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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權鼈,1589∼1671)이 지은『해동잡록(海東雜錄)』1권 / 본조(本朝) 안경공(安景恭) 興寧人。字遜甫。謹齋之孫。辛禑二年登第。事我太祖。爲開國功臣。封興寧府院君。謚良度。○天資簡重。秉心直謙。行己謹恪。臨事謹詳。未嘗有疾言遽色。亦未嘗趨勢以低昂。亦不立異以表襮。 碑序 再掌銓選。不用私謁。 誌序
○ 본관은 흥녕(興寧)으로 자는 손보(遜甫)라 한다. 근재(謹齋)의 손자로 고려 신우(辛禑 우왕(禑王)을 가리킴) 2년에 급제하였고, 우리 태조(太祖)를 섬겨 개국 공신(開國功臣)이 되어, 흥녕 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양도(良度)라 하였다.
○ 타고난 성품이 간결하고 정중하며 마음가짐이 곧고 겸양하며, 행실이 공손스럽고 일에 임해서는 삼가고 상세하며, 일찍이 말을 빨리하거나 갑자기 안색을 달리하는 일이 없었으며, 또한 일찍이 세력에 부좇아 우쭐대거나 기죽는 일이 없었고, 또한 독특함을 주장하여 잘난 체하지도 아니하였다. 〈비서(碑序)〉
○ 두 번이나 이조 판서를 맡았으나 사사로이 청탁하는 사람은 쓰지 않았다. 〈지서(誌序)〉
안침(安琛) 順興人。字可珍。我光廟朝登第。官至判書。有文名。子處善處誠。俱登第早歿。○靈岩客舍東。有徘徊樓。題詩云。徘徊樓上月徘徊。客子登臨亦快哉。玉兔幾年仙藥搗。素娥何處鏡奩開。搖波散百東坡水。對影成三太白盃。 勝覽
○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자는 진(可珍)이다. 우리 세조 때에 급제하고 관직은 판서에 이르렀으며,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있었다. 아들 처선(處善)과 처성(處誠)이 모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 영암(靈岩) 객사(客舍) 동쪽에 배회루(徘徊樓)가 있는데, 제시(題詩)에 이르기를 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는데 / 徘徊樓上月徘徊 나그네가 올라 보니 또한 유쾌하도다 / 客子登臨亦快哉 옥토끼는 몇 년이나 선약을 찧고 있으며 / 玉兎幾年仙藥搗 월궁의 선녀는 어느 곳에서 경대를 벌렸는고 / 素娥何處鏡奩開 물결은 흔들려 백동파의 물도 흩어지고 / 搖波散百東坡水 그림자를 대하여 셋을 이루었으니 태백의 술잔이로다 / 對影成三太白杯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안당(安瑭)
順興人。字彥寶。生於天順辛巳。年二十中司馬。二十一我成廟十三年登第。天性簡直。守正不撓。燕山時。久革諫院之官。中廟反正之日。特以公爲大司諫。彈枉歸正。四館都憲。振起頹綱。乃判銓曹。痛革奔競之習。凡孝行公薦之人。標題行實而銓注之。又啓曰。明經行義之儒。不可拘循資級。請擢授不次。當時聞望之士。如趙光祖金湜朴薰。持除六品職。金安國金凈宋欽潘碩枰。皆賢大夫也。亦請薦拔。力陳求言而不可罪言事之人。上以法外建白責之。臺諫以誤國劾之。公則晏然不撓。以甄拔賢士激濁揚淸。爲己任焉。自乙亥以後。與李相長坤申文節鏛相繼典選以啓。己卯明良際會。當時名賢荷遇寵眷。庶幾大猷之盛。而新進諸賢勇於敢爲。不能無過激之疵也。及登台府。與鄭領相光弼。務持大軆。裁抑鎭定。○公子處謙等三人。皆中薦科。而俱列淸顯。公戒盛滿察時勢。欲退而不能。己卯十一月十五日夜五更。府胥來言。領相承召詣闕。公驚駭詣闕。首相鄭公獨坐賓廳。公問事由。鄭公揮涕掉頭不忍語。但道器械已具於殿庭云耳。公遂與鄭公力請。會朝庭議罪。乃命召參議以上。共啓伸救。十二月。臺諫欲加罪淸流。追劾竄逐三十餘人。以公爲首。鄭相極諫營救。止落職焉。辛巳秋。沈貞陰嗾執義尹止衡。削公官爵。是冬公聞子處謙等。觸時宰語。驚駭仆地。卽欲上達以其言語無實事。又恐惹起士林之禍。率歸外鄕。欲使消沮。而豈意所親信者按釼瞋目而相待耶。公平生不顧生產。己卯夏。夫人暴逝。無以爲措。至於假貸。性又剛直。唯將甄拔賢才。力排邪議。庶救忠良誣枉之獄。權奸畜憾成獄。二子俱被極刑。身且不免。痛哉痛哉。○公之父司藝公敦厚。年老喪耦。以兄監司寬厚之婢重今爲妾。重今有女。曰甘丁。乃家畜前所生也。性狡黠。多爲不道之語。司藝公怒其有離間之漸。大杖足掌。送于白川外家。司藝下世後。甘丁嫁白川宋麟。生子祀連。公之一家。視祀連如親子。時奸兇執政。國勢日危。公之子處謙。常懷憤惋。言及時事。未嘗不涕隨言零。偶與詩山正正叔權礩等語曰。沈貞南衮專擅威福。俾上聾瞽。除去此輩。則可以扶國勢保士林矣。祀連聞之。以公夫人初喪時弔客錄。及發靷時役軍簿。上變告。遂成辛巳之獄。○後丙寅孫玧上書言。一時緣坐。皆蒙收敍。而惟祖父未蒙伸雪。誠爲九泉之冤。明廟特憐愍。還賜職牒。萬曆三年乙亥。宣廟贈謚曰貞愍。 東閣雜記
