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직전신장), 1534~1582.6.21]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尾張國: 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막부(幕府)의 회복을 청해 왔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京都]를 진정하고 막부를 재건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 ·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전란의 시대에 통일의 서광을 비추어 준 전제무장(專制武將)으로 주목할 만한 여러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였다. 구체제 ·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 ·교량의 정비, 관소(關所: 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의 위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계승되었다.
오다노부나가...
이사람은 그야말로 파격적이라고 할수있습니다. 그전에는 일본에 그와 같은
사람은 없었죠. 일본역사에 가장많은 영향을 끼친사람중에 한명입니다만.
이사람은 기존의 상식에 크게 매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어릴적에는 하도
기행(여행이 아닙니다. 이상한 행동을말합니다.-_-)을 많이 해서 멍청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때문에 가문의 가신들이 가문의장례를 걱정해서 그를
몰아내고 동생을 영주로 내세울려는 시도까지하죠.
그러나 아버지의 급사로인해(복상사했다는 말도있습니다.-_-)갑작스래 가독을 승계하게 되고 그때부터 그전과는 전혀다른 모습을 보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돌출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자 본격적으로 주목받고 가신들에게 영주로 인정받은것은 오케하자마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인데요.당시 수적열세를 딛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일약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때에도 상식을 뒤업는 행동을 하면서 승리를 거둡니다.
적군은 오다군이 농성을 할거라고 보고 안심하고있었는데 뒤통수를 갈겨버리죠.
그이후에는 다른영주들과는 달리 영토내에서의 상인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하고 철저히 능력에따라 가신들을 받아들이는등 기존의 영주들과는 다른사고방식을 보여주죠.
그가 했던업적중에 가장 유명한것은 철포대의 집단운용이었는데요. 철포란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사용했던 조총을 말합니다. 당시 일본 영주들은 철포를 쓰고있기는
했지만 집단운용은 안하고 여러 부대에 분산시켜쓰거나 농성전에서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이를 뒤집어버리죠. 그는 철포들을 모두 모아서 집단운용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했고 나가시노전투에서 일본최강의 기마군단을
보유하고있던 다케다가문의 군대를 괴멸시켜버립니다.
그이후 명실상부하게 일본 최대의 다이묘가 되죠.
그는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영주였고 공을 세운부하들에게는 확실한 은공을
내리는 사람이었지만 적에대헤서는 너무나 잔인한데다가 부하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스스로 제육천의 마왕이라고 칭하고 천하경영의 방식으로 천하포무
(무력통치를 의미합니다.)를 내세웠을 정도였죠.
이때문에 엄청난 악명을 얻게되고 부하들조차 그를 두려워하게 되죠. 그로인해
가장신임하는 부하중에 하나였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일으킨 모반으로인해
천하통일을 눈앞에두고 최후를 맞게 됩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죠.-_-얄굿게도 이말을 한사람이 노부나가가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미쓰히데였죠-_-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풍신수길), 1536~1598.8.18]
일본의 무장 ·정치가.
별칭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국적 일본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일본 오와리국[尾張國: 愛知縣]
오사카성 / 성곽주변에 '해자(방어용 물웅덩이)'를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방어를 하였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하여 3년 만에 완공하였으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31년 재건하였다.
본문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 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조대신[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고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은 그때까지 되풀이되던 왜구의 노략질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로 하여금 1만 8,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조선은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전열을 정비한 관군과 의병 및 수군의 활약으로 왜구를 모두 퇴각시켰다. 이 전란으로 조선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노략질 당했고, 조선의 도공(陶工)을 납치한 일본은 도자기 문화를 이룩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_-;;
풍신수길로 더알려져 있죠. 임진왜란의 원흉이기도 합니다만.
이사람은 일본사람들에게 입지전적인 인물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생김새때문에 원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있죠. 원래는 "기노시타 도키치로' 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였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개명합니다.
원래는 오다가문의 하급무사의 아들이었는데 젊어서 여러곳을 많이 유랑했고
그과정에서 많은 직업을 두루 거치게 됩니다.
그과정에서 오다노부나가에의해 발탁당하게 되죠. 처음에는 말단직을 수여받습
니다만. 그뛰어난 말발과 잔머리 그리고 주위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으로 인해 오다가의 중신으로 올라서게 되고 나중에는 오다노부나가가
가장신임하는 위치에 까지오르게 됩니다.
