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무책임한 키드 주지사의 속임수에 넘어가다
주지사는 나와 어울리는 것이 좋았는지 나를 자주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그럴 때마다 네게 인쇄소를 차려주는 걸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영국에 갈 때 주지사의 친구들에게 보여줄 추천장과 함께 인쇄기, 활자, 종이 등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한 신용장을 가져가기로 했다. 그래서 주지사가 서류를 완성하는 대로 그때마다 가서 받기로 했지만, 주지사는 매번 미루기만 했다. 배 역시 몇 차례 연기되다가 겨우 출항하게 되었는데 주지사는 그때까지도 필요한 서류를 주지 않았다. 출발을 앞두고 작별 인사도 하고 서류도 받을 겸 해서 들렸더니 지사의 비서인 바드 박사가 나와서 지사는 지금 글을 쓰느라 몹시 바브며 배보다 뉴캐슬에 먼저 도착할 테니 거기에서 서류를 받으라고 했다.
랠프는 그때 결혼해서 아이도 하나 있었지만 나와 함께 가기로 했다. 나는 랠프가 그쪽 사람들과 거래를 터서 위탁판매할 물건을 받으려고 가는 것인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와 사이가 나빠져서 그녀 곁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리드양과 몇가지 약속을 주고받은 뒤에 배를 타고 필라델피아를 떠났다. 뉴캐슬에 도착해보니 약속대로 지사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숙소를 찾아갔을 때 이번에도 나를 맞은 사람은 그의 비서였다. 비서는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지사의 말을 전해주었다. 주지사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만날 수 없으며 대신 배로 서류를 보내주겠으니 편안하게 여행하고 속히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해서 배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우리 배에는 필라델피아의 유명한 변호사 앤드류 해밀턴 씨가 아들과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 부자와 함께 퀘이커 교도 상인 데넘, 메릴랜드에서 철강업을 같이 하는 어니언 씨와 러셀 씨가 넓은 일등선실에 있었다. 나와 랠프는 삼등선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 배에서 우리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고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해밀턴 변호사가 압류당한 선박을 찾아달라는 거액의 사례금이 걸린 의뢰를 받아 아들(그의 아들의 이름은 제임스였고 나중에 주지사가 되었다)과 함께 뉴캐슬에서 필라델피아로 돌아갔다. 그리고 배가 출항하기 직전에 프렌치 대령이 배에 탔는데 나를 굉장히 정중하게 대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새삼 눈여겨보았다. 일등선실에 머물던 신사들이 자리가 있다며 나와 랠프를 일등선실로 불러주어서 우리는 그쪽으로 옮겼다.
프렌치 대령이 주지사의 편지를 갖고 배에 탔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선장에게 내 앞으로 되어 있는 편지들을 찾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선장은 편지들이 모두 화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당장은 찾을 수가 없고 영국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기 직전에 꺼내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아무 걱정 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했다. 선실에서는 모두들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게가다 해밀턴 씨가 음식을 모두 두고 간 덕에 아주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특히 데넘 씨와 각별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때 맺은 우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배를 타고 가는 내내 날씨가 굉장히 험악해서 항해가 그리 편안치는 않았다.
드디어 영국 해협에 도착했을 때 선장이 내게 약속했던 대로 짐을 뒤져 주지사의 편지를 찾아보게 해주었다. 그런데 내 이름이 적힌 편지는 한 통도 없었다. 나는 필체로 봐서 내가 찾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편지 예닐곱 통을 골랐다. 특히 그중 하나는 왕실의 인쇄업자인 배스킷 앞으로 되어있었고, 또 한통은 어떤 서적상 앞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1724년 12월 24일 런던에 도착했다. 나는 우선 서적상을 찾아가 키드 주지사가 보낸 것이라며 편지를 전달했다. 서적상은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편지를 뜯어보고는 말했다.
“아, 리들스덴이 보낸 편지로군요. 나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이자는 아주 못된 인간이라고 하더군요. 이자하고 엮일 일이 없으니 편지도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더니 편지를 내 손에 쥐여주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다른 손님들을 상대했다. 나는 그 편지가 주지사의 편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여러 정황들을 되짚어 생각해보니 그제야 주지사의 진실성이 의심스러워졌다. 나는 친구 데넘 씨를 찾아가 모든 사정을 털어놓았다. 데넘 씨는 키드 주지사가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주면서 그가 나를 위해 편지를 써주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신용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사람이 무슨 신용장을 주느냐며 헛웃음을 웃었다. 내가 앞으로 어떡 해야 할지 걱정하자 데넘 씨는 인쇄소에서 일자리를 구해보라고 조언했다. 그가 말했다.
“이곳 인쇄업자들과 일하다 보면 실력이 늘 걸세. 그러면 나중에 아메리카에 가서 개업할 때 훨씬 수월할 거야.”
내가 잘못 알고 가져온 편지 때문에 아까 그 서적상 말대로 리들스덴이라는 변호사가 아주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리드 양의 아버지에게 동업을 하자고 꼬드겨서 파산 지경에 이르게 한 자였다. 편지 내용으로 보건대 해밀턴 변호사(그때 우리와 함께 오기로 했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음모에는 리들스텐뿐만 아니라 키드 주지사도 관련되어 있었다. 해밀턴 변호사의 친구인 대넘 씨는 그에게 이 일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 뒤에 해밀턴 변호사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편으로 키드 주지사와 리들스덴에 대한 분노와 적의 때문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해밀턴에 대한 호의 때문에 그를 만나 편지를 보여주었다. 해밀턴 변호사는 중요한 정보를 주었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대부터 그는 내 친구가 되었고 훗날 내게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주지사라는 사람은 어떻게 그처럼 치졸한 장난을 치고 불쌍한 어린아이를 그렇게 비열하게 속일 수 있었을까! 그게 그 사람의 버릇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는 싶은데 정작 줄 것은 없고 하니까 기대감만 주는 거였다. 그런 점만 아니면 똑똑하고 이해가 빠르고 글도 굉징히 잘 쓰는 사람이었다. 영주들의 훈령을 가끔 무시하기는 했어도 시민들에게는 훌륭한 지사였다. 그는 우리 주의 훌륭한 법안 몇 개를 임기 중에 입안해서 통과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