○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는 언보(彦寶)다. 천순(天順) 신사년(세조 2년)에 나서 나이 2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21세가 되어 성종 1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천성이 소탈하고 정직하여 바른 것을 지켜 요동하지 않았다. 연산(燕山) 때에 오랫동안 간원(諫院)의 관직을 혁파하였다가 중종이 반정(反正)한 날에 특별히 공을 대사간으로 삼으니 그른 것을 탄핵하여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였고, 4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과 대사헌으로 무너진 기강을 떨쳐 일으켰다. 이에 이조 판서가 되어서 벼슬을 경쟁하는 습속을 철저히 개혁하고, 모든 효행으로 공천된 사람은 행실을 표제(標題)하여 전형(銓衡)하였다. 또한 아뢰기를, “경(經)에 밝고 의(義)를 행하는 선비들은 품계나 직급의 순차에 구애 받아서는 안 되오니, 등급을 무시하고 선발하여 등용하십시오.” 하였다. 그 당시 명망 높은 사람들 중 조광조(趙光祖)ㆍ김식(金湜)ㆍ박훈(朴薰) 같은 이들에게는 특별히 6품직을 제수하였다. 김안국(金安國)ㆍ김정(金淨)ㆍ송흠(宋欽)ㆍ반석평(潘碩枰) 등은 다 어진 대부(大夫)들이라 하여 역시 천거 발탁하기를 청하였다. 또 직언(直言)을 하는 언관(言官)을 죄줄 수 없다고 힘써 말하니, 왕은 법도 밖의 건의라고 책하고, 대간에서는 나라를 그르치는 짓이라고 탄핵하였으나, 공은 태연히 흔들리지 않고 어진 선비를 선발하며 탁한 것을 쳐내고 맑은 것을 드높이는 일로써 자신의 책임을 삼았다. 을해년 이후부터 재상 이장곤(李長坤)과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과 서로 이어 이조의 전형을 맡아서 ‘기묘의 밝은 임금과 훌륭한 신하들의 만남[己卯明良際會]’을 열었다. 당시의 명현들은 임금의 총애를 받아서 거의 큰 정치가 흥성할 듯했으나 신진 제현(諸賢)들이 일해 나가는 데 용감하여, 과격한 흠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공이 정승이 되자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힘써 대체(大體)를 가지고 억제하고 진정시켰다.
○ 공의 아들 처겸(處謙) 등 세 사람은 모두 천과(薦科)에 합격하여 좋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자기의 영화가 가득 참을 경계하고 시세를 살펴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기묘년 11월 15일 밤 5경에 의정부 서리(胥吏)가 와서 영상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대궐로 들어갔다고 말하므로, 공은 깜짝 놀라 대궐로 달려 들어갔다 영의정 정공(鄭公 광필)이 홀로 빈청(賓廳)에 앉아 있기에 공이 그 사유를 물으니, 정공은 눈물을 뿌리고 머리를 흔들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치죄할 기구를 궁전 뜰에 갖추어 놓았다는 말만 할 따름이었다. 공은 드디어, 정공과 함께 힘써 청하여 조정에 모여 죄를 의논하도록 했다. 이에 명령하여 참의 이상을 소집하니, 모두가 함께 죄인(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하여 구제할 것을 상계하였다. 12월에 대간(臺諫)에서 명현들[淸流]에게 죄를 더하고자 탄핵하여 30여 명을 귀양보내는데, 공을 우두머리로 삼았거늘 정광필(鄭光弼)이 극간하여 구제해서 관직만 떨어졌다. 신사년 가을에 심정(沈貞)이 몰래 집의인 윤지형(尹止衡)을 사주하여 공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아들 처겸(處謙) 등이 당시 재상들을 비방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 넘어졌다. 즉시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상달하려 하였더니, 사림의 화를 일으킬까 염려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시골로 돌아가서 말썽을 없애고자 했는데, 어찌 뜻하였으랴, 친애하고 믿은 자가 칼을 어루만지며 눈을 흘기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공은 평생에 생산을 돌보지 않았다. 기묘년 여름에 부인이 갑자기 일을 치를 길이 없어서 돈을 꾸기까지 했다. 성품이 또한 강직하여 오직 현재(賢才)만을 선발하여 쓰고, 힘써 간사한 의논을 배척하였으며 충량한 사람을 모함하여 꾸민 옥사를 구하려 하였으므로, 권세 가진 간사한 무리가 감정을 품어 옥사를 일으켜, 두 아들이 함께 극형을 받았고, 자신도 또한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통코 애통하구나.
