보세요.” 다른 사람이 대답한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오는 일요일 법령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엄청난 관계가 있지요. 많은 일요일 준수자들이 참으로 예수를 사랑합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18:1-4의 마지막 때 최후의 초청이 주어질 때 제칠일 안식일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그 소식을 받아들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때 성도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요일 준수 가운데서 안식일의 의미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케이. 그러나 마지막 때 안식일준수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다른 사람이 답변을 재촉했다. “안식일을 준수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을 기억하십시요. 그 당시 테스트는 날이 아닌, 한 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제칠일이 하나님의 안식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받아들이고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안식일을 알았지만, 안식일의 주님을 몰랐습니다. 제칠일을 지키는 안식일준수자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을 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잠깐만요.” 다른 사람이 말을 가로 막았습니다. “안식일은 마지막 때 계쟁점이 아닙니까?” “그 답은 ‘예”이기도 하고 ’아니오’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때 테스트는 산수 이상입니다. 어느 날이 제칠일인지 아는 것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누가 안식일의 주님이신가에 더 관계가 있습니다. 즉 내가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분이 나에게 나를 보호해줄 안식일 경험을 주시고 있는가 입니다.”
“그처럼 그것은 일괄거래란 말씀이군요. 즉, 구주 그리고 안식일, 이렇게?” “맞습니다! 주된 테스트는 우리가 예수님과 깊은 구원하는 관계를 맺고 있느냐 입니다. 제칠일 안식일은 이 관계의 궁극적인 외적 현현이 될 것입니다. 일요일 법령의 테스트는 날 이상입니다. 그것은 관계에 대한 테스트입니다.” 언젠가 일요일 법령이 반포되어 모든 사람들이 안식일과 관련된 시험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전대미문의 박해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안식일을 굳게 고수하고 설 수 있을까? 몇몇 재림교인들은 이런 시련을 두려워한다.
마지막 사건들과 재림, 안식일, 십자가는 한 관심사로 묶어 해결될 것이다. 놀만 갈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바른 날을 준수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바른 경험을 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바른 경험을 갖고 그릇된 날을 지키는 것이, 바른 날을 지키면서도 그릇된 경험을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유대인 중 어떤 이들은 바른 안식일을 공경했지만, 안식일의 주인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최후의 큰 외침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질 때(계 18:1-4), 많은 사람들이 진리 편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일요일 준수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할 일이라곤 날을 바꾸는 것뿐이며, 그럴 시간은 충분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지만,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최후의 운동들은 매우 빠르게 진척될 것”(교회증언 9권, 11)이기에, 경험을 바꿀 시간이 없을지 모른다. 날을 바꾸는 것은 순식간에 할 수 있지만, 관계를 바꾸는 것은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안식일 준수는 일요일 법령이 올 때 그 사람이 그리스도께 헌신을 유지할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지금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속살거리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유의할 것이다”(가려뽑은 기별 2권, 368). 엘렌 화잇은 너무 많은 재림교인들이 떠나가서 교회가 무너질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예언한다(상동, 380). 안식일 준수자들이 매매가 불가능하게 되어 기아에 직면했을 때(계 13:16, 17), 그리고 사형시키겠다는 위협에 직면할 때(13:15),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진실하게 서도록 할 것인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그저 주일 중 어느 날이 어느 날인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안식일을 포기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도 안식일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의 의미를 마지막 때 환난에 적용함 - 적극인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것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3. 그리스도 없이 승리 없다
“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4-15)
진리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위협과 죽음을 무릅썼던 루터의 동료들은 밀려드는 로마교회의 핍박과 박해로 낙망 직전에 빠졌다. 그 때 루터는 친구 필립 멜랑히톤에게 이렇게 쾌활하게 말했다. “필립, 이리 오게. 우리 시편 46편을 보세나.” 저 유명한 종교 개혁의 찬미가인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시편 46편이 그 토대가 되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은 긍정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 되어 오셨으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큰 도움”(present help)은 “지금 현재적 도움”을 뜻한다. 언제든지 곁에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셨고, 도우시기 위해 항상 곁에 계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라고 시편 기자는 선언한다. “그러므로.” 시편 46편은 이유 없는, 시인의 환희가 아니다. 그것은 수학적 공식처럼 논리적이다. 그가 다음에 하는 말들은 그것으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필연적인 논리적 귀결이다. 즉, “우리는 두려워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데 두려워하는 것은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그분이 계신 곳에 전능의 능력이 있는데, 왜 우리가 겁먹고 풀이 죽어야 하는가?
