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으로서의 한 개인은 그 정체성 형성에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사회와 세계를 단순하게 구분하자면, 사회의 총합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사회를 묶어버리는 세계화는 비문명의 사회가 소멸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언급했듯이 문명 이전에는 사회는 경험 가능한 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인류의 대이동 이후에 정주 사회가 된 이후로 꽤 오랫동안 경험 가능한 세계의 확장은 한정된 범위에서 천천히 확장되었다. 이는 원거리 이동수단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굳이 더 이상 이동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확장은 주변 사회와의 교류와 원거리 무역을 하던 상인 집단에 의해서 직간접적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문명이 시작되면서 세계의 확장은 초경험적으로 진행된다. 힘에 의한 강제로 편입된 사회는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즉 시원적으로 초경험적 세계의 확장은 배타적 사회 간의 조화로운 섞임에 따른 현상이 아니다. 지금의 세계화는 곧 세계의 문명화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전근대사회에서 벗어나 진보된 사회로의 변형으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강제된 선택지를 받아들고 그나마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는 건 아닐까? 분명한 건, 문명을 의심하는 항목은 선택지에 없다.
외재하는 정신으로 세계정신도 있다. 세계정신에는 문명화에 따른 제사회를 관통하는 정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정신이 권력 일변도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일견 대자연의 원리에 따른 정신이 혼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는 문명의 시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있다. ‘없음’에서 ‘있음’이 나올 수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이 문명의 시작에도 작용했다. 비문명인들이 문명을 받아들이게 된 것에는 문명의 폭력적 수용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도 했다. 문명이 완전한 ‘없음’에서 나왔다면, 즉 비문명의 완벽한 단절에서 출발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인류가 사라졌던지 혹은 인류는 지금까지 문명과의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대자연에서 스스로 생존하기에는 쉽지 않은 신체조건을 지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지구 곳곳에 정착하였고,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혹자는 인간은 파괴적 본성을 지녔고, 그래서 인류의 대이동을 끊임없는 약탈과 정복에 따른 파장의 결과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문명 이후 제국주의에 따른 정복역사를 문명 이전의 인류사회에 단순하게 적용하였을 뿐이고, 이러한 논리적 오류를 간과한 주장이다. 반문명적 관점에서는 인류의 그 첫 대이동은 권력적 동인(動因)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가령 최근까지 비문명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부족과 오래지 않은 역사 속의 인디언들만 보더라도, 파괴적 본성에 따른 권력 사회로의 진화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인류 대이동이 비권력적 동인에 따른 것이라고 실증하지는 못하지만, 권력적 동인에 따른 것이 아님을 방증한다고는 볼 수 있다.
인류의 대이동이 권력적 동인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인류가 자연을 파괴와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조화는 자연으로부터 나온 존재들의 공통된 속성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조화’는 생명들이 그들의 생을 지속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동들이다. 즉 삶이 곧 조화가 된다. 자연이 ‘생(生)Nature’의 양태이고, 자연의 자연스러움이 곧 조화가 된다. 본래의 삶은 자연의 자연스러움에 있고, 그때의 삶에서 편함을 느끼게 된다. 야생동물들이 그들의 편한 삶을 위해 행동한다면, 이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며, 이러한 행동들은 자연의 조화로움을 풍성하게 한다. 문명 이전의 초창기 인류도 다른 생명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인간이 대자연에서 조화로움을 이룰 수 있었던 인간의 존재성이 있다면, 어쩌면 놀라울 정도의 적응력을 그 하나로 꼽을 수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지구 곳곳에서 그곳의 환경에 적응하며 정주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적응력 그 자체보다 그러한 적응력이 가능하도록 하는 요소들을 인간의 존재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징적인 한 가지를 꼽자면 ‘논리적 상상(logical imaging)’이다. 이로써 도구를 만들고 다룰 수 있었다. 이로써 환경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도 있었다. 이로써 ‘무리’를 유지하고 ‘사회’를 형성하는 이야기를 지어낼 수도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리(사회)는 삶의 전제가 된다. 