○ 공의 아버지 사예공(司藝公) 돈후(敦厚)는 늙은 나이에 상처를 하고서 형인 감사(監司) 관후(寬厚)의 계집종 중금(重今)을 첩으로 삼았는데, 중금에게 감정(甘丁)이라는 여식이 있었다. 돈후가 집에 데려 왔는데 살기 전에 낳은 애였다. 성질이 교활하여 엉뚱한 소리를 많이 하므로, 사예공은 그가 이간질을 할 징조가 있음을 노하여 발바닥을 몹시 매질하여 배천(白川) 외가로 보내었다. 사예공이 별세한 후에 감정은 배천 송린(宋麟)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사련(祀連)을 낳았는데, 공의 온집안이 사련을 친자식 같이 보았다. 당시 간흉들이 정권을 잡아 나라 형세가 날로 위태하였다. 공의 아들 처겸은 항상 분개하여 시사에 언급하면 일찍이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우연히 시산정(詩山正) 정숙(正叔 시산정의 자)과 권질(權礩) 등과 더불어, “심정(沈貞)과 남곤(南袞) 등이 전적으로 권위와 복록을 맘대로 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귀머거리를 만드니, 이 무리들을 제거하여야 국세를 붙잡고 사림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사련은 이것을 듣고 공의 부인이 죽었을 때의 조객록(弔客錄)과 발인 때의 역군들의 명부를 가지고 고변(告變)을 하여 드디어 신사년 옥사를 이루었다.
○ 나중 병인년에 손자 윤(玧)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한때 연좌된 이는 다 서용함을 받았는데, 오직 조부만이 신설을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구천의 원한이 되오리다.” 하였다. 명종(明宗)은 특별히 불쌍히 여겨 직첩을 돌려주었고, 만력(萬曆) 3년 을해년(선조(宣祖) 8년)에 선조가 정민(貞愍)이란 시호를 주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안처겸(安處謙)
順興人。字伯虛。貞愍公之長子也。癸酉進士。與權礩請從祀鄭文忠。革昭格署。釋奠儀物獻議更定。鉶羹大羹陽燧明水各得其制。至今遵用。登第授學諭。遭母喪。辛巳服闋。與同里詩山正權礩等語曰。衮貞專擅威福。必除去此輩。可以扶國勢。宋祀連與其妻甥鄭瑺告謀害大臣推官鍛鍊構捏。故入大罪。 雜記
○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자는 백허(伯虛)이며 정민공(貞愍公)의 장자이다. 계유년에 진사를 하였다. 권질(權礩)과 더불어 정문충(鄭文忠 포은(圃隱))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했고,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으며, 석전 의물(釋奠儀物)을 헌의(獻議)하여 다시 정하고 형갱(鉶羹 5미(味)를 조화시켜 형기(鉶器)에 담은 국)ㆍ대갱(大羹 양념을 치지 않은 육즙(肉汁))ㆍ양수(陽燧 태양열을 받아 불을 일으키기 위한 동제(銅製)의 거울)ㆍ명수(明水 맑은 물)가 각각 그 제도를 얻어서 지금까지 준용하고 있다. 급제하여 학유(學諭)로 제수되었다. 어머니 상(喪)을 만나서 신사년에 탈상했다. 한 동네에 사는 시산정(詩山正)과 권질(權礩)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 “남곤과 심정이 권위와 복록을 제 맘대로 하니, 반드시 이 무리를 제거하여야 국세를 바로잡을 수 있다.” 하였던 바, 송사련(宋祀連)과 그의 처 생질 정상(鄭瑺)이 대신을 해칠 것을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추관(推官)이 거짓으로 꾸며 죄안(罪案)을 성립시켰다. 그래서 대죄(大罪 사형)에 들어가게 하였다. 《잡기(雜記)》
안처근(安處謹)
順興人。字靜夫。處謙之弟也。資稟安詳。與朋友交。愈久愈敬。世稱三珠白眉勝諸兄。登薦科。爲弘文博士。辛巳杖殞。
○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자는 정부(靜夫)이며 처겸(處謙)의 아우이다. 자질이 고요하고 자상하며 벗과 더불어 사귐에 오래될수록 더욱 존경을 받았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세 형제 중의 백미로서 형보다 낫다고 했다. 천과(薦科)에 올라 홍문박사(弘文博士)가 되었다. 신사년에 매맞아 죽었다.
