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 제124권 / 묘지(墓誌)
대원 고장사랑 요양로 개주판관 고려국 정순대부 검교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최군 묘지
(大元故將仕郞遼陽路蓋州判官高麗國正順大夫檢校成均館大司成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崔君墓誌)
이곡(李穀)
황조(皇朝) 진사로 동방에 유명한 자가 있었으니, 이르기를, “계림(鷄林) 최수옹(崔壽翁)”이다. 처음에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제수돠었는데 지역이 궁벽하고 직무가 골몰하여 거한 지 5개월 만에 병으로 사직하고 본국에 돌아와서 다시 원나라에 벼슬하지 않았다.
비록 본국에서 벼슬하였으나 재주가 기이하고 뜻이 높아 당시에 용납되지 못하고, 나이 54세로 지원(至元) 6년 경진(후지원임. 충혜왕 복위 원년) 6월 10일 임인에 병으로 세상을 마치니, 장사는 아직 기일이 있다.
공의 아우 감찰규정(監察糾正) 지(𣶱)가 자기가 지은 바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님의 재주는 옛날 사람에 부끄럽지 않았는데, 우리 형님의 뜻이 세상에 행해지지 못하고 마침내 벼슬도 높지 못하였습니다. 나이가 많지 않으므로 은택을 남에게 미치지 못하고, 아들이 뒤를 잇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분묘에 명문을 적어 그 행적을 기록하지 않으면 나는 우리 형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형님을 알기로는 그대만한 이가 없으니, 명문을 지어주소서”. 하였다. 내가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여 그 세계(世系)를 차례대로 하고 그 행실을 서술한다. 군의 휘는 해(瀣)요, 자는 언명보(彥明父)라고도 한다. 먼 조상 윤순(允順)이 신라에 벼슬하여 관직이 태수(太守)에 이르렀고, 대대로 계림부에서 살았다.
증조부의 휘는 모이니 경주사병(慶州司兵)인데 증직으로 군부판서(軍簿判書)이며, 조부의 휘는 모이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요, 증직 판도판서(版圖判書)이다. 부친의 휘는 백륜(伯倫)이니 장원급제하여 명성이 조정에 들려, 고려왕 경유학교수(高麗王京儒學敎授)에 제수되었고, 누차 영전으로 본국의 민부의랑(民部議郞)이 되니, 계품은 중현대부(中顯大夫)이다.
모친은 임씨(任氏)이니 진양군부인(晉陽郡夫人)에 봉하였고, 대호군으로 치사한 휘 모(某)의 딸이다. 군은 어려서부터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9세 때에 시를 잘 지었고, 장성한 뒤에는 학문이 날로 진취하여 크게 선비들에게 칭탄을 받았다. 채 20세 전에 두 번 사부(詞賦)로써 유사(有司) 시험에 응시였는데, 그때마다 모두 합격하였다.
처음에 성균학유(成均學諭)에서 파직 당하고, 예문춘추관 검열에 선발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능으로 장사감무로 폄직되었다. 얼마 후에 또 다시 예문춘추관 주부에 선발되고, 주부에서 장흥고사에 임명되었다가 전직하여 성균관승 예문응교 전교 전의 이부령 검교대사성(成均館藝文應敎典校典儀二副令檢校大司成)이 되었으니, 군의 경력이 이러하다.
군은 글을 읽고 문장을 짓는 데 스승과 친구의 강습에 힘입지 않고 초연(超然)히 의리의 귀추를 스스로 깨달았으며, 이단에 미혹되지 않고 세속의 습속에 빠지지 않으면서 옛날 사람과 합치되기를 힘썼다. 의논의 같고 다름이 있는 데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그 정도임을 알면, 비록 노사숙유로 당시의 종장(宗匠)이 되는 자일지라도 힐문하고 또 꺾으며 자기의 생각을 확고히 하며 변하지 않았으니, 군의 배운 바는 이러하다.
연우(延祐) 연간(원 나라 인종(仁宗)의 연호)에 과거를 보이는데, 조서를 듣고서 말하기를, “배운 바를 시험해 볼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과연 신유년(충숙왕 8년) 과거에 장원에 합격하였다. 송 좨주(宋祭酒 원나라 사람)가 그의 재주를 칭찬하여 자주 시에서 말하니 여기서부터 명성이 더욱 나타났는데, 자기와 다른 자는 좋아하지 않고 더욱 배격하였다.
군은 윗사람을 찾아 다니면서 문안드리는 일을 잘하지 않았고, 큰 소리로 과감하게 남의 선악을 말하기 좋아한 까닭으로 벼슬에 올랐다가는 문득 쫓겨나서 마침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단정한 사람과 벗하고 천명을 알아 걱정이 없으며, 벼슬하고 안 하는 것으로 하여 기뻐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다만 시와 술로써 스스로 세월을 보내었다.
