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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는 스스로 상유에서 말하길, 자신은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기린과 봉황 등이 나다니며 황제의 위엄을 찬양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단 한번도 믿은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옹정은 강희와 달랐습니다. 그는 이런 징조들을 꺼리지 않았고, 신하들이 예사로운 말을 하여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역정을 내지도 않았습니다. 옹정이 도사들의 말에 조금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를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옹정 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유례가 없을 정도로 온갖 종류의 길조가 출현했습니다. 옹정 원년에는 순치 황제의 묘에서 상서로운 풀이 발견되었고, 그 해 8월에는 강남, 산동 등에서 이상야릇한 보리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옹정 7년에 이르면 무료 7백알까지 열리는 보리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절강성 총독은 호주의 왕문륭이라는 농부가, 1만개의 누에고치로 길이 5자 5치, 너비 2자 3치의 비단을 짜는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강희제의 공덕을 기린 비석의 기단에서 예사롭지 않은 버섯이 발견되었고, 옹정 11년에는 급기야 기린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옹정 8년에는 봉황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황화의 물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맑아지는 사태도 일어났습니다.
이런 보고들은 물론 신하들이 황제에게 아첨을 하려는 수작이었지만, 중국 땅이 워낙 넒고 기이한 사람과 사건도 많으니 이상야릇한 일이 확실히 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희가 이런 부분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옹정은 적극적으로 이런 일을 높이고 보고를 한 지현등에게 상을 내리면서, 이것이 하늘이 자신의 성세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선전해 나갔습니다. 하늘이 지지하는 황제만큼 정통성 있는 군주도 또 없을 것입니다. 옹정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옹정은 탐관오리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부패한 관료는 결국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제국의 주인이 되는 옹정은 '자신의 것' 이 무너지는, 이런것을 가만히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옹정은 통치기반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이익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짐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조금이라도 백성을 불편하게 하는 점이 있으면 즉시 시정하여 빈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라. 지방에 불법적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가 있으면 그 죄를 엄하게 다스려 그들의 폭거는 반드시 응징 당한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게 하라."
지방에서 토호들과 백성들 간의 충돌이 생길 시, 옹정은 백성들의 편을 들어주는 군주였는데, 물론 어느 군주나 그런 마음이 있지만 특히 옹정의 병적일 정도의 권력에 대한 염원과 집착, 철두철미함은 그 효과를 크게 늘렸습니다. 대다수 군주가 백성에 대해 구휼과 보장 제도를 마련할때 가장 군주를 곤란하게 하는 요소 중에 하나가 기존 기득권의 반발입니다. 하지만, 옹정에게는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는 강희 시대와 상반되는 일입니다. 물론 강희 역시 강력한 전제군주고 파당을 이루는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지만, 정책의 큰 틀은 조화로움에 있었고, 이에 따라 여러 문제에서 관대함을 기조로 정책을 펼쳤습니다. 중국의 고위급 인사들인 장쩌민, 주룽지, 후진타오와 같은 인물들은 강희제를 높이 평가하고 공개적으로 그를 칭찬하는 발언들을 했는데, 그 이유가 강희제 시대가 ‘조화사회(和諧社會)의 큰 모델이 되고, 여러 민족과 수많은 분쟁 문제를 안으로 가지고 있는 현 중국 체제에서, 강희제의 조화로움을 높이 여기는것은 어느정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조화로움은 분명 듣기에는 좋은 말입니다. 그리고 강희제 시대가 커다란 성과를 내었던 사실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61년의 기나긴 치세동안, 조화로움은 약간 이상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전현직 관리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부정부패의 사회기조에 일조를 하고 있었고, '도의적인 치세' 를 위한 느슨한 체계 속에서 재정은 묘한 곳으로 분산되었습니다. 외적을 섬멸하는것은 눈 앞의 적을 무찌르면 그만이지만, 부정부패, 그리고 구체제의 악습과 싸우는것은 국가의 모든것들에 대해 싸움을 걸 준비를 해야합니다. 늙고 지친 강희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엄격한 제도를 만들어도 아래에선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각급 관리들은 서로 결탁하여 무리 짓고, 뇌물을 받는 폐단이 늘어났습니다. 문관은 '화모' 방식으로 세금을 추가로 거두어들이고, 무관이 군량미를 착복하는 일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강희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통치 계급 내부의 갈등을 완화하고 통치 기반을 확고히 한다는 차원에서 '비교적' 관대하게 처벌했습니다.