안처함(安處諴)
順興人。字久叔。處謙之弟也。天資渾厚。無疾言遽色。信於然諾。少與諸友語曰。三十後監試。四十後東堂。決不可赴。至戊寅三十一也。父翁命赴司馬。對曰。君子一言。千年不改。少與友言。今不可改。與兄同登薦科。爲弘文修撰。聞兄語觸時宰。言于貞愍。貞愍欲其消沮。率歸外鄕。變作。公以先告貞愍免罪。而亦緣坐。定屬于淸州。壬午蒙放。閑住二十二年而終。
○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자는 구숙(久叔)이며 처겸(處謙)의 아우이다. 자질이 혼후(渾厚)하여 말을 급하게 하거나 표정을 발끈하는 일이 없으며, 서로 약속한 바에는 신의가 두터웠다. 젊어서 친구들과 더불어 말하기를, “30세 후의 감시(監試)와 40세 후의 동당시(東堂試)는 결코 응하지 않겠다.” 하였다. 무인년에 31세가 되었다. 아버지가 사마시(司馬試)에 응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군자(君子)의 한 마디 말은 천 년을 두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니, 젊어서 친구들과 한 말을 지금에 와서 고친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형과 같이 천과(薦科)에 올라서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 형이 당시 재상을 비방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정민공(貞愍公)에게 말하였다. 정민공은 그 말썽을 없애버리고자, 가족을 거느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화변(禍變)이 일어나자 공은 먼저 정민공에게 고했다고 해서 죄를 면했으나, 역시 연좌되어 청주(淸州)로 귀양갔다가 임오년에 풀려나 22년을 한가히 살다 죽었다.
안명세(安名世)
順興人。字名世我中廟朝登第。爲弘文正字。戊申李芑以曾爲史官時褒揚柳灌等。論以逆黨殺之。人皆惜之。
○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자는 경응(慶應)이다. 중종(中宗) 때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무신년에 이기(李芑)가 명세가 일찍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유관(柳灌) 등을 포창 선양했다고 해서 역적의 도당으로 몰아 죽였다. 사람들이 모두 아까워하였다.
안응세(安應世)
竹山人。字子挺。號月窓。與南秋江最相善。爲人淸淡洒落。能詩尤長於樂府。安貧喜分。不求功名。不喜碁奕。自號烟波釣徒又鷗鷺主人。性又嚴厲。雖不白眼待俗。於人少許可。中司馬試。二十六早歿。人莫不慟之。 師友錄 安子挺死。南秋江會葬畢。於墓前用兕觥酹酒。以詩哭之曰。揮淚强高歌。酹汝一觥酒。 本集 子挺爲人淸淡洒落。白玉疵喜酒色也。嘗曰。不義之財。補止於家。不義之食。補止五臟。不可犯也。 師友錄 子挺抱不世大才。有文章操行天性朴野。不喜紛華。乃就古人古律歌詞中。拔其閑適可玩之尤者一百十四首。合爲一部。名曰湖山老伴。以爲終老江山之計。 冷話 秋江夢見子挺述夢中所見。作詩一絶記之云。邯鄲一夢暮山前。魂與魂逢是偶然。細雨半庭春寂寂。杏花無數落紅錢。 本集 子挺善吟詩喜看花。嘗曰。死亦看花吟詩。死無恨矣。及子挺死。秋江以詩哭之曰。吟詩死亦得。渠恨半消除。 秋江集記 秋江云。吾友安子挺亡後十年。高生淳夢見子挺於廣漠之野。子挺問伯恭安在。高曰上寺隷業。子挺不悅。卽成一絶付高生以遺之云。文章富貴摠如雲。何須勞苦讀書勤。但當得錢沽酒飮。世間萬事不須云。高覺而記之遺余。余罔知其意。後十年然後乃覺之。 冷話
○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이며 남추강(南秋江)과 더불어 가장 사이가 좋았다. 사람됨이 맑고 깨끗하였으며, 시를 잘하고 더욱 악부(樂府)에 능하였다. 가난을 편히 여기며 분수를 즐기고 공명을 구하지 않았으며, 바둑과 장기 같은 것은 싫어했다. 자호(自號)를 연파조도(煙波釣徒)라 하고, 또 구로주인(鷗鷺主人)이라고도 했다. 성격은 엄격하여 비록 시속을 백안시(白眼視)하지는 않으나, 사람들에 대해 허여함이 적었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26세로 일찍 죽으니, 사람들이 애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우명행록》
○ 안자정(安子挺)이 죽으니, 남추강(南秋江)이 와서 장사를 끝내고 묘 앞에 쇠뿔로 만든 술잔에 술을 따루어 바치며, 시로써 곡하기를
눈물을 뿌리며 억지로 노래 소리 높이 하여 / 揮淚强高歌 그대에게 한 잔 술을 드린다 / 酹汝一觥酒 하였다. 본집(本集)
○ 자정의 사람됨은 맑고 깨끗하였으나, 백옥에 흠은 주색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그는 말하기를, “의롭지 못한 재물은 집에만 도움이 되고 의롭지 못한 음식은 오장에만 도움이 될 뿐이니, 범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사우명행록》
