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엘레지의 여왕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트로트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평가된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노래로 대변해온 보컬리스트다. 현재까지도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뛰어난 객석 파워를 자랑하며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주 장르가 전통가요이지만 음색이 상당히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젊은 시절부터 재즈, 팝, 블루스 곡들도 음반에 많이 남겨 있다.
대표곡으로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여자의 일생』, 『내 삶의 이유 있음을』, 『열아홉 순정』 등이 있다. 70~80년대 데뷔한 많은 여가수들이 지금은 은퇴 혹은 활동을 안 하고 있으나, 65년째 한국 트로트 가수 사상 최장기간 활동 중이다.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유명하다.
2. 가수 활동
어릴적 부터 노래에 소질이 있어서 각종 대회에 나가서 입상하였으며, 학창시절이 되면서 노래에 더욱 관심이 많아졌고, 16살이던 1957년 KBS 프로그램 <노래의 꽃다발>에 출연하여 1등으로 입상하였다. 이후 HLKZ-TV에서 개최한 아마추어 노래 콩쿠르인 <예능 로타리>에서 1등에 입상한 후, 작곡가 나화랑에 스카웃되어 데뷔하였다.출처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 했지만, 사실 데뷔 자체는 '열아홉 순정'이라는 제목의, 스윙 재즈 빅밴드 편성의 미국식 스탠다드 팝 스타일이 농후한 곡이었다. 50년대 당시는 주한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미국의 대중음악 문화가 직도입 되던 시기였고 대중 가수들 또한 미군 클럽을 중심으로 공연 활동을 해야했는데, 이미자도 당연히 이런 영향을 받았던 것. 그러나 이미자는 60년대의 동백아가씨의 엄청난 히트 이후에는 트로트 가수로 완전히 정착한다. 반면 동시대에 데뷔했던 라이벌 패티김은 아예 그 후에도 꾸준히 스탠더드 팝 성향의 곡으로 활동했다.
이미자 이미지의 원천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이다. 전쟁의 상처를 서서히 회복해가던 전후,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화려하고 도회적이고 서구적인 이미지의 가수들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패티김으로 대표되는 그 여가수들 가운데서 이미자는 고향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연상시켰다. 그녀와 대비되는 패티김은 서구풍의 가곡이나 스탠더드 팝 같은 우아한 곡들을 불렀고, 이와 대비되게 서구적으로 편곡한 민요조의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신민요 가수들도 있었지만 이미자는 사실 대중들에게 훨씬 친숙한 일본풍 엘레지로 대중들의 마음을 달래왔다.
총 2000곡이 넘는 노래들을 불렀다. 그 당시 '이미자가 싫어하는 여가수는 왕따를 당했다'는 얘기도 있었을 정도로 60년대 그녀는 대중음악의 아이콘이었고 그 당시 한국전쟁 이후 민족의 한을 달래주던 여가수였다.
2002년에는 북한 평양에서 단독 콘서트를 했다. MBC가 주최했으며, 콘서트 제목은 <이미자의 평양동백아가씨>. 힐링캠프에 나와서 당시 분위기를 말하길 공연 초반에는 북한 관객들 모두 어리둥절하게 바라봤으나 마지막 곡을 부를 때쯤에는 전부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가장 의미 깊은 무대로 꼽기도 했다.
2011년 12월 25일 MBC 창사 50주년 콘서트 <이미자와 친구들>에도 헤드라이너로 참석했는데, 이 콘서트는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단원을 격려하기 위한 자선콘서트이다. 특히 그녀는 출연료를 세네갈에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기부해 수술에 보탰다고. 이 콘서트에서 그녀는 직접 아이유에게 마이크를 건넸고, 아이유는 이미자의 데뷔곡 '열아홉 순정'을 불렀다.