이로써 ‘무리지음’은 자연스러움이며, 조화로움에 있다. 무리를 유지하고 사회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논리적 상상’이 작용한 일례로 ‘이야기’가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자연의 요소를 시각적으로 지각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연의 조화로움을 직시할 때, 있는 그대로 우리는 느낄 수가 있다. 물론 감각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인간의 감각이 부족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타자와의 연결을 통한 감정의 북돋음, 그 느낌을 대체적으로 ‘인지’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인지는 ‘인식’과 ‘지각’을 포괄한다. 대체적으로 인간은 지각의 부족함을 인식으로 보완하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비문명에서도 인식의 방편으로 이야기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정령’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는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 ‘나’가 있고 ‘무리’가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이야기의 흔적은 인디언의 구전설화에서 무속의 굿에서 심지어 도덕경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흔히 전설이라고 불리는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문명의 도래와 함께, 이야기는 문명의 유용한 선전도구로써의 역할도 담당하게 된다. 비문명에서의 이야기는 선전도구였다기보다 ‘논리적 상상’으로 본질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이 중심이었다. 즉 있음을 있는 그대로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도움을 주었다. 반면 도시 중심으로 문명이 생겼을 때, 권력(자)이 그 문명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비문명인들에도 익숙한 이야기를 선전도구로 활용하였다. 물론 폭력에 의한 강압적 방식으로 비문명인들을 속박하였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저항을 뿌리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거부와 저항은 지속하였고, 노동력은 약화하거나 유출되었을 것이다. 도시는 필연적으로 외부의 공급을 기반으로 유지 및 성장한다. 당시 원활한 공급을 위해서 착취는 불가피했지만, 그 착취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조화를 지향하는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우열의 세계에서 권력에 순종하는 삶은 자신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대한 전인적인 부정이었다.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이야기’가 필요했다. 즉 관념적 회피라도 해야만 했다. 문명 이전의 내세관은 조상들의 부재(不在)가 현세에 끼치는 영향이 있음을 환기한다. 육체의 환원이며 조화를 지향하는 정신의 계승을 환기한다. 문명 이후의 내세관은 장차 ‘나’가 가게 될 안식처에 집중된다.
문명 속에서 ‘이야기’는 왜곡된 진실로 재생산된다. 정령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을 관장하는 신들이 된다. 권력은 그 신들이 왕에게 부여한 신성한 힘이 되고, 심지어 제국의 왕은 신의 현현(懸懸, incarnation)이 된다. 정령은 자연을 상징하지만, 신은 더 이상 자연을 상징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벗어난 신은 내세마저 관장하는 힘을 지닌 존재가 된다. 자연을 벗어난 신은 스스로를 상징하면서 시뮬라크르가 된다. 신들의 현현으로서의 권력자들은 왕, 제사장, 귀족 등등의 계급으로 만물에 군림한다. 동물은 타자의 훼손을 통한 삶을 영위한다. 훼손은 회복을 전제하는 조화의 양상이다. 동물인 사람들은 그 삶을 긍정한다. 하지만 만물을 지배하는 자가 허용하고 강요하는 자연에 대한 훼손은 회복을 전제하지 않는 파괴로 이어진다. 이를 수행하는 자들에겐 적절한 보상이 주어진다. 이를 사회 구조화하여, 착취당하는 자들도 스스로 권력의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구조는 형식이고, 그 형식에 따른 행동을 통해서 사회에 편입하게 되고, 적응하며 살아간다.
자연은 생(生)의 양태이고, 조화는 생의 속성이다. 문명 시대에는 실체인 ‘생(生)’을 왜곡하여 관념적 실재인 문명이 실체로 둔갑한다. 그래서 도시는 문명의 양태가 되고 권력은 문명의 속성이 된다. 이렇듯 왜곡된 진실을 문명인들은 ‘나-주체’에 담게 되는데, 이것이 ‘문명주체’이며 곧 권력을 지향하는 ‘권력주체’이다. 권력주체인 ‘나-주체’는 문명과 연결되어 있다. 문명인에게 이를 ‘보편적 정신’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세계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명이 자연을 모방 왜곡하였기에, 문명인에게 ‘세계정신’으로 ‘생의 연속’으로서의 ‘조화주체’도 담겨 있다. 즉 ‘세계정신’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정신들에서 조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다.
세계정신은 외재한다. 한 개인에게 선택적으로 수용되기도 하지만, 선택의 여지 없이 주입되기도 한다. 가령 종교를 선택하기도 하지만, 모태신앙처럼 주입되기도 한다. 세계정신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종교, Globalization, 이즘 등등이 있다. 물론 ‘생(生)Nature’도 세계정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회정신의 확장으로 영혼(Spiritus, Pneuma)도 세계정신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