○ 자정은 세상에 없는 큰 재주를 지녔으며 문장과 조행이 있었고, 천성이 소박해서 야단스럽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였다. 옛사람의 고율(古律)과 가사(歌詞) 중에서 한적하여 감상할 만한 것으로 뛰어난 것 1백 14편을 뽑아서 한 부의 책을 만들어, 《호산노반(湖山老伴)》이라 이름하고 산수간에서 일생을 마칠 계책으로 삼았다. 《추강냉화(秋江冷話)》
○ 추강(秋江)은 꿈속에서 자정을 만나보고, 꿈속에서 본 것을 술회하여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이것을 기록하면
부귀 영화의 덧없는 한 꿈도 죽기 전의 일이던가 / 邯鄲一夢暮山前 자네 혼과 내 혼이 서로 만나게 되니 우연이로세 / 魂與魂逢是偶然 가랑비 내리는 뜰에는 봄이 적적한데 / 細雨半庭春寂寂 살구꽃은 수없이 붉은 꽃잎을 떨어뜨리네 / 杏花無數落紅錢 하였다. 본집(本集)
○ 자정은 시 읊기를 잘 하고 꽃보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이르기를, “죽어서도 꽃을 보고 시만 읊는다면, 죽어도 한은 없겠다.” 하였다. 그래서 자정이 죽자 추강(秋江)은 시로써 곡하기를
시를 읊게 되면 죽어도 좋아 하였으니 / 吟詩死亦得 이 사람의 한은 반쯤은 녹아 없어지리 / 渠恨半消除 하였다. 《추강집기(秋江集記)》
추강이 이르기를, “나의 벗 안자정(安子挺)이 죽은 지 10년 후에 고순(高淳)이 꿈에 넓고 막막한 들에서 자정을 보았는데, 자정은, ‘백공(伯恭 추강(秋江))이 어디에 있느냐?” 묻기에, 고순이 대답하기를, ‘절에 가서 학업을 닦고 있다.’ 하니, 자정이 기꺼워하지 않는 기색을 하며, 즉시 절구 한 수를 지어서 고순에게 부쳐 보냈는데, 이르기를
문장이나 부귀는 모두 뜬구름 같은 것인데 / 文章富貴摠如雲 뭣 때문에 수고로이 독서에 힘쓰는가 / 何須勞苦讀書勤 마땅히 돈이 있으면 술이나 사서 마실 일이지 / 但當得錢沽酒飮 세상 만사가 다 요긴한 것이 아니라오 / 世間萬事不須云 하였다. 고순은 꿈을 깨서 이것을 기록하여 나에게 주었는데, 나는 그 뜻을 알 바 없었다가 그 뒤 10년 후에야 곧 이를 깨달았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안순(安純)
安純爲司憲。雜端宮娥犯罪。上命大司憲趙璞立殺之。公曰。憲府非刑官。且不正其罪而殺之可乎。璞以上旨强之。公曰。人命至重。死不復生。遽刑之於義何。宜付有司鞫訊。太祖聞而悟從之。 誌序 崔塋誅權姦。進士安純座主亦連坐。尸諸郊時適雨。流漂積屍。純年十八。率一僮物色求之以葬。識者服其大器。 碑序
○ 안순(安純)이 사헌(司憲)의 잡단(雜端)이 되었을 때 궁녀가 죄를 범하였다. 임금은 대사헌 조박(趙璞)에게 명하여 곧 죽이라 했다. 공이 말하기를, “헌부는 형관(刑官)이 아니고 또 그 죄를 다루지 않고 죽이는 것이 가한 일이오?” 하니, 조박은 임금의 뜻이라 하여 이를 감행하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인명은 지극히 중하고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온데, 형을 빨리만 집행하려는 것이 의(義)에 있어서 어떠하오? 마땅히 담당 관서에 넘겨 신문해 보아야 하오.” 하니, 태조(太祖)가 이 말을 듣고 깨달아 이에 따랐다. 〈지서(誌序)〉
○ 최영(崔瑩)이 권간(權姦)을 죽일 때, 진사(進士) 안순의 좌주(座主 자기가 급제할 때의 과거 고시관)도 역시 연좌되었다. 시체를 들에 버리었는데, 때마침 비가 많이 와서 쌓아 둔 시체가 떠내려 가거늘, 안순이 그때 나이 18세로서 한 아이 종을 데리고 가서 이것을 찾아다가 장사지내 주었다. 식자(識者)들이 그 기량(器量)이 큼을 감복하였다. 〈비서(碑序)〉
안찬(安瓚)
精通醫術。尤精於理學。士類取以爲友。有一男子。乘晩出去。忽兩眼皆合。以手揩之。如以漆接之。仍作盲瞽。瓚曰。眼者屬肝。肝受病故眼閉。敎治肝之病。未久漸開如常。又有女子。陰門忽痛。有頃黃黑毛相雜。如牛馬之毛。如水湧出。晝夜不止。瓚曰。毛者血之餘。血受病有怪也。可先治血。其人受服。未久毛止。又有婦人漱口。自舌端血出淋漓。連日不止。多用止血藥。猶不止。罔知所措。問瓚。瓚曰急服龍腦蘇合元。稍遲則不救矣。血者屬心。而血得熱則沸。今此婦人多用心慮。心氣極熱。血沸湧出。妄行于舌。血盡心虛。客邪乘之。則不能救矣。治心去熱。則血自止矣。果服四丸。流血卽止。人服其術精識遠非庸醫所及。由是見重於一時。問病診脉者。塡咽門巷。不能周徧。毀譽交起。同輩人疾如仇讎。大司憲李沆以交結黨人。拿致鞫問。受杖一百流外。至延曙驛而死。人皆惜之。
○ 의술(醫術)에 정통하고 더욱 이학(理學)에 정밀하였다. 사류들이 다 벗으로 삼았다. 어떤 남자가 어두울 녘에 밖에 나갔다가, 문득 두 눈이 합쳐져서 손으로 문질러 보았으나 마치 칠(漆)로써 붙여 놓은 것 같이 되어 끝내 소경이 되었다. 안찬이 말하기를, “눈은 간(肝)에 속한 것이라, 간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눈이 닫혀졌다.” 하고, 간의 병을 치료하였다. 얼마 안가서 점점 눈이 열려서 평상시와 같이 되었다.