일찍이 본국 명현(名賢)의 저술을 뽑아 그 제목을 《동인문(東人文)》이라 붙이니, 모두 25권이다. 평생에 가정 살림살이를 하지 않으며 스스로 졸옹(拙翁)이라 호하였다. 후에 성남 사자산(城南獅子山) 아래 살았는데, 농원(農園)을 개발하고 이르기를, “충분타.” 하며, 드디어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 자칭하였다.
죽어서 그 산의 동쪽 언덕에 장사 지내는데 집이 몹시 가난하여 모든 군을 아는 자들이 다투어 부의를 보내어 이에 장례를 치루었다. 군은 재취(再娶)하였는데 전취(前娶)는 검교평리(檢校評理) 반영원(潘永源)의 딸이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선비 지섭(池燮)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는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 채흥(蔡興)의 딸로서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아들은 없다. 명문에 이르기를,
아, 최군이여 / 嗚呼崔君
홀로 고상하였네 / 不覊不群
사숙한 그 학문이요 / 私淑其學
옛것을 좋아한 문장일세 / 好古而文
분연히 세속에 끌리지 않았고 / 奮不牵俗
미친 척 과감히 말하였다 / 陽狂敢言
나이는 높지 않으나 / 雖無其年
이름은 전할 수 있고 / 名有可傳
아들은 없으나 / 雖無其子
아우 있어 의지되네 / 弟有可倚
너는 지위, 나는 덕이니 / 彼位我德
득실이 누구인고 / 孰失孰得
그대 스스로 의심하지 않았으니 / 君自不疑
그 또한 무엇을 슬퍼하리 / 其又奚悲
예산 동쪽 언덕에 / 猊山之東
마렵의 봉분 있으니 / 馬鬣之封
천년을 내려가도 / 千載之下
졸옹 있었던 줄 알지로다 / 知有拙翁
<끝>
ⓒ 한국고전번역원 | 김용국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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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元故將仕郞遼陽路蓋州判官,高麗國正順大夫檢校成均大司成,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崔君墓誌 - 李穀
皇朝進士有名東方者曰鷄林崔壽翁。始除蓋州判官。地僻職冗。居五月移病東歸。不復于朝。雖仕本國。才奇志高。不容於時。年五十四。至元六年庚辰六月十日壬辰。以病卒。葬有日。其弟監察糾正潪以所爲行狀。來乞墓銘曰。吾兄之才。不愧于古。而吾兄之志不行于世。卒至官不達齒不高。無澤以及物。無子以爲後。其又不克銘諸幽堂。以列其行。則吾負吾兄矣。知吾兄莫如子。宜爲銘。穀義不可辭。迺次其世系。而敍其行實焉。君諱瀣。一字彦明父。遠祖允順仕新羅。官至太守。世家雞林府。曾祖諱某。慶州司兵。贈軍簿判書。祖諱某。檢校軍器監。贈版圖判書。考諱伯倫。狀元及第。名聞于朝。授高麗王京儒學敎授。累遷本國民部議郞。階中顯大夫。妣任氏封晉陽郡夫人。大護軍致仕諱某之女也。君幼穎悟。九歲能詩。旣長學日進。大爲先輩所服。未及冠。再以詞賦試有司。試輒中之。初罷成均學諭。選藝文春秋館檢閱。尋以事貶監長沙務。旣又復選注簿藝文春秋館。由注簿拜長興庫使。遷成均館丞藝文應敎典校典儀二副令檢校大司成。君之所歷如是。君讀書爲文辭。不資師友講習。超然自得於義理之歸。不惑異端。不溺俗習。而務合於古人。至論同異。苟知其正。雖老師宿儒爲時所宗者。且詰且折。確持不變。君之所學如是。延祐科興聞詔。乃曰可試所學。旣而果中辛酉科狀元。宋祭酒稱其才。屢形於詩。自是名益著。異己者益不喜而益排之。君又不善伺候。放蕩敢言。而喜說人善惡。故輒擧輒斥。卒不大用。然取友必端。知命無憂。不以仕已喜慍。惟以詩酒自娛。甞選本國名賢所著。題其目東人之文。凡二十五卷。平生不理家人生産。自號拙翁。後居城南獅子山下。開園曰取足。遂稱猊山農隱。卒葬其山之東。家甚貧。凡知君者爭致賻。乃克葬。君再取。先取檢校評理潘永源之女。生一女。適士人池爕。後取通禮門祗候蔡興之女。生二女。皆幼無子。銘曰。
嗚呼崔君。不羈不群。私淑其學。好古而文。奮不牽俗。陽狂敢言。雖無其年。名有可傳。雖無其子。弟有可倚。彼位我德。孰失孰得。君自不疑。其又奚悲。猊山之東。馬鬣之封。千載之下。知有拙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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