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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 제16권 / 구묘문(丘墓文)
호조 판서 김공(金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공은 휘는 세렴(世濂), 자는 도원(道源), 성은 김씨(金氏)요, 선조는 본래 일선『一善: 선산(善山)의 옛 이름』 사람이다. 3세조(世祖)인 김홍우(金弘遇)는 영유 현령(永柔縣令)이었으며, 조부 김효원(金孝元)은 선조(宣祖)를 섬겨 당시에 중망이 있었으나, 요직에 있는 사람과 의견이 달라 영흥 도호부사로 척출(斥出)되어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부친 김극건(金克鍵)은 통천 군수(通川郡守)이고, 모친은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홍문관 전한 허봉(許篈)의 따님이다. 후에 공이 귀하게 되자 부사인 조부는 이조 참판으로, 군수인 부친은 이조 판서로, 모친 허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각각 추은(推恩)되었다.
공은 명 나라 만력(萬曆) 21년(1593, 선조 26) 12월 11일에 출생하였으니, 바로 우리 선조 26년이다.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재예(才藝)가 탁월하여 명성이 일찍부터 세상에 알려졌다. 20세(1612, 광해군4)에 모친 허 부인이 별세하고, 3년 뒤에 국자감(國子監) 양시(兩試)에 뽑혔다.
다음해(1616, 광해군 8) 증광 문과(增廣文科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행하는 문과(文科))에 장원이 되어 예조좌랑 겸 시강원 사서가 되었으며, 얼마 후에 옥당에 들어가 수찬 지제교가 되었다. 정사년(1617, 광해군 9)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바로 그해 모후(母后)를 폐하는 의논이 일어나자 공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을 배척하여 탄핵하다가 죄를 얻어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
1년 만에 강릉으로 옮겨졌고 다시 1년 뒤에 석방되어 자유로운 거주가 허용되어 산 지 5년이었다. 인조가 반정(反正)하고 나서는 수찬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곧 헌납으로 옮기고 다시 옥당에 들어가 교리에 이르렀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암행어사로 호서 지방을 염찰(廉察)하던 중 부친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상을 마치자 교리를 제수하였고,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다시 교리에 복직하고 헌납으로 옮겨져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 5)에 난을 만나자 상이 강도(江都)에 행차하고 체상(體相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이원익(李元翼)에게 명하여 왕세자를 따르게 하여 전주(全州)에 이르렀다.
공은 종사관으로 수행하던 차에 조모인 정 부인(鄭夫人)의 별세 소식을 듣고 분상(奔喪)하게 되자, 도체찰사가 탄 말을 주어 보냈는데 그 뒤 요직에 있는 사람이 분상에 역말을 탈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이조의 추천을 받지 못했다. 영의정 김류(金瑬), 지경연사 정경세(鄭經世)가 이 사실을 상에게 아뢰니, 상이 ‘자기와 뜻이 다르다 하여 억압하고 배척하려는 것이다.’ 하여, 훼방한 사람을 모두 물리쳤다.
뒤에 다시 수찬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공은 스스로 ‘율(律)을 범했다.’는 말로 상소를 올리니, 상이 이르기를,“이것은 진삼(陳三)의 죽음이다.”하여, 불러들이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 사례는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병을 핑계 대고 향리로 돌아왔다.
세 번이나 부름을 받고 부교리로 조정에 들어가 상에게 숙배하고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정부 사인(政府舍人)이 되었으며, 다시 암행어사로 호남 지방에 나갔다. 민정(民情)과 다스림의 폐단을 아뢰니, 상이 미납된 조세를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돌아와서는 부응교가 되었다.