또 한 여자가 있었는데, 음부(陰部)가 문득 아프며, 좀 있다가 누른 색과 검은 색의 털이 함께 섞여 소나 말의 털과 같고 물이 솟듯 솟아 나와, 주야로 그치지 않았다. 안찬이 말하기를, “털은 피의 여분이라, 피에 병이 생기면 그런 괴상한 일이 있으니, 먼저 피를 치료해야 한다.” 하였다. 그 사람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얼마 아니 되어 털 솟아나는 것이 그쳤다.
또 어떤 부인이 입을 양치질하다 혀끝으로부터 피가 질척하게 나와 연일을 그치지 아니하여, 지혈약(止血藥)도 많이 썼으나, 그래도 그치지 않아 어쩔 줄을 몰라서 안찬에게 물으니, 안찬이 말하기를, “급히 용뇌 소합환(龍腦蘇合丸)을 먹어라. 조금만 더 늦어지면 구하지 못할 것이다. 피는 심장에 속하는데, 피가 열(熱)을 만나면 끓는다. 지금 이 부인은 마음을 몹시 써서 심기(心氣)가 극히 뜨거워져서 피가 끓어 솟아올라 혀로 번진 것이다. 피가 다하고 심장이 허하여져 사기(邪氣)가 틈타 들어오면 구하지 못하리라. 심장을 다스려 열을 제거하면 피는 자연 그치리라.” 하였다. 과연 소합한 네 개를 먹였던 바 흐르던 피가 즉시 그쳤다. 사람들은 그 의술의 정묘함과 식견의 원대한 것이 보통 의원의 미칠 바 못 됨을 탄복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때 중요시 되어 병을 묻고 맥을 진단하려고 하는 자가 문간을 메웠다. 그러나 두루 주선하지 못하여 헐뜯음과 칭찬이 섞여 일어나 동배인(同輩人)이 질시하기를 원수 같이 하더니, 대사헌 이항(李沆)이 당인(黨人)들과 결탁했다는 것을 구실로 만들어 잡아다 심문하여, 매 1백 대를 맞고 외지로 귀양가는 도중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 죽으니, 사람마다 애석히 여겼다.
안지(安止)
康津人。字子行。號皐隱。我太宗朝再捷科。官至領中樞府事。有文名。謚文靖。○安止爲集賢殿大提學。時文士方趨附。安平大君獨不致公。屢折簡邀之。則曰大君簡不可遙答。當親謝謁云云。竟不赴。一日諸文士有製述。爭其高下。往質之。公故以高者爲下。下者爲高。諸文士笑曰。此老衰耗不足較。遂絶延請。 瑣錄
○ 본관은 강진(康津)으로 자는 자행(子行)이요, 호는 고은(皐隱)이다. 태종(太宗) 때에 다시 과거를 하고, 관직은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문명(文名)이 있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안지가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는데, 당시 문사들이 바야흐로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붙좇았으나, 홀로 공만은 가지 않았다. 안평 대군이 여러 차례 쪽지를 보내서 그를 맞이하려 하니, 말하기를, “대군의 편지에 멀리서 답하는 것은 불가하니, 마땅히 친히 가 뵙겠다.” 하고는, 결국 가지 않았다. 하루는 여러 문사들이 글을 지어 가지고 그 고하를 다투고자 그에게 가서 물었다. 공은 고의로 고하를 반대로 하였더니, 여러 문사들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노인이 아주 쇠약하여 족히 비교하지 못하겠다.” 하고, 드디어 초청하지를 않았다. 《소문쇄록(謏聞瑣錄)》
안견(安堅)