또 재위 중기이후에는 주현 관리들이 전량을 조금씩 더 거두어들이는 것에 대해서 묵인해 주었고, 고급 관리의 경우는 자세하게 조사해보기는 했지만 심하게 처벌하지는 않았습니다. 강희 49년 7월, 무려 호부관리 176명이 총 64만냥이 넘는 뇌물을 받은 정황이 들어난 적이 있었는데, 강희는 크게 놀라 즉시 전원을 삭탈관직했습니다. 하지만 하루동안 고민하다, 다음날 명령을 취소했습니다.
또 늙은 총독들에 대해 고발이 오면 연로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해 주고, 떄로는 냉정하고 가혹하다면서, 탐관오리를 탄핵한 청렴한 관리를 오히려 질책하는 경우조차 있었습니다. 강소 순무 장백행이 평소에 성리학을 공부하고 청렴한 관리로 그 칭송이 전국에 자자했는데, 강희는 작뱅행이 다른 관리의 탄핵 상소를 너무 많이 올린다고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무인들에게는 더욱 관대하여, 강희의 말년인 제위 60년경, 신임 강남 제독이 군대의 전량 착복을 철저히 조사하여 분위기를 일신한 후 보고하자 오히려 너무한것 아니냐는 식으로 질책하는 뜻밖의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준가르와의 전쟁이 이어지며 재정 상황도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옹정은 즉위하여,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짐이야말로, 45년간의 더부살이 생활에서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본 후에야 비로소 천자가 된 사황자이다. 응석받이로 자란 여느 천자들과는 사정이 다르다. 만만히 보고 덤비다간 호되게 당할 줄 알아라. 관리의 기강이나 기풍의 문란 문제는 송, 원대 이래 점점 폐혜가 심해져서 이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좋다. 짐은 있는 힘을 다해 천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이런 부패 풍조를 일신해 보이겠다."
천여년을 내려오는 사회의 부패와 일신으로 맞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관료 조직을 개혁하여 새로운 관료체계를 수립하겠다는 의미인데, 문제는 이것이 '집을 아예 허물고' 새로운 짓을 짓자는 식이 아니라, 낡은 집의 벌레 먹은 기둥을 하나씩 교체해서 새롭게 만들자는 의미인 만큼, '혁명은 용이하지만 개혁은 어렵다' 는 식으로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옹정은 비관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만만했습니다.
옹정이 일을 해결해나가는데 있어 커다란 '적'들은 바로 지방의 향신들입니다. 청나라가 입관한 초기에, 정부는 반청 의식을 무마하기 위해 관원의 품계에 따라 일정액의 정역을 감면했고, 사인들의 부역과 잡역도 면제해주었습니다. 향신들은 관과의 특수한 관계를 이용하여 백성을 마구 착취했습니다. 그들의 악행을 열거해보자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지방관리와 유착하여, 소송을 전담함으로서 사법권을 사실상 사유화 함.
2. 지방을 돌아다니며 횡포를 부리고 백성을 억압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떄로는 관리들보다도 향신을 두려워함
3. 문중과 평민들에게 정부 대신 지세를 징수하고, 이를 하급 관리들과 결탁하여 착복.
4. 지신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납주하지 않음.
5. 문중이나 친인척의 토지를 자신의 명의로 바꾸어 잡역을 면제받게 한 뒤, 대가를 챙김.
이는 향신들이 저지른 많은 폐단 중, 바다 속의 작은 돌맹이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행정 권력의 일부를 점유하고, 관료 사회에 개입하여 관료들을 더욱 부패하게 했습니다. 부유한 향신들은마땅히 부담해야 할 자신들의 요역을 가난한 평민들에게 전가하여 부역 제도에 크나큰 곤란을 주고, 자신들은 대대로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 문제에 근본적으로 다가가는 일은 사회 기초 전체에 대해 달려드는 일과 같았고, 강희는 이를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둥글게 돌아가는 형태로 일단 덮어두었습니다. 하지만 야심만만 옹정은 칼날을 바로 향신들에게 들이밀었습니다.