시인은 “그러므로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선언한 후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지 열거한다.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보이는 모든 것들의 기초가 몸부림치듯 흔들려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소동들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만물들이 흥분하여 광포하게 뛰놀 때에라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그런 다음 4절의 말씀이 주어진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고대 동방에서는, 포위될 때 물 공급이 끊어질까 두려워하였다. 물 공급이 보장되면 도시는 무한정 공격에 맞설 수 있었다. 여기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예루살렘은 환난 때에 성 안 구석구석까지 물 공급이 잘 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시련의 때에 우리의 모든 현세적인 필요가 공급될 것이다.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33:16). 그리고 5절은 하나님의 도움이 얼마나 확실하고 가까운 지를 알려준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포위되었는가? 그렇다면 교회 안에 계신 주님도 포위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에워싼 원수의 진을 돌파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재림교인들에게는 일요일 휴업령 공포증, 야곱의 환난 공포증이 있을지 모르겠다.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 비상 상황에 살아남기 위한 비법을 가르치는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아남는 법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과연 우리 재림교인들이 그런 정도의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Y2K 때, 몇 재림교인들은 비상시를 위해 장작을 다량으로 준비해 놓고, 식량 등 생필품들을 준비해 놓았었다. 어떤 재림교인들은 매매를 못할 것에 대비해서 시골에 텃밭을 준비하고, 자급자족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궁벽한 곳에서 환난을 피할 방도도 궁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요즘처럼 인공위성이 어떤 곳이든 구석구석 감시할 수 있는 때에 우리가 피할 곳이 어디 있겠는가?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정찰기를 띄워 우리나라보다 수십 배가 큰 지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감시하다가 적군을 찾아내면 무인기로 족집게 공격을 할 수 있는 시대다. 재림교인들을 찾아내려면, 최근에 시골로 이사한 사람들의 주민등록을 전산으로 조회하면 아주 간단하다고 누군가 말한 것이 기억난다. 우리가 참으로 숨을 곳이 어디인가?
재림교인들은 우리로 환난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임을 굳게 믿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를 구름 기둥이 막아서서 어둠 속에 있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악인들 사이에 구름기둥이 되셔서 우리로 발각되지 않게 해주실 것이다. 환난을 대비하여 우리가 준비한 양식은 그리 오래 못 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행을 위하여 대비했던 며칠 분 식량 정도 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만나를 예비해 놓고 계셨다. <각 시대의 대쟁투>에 보면, 우리가 아무리 숨어도 결국 다 발각이 된다. 포위당하고,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를 그쳐야 한다. 환난 대비는 물리적인 차원이 아니다. 영적인 차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이다.
1880년대에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요일 법령들은 재림교인들에게는 준비하라는 경고가 되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대도시를 떠나라거나 하는 그런 문제 이전에, 미네아폴리스 대총회를 통해서, 거기 참석했던 대표자들에게 일요일 법령에 관한 기별이 아닌, 그리스도에 관한 기별을 주셨다. 왜냐하면, 최후의 위기를 맞을 준비를 갖추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바라보는 일이 환난을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요일 법령과 관련된 소동이 전 미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었던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관한 기별을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많은 재림교인들이 경제 위기를 걱정한다. 환난을 바라보며 지레 겁을 먹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환난과 환난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려야 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켰을 때 베드로는 폭풍이 이는 바다와 파도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에게서 시선을 떼자 그는 겁이 났고, 그리고 바다에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시선을 환난이 아닌, 환난을 통과케 하실 주님께 고정시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결론 - 안식일의 쉼-하나님의 안에서 환난 때에 쉼
첫 출애굽은 최후의 사건들을 통과하여 나오는 둘째 출애굽의 예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전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들의 할 일은 아주 적었지만 필수적이었다. 하나님은 지도자인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물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내가 나머지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바다 속으로 난 길을 통과하여 걸어가고, 뒤에는 가장 강력한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이 알았던지 몰랐던지, 그들은 안식일의 정수를 경험했던 것이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그들 자신의 구별을 경험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할 일과 그들이 할 일을 구별했던 것이다.
최후의 출애굽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원이 끊기고, 매매도 못하고, 그들의 머리에 현상금이 붙어 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통과케 할 책임은 그분의 일임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역할은 그분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의뢰하는 것뿐이다(대하 20:15-17).
그들의 할 일은 여호사밧 왕 때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부르짖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그분의 구원 안에서 안식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요 안식일의 바로 그 의미이다. 바로 그 쉼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창조주, 우리의 해방자, 우리를 성화케 하시는 분이시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뢰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 최후의 싸움에서의 구출, 구원을 위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뢰하면서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안식일은 십자가의 기념일이다. 구원의 기념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