이사람의 행적을 살펴보면 노부나가와는 전혀다른 방식으로 주변사람들을 다스렸죠. 오다가 무력으로 다스렸다면 그는 뛰어난 두뇌를 이용해서 주위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여 들였고. 사람을 대할때 허물없이 대했기때문에 호감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노부나가가 죽은후에 재빨리 아케치 미쓰히데를 처치하고 오다가의 후계자를 장악함으로서 오다가의 세력을 모두흡수하고 같은 동료였던 시바타 가쓰이에를 무너뜨리고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킴으로서 일본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일본통일을 완수하죠.
다만 출신배경탓에 상당한 컴플랙스를 가지고있었고 화려한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자식에 대해 매우약한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마지막에
죽을때 자기의 어린아들의 장례를 원로들에게 당부하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각서까지 받아내는모습을 보이죠.
최후에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임진왜란을 일으킴으로서 미친놈이라는 말까지들었지만. 최하층에서 최고 지도자까지올라 간인물이기도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덕천가강), 1542.12.26~1616.4.17]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초대 장군.
별칭 아명 다케치요[竹千代]
국적 일본
도쇼구 / 이 건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신이 시즈오카에 붇혔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닛코로 이장되면서 지어진 사당이다.
본문
아명 다케치요[竹千代].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河] ·도토미[遠江] ·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 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1603년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614∼1615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여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통일을 완수하고 에도막부를 연인물이죠. 세명중에 가장오래살기도했고.
이사람의 역시 앞에두사람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사람입니다.
어릴때 영주인 아버지가 가신에 의해 살해당하고 처음에는 오다가의 인질로 갔다가 그다음에는 이마가와가의 인질로 가서 어린시절을 인질생활을 하면서 다보냈죠
그의 아내역시 이마가와가의 여자였습니다.
어린시절겪은 인질생활이 그의 인생에 큰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인질생활에서 풀려나것은 오케하자마전투에서 이마가와 요리토모(맞나??)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입니다.
자기의 영지인 미카와로 돌아온이후에는 이마가와가와 동맹을 파기하고 오다가와 동맹을 맺으면서 이마가와의 영토를 모두흡수하죠.
그는 노부나가가 죽을때까지 그와의 동맹을 계속유지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해나가고 인재들을 가신으로 끌어모으면서 세력을 키워나가죠.
항상 겸손한모습을 보이고 앞에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만. 젊었을적에는
상당한 다혈질로 미타카하라전투에서 다케다신겐에게 박살이 나면서 그런 자세를
버리죠.
그로서는 전투에패하기는 했지만
많은것을 배우게 됩니다. 후에 그 스스로도 자신은 다케다신겐에게서 배웠다고
말하죠.
그가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건 오다노부나가가 죽으면서 입니다만. 그과정에
옜 다케다세력을 모두 흡수하죠.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자 머리를 숙이고 그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영지를 모두뺐기고 다른곳으로 옮기라는 명령까지도 감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후에 임진왜란에도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군대를 보전해놓다가 히데요시가 죽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파영주들을 격파하고 일본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죽기전에 자기아들의 장래를 부탁한 인물이 이에야스라는게
참 얄굿기는 합니다만.
일본을 장악한후에 오사카성 여름과 겨울의 진을 거치면서 히데요시세력을 말소하고 완전한 통일을 이루게 되죠. 이 오사카성전투에서 그유명한 사나다 유키무라가 대활약을 합니다. 결국은 전사하기 합니다만.
아들에게 쇼군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오고쇼로 물러나죠 그렇지만 권력은 계속 장악하고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70대의 나이로 소화불량-_-으로 죽습니다.
세명중에 가장오래살았고 냉정하게 정세를 판단함으로서 목숨을 보전하고
끝내는 천하를 얻은 인물이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소서행장), ?~1600]
요약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의 무장.
국적 일본
활동분야 군사
순천 왜성 /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인 소서행장이 쌓은 왜성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전라남도 지방에 쌓은 왜성으로는 오직 한군데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이충무공의 전장터이기도 한 이 성은 왜장 소서행장을 이곳에서부터 노량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본문
약종상(藥種商)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1592∼1593) 때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하였다. 화평공작에 실패하여 귀국하였다가 정유재란(1597∼1598) 때 재침하였으나 위세가 떨어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후퇴하여 갔다. 귀국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반항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참수형을 받았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신앙심이 깊은 장군이었다.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가등청정), Kato Kiyomasa, 1562~1611.8.2]
일본의 무장(武將).