2020년 10월 추석을 맞아 TV조선이 실시한 2020 트롯 어워즈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2022년 11월 TV조선과의 협력으로 이미자 특별감사콘서트를 진행하였다. 메인 가수로 참여하였으며, 임성훈 MC, 조항조, 김용임, 영탁이 서브 가수로 참여, 나레이션으로 성우 이광자가 참여하였다. 이 콘서트에 대한 기념품으로 기부자에게 이미자가 직접 만든 수세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3. 대표곡
1959년 열아홉 순정
1963년 님이라 부르리까
1964년 동백아가씨
1964년 여자의 일생
1964년 황포돛대
1965년 살아있는 가로수
1965년 울어라 열풍아
1965년 저 강은 알고 있다
1965년 홍콩의 왼손잡이
1966년 지평선은 말이 없다
1966년 흑산도 아가씨
1967년 그리움은 가슴마다
1967년 빙점
1967년 섬마을 선생님
1967년 유달산아 말해다오
1967년 첫눈 내린 거리
1969년 기러기 아빠
1969년 한 번 준 마음인데
1969년 황혼의 블루스
1970년 아씨
1972년 낭주골 처녀
1972년 삼백 리 한려수도
1972년 여로
1973년 서울이여 안녕
1977년 모정
1978년 눈물이 진주라면
1994년 타인
2009년 내 삶의 이유 있음은
2019년 내 노래 내 사랑 그대에게
4. 논란 및 사건 사고
가수로서의 명성과 영향력과는 별개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사인을 요청하는 팬을 무시하고 차에 타버린 일화가 유명할 정도. 다만 한때 나돌았던 성대 기증설이 그렇듯, 루머도 감안해야 한다.
워낙 유명하고 위상 높은 원로 가수이지만, 고령층 한정으로는 안티팬이 상당한 편이다. 사유는 아래 후술되겠지만, 첫남편과 이혼한 뒤 친딸을 외면하고 산 이야기나 후배 여가수 죽이기 등 나쁜 일화가 많아서이다. 동시에 이미자 관련 뉴스나 유튜브 댓글을 보면 나이 지긋한 분들의 악플이 꽤 많다.
4.1. 왜색 논란
이미자의 노래는 일본 엔카 스타일의 곡 분위기와 창법으로 인해 왜색 논란이 있었다. 그 때문에 『동백아가씨』는 한때 금지곡으로 지정 당하기도 했다. 당시 이미자의 히트곡들이 5음 음계 중심, 7·5조 가사의 폭스트롯이라 엔카와 음악적 문법이 똑같다. 왜색이기는 하나, 사실 60년대 당시 장년층 이상에게는 젊은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향수로 어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4.2. 금지곡 지정
1964년에 발표되어 한창 인기를 끌던 <동백아가씨>를, 박정희 정권이 돌연 금지곡으로 지정해 버렸다.
이후로 《섬마을 선생님》은 일본 곡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는데, 정작 표절시비에 얽힌 일본 곡이 《섬마을 선생님》 보다 나중에 발표된 곡이었다.기사 참조 또, 《기러기 아빠》는 노랫말이 비관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유달산아 말해다오(1967)》는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는데, 2년 후에 전반부를 고쳐서 발표하게 된다. 이처럼 새로 발표하는 곡들이 왜색 등의 이유로 금지곡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미자 본인은 노래를 그만 둘까 생각도 했다고 한다.
4.3. 친딸에 대한 냉대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정재은을 친딸로 대우하지 않고 냉대했다. 정재은은 2살 때 부모가 이혼한 이후 친어머니 이미자를 단 3번 만났다고 했는데, 가정사가 복잡하다고만 할 뿐 정확한 단절의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펴낸 자서전에서 이미자는 딸아이를 지금껏 보지 않는 것에 대해 정확한 언급을 피했으며, 이혼 후 아이를 보지 않았던 것은 전남편과 계속 얽히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일화는 일견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에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합치되는 듯한 면도 있다.관련 기사. 아이러니하게 이미자 자신도 어린 시절 생모와 헤어진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한다.
친딸 정재은은 두 살 이후 평생 만난 것이 세 번이었는데, 우연이 아닌 만남은 일곱살 때 외할아버지가 몰래 사흘간 데려가 함께 생활 한 것이 전부였다. 물론 딸의 결혼식에도 이미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일설에는 딸 정재은이 결혼 6개월 만에 이혼을 겪은 직후 공항에서 이미자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이미자는 "잘 살지 그랬니..."는 말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이때가 1987년으로 두번째 만남이었는데, 당시 인사 드리라고 권한 이는 전영록이었다고 한다. 세번째에도 딸은 반갑게 인사하였지만 이미자는 사람들 눈치에 못 본 체 했다고.