옹정의 복안은 그들의 불법적 특권을 박탈하거나, 제한함으로서 평민들과 똑같이 부역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옹정 2년 2월, 옹정읜 과거에 합격한 수재와 감생들의 특권을 폐지했고, 향신 본인에게만 정역을 면제한다는 원칙을 강조했습니다.
옹정과 향신의 대립, 이것이 그야말로 절정에 달한 것이 바로 세금 제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대립입니다. 이 문제는 중국 세금 제도 역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대립이었습니다.
중국 역사 속에서 호구 조사로 인한 인구의 수치는 마치 엿가락과도 같이 늘어났다, 줄어났다를 반복합니다. 물론 전란의 시기가 길어지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살육이 벌어지는것은 분명하나, 4천만이 넘던 인구가 단순히 8백만 가량으로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단순히 대살육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첫번째는 물론 국가의 행정력이 마비가 되어, 실제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인구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전란이 없던 시기에도 인구는 늘어났다 줄어났다를 반복할수 있습니다.
고대 한나라의 조세 제도에서는 인두세(人頭稅)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두세. 사람 인, 머리 두, 세금 세. 즉 사람 머리 숫자대로 돈을 거두어 들였다는 것입니다. 3∼14세의 남녀에게 23전을(구부라고 한다.), 15∼56세의 남녀는 120전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는 가혹한 일이었는데, 백성들의 부담은 인두세에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전조(田租)라는것이 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작하는 땅에 부과하는 세금이었는데, 수확량의 일정량을 바치는게 목적입니다. 일종의 지세입니다.
자신의 몸에 해당하는 인두세, 그리고 땅에 해당하는 지세를 동시에 내야 하니 그 부담은 만만치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땅이 없는 사람, 즉 사실상 재산이 없는 사람도 인두세의 부담에 시달리니 방법이 없습니다. 소작농을 한다손 쳐도 지주에게 주고 인두세로 바치고 하면 그 부담은 절망적인 것입니다.
거기다 지방의 지주들이나 유지들은 관과 유착을 하게 됩니다. 그 비리로 인해 세액은 일반 농민들에게 전가되어, 조세의 불균형 현상은 더욱 심해집니다.
너무나 가난한 백성들은 살기 위해 도망을 칩니다. 절이나 사원으로 들어가거나, 유랑민이 되어 떠돌거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도적질을 하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이미 명나라 시대부터 실질적인 중국 내의 인구는 어마어마했는데, 호구조사를 하면 정작 인구는 증가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조사에 포함되지 않고 떠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문제 뿐만이 아닙니다. 집도 근거지도 잃고, 징세를 할수도 없는 유랑민들이 많아지는것은 국가에 있어서도 심대한 타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할 뾰족할 방법이 없어, 중국 내 인구는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지 않고 그렇게 수천년을 지나게 됩니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정세(인두세)와 지세를 통합하는것입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시키면, 인두세는 사라지게 되고, 땅을 가지지 않은 불행한 농민들은 부담에서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명나라 말 시기부터 이런 시도를 해보려는 모습은 있었는데, 섬서성 호현(戶縣)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시행해보았고, 청나라 순치제 시절에도 몇몇 현에서 시도가 되보았지만 어디까지나 한정적인 일이었을 뿐입니다. 비유하기 쉽게 조선의 대개혁인 대동법의 경우를 보자면, 경기선혜법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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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 시대에 이르면 백성들은 스스로 들고 일어나서 저항했습니다. 절강성 영파부(寧波府)의 농민들은 "토지에 따라 정역을 부담하라!" 라고 주장했고, 일부 의식 있는 관리들도 폐단을 지적하고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존 기득권층, 부호들의 반발이었습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면 땅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압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땅 많은 토지의 소유자는 역으로 세금이 늘어납니다. 이에 땅 가진 부자들은 이러한 개혁 조치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이 반대하는 이유들은 크게 두가지 였는데, 첫쨰, 정역과 지세를 통합하면 유동 인구를 통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가장 큰 문제입니다. 부호들을 비롯한 기득권의 생각이었습니다.
"세금은 모두가 똑같이 내야지, 가난하다고 세금을 안내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부자들에게 가는것이 아닌가? 부자들이 왜 그것을 책임져야 하는가?"
증왕손이라는 관리는 지세에 비례해서 정세를 부과하는 방법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정세를 부과하려면 우선 인구 조사가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가난한 농민들은 도망을 치고, 부자들은 관하고 연계하여 정세를 피합니다. 그 결과는 재정이 부실해지고, 조사하는 관리들도 문책을 당하니 문제가 많았던 것입니다.
