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보물을 발견하자
보물의 사전적 의미는 ‘썩 드물고 귀 한 가치(價値) 있는 물건, 예로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가치 있고 예술, 문화를 대표할만한 보배로운 물건’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보물은 가치의 재발견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 있는 그대로의 모습, 또는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사는 심원지역은 천혜의 갯벌을 보물로 알고 세계적인 체험 명소가 되도록 깨끗하게 가꾸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미 자연적으로 형성된 갯벌을 그저 생업의 터전으로 살아왔던 새로울 것이 없는 평범한 자연이, 가치(價値)의 의미를 부여하자 고창의 보물이요 세계가 인정하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 지역으로 선정된 것이다.
가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개인의 기호(嗜好)에 의해 가질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
필자에게 보물은 어린 시절 뛰어 놀며 자라왔던 대산의 고향마을이다. 사방으로 숲이 있어 고함을 치면 가장 아름다운 울림으로 메아리쳐 오는 산촌이었다. 윗방죽, 아랫방죽이 있어 무서워하면서도 멱을 감고 숲에서 놀며 자연의 풍요로움을 마음껏 만끽했던 장소였다. 온갖 곤충들이 조금도 심심할 틈이 없었던 노리감이요 호기심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숲과 들판이 놀이터였다.
그 중에서 가장 신나던 것은 쇠말똥구리를 잡아서 노는 재미이다. 동산에 메어놓은 소가 싼 쇠똥이 그들의 먹이였고 뒷발로 공처럼 굴리며 자기 집으로 가는 모습도 흥미로 왔으며, 지면에 무덤처럼 수북이 올라온 흙무더기의 쇠똥구리 집을 발견하며 마치 보물을 발견하듯 환호성을 지르곤 했었다. 숲과 들에서 놀다 우연히 벌집을 발견하면 악동들 몇 몇이 벌에 쏘이면서라도 기어이 초전박살(?) 내고야 마는 눈물 나도록 재밌고 흥미진진한 추억들이 있었다.
사계절 언제 어디서나 거저 주는 자연의 혜택을 마음껏 누렸던 그 어린 시절이 보물이었음을 고향을 떠나고 난 후 몇 십 년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야산개발로 인해 그 울창한 숲은 사라지고 멀리서 지나가는 버스만 보여도 나무에 올라가 구경했던 그곳에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삼복더위에 시원함을 맘껏 누리며 어른들 호통소리를 들으며 재잘거리던 시정(市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목마르면 금세 달려가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했던 마을 우물도 메꾸어졌다.
지나는 길에 고향이라고 잠시 들렸다가 너무 실망만 안고 돌아서야 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너무도 변해버린 마을 모습에 행복한 추억까지 잊을까 두려웠다. 이후로 마음속에만 담았고 지금 사는 곳에 정을 주고 산다. 원 고향과 비교되는 이곳 심원 궁산(弓山) 마을은 뒤에 산이 있고 앞에는 넓은 호수가 펼쳐진 보기 드문 자연지형을 갖추고 있다. 더구나 야산 개발을 할 수 없는 경사진 숲에는 이곳에 고향을 둔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추억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진정 이곳이 보물임을 깨닫고 좀 더 좋은 가치를 공유하고자 정부 보조금을 받아 마을 뒤로 호수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을 냈고 수풀로 우거진 마을 뒷산에 꽃동산을 조성했다. 이러한 기초가 근거가 되어 올해는 마을 품격을 높이는 획기적인 사업을 유치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의 보물은 자연경관뿐만이 아닌 농민운동의 전무후무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이곳에 살면서 사실을 알게 되었다.
80년대 삼양 영업사 소작농 양도 투쟁 사건이었다.
왜정(倭政)때 이미 간척한 해리, 심원 일대 농지를 50년대 토지개혁에서 분양받아야 할 토지를 권력의 힘으로 미 간척 용지로 위조하고 30년 동안 부당하게 소작료를 받아온 거대 기업과 싸워서 승리한 사건이었다. 비록 무상양도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3할을 소작료로 주었던 농민들이 그 당시 공시지가로 유상 양도를 받아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17개 마을 600농가의 농민들이 서울에 가서 투쟁하며 여러 사회, 종교 단체들을 비롯하여 대학생들이 같이 협력한 값진 결과를 이룬 것이다.
과거 일제 식민지 때 신안군 암태도에서는 소작농 투쟁이 일어나서 소작료를 대폭 인하하는 성공을 거두고 근래에 기념탑을 세워 교육의 장으로, 관광 상품으로 그 저항정신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동학 농민혁명의 기포지인 이곳 고창에서의 자발적인 농민운동의 가치는 동학정신을 이어받아 부당한 처사에 생존권을 주장하며 개인토지로 양도받은 이 사건은 고창의 자랑이요 세계사적 농민운동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같은 마을에서 생존해계시는 김재만 당시 소작 투쟁 위원장의 증언을 들으며 이 사건을 공론화하기를 위해 그동안 노력해 왔었다.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이 가치를 아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그 정신을 기리며 조촐하지만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듯이 정작 투쟁을 하여 현재 혜택을 누리는 지역 농민들은 이 가치를 잘 모르고 무관심하고 있는 현실이다.
필자가 자라온 고향 숲이 그러했고 서해안 갯벌이 생업을 하는 현지인들보다 외부에 의해 보물로 인정되고, 풍치 좋은 마을의 자원의 가치를 발견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안에만 있으면 객관적인 안목(眼目)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의 단점이다.
이러한 객관적 안목은 원주민들보다는 이주민들이 더 잘 발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점차 귀농, 귀촌인이 늘어나는 시대에 마을 정서를 이해하지 못해 불협화음을 내는 갈등도 있겠지만, 다양한 경험을 가진 그들과 잘 협력한다면 마을의 유, 무형 보물을 발견하는 보물 같은 주민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성공한 농민운동의 가치가 널리 전해지며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다.
점점 노령화로 빈집이 늘어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원주민들과 귀촌인 들이 하나 되어 새로운 희망을 창출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아름다운 마을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별거 아닌 것이 나중에 어떤 보물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분별한 자연환경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며 미래에 귀한 보물로 인정될 수 있도록 보다 멀리 보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생물권 보존지역인 우리의 고창을 더욱 가치 있게 관리 개발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느낀다.
활뫼지기 박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