한편 정재은은 가수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1978년 KBS 국악가요제에서 '무지개 피는 곳에'로 최연소 특별상을 수상하며 데뷔, 1999년 일본 진출 후 2001년 오리콘 차트 엔카 부문 정상을 차지했다.
4.4. 40억 탈세 논란
이미자는 2016년 탈세 의혹이 있었다. 세무조사 결과 10년간 44억 원이 넘는 소득 신고를 누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이미자는 “탈세를 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다가, 당당히 세무조사를 받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부장 이성용)는 이미자가 반포세무서를 상대로 낸 19억 원대 종합소득세 중 일부를 취소해 달라는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이미자는 세무 조사 결과 각종 공연을 통해 얻은 이익 중 상당한 부분을 매니저 권모 씨(사망)를 통해 현금으로 받은 뒤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매니저로부터 받은 돈을 자신의 계좌가 아닌 남편의 계좌에 입금하거나, 아들에게 약 20억 원을 현금으로 증여하는 등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동안 총 44억 5,000여만 원의 금액을 탈루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결과에 따라 반포세무서는 이미자에게 19억 9,000여만 원의 종합소득세를 경정‧고지했다. 이후 세금을 추징 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5. 여담
2017년 10월 1일 KBS 전국노래자랑 서울특별시 서초구 편에 본선 심사위원 겸 피날레 초대가수로 등장했다. 평소 전국노래자랑은 물론이고 가요무대에도 자주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미자 본인이 30년 가까이 서초구 반포동에 거주한 서초구민이었기에 출연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재능기부 차원에서 출연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날은 특별히 10분 더 방송을 했었다. 마침 촬영 당시 서초구에서 서리풀 페스티벌이라는 지역 축제가 열렸는데 그것의 일환으로 전국노래자랑의 촬영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초 2016년에도 행사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스케쥴 때문에 불발돼서 아쉬웠다고 한다.
1960년 당시 스무살 나이로 결혼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출신 전 남편 정진흡 씨와 1964년, 4년 만에 이혼했는데, 원인은 남편의 가정 폭력이었다. 1970년 KBS 방송위원이자 PD였던 김창수와 재혼했다. 재혼 후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지만, 종갓집 큰며느리, 이른바 '종부'로서 때마다 제삿상 음식을 준비하는 등 가정주부의 삶이 만만치는 않았다고 한다.
트로트 이미지 때문에 무수히 많은 히트곡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를 상당히 많이 당했다. 일례로 1989년 가수 생활 30년 기념을 위해 세종문화회관에 대관신청을 했으나, "이미자의 노래는 '고무신짝' 들이 많이 들어와 질서가 없어지고 문화를 해친다" 며 대관 자체를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을 '고무신짝' 이라고 비하하는 소리를 직접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이후 당시 고건 서울시장의 도움으로 대관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득실 댈 것이라던 세종문화회관 측의 예상과 달리 당시 정재계를 비롯한 고위층 인물들이 관람하러 왔고, 특히 4개 야당 총재들이 부부동반으로 직접 공연을 관람하러 오는 등 공연은 성황리를 이뤘다고 한다. 이후 이미자가 트로트 가수로서 처음 세종문화회관의 문턱을 넘으면서 남진이나 심수봉 같은 후배 가수들 역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99년 <인생 나의 40년(황금가지)>, 2009년 <동백아가씨(나무와숲)> 등의 자서전 2종을 출판하였다.
로미나의 커버 영상을 접한 이미자가 그녀를 직접 수제자로 받아들였고, 콘서트 때마다 초청하여 함께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2023년 10월 21일 대중음악인으로서는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 가수이다.
신성일이 이미자의 팬이었다고 한다.
2019년 5월 2일,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28일 MBN과의 인터뷰에서는 은퇴는 아니라고 한다. 관련영상 실제로 2020년 2월에도 스케줄이 잡혔고 2022년에도 이미자 특별감사콘서트가 있었던 것을 보면 정말 은퇴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