이때에 공신 등이 장묘(章廟 원종)를 추숭(追崇)하는 일로 다투게 되었는데, 추숭을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배척되었다. 공은 모든 학사들과 차자(箚子)를 올려 맹렬히 다투었는데, 얼마 후 집의(執義)로 전직되자, 이를 사양하고 아뢰기를, “상의 위엄이 날로 더하시어 대소 신민들이 두려워 떨며 마음이 선뜩해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이같이 상하가 서로 막히고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신은 어리석고 용렬하니 물리쳐 주십시오.”하니, 상이 삼사(三司)를 귀양 보내는 명을 중지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오랑캐가 침범해 올까 근심이 되어 강화도에 성을 쌓으려는 의논이 한창이었으며, 한편 어사를 양호(兩湖)와 영남 제도에 각각 보내어 유생들을 시험 보이고 재주가 없는 자는 종군(從軍)하게 했으며, 또한 청천강 이북 지방을 포기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공은 상소하기를, “국가가 백성의 마음을 잃은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하고, 이에 대해 낱낱이 들어 말하고, 또 아뢰기를, “인심이 떠나고 대세가 이미 기울어지면 전하에게는 비록 열 길의 성, 백만의 군졸이 있어서 승패(勝敗)의 운수에는 보탬이 될 것이 없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이러한 계획을 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입니다.”하였다. 상이 이 의논을 내리자, 조정의 의논이 이에 찬동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 일은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공신 이귀(李貴)가 자천(自薦)하여 이조 판서가 되니, 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어떤 사람이 이귀에게 한 관직을 요구하자, 이귀는 마음으로 그를 경박하게 여기고 이 사실을 아뢰려고 하였다 합니다.
스스로 요구하는 수치는 이귀 또한 부끄럽게 여긴 것인데, 어찌 당당한 조정에서 이귀도 하지 않는 일을 가지고 이귀를 예우하십니까?”하니, 상이 이귀를 안심하게 하려고 공을 배척하여 현풍 현감(玄風縣監)을 삼았다. 부임하자 학규(學規)를 세우고 향약법을 편수하니, 조목이 상세하고 세밀하여 1년이 지나자 읍이 크게 다스려졌다.
재상이 이 사실을 상께 아뢰니 상이 어질게 여기고 조목을 올리게 하여 전국에 반포해 시행토록 하였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고변(告變)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연루되었으나, 상이 곧 석방하였다. 그해 병으로 향리에 돌아오니, 읍인들이 공(功)을 돌에 새겨 그가 남긴 사랑을 잊지 않았다 한다.
병자년(1636, 인조 14)에 대마도(對馬島) 부관(副官)인 평조흥(平調興)이 그 도주(島主)와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날로 자기 나라에 참소하고 이어서 갖은 방법으로 우리나라와 사이를 벌리려 하니, 관백(關白 당시 일본에서 천황(天皇)을 보좌하여 실제 정사를 맡아보던 중직)은 우리나라에 사절을 요구하여 틈이 있는지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부사(副使)로 삼아 바닷길 5천 리인 일본에 가게 되었다. 그 나라 서울에 이르니 관백이 크게 기뻐하여 상당(上堂)에 모시어 예우하고 길을 닦고 관(館)을 수축하였으며, 공장(供帳 연회를 하기 위해 음식을 차리고 막을 치는 것)이 매우 엄숙하였다.
신분이 높은 신하를 시켜 관제(官制)와 복색(服色)을 묻게 하고, 이어서 더불어 시서(詩書)와 인의(仁義)에 대한 설을 말하자 머리를 조아리면서, “해외(海外) 사람이 이제야 군자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하였다. 공은 그들이 주는 물건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관백은 후관(候館)ㆍ공장에 쓰고 남은 황금 170정(錠)을 ‘행자’라고 보내왔다. 공은 이를 받아 가지고 금절하(金絶河)까지 와서 얕은 물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재화를 탐내지 않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니, 유용한 것을 무용하게 하지는 말아라.”하였다.
그 뒤 대마도에서 그 황금을 건져 내어 세급포(歲給布 매년 방치는 공물) 1만 5천과 대신하도록 간청했다. 돌아오니 상이 방금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공은 사간에서 통정대부로 특진되어 서해도(西海道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다음해 돌아와 동부승지가 되고 병조 참지에서 병조와 형조의 참의로 옮겼다.
기묘년(1639, 인조 17)에 다시 이조 참의, 부제학이 되었으며 승정원에 되돌아왔다. 신사년(1641, 인조 19)에 늙은 부모를 봉양하고자 간청하여 안변 도호부사가 되었고, 1년 만에 본도(本道)의 관찰사가 되었다. 북방의 풍속이 오랑캐와 섞여 쉽게 노하고 반역을 잘하였으며, 수령은 대개 무인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아서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공은 이어 대동법(大同法)을 거듭 밝혀 부세를 함부로 받지 못하게 하였다. 북변 지방이 미납된 조세가 거듭 쌓이자 정처없이 떠도는 백성이 더욱 많아졌다. 공은 군현의 곡식 가운데서 회계(會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을 거두고, 또 감영(監營)에 저축되어 있는 1만 1천 6백 석의 곡식을 방출하여 이들을 위해 배상해 주었으며, 나머지는 역말로 조정에 보고하여 제(除)하도록 하였다.
