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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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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매포정사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37 13.12.03 20: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장렬공 사당(壯烈公祠堂)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 263번지
건 축 주 :  정담(鄭湛, 1548~1592)
소 유 자 :  정재홍(鄭在弘)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7호


건축 배경
장렬공사당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르고자 의병을 일으켜 웅치(雄峙) 싸움에서 순절한 정담(鄭湛, 1548~1592)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이다.
정담은 1583년(선조16)에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청주목사로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김제군수로 제수되었고, 의병장 황박(黃璞)과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등과 연합하여 웅치를 방어하다가 전사하였으며, 왜적의 장수도 공의 충절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장렬공사당의 옆에 있는 종택은 정담의 9대손 정치묵(鄭致默)이 1805년(순조5) 영해 인량리에서 이주하여 지은 것이다. 10대손 정형규(鄭亨逵)대에서 하회 예조참판 학서(鶴棲) 유이좌(柳台佐, 1763~1837)가 방문하여보니, 너무 초라하여 향회를 소집하여 인력을 동원하고 자신의 많은 재산을 헌성(獻誠)하여 1864년(고종1)에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건축 특징
장렬공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사당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사당은 내부를 통칸으로 구성한 후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하였으며, 벽체는 정면을 제외한 3면을 모두 토벽으로 처리하였다. 정면의 문비에는 어칸에 쌍여닫이문을 좌우칸에는 외여닫이문을 설치하였는데, 문비의 형태는 높은 굽널 위에 정자살을 설치하였다. 가구는 3량가의 소로수장집으로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의 양 측면에는 풍판을 설치하였다.

 

관련유물
- 『충렬록(忠烈錄)』
『충렬록(忠烈錄)』은 임란왜란 때 전라도 김제군 웅치전투에서 전사한 정담(鄭湛, 1548~1592)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 정형규(鄭亨逵)가 1869년(고종6)에 전문(傳聞)이나 당시의 여러 문헌 자료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시·서·유사·행장·전·묘지명(墓誌銘)·제문·만사·사략잡기(事略雜記)·기발(記跋)·상량문(上樑文)·정각상량문(?閣上樑文)·소계수록(疏啓隨錄)·청시사략(請諡事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략잡기」는 정담의 웅치전투에서의 전공 및 전적지가 수록된 문헌에서 뽑아 모은 것이며, 기발은 충렬록 간행의 경위에 대한 기록이다. 소계수록에 의하면, 정담은 영남의 영해출신으로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을 맞아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에 버금가는 전공을 세웠음에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지 못한데 대해 김제유생 및 자손들이 추록훈(追錄勳)을 바라는 소·계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청시사략」에는 정조(正祖)와 순조대(純祖代)에 그동안 작시포증(爵謚褒贈)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포증(褒贈)방침에 따라, 선조 때 정담의 전공과 녹훈 전말의 사실들을 밝혀 작시(爵諡)를 청하는 상언(上言)·보상(報狀)에 대한 비답(批答)·관문(關文)의 내용이 들어있다.

 

주향자
- 정담(鄭湛, 1548~1592)
자는 언결(彦潔), 호는 일헌(逸軒)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1583년(선조16)에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청주목사를 제수 받아 부임하던 중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제군수로 제수되어 5월 공주싸움, 6월 초 용인전을 치르고 다시 7월초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과 의병장 황박(黃璞) 등과 함께 웅치(熊峙)싸움에서 왜군 소조촌 융경이 거느리는 수천 명의 군사와 대적해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왜군들도 그의 충절에 감복하여 왜군의 장수가 ‘조조선국(弔朝鮮國) 충간의담(忠肝義膽)’이라는 표서를 세웠다고 한다. 그 이듬해 1593년(선조26) 9월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기리어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하고 비를 세웠다. 1690년(숙종16)에 정충각(旌忠閣)이 건립되고 향현사(鄕賢祠)에 봉향되었으며, 조선 순조 때 장렬공(壯烈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관련인물
- 사환가 집안의 충신의사 정담(鄭湛)
정담(鄭湛, 1548~1592)의 가계는 고려 말 시중(侍中)으로서 공신에 책봉되었던 정송(鄭松)을 시조로 하고, 뒤 이어 통훈대부(通訓大夫) 평안도사(平安道使) 정을현(鄭乙賢), 사간원(司諫院) 사과(司果) 정신수(鄭臣秀) 이조참의 (吏曹參議) 정태서(鄭台瑞)로 이어졌다. 이중 태서의 손자 정자영(鄭自英)은 경사(經史)에 밝은 사장(師長)으로서 존경을 받으면서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시호를 문경공(文敬公)으로 받을 만큼 특출한 인물이었다.
정담의 직계는 태서의 아우인 정태진(鄭台璡)으로, 그의 아들 종사랑사선(從仕郞司膳) 정득화(鄭得和) 때에 처음으로 울진군 사동으로 입향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득화는 정담의 5대조로서 그의 일가가 울진에 인연을 갖게 된 것이 이때부터 임을 알 수 있다. 고조(高祖)인 정자함(鄭自咸)의 뒤를 이어 증조부 정신(鄭伸)과 조부 정사교(鄭士僑)는 각각 능참봉(陵參奉) 벼슬에 머물고, 그의 부친 정창국(鄭昌國)도 내금위(內禁衛) 선략장군(宣略將軍) 부사과(副司果)에 머물렀다.
아버지의 무과 경력을 닮은 정담은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보직을 거쳐 1592년(선조25) 김제군수(金堤郡守)로 나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나주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樸) 등과 함께 금산(錦山)을 거쳐 전주(全州)를 공략하려는 왜군을 웅치(熊峙)에서 육탄전으로 방어하다가 모두 전사한 것이다. 왜장이 그 충절에 경의를 표하여 “조선의 충신 의사들의 영혼을 조상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는 묘비를 세웠으며, 나라에서는 1690년(숙종16) 정문(旌門)을 내렸다.
- 유이좌(柳台佐, 1763~1837)
자는 사현(士鉉), 호는 학서(鶴棲)이고,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사춘(師春)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예조판서 억지(億之)의 딸이다. 1794년(정조1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가 되고 『주자서(朱子書)』3책을 하사받았다. 1796년(정조20) 경연에서 주자서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진강하였고, 1800년(정조24)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곧 부여현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북평사가 되어서는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썼다. 이듬해에 성균관사성을 지내고, 1807년(순조7)에 안변부사가 되었을 때 화재로 소실한 무기고와 병기를 복구하였다. 1810년(순조10) 군자감정과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1820년(순조20) 예조참의, 1822년(순조22) 동부승지, 1829년(순조29) 부총관·우승지·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향리에 돌아가 후진을 가르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따랐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학서집(鶴棲集)』20권 10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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