별칭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국적 일본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나카무라
가등청정의 석상 / 나고야 성에 있는 가등청정의 석상으로 임진왜란시에 일본장수로 출병하였으며, 일본 3대성중 하나인 구마모토성을 축조하였다.
1562년 나카무라[中村]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명(兒名)은 가토 도라노스케[加藤虎之助]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는 6촌간으로,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아래서 성장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의 시동을 지내며 많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合戰]에서는 뛰어난 활약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과 더불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이후 규슈[九州]의 히고[肥後] 남부에서 25만 석의 다이묘[大名]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방면으로 출병하여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울산싸움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과 갈등을 빚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섭정을 맡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戰鬪]에서 동군(東軍)인 이에야스 측에 참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宇土城)을 함락시켰다. 이후 구마모토[熊本] 대영지(大領地)의 세습영주가 되어 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오사카성[大阪城], 나고야성[名古屋城]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名城)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을 축조하였으며, 정치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다가 1611년 8월 2일 사망하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풍신수길이 가장 총애했던 전형적인 무장으로, 상인출신인 무장인 고니시를 경멸하는 면이 있었다고 하며 - 그 시대에 인접영지를 가진 영주들간이 거의 그렇듯이 -고니시와는 대립관계였다고 합니다.
고니시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큰 수익을 얻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있어서 임진왜란은 조선과의 교역에 막대한 손해를 입을수 밖에 없어 풍신수길에게 전쟁을 방지하려는 전쟁반대파였습니다.
고니시는 소 요시모토와 함께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서 일본에 보고하는 말과 조선에 전하는 말을 달리하는 이중적인 외교를 하다가 결국 풍신수길의 분노를 사게되고, 결국 조선출병이 현실화되자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고자 조선 출병의 선봉을 맡게 됩니다.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전공을 다투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가 한강을 건너는데 이용될 나룻배를 모두 떠내 자신이 먼저 한양에 입성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고니시는 명나라와의 강화조약을 맺는데 있어서도 명나라 사신과 짜고 문서를 위조하는 등 무장으로서 우직함을 보이는 무장은 아니었다고 전해집니다.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임란 당시 1군(선발대)
고니시 유기나가(1558~1600)는 오오사가 옆에 있는 무역도시 사가이 출신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약품무역을 하는 거상의 아들이었는데, 당시 조선산 인삼과 약품을 포함한 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대마도 도주 요시도시가 그의 사위였다.
풍신수길의 부하가 되어 일본 통일전쟁 때 군수물자의 보급업무를 잘 수행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고, 우도에 있는 우도성의 성주가 되었다.
풍신수길이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사위 소오 요시도시와 풍신수길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협력하여 전쟁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가 되고, 결국 전쟁은 터지고 말았다.
일설에는 사위와 같이 조선을 여러번 다녀와서 조선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풍신수길을 사주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여러번 그러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없는 것 같다.
임진왜란때는 제 1군의 장수로 18,700명의 지휘관이 되어 참전하였다. 이때 풍신수길은 휘하 영주들을 견제시키기 위하여 유기나가에게 가토 기요마사와 공동 선봉장이 되어 추첨을 하여 1일 교대로 전투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92년 4월 14일 첨사 정발이 사수한 부산진성과 첨사 윤흥신의 결사 수비한 다대포진성을 함락시켰다. 다음날인 4월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결사 항전한 동래성을 공격하기 전에 싸우지 않고 이기고자라는 나무판자를 성 앞에 세우니, 송상현이 "싸워서 죽기는 쉽다.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 라고 쓴 나무판자 대답을 해서 공방전이 시작되어 함락시켰다.
계속 북상하여 충주에서 공동 선봉장인 가토는 좌로, 고니시는 우로 각각 다른 다른 길로 진격하여 한성 입성의 다툼을 하였다.