1711년. 강희제 시대에 마침내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 시행되었습니다. 이 해의 인구를 철저하게 조사한다음, 그것을 기준으로 인두세를 정한다음, 그 기준에서 더 늘리지 않겠다고 선포한것입니다. 즉, 사람이 더 증가해도 지금 기준보다 더 걷지 않겠다는 것이니, 실질적인 인두세의 폐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정책은 중국 부역사에 있어서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으나 정세를 징수당하는 농민들이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지세 1냥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서 문제가 해결이 된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이 실행되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사천, 광동이나 하남성 등지에서 부분적으로 시행이 될 뿐이었고, 실행된 정책에 대해서도 이광파(李光坡) 등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것입니다.
강희제 시대가 끝을 고하는 상황에서도 개정파와 유지파의 대립은 팽팽하게 맞서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옹정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섣불리 선친, 그것도 대단한 평판을 얻은 아버지의 제도를 수정하고 나선다면, 불효자라는 오명을 받으며 자신의 권력이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권력에 대해 늑대와 같은 예리함이 있는 옹정은 가만히 때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당장 옹정제가 즉위한 바로 그해, 산동의 순무 황병(黃炳)이라는 인물이 산동에서 정세와 지세를 통일하여 징수하겠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황병은 지방관리로 오래 근무하면서 가난한 백성들이 도망치는 광경을 많이 보았고,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방법만이 빈부의 차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옹정제는 놀랍게도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개혁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쓸데없이 이런 상소를 올렸다고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의 내심은 전혀 달랐지만 말입니다.
한달이 지나 직예 순무 이유균(李維鈞)은 가난한 백성들을 이롭게 하자고 주장하며 황병과 동일한 논지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옹정제는 또다시 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개혁을 하려면 신중하게 논의해야 하며, 제도를 바꾸려면 풍년이 들어 사회가 안정될때 시행해야 한다는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옹정제는 일을 막무가내로 처리하지 않고 확실하게 의견을 모으기 위해 호부에서 논의하도록 하며 신중을 기했습니다. 호부에서는 이유균의 의견이 옳을듯 하다고 그들의 의견을 밝혔는데, 호부의 승낙이 나왔음에도 옹정제는 또다시 문제를 더 검토하도록 했습니다. 1무(畝 : 토지를 재는 단위)의 크기는 일정한가? 질이 떨어지는 토지에 대해 동일한 세금을 매기는것은 부담이 크지 않는가?토지를 파는 사람이 매입자를 대신하여 토지세를 납부하면서 정세를 내는 일도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신중을 기한 것입니다. 개혁은 물론 급진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급진적'이기만 해서는 그것은 절대로 성공을 거둘 수 없고, 현실과도 유리되어 있는 공상론자들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헛소리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세심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진정한 개혁이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유균은 논의에 논의를 걸쳐 토지를 상중하 3등급으로 매겨 차등적으로 징세하도록 해 불공평함을 없앴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서야 옹정은 이유균을 칭찬하고, 바로 다음 해부터 이 정책을 시행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만 이유균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부자들이 이 제도를 반대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방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옹정은 이유균의 우려를 씻어 주며 소신껏 시행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면 토지의 소유자는 세금이 늘어나고, 가난한 사람은 실질적으로 세금이 면제되니 국가는 조세를 본래대로 걷을 수 있으면서도, 빈민 구제의 일거양득을 득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정세를 지세에 포함시키면 빈민들은 편해지고, 부호들은 불편해진다."
이리하여 직예성에서 드디어 지정은제가 출발을 했고, 앞서 옹정에게 상소를 올린 황병도 이를 살펴보고 다음 해 산동에서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드디어 중국 전역의 모든 성에서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복건, 섬서, 감숙, 강서, 호북, 강소, 안휘성 등에서 제도가 시행되었고, 1731년에는 산서성에서도 부분적으로 지정은제가 시행되었으며, 건륭 연간에 접어들면 제도가 완전히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행동도 이제 수면위로 떠올랐습니다.