小字得守。性聰敏精博。多閱古畫。皆得其要。集諸家之長而拆衷之。山水尤其所長。所畫內藏靑山白雲圖。眞圖中絶寶也。 詩話 八駿馬。我太祖征戰時所御。我世宗朝命護軍安堅圖其形。集賢殿諸臣製其贊。以傳後。雜記 一曰橫雲鶻。 產女眞走納氏平紅賊時所御中二箭 贊曰。雄姿應圖。駭骨超群。掃盡妖氛。橫爾橫雲。二曰。游麟靑。 產咸興取兀剌戰海州捷雲峯時所御中三箭養三十一死 贊曰。偉此游麟。瑞我聖德。積年三十。宣威南北。三曰追風烏。 純黑烏產女眞中一箭 贊曰。色潤玄雲。眼閃明星。一鞭騰驤。萬里縱橫。四曰發電赭。 產安邊赤色白鼻白足長湍之獵所御 贊曰。逸倫之驥。應機如神。千軍陣開。一策電奔。五曰龍騰紫 產端川平倭時所御中一箭紫色黑鬣黑尾 贊曰。虯螭變化。風雲雜遝。凱旋孤竹。功存三捷。六曰凝霜白。 產濟州純白色烏嘴烏眼烏腎烏蹄鴨綠回軍時所御 贊曰。神奇天與。光景練素。義旌一回。鴻業永樹。七曰獅子黃。產江華煤島智異山平倭時所御黃色烏嘴 贊曰。三尺威奮。一怒而成。頭流山峙。黃獅有名。八曰玄豹。 產咸興兔兒洞潛邸平倭時所御黑色豹腎 贊曰。玄豹趫迅。所向無闊。粤騁逸足。揚我武烈。
○ 어릴 때 이름은 득수(得守)다. 성품이 총명 기민 정밀 해박하고, 옛 그림을 많이 보아서 모두 그 요체를 체득하여 모든 화가의 장점을 모아서 이것을 절충하였는데, 산수도(山水圖)에 더욱 뛰어났었다. 그가 그린 내장청산백운도(內藏靑山白雲圖)는 진실로 그림 가운데서도 절대적인 보물이었다. 《시화총림》
○ 팔준마(八駿馬)는 우리 태조(太祖)가 정벌할 때 타던 것으로, 우리 세종(世宗) 때에 호군(護軍) 안견(安堅)에게 명하여 그 형상을 그리고, 집현전의 모든 신하들이 그 찬(贊)을 지어 후세에 전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첫째, 횡운골(橫雲鶻 구름을 횡행하는 매) 여진(如眞)의 소산(所産)으로 납합출(納合出)을 쫓아낼 때와 홍건적을 평정할 때 탄 말로서 두 대의 화살을 맞았다. 찬(贊)에 이르기를
웅장한 자세는 그림에 상응하고 / 雄姿應圖 골격은 무리에서 뛰어났도다 / 駭骨超群 요사한 기운을 다 일소하고 / 掃盡妖氛 횡행한 것은 바로 너 횡운이로구나 / 橫爾橫雲 하였다.
둘째, 유린청(游麟靑 빠른 기린과 같은 청총마) 함흥(咸興) 소산(所産)으로 올랄(兀剌)을 쫓아낼 때와 해주(海州)에서 싸울 때와 운봉(雲峯)에서 승리할 때 탔던 것으로 세 대의 화살을 맞았고, 31년을 기르다가 죽음. 찬에 이르기를
거룩하다, 이 유린이여 / 偉此游麟 우리 성덕을 상서롭게 하였도다 / 瑞我聖德 나이를 30이나 쌓아 가면서 / 積年三十 위엄을 남북에 떨쳤도다 / 宣威南北 하였다.
셋째, 추풍오(追風烏 바람을 쫓는 오추마(烏騅馬)) 순 검은 까마귀 색깔. 여진산(女眞産)으로 화살 한 대를 맞았다. 찬에 이르기를
빛깔의 윤택함은 검은 구름 같고 / 色潤玄雲 눈의 빛남음 밝은 별과 같도다 / 眼閃明星 한 채찍에 머리를 들고 달리면 / 一鞭騰驤 만리라도 종횡으로 뛰는구나 / 萬里縱橫 하였다.
넷째, 발전자(發電赭 번개와 같이 빠른 적토마(赤兎馬)) 안변(安邊) 소산으로 붉은색 코와 발목은 흰 빛이다. 장단(長湍) 사냥 때 탔었다. 찬에 이르기를
무리에서 빼어난 말이여 / 逸倫之驥 기미에 대응하기 귀신 같도다 / 應機如神 일천 군사가 진을 열어도 / 千軍陣開 한 채찍에 번개같이 달리도다 / 一策電奔 하였다.
다섯째, 용등자(龍騰紫 용의 달림을 가진 자류마(紫騮馬)) 단천(端川) 소산으로, 왜적을 평정할 때 탔으며, 화살 한 대를 맞음. 자주빛이고 갈기와 꼬리는 검었다. 찬에 이르기를
뿔 없는 용이 변하여 / 虯螭變化 바람과 구름이 몰리도다 / 風雲雜遝 고죽(해주)에서 이겨 돌아왔으니 / 凱旋孤竹 공은 세 번의 승첩을 남겼도다 / 功存三捷 하였다.
여섯째, 응상백(凝霜白 어린 서리와 같은 백마) 제주도 소산. 순 흰색이나 주둥이와 배와 음경과 발굽은 검으며, 압록강 회군 때에 탔었다. 찬에 이르기를
신기함은 하늘이 준 것 / 神奇天與 모양이 흰 비단이로다 / 光景練素 의로운 깃발을 한 번 돌리어(태조의 위화도 회군을 말함) / 義旌一回 왕업을 영구히 심었도다 / 鴻業永樹 하였다.