고니시는 조선의 지리를 잘 아는 포로를 시켜서 가토 부대가 서울에 입성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한성에 있는 나룻배를 전부 떠내려 보내 가토 부대의 도하작전을 지연시키고, 1592년 6월 5일 동대문을 지나 제1차로 서울에 입성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고니시 부대의 입성 전에 조선 민중들의 양반, 왕족들에 대한 반감으로 여러 곳에 방화하여 이미 서울은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다.
북상하여 6월 14일에 대동강을 도하,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1592년 7월 18일 조승훈이 지휘하는 명군과 싸워 격퇴하였다.
겨울이 되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온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와, 서산대사가 지휘하는 승군을 포함한 조선 의병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고니시는 봉산에 있는 오오도모 요시노리, 백천에 있는 구로다 나가마사, 우봉에 있는 고바야가와 히데가네, 개성에 있는 고바야가와 다가가게, 한성에 있는 우기다 히데이에에게 구원을 청했다. 오오도모 부대가 평양에 척후병을 보냈다. 그러나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명군만 보이고 고니시 부대는 전멸한 것 같았다. 그래서 며칠 있으면 자기들도 위험하겠다고 생각하여 무조건 후퇴해 버렸다. 한성에 있는 우기다 부대는 평양까지 가려면 5일이 걸리고, 도중에 또 큰 강도 있고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며 시일만 보내고 있었다. 평양에 부상자, 병자를 놓아두고 고니시가 후퇴하여 황해도 봉산에 도착하자, 오오도모 요시노리의 부대는 한명도 없었다. 이 보고를 받은 풍신수길은 오오도모의 영지를 몰수하는 가혹한 벌을 내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토 기요마사는 평양의 고니시를 돕지 않은 것은 오오도모나 우기다나 마찬가지라고 말하였다 한다.
고니시 부대는 겨우 서울에 후퇴했으나 병력의 2/3가 희생되고 고니시의 건강도 아주 악화되어 있었다. 평양에서 패전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고니시는 마침 전라도에서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여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는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약 3천명의 조선군을 공격할 약 4만명의 일본군 선봉장이 되었는데. 조선군이 결사 항전을 하므로 2차에 걸친 공격도 실패하고 말았다. 각지에서 패전하고, 극도의 식량난으로 아사자가 속출하여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이 일본군의 이때의 패전의 주원인이었다.
조선이 제외된 채 진행된 명, 일간의 강화회담의 일본측 대표를 고니시가 맡았는데 풍신수길은 전투의 패배를 외교로써 만회하려고 승전국 같이 행세하여 명나라가 들어줄리 없는 7개조의 국서를 명나라 사신에게 들려보냈다.
고니시는 명나라 사신과 밀약하여 오만불손한 일본의 국서를 명나라 황제에게 아부하는 내용으로 변조하여 강화 성립에 노력하였으나, 강화는 결렬되고 오히려 국서 변조 사건만 탄로나 풍신수길이 노발대발하여 고니시의 목을 치겠다고 하였다.
고니시가 "나혼자서 한 것이 아니오" 하며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보이니, 풍신수길의 측근 중신들도 국서 변조에 찬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그들까지 처벌할 수도 없어 풍신수길은 화를 삭이며 자리를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니시는 1600년 일본이 양분되어 패권을 다툰 세기가하라노 다다가이에서 패하여 참수당하고 멸문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당시 탄압 받는 천주교의 보호에 힘썼으므로 사후 천주교에서는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1562~1611)는 풍신수길과 같은 아이지겐 나가무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풍신수길의 어머니의 4촌 여동생의 아들인데, 3살 때 아버지가 죽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풍신수길의 부하가 되어 전공을 많이 세워 구마모도의 구마모도죠오 성주가 되었다.
인접해있는 우도성의 성주 고니시 유기나가와는 이해관계가 얽혀 사이기 나빴다. 풍신수길이 죽고서 세기가하라의 싸움에서 도구가와측에 가담하여 승리하였고, 고니시의 영토인 우도를 빼앗아 구마모도의 영주가 되어 지금의 구마모도죠오를 축성하였다.
현재 일본에서는 신격화되어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는데, 도구도미 소호오는 "가토 기요마사는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정도의 신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임란 당시 2군
구로다 나가마사 [黑田長政(흑전장정), 1568~1623]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의 무장(武將).
국적 일본
활동분야 군사
임진왜란 때 제3군을 이끌고 황해도 방면으로 침공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을 재공략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충성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