1724년, 절강성에서 지정은제가 시행되려 하자, 지주들은 무리를 이끌고 순무를 습격하고 거칠게 항의하여 반발했고, 순무 법해는 겁에 질려 실행을 미루었습니다. 백성들은 이에 반발하여 역으로 대규모 청원을 했지만, 1726년 7월, 전당현 아문에서 치뤄진 향시에서 합격한 천여명의 응시생들이 지정은제 실시를 반대하는 시위를 펼쳤고, 상인들에게는 파시를 하라고 위협했습니다. 파시는 시장을 닫아버리는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전통적으로 지방관의 폭거에 대해 항의하는 방법 중에 하나인 만큼, 이는 지방관들에게 위협이 되는 일이었씁니다.
향신들은 영향력이 막강했고, 관리들도 함부로 그들을 대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지방의 지배자들인 그들은 이런 점을 이용해 세금과 지세를 체납하거나 거부하여 지방관과 평민들을 괴롭혔습니다. 일례로 산둥의 향신들은 지세를 납부하지 않은 풍조가 매우 강해, 산동에서는 이런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
1727년 4월, 직예 동광현의 지현 정삼재는 그들의 반발에 혀를 내둘러 "이곳의 악랄한 향신들이 각종 구실로 관을 위협하여, 지세를 내지 않고 백성들에게 전가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고 보고했습니다. 향신들은 관리들의 개인적 문제를 끄집어내 공격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는데, 때마침 옹정이 이에 더해 "사민이 모두 부역을 담당한다." 는 정책까지 내걸자 반발이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하남 축현의 지현 장가표는 "생원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을 담당해야 한다." 는 명령을 내렸다가, 향신들에게 장가표가 평민에게 돈을 빌린적이 있다는 사실로 공격당했습니다. 1727년, 게주의 지주 서리 진순예는 지세 체납을 재촉하다 향신들에게 탄핵을 당했습니다. 1724년 2월, 하남성 봉구현 지현 당수조가 황화의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 공사를 하면서, 예외 없는 보역 정책에 따라 지방의 신사들도 부역에 참여하게 하자 감생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당소조가 고분고분한 맛이 없자 향신들은 단체로 향시의 시험을 거부하고, 심지어 소수의 응시자들이 답안지를 작성하자 이를 빼앗아 사람들 앞에서 찢어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습니다. 전국에서 반발과 야유가 끊이지 않았고, 끈기를 가지고 법을 시행하는 관원들은 악랄하다고 원성을 사며 탄핵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옹정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고, 심지어 흔들리거나 고민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자들에게 단호한 옹정은 향신들에게 그러했습니다.
진순예가 탄핵을 당할때, 옹정은 만약 그를 해직하면 앞으로 관리들이 원칙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그에 반대하여 지세를 거부하는 무리들의 기세가 매우 당당해질것이라 생각하고, 진순예를 처벌하기는 커녕 그에 반발하여 지세를 납부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했습니다. 그러자 원칙을 고수하는 지방 관리들은 자신들의 황제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생각에 크게 사기가 고취되었습니다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라는 산동성에 대해서는 옹정은 산동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명의 공명을 모두 박탈해버렸습니다. 또한 동시에 각지에서 수백만 냥의 지세 감면 정책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고, 향시 거부를 주동하는 무리들을 사형에 처하면서, 이를 비호하는 조정 관리들까지 처벌해버렸습니다. 옹정 5년, 하남의 향신 화경혜가 옹정의 명을 집행하는 전문경을 무고로 고발했는데, 옹정은 이에 대해 오히려 전문경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만 보내주었습니다.
이위
궁지에 몰린 향신들은 발작적으로 대응하여, 온갖 거짓죄를 꾸며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그게 사실이건 아니면 그 과정속에 관련된 사람들은 악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는 악명 따위에는 눈썹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게중에서도 이위는 향신 측의 대규모 시위집회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개를 패듯이 두들기며 쫒아버렸습니다.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지만, 이 경우는 시위를 하는 무리들이 오히려 기득권입니다. 당연히 이위는 온갖 중상모략에 향신들의 비난을 한번에 받았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할 일만 했습니다. 형부에서는 이러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지세를 착복하는 공생, 감생 등에 데해서는 그 정도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공명을 박탈, 평민으로 만든다. 횡령 금액이 80량이 넘을 경우에는 횡령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추징한다. 일반 평민이 지세를 횡령하면 대청률을 무시한 죄로 중벌을 받는다. 향신들의 전량 미납부나 횡령을 눈감아 주는 지방관에게는 1년간 봉록을 내리지 않는다.