일곱째, 사자황(獅子黃 사자와 같은 황마(黃馬)) 강화(江華) 매도(煤島) 소산으로 지리산에서 왜구를 평정할 때 타던 말. 누른 색이며 주둥이는 검다. 찬에 이르기를
3척의 칼로 위엄을 떨쳐서 / 三尺威奮 한 번 성을 냄으로 성공을 했나니 / 一怒而成 지리산 고개에 / 頭流山峙 누른 사자가 유명했었다 / 黃獅有名 하였다.
여덟째, 현표(玄豹 검은 표범) 함흥 토아동(兎兒洞) 소산. 왕이 되기 전 왜구를 평정할 때 탔었다. 빛깔은 검고 음경은 표범의 것과 같다. 찬에 이르기를
현표의 빠르고 빠름이여 / 玄豹趫迅 향한 곳에 넓은 것이 없도다 / 所向無濶 달리는 빠른 발이여 / 粤騁逸足 우리 태조의 무열을 드날렸도다 / 揚我武烈 하였다.
권별(權鼈,1589∼1671)이 지은『해동잡록(海東雜錄)』5권 / 본조(本朝) / 효자(孝子) 안규(安圭) 白州人。烈女元氏子。家嘗失火。元氏抱夫神主。未嘗而仆。圭入烈火中。負母抱神主而出。頭髮盡焦爛。弘治辛亥旌門。
백주(白州, 현 황해도 백천군) 사람이며, 열녀 원씨(元氏)의 아들이다. 집에 불이 났는데, 원씨는 남편의 신주(神主)를 안고 엎드렸다. 안규가 타오르는 불속에 뛰어들어 어머니를 업고 신주를 안아 끌고 나왔는데 머리카락이 모두 타버렸다. 홍치(弘治, 명(明) 나라 효종(孝宗)의 연호(1488~1505)) 신해년에 정문을 세웠다.
안도(安堵)
靈山人。遭母喪。獨守廬側。泣血三年。我太宗命旌其閭。官至司諫院獻納。
영산(靈山, 현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사람이며,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홀로 묘막을 지키고 피눈물을 흘리며 3년을 살았다. 태종(太宗)이 명하여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벼슬은 사간원 헌납(獻納)에 이르렀다.
안정명(安正命)
昌平人。縣監起之子。父歿。居廬三年。不食菜果。母病苦。嘗糞以驗生歿。母又苦虱繁。散其髮以分其虱。人稱其孝。
창평(昌平) 사람이며, 현감 기(起)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죽고 3년 동안 묘막 생활을 하며 채소와 과일도 먹지 아니했다. 어머니가 병고에 시달리자 대변 맛을 보고서 생사를 살펴보았다. 어머니가 또 이[虱]가 많아서 고생을 했는데 머리를 풀어 이를 자신에게 오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 효성을 칭찬했다. |
첫댓글 위 내용을 보면 흥녕인, 순흥인, 죽산인, 강진인, 백주인, 영산인, 창평인 등은 모두 출생지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을 본관이라고도 하였구요. 그러면 본관이라는 것이 많은 경우에는 출생지를 나타내는 같네요.
위 내용을 보면 출생지 혹은 본관이 다른데 왜 지금은 왜 순흥 안씨로 바뀐 것인지요? 그리고 순흥안씨가 왜 그렇게 많은지요?
분명한 것은 안지 선조님이 본관이 탐진인 것만은 확실하네요. 역사자료에는 이 선조님들이 순흥인으로 적혀있는 것을 본적이 없네요. 600년간 탐진안씨로 사용된 것이 근래 순흥으로 사용하라고 해서 의아해서 입니다.
안진환님의 좋은 자료 정말 감사합니다. 인터넷 아니면 어떻게 이런자료 볼 수 있겠습니까? 감사 또 감사 드립니다.
싸리울님의 과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수집하여 올린 자료가 우리 집안의 족사(族史)를 올바르게 인식 하는데
도움이 되었어면 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되기 전에는 일반인들이 각종 역사서(삼국사기,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지리지, 문집등의 자료들을 접하기가 쉽지 않아서 족사에 대한 정체성에 의문이 많았고 혹은 족보를 편찬할때에도 정확 하지않은 자료에 근거하여 잘못된 기록이 족보에 등재되는 경우가 비일비제 하였던게 사실입니다 지금 부터라도 이런 잘못된 기록을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바로잡는게 후손들이 해야 될 일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그리고 싸리울님이 궁금해 하시는 의문점들은 여기 족사 게시판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정독 하시면 아마 이해가 되실거라 생각하여 별도로 설명 드리는 것은 생략 하겠습니다.
안진환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시간이 되면 정독해 보겠습니다. 아직은 현직에 있고 여러 활동을 하느라 집중은 힘듭니다. 가끔 들러겠습니다. 언제 한번 인사가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