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응제왕應帝王
‘응제왕’은 스스로를 잊고 자연을 따르면 만물의 제왕이 되기에 알맞음을 의미한다. 제왕은 자연의 대도를 터득하여 무심무위(無心無爲)하여 만민만물(萬民萬物)의 자연의 변화에 일임(一任)해야 한다. 제왕이 천하를 다스릴 때 무심 무위하면 천하는 저절로 다스려지고, 상은 하를 잊고, 하는 상을 잊어 만민(萬民)은 제왕의 공덕이 위대하다는 따위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참된 제왕의 덕이다. 다른 말로 장자적 초월자(超越者)는 정신세계의 절대자이며, 또 그 절대성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도 최고의 지배자인 제왕이 되어야 한다. 이 편은 주로 정치에 관계되는 내용이 많지만, 실은 자연 그대로를 귀하게 여기는 정치의 부정(否定)을 말하고 있다.
모두 일곱 가지 우화(寓話)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지(小知)의 부정에서 시작하여 천지의 자연에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곽주(郭注)>는 ‘대저 무심하여 스스로 변화에 몸을 맡기는 자는 의당 제왕이 되는 것’이라 했다. 또 육수지(陸樹芝)의 <장자(莊子雪)>은 ‘천하를 다스리려면 일이 번잡(煩雜)하고 많다. 그리고 유위(有爲)의 다스림은 무위(無爲)의 다스림만 못하다. 무위하면 곧 허(虛)에서 노닐며, 그 실정은 예측할 수 없다. 유위하면 곧 혼돈(混沌)을 파괴하며 오히려 대해(大害)가 된다. 태사공(太史公, 司馬遷)은 장자의 글은 노자(老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만 무위(無爲)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부지(不知)에 의거하여 그 부지를 부지에 귀속시켰다. 장자는 노자를 훨씬 능가는 데가 있다.’고 했다.
(1) 설결(齧缺)이 선생인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네 번 물었으나 네 번 다 모른다고 했다. 설결은 그러자 ‘부지(不知, 모르는 것)가 바로 진지(眞知, 참된 앎)임을 깨닫고’ 껑충껑충 뛰며 매우 좋아했고, 포의자(浦衣子)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포의자가 말했다. “너는 지금에야 그걸 알았느냐. ‘세상에서 성군(聖君)이라 하는’ 유우씨(有虞氏)도 태씨(泰氏)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유우씨는 아직도 인(仁)을 마음속에 지닌 채 그것으로 사람을 모으려 한다. 하긴 그래도 인심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조금도 남을 헐뜯는 입장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태씨는 누워 자면 그지없이 편안하고 깨어나면 어수룩하며, 혹은 스스로 말이 되기도 하고 혹은 소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므로’, 그 지혜는 아주 확실하고 그 덕은 매우 진실하다. 그러니 애초 남을 헐뜯는 입장에는 빠져들지 않는다.”
(2) 견오(肩吾)가 광접여(狂接輿)를 만났을 때 광접여가 물었다. “전에 중시(中始)는 네게 무슨 말을 했느냐?” 견오가 “남의 군주(君主)된 자가 자기 생각대로 갖가지 규범이나 법도를 지어낸다면,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따르고 교화(敎化)되지 않겠느냐.”라 했습니다. 광접여는 “그건 거짓 덕이다. 그따위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바다를 걸어서 건너고 강을 손으로 파 헤지며, 모기에게 산을 지게 하는 짓 같은 ‘무모한 행위’이다. 대체 성인의 정치란 밖을 다스리는 걸까? 오히려 스스로를 올바르게 한 뒤라야 잘 다스려지는 법이니, ‘성인의 정치는’ 다만 확고하게 자기 일을 해낼 뿐이다. 새는 높이 날아 화살의 위험을 피하고, 생쥐는 신단(神壇) 밑 깊숙이 굴을 파고서, 연기에 그을리거나 파헤쳐지는 화(禍)를 피한다. 그러나 중시의 말대로 따르는 너는 저 두 짐승보다 못하다.”
(4) 양자거(陽子居)가 노담(老耼)을 만나 “여기 한 사람이 있는데 그 동작이 빠르고 억세며 사물의 도리에 밝고, 도를 부지런히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훌륭한 왕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노담은 “그런 자는 성인(聖人)의 입장에서 보면 지혜만 앞서고 재주에 얽매여 몸을 지치게 하고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자다. 가령 예를 들어보자. 호랑이나 표범의 무늬는 사냥꾼들을 불러들이게 되고, 재빠른 원숭이나 너구리를 잡는 개는 노끈에 매이게 된다. 이런 자가 훌륭한 왕에 비교될 수 있겠느냐.”라고 대답했다. 양자거는 놀라며, 그러면 훌륭한 왕의 정치에 대해 들려달라고 했다. 이에 노담은 “훌륭한 왕의 정치란 그 공적이 온 세상에 미치면서도 자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하고, 만물에 교화(敎化)를 베풀지만 백성은 ‘별로 깨닫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는다. 선정(善政)이란 베풀어지고 있으나 뭐라고 나타낼 수 없으며, 만물은 각기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왕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서서, 속박(束縛) 없는 무(無)의 세계에 노니는 자이다.”
(11) 명예의 표적이 되지 말라. 모략(謀略)의 창고(倉庫)가 되지 말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 말라. 지혜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 무궁한 도를 잘 터득하고 자취 없는 경지에 노닐며,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인 본성(本性)을 온전하게 하고, 스스로 얻는 바가 이었다고 생각지 말라. 오직 허심(虛心)해지는 것뿐이다. 지인(至人)의 마음의 작용은 거울과 같다. 사물을 보내지도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사물에 따라 응하여 비추어주되 감추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물에 대응하여 자기 몸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가 있다.
(12) 남해의 임금을 숙(儵, 빠를 숙)이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忽, 소홀히 할 홀)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을 혼돈(混沌)이라 한다. 숙과 홀이 때마침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매우 융숭하게 그들을 대접했으므로,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의논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입, 코, 눈,’ 등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이 혼돈에게만은 없다. 어디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주자. 그래서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 죽과 말았다(칠일이혼돈사(七日而混沌死).
<해설>
‘혼돈(混沌)이 칠규(七竅)로 죽었다.’는 유명한 우화다. 인간적인 유위(有爲)의 행동이 자연의 순박(淳朴)을 파괴함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장자≫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우화다. 당(唐)나라 초기의 전설적인 승려 시인 한산(寒山)의 시에 이 ‘혼돈’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이 있다.
쾌재혼돈신 快哉渾沌身 아직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前) 혼돈의 몸은 그지없이 유쾌했고
불반목불뇨 不飯復不尿 밥 먹고 오줌 누는 번거로움도 없었는데
조득수찬착 遭得誰鑽鑿 어쩌다 누구에게 구멍을 뚫렸는가
인자입구규 因玆立九竅 그래서 사람이 되어 아홉 구멍을 갖춘 몸이 되었는가
조조위의식 朝朝爲衣食 덕분에 날마다 입고 먹기에 허둥지둥
세세수조조 歲歲愁租調 해마다 상납(上納)할 걱정 뿐
천개쟁일전 千箇爭一錢 사람들은 일전(一錢)의 돈에 천인(千人)이 다투고
취두망명규 聚頭亡命叫 와글와글 모여서 목숨 걸고 외쳐대네
첫댓글 이것으로 <장자 내편> 소개를 마칩니다.
미리 써놓은 글을 옮기는 과정에서
처음에 순서가 약간 바뀌어서 송구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 모두 열심히 읽고 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