일관적인 단호한 정책들로 향신들의 기세는 점점 수그러졌습니다. 결정적으로 향시를 거부한 사람들이 처형까지 당한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결국 드디어 지정은제가 전국에 확립되었습니다.
효과는 바로 드러났습니다.
땅이 없는 농민들은 더 이상 지세의 부담에 짓눌리며 도망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호구조사에 집계됨과 동시에, 고구마 등의 작물이 전해지고 평화가 유지됨에 따라 청나라의 인구는 경이적인 수준으로 증가 추세를 겪게 됩니다. 20년, 30년 사이에 천만, 이천만 씩 인구가 엄청난 수치로 증가하며, 그에 더불어 국가의 부도 급증했습니다. 50~60년 사이에 1억명의 인구가 증가하는등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수준의 인구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또한 옹정은 지주가 소작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선비가 사람을 죽이는것은 신분에 맞지 않은 행위라는 이유로 이에 대해 초강경하게 정책을 수립하여, 되려 백성이 향신을 괴롭히는 기현상까지 발생, 옹정이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지 못했다 라고 선언하며 법률을 다시 수정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굳이 살인이 아니더라도, 소작인에 대해 학대 행위가 발각된 수재나 감생들은 즉시 공명이 박탈되었고, 대청률의 최고 한도인 80대의 장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식자층에서, '소작농은 평민과는 다른데, 소작농을 폭행한다고 혹독한 장형을 내리는것은 너무 심하지 않나' 하는 반발도 있었지만 옹정은 언제나 그렇듯 무시해버렸습니다.
하남에서는 정씨라는 감생이, 자신의 집에 소작인이 방화를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나 공명이 취소되었습니다. 절강성에서 신사 양육선이라는 인물이 평민 부녀자를 겁탈하고 지현들에게 뇌물을 먹여서 이를 숨기는등 악행을 부렸으나, 결국 일이 발각나 체포 당했고, 그 재판하는 날에 양육선에게 원통한 일을 당했거나,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무려 만여명이 모였습니다.
한편, 옹정은 향신들이 지방관의 이임을 만류하는 관례도 금지시켰습니다. 백성들은 선정을 베푼 관리를 떠나보내기 안타까워 이임하지 못하게 만류하는데, 옹정이 살펴보니 실제로는 관리들이 백성들을 일부러 선동을 하거나, 아니면 향신들이 관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연기를 하는 실상이 포착되었던 것입니다. 옹정은 관리들과 신사층이 유착하는 사회적 악습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1724년, 절강성에서 산동 순무 진세관의 동생, 진세간의 의 가복이 주인의 권세를 믿고, 고기를 사고 돈도 내지 않아 푸줏간 주인과 몸싸움을 벌여 고발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세간은 되려 가복을 야단치기는 커녕 비호했고, 오히려 푸줏간 주인이 장형에 처해지는 억울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옹정은 이에 조사관을 파견했고, 진상을 숨긴다는 의심이 들자 재조사를 명했습니다. 놀란 진세관은 동생이 처벌 받지 않게 하려고 '노모가 노심초사하여 식읍을 전폐하고 목숨이 위태롭고' 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통사정을 했지만, 옹정은 벌컥 화를 낼 뿐이었습니다.
"어찌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인가? 어찌 도량이 작은가?"
첫댓글 지금의 중국이나 한국에 필요한 인물일지도.....;;
장을 80대나 쳤다는 거는, 그냥 죽여버리겠다는 말인데... 옹정은 대단히 카리스마있는 사람이네요. 이런일을 벌려놓고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네요.
자원이 한정됬는데 인구가 너무 늘면 곤란.현재 중국은 지금도 인구 많아서 고민중인데...근데 어쨌든 출생율이 바닥이라 고민중인 현대한국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듯
어차피 있는 인구입니다. 그걸 호적상에 올려놓은게 업적이지요.
신하(관료)가 괴로워야 백성이 편안해진다는건 만고의 진리인듯... 서로 다른 측면이기는 하지만, 강희제나 옹정제나 신하를 괴롭히는데는 일가견이 있는듯..
"어찌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인가? 어찌 도량이 작은가?"
박정희+스탈린+푸틴+리콴유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