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반여 중리마을>
반여 중리마을에 입향한 양산 이씨 장강공파 문중
양산 이씨는 이만영을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 전생(全生)은 태조 7년(1398년) 가선대부 공조전서(嘉善大夫工曺典書)에 임명됐으며, 태종 때는 예조판서와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등을 역임했다. 노후에는 향리에서 머물다 세종 32년(1450년) 1월 향년 99세로 죽었다.
세종(世宗)은 한 부모 밑에 세 장수(將帥)인 징석(澄石)ㆍ징옥(澄玉)ㆍ징규(澄圭) 3형제가 태어나서 일국간성(一國干城)의 공을 세웠으므로 그 공을 치하하고자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으로 증봉군(增封君)하였으며, 이때부터 양산 이씨의 관향(貫鄕)이 생겼다. 이후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양산(梁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차남인 징옥(澄玉ㆍ충강공파)의 후손들은 근대에 양산 이씨(梁山李氏)에서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환관(還貫)하였고, 징규(澄圭)는 영산 이씨(靈山李氏)로 분파되었다.
양산 이씨의 유명 인물은 계유정난(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사건)에 고초를 겪은 이전생의 세 아들인 장강공 이징석, 이징옥, 이징규 등이다. 양산 이씨는 맏아들 이징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징석의 아들인 현령 이팔동(李八仝)은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부사직(副司直) 이윤조(李胤祖)와 군사(郡事) 이윤환(李胤環)이다. 이윤조를 중심으로 사직공파(司直公派)가, 이윤환을 중심으로 군사공파(郡事公派)가 형성되었다. 양산 이씨의 동래 입향조는 이식(李植)으로, 그는 이징석의 증손자로 조선 전기에 양산에서 왔다. 이식은 사직공파로 이윤조의 차남이다.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 조에는 양산 이씨가 세거(世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통계표에 의하면 양산 이씨는 260가구에 801명(남 441명, 여 360명)이 부산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현재 양산 이씨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과 재송동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다. 중리마을은 반여동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던 자연마을이다.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리(中里)라 이름 붙여졌다.
옛날 이 마을은 남평 문씨, 청도 김씨 등이 집성촌을 이뤘으며, 유교 숭상 사상이 짙은 마을이었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