향약(鄕約)을 증손(增損)하여 군과 현에 시행하도록 보급하였으며, 선비들을 모아 부(府 지방 관아의 하나)에서 가르쳐 친히 학예(學藝)를 권하고, 각읍에서 학업이 우수한 자를 선출하여 군과 현의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군졸을 훈련시키고 병기(兵器)를 잘 다듬어 위급한 때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 22)에 관서 관찰사(關西觀察使 평안도 관찰사)로 옮겼다. 이곳은 일이 많아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조정에 간청하여 3천 금(金)과 5천 곡(斛 1곡은 10두(斗))의 곡식을 얻어서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북사(北使 청 나라의 사신)가 계속 들어왔는데 교만하고 포악하기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공은 이들을 대하는 데 실수가 없었으며, 또한 뇌물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지 않자, 그들 또한 꺼리고 두려워하여 욕심대로 행동하지 못하였다. 평양에 양몽재(養蒙齋)를 설치하고 대란(大亂)이 처음 안정되자 특히 선비 양성을 급선무로 삼았다.
을유년(1645, 인조 23)에 대사헌으로 들어와 홍문관 제학을 겸직하였고, 얼마 뒤에 도승지가 되었다. 상이 매우 신임하고 발탁하여 호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판서가 되자 군현의 방납(防納)을 엄금하였다. 공은 본래 병이 많았는데 양계(兩界)를 염찰한 4년 동안 심신이 지쳐 있었다.
전해에는 장자 김익상(金翊相)이 병으로 죽고 뒤를 이어 공 또한 갑자기 별세하니, 병술년(1646, 인조 24) 1월 17일로, 향년 54세였다. 그해 4월에 양주(楊州) 남쪽 족장(族葬)한 곳에 장사하였으며, 20년 뒤에 다시 양주 북편 고모현(姑母峴) 서남쪽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공은 단정(端正)하고 침착하고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자상하고 신중하여 빠른 말과 급한 안색이 없었다. 대체(大體)와 요점에 밝았으므로 일이 간단하여 백성들이 따르기가 쉬웠고 조야가 모두 소중히 여겼다.
공이 경연에 있을 때 상의 총명(聰明)을 계발(啓發)하고 의리(義理)를 진술하는 것이 곡진하고 이치에 들어맞았으므로 상국(相國) 김류(金瑬)가 ‘진짜 학사(學士)다.’라고 칭찬하였으며, 정경세(鄭經世) 또한 말하기를, “인물로 말한다면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하였다.
만년에는 경학(經學)에 더욱 힘을 써서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부터 미루어 백성을 가르치고 풍속을 바로잡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또 마음의 요체를 근본으로 하고 실천으로 실증하였으니, 《예기(禮記)》의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잘못이 없도록 경계하고, 덕을 지켜 변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서를 즐겼으며 문장이 전아(典雅)하였는데, 특히 시를 잘하였다. 일찍이 배척을 받아 동해 가에 살 때 스스로 동명(東溟)이라 호(號)하였다. 《동명집(東溟集)》 6권이 있다. 전부인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별세하였으며 소생이 없다.
후부인 또한 문화 유씨로 증 병조 참판 유성민(柳成民)의 따님인데,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김익상(金翊相), 김필상(金弼相), 김준상(金儁相)이요, 사위는 이가우(李嘉雨), 신상(申晑)인데, 모두 명문가의 자제들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온화하고 공손하고 삼가는 덕과 / 溫恭愼德
화락하고 단아한 용모와 기상은 / 以篤愷悌
행실에서 나타났고 / 觀其行也
바른 도리를 지켜 굽히지 않으며 / 直道不回
일이 형통할 때와 불운할 때에 한결같이 하심은 / 通塞不貳
선천적 성품에서 나타났다 / 觀其定也
두루 착한 소문이 퍼지고 / 周聞令善
직간하여 숨김이 없음은 / 犯而不隱
경하는 데서 나타났고 / 觀其敬也
예절과 의리를 잡아 확고히 지키고 / 秉禮制義
먼 나라 사람을 복종케 하니 / 遠人向服
사절에서 역량이 발휘되었으며 / 觀其使也
부역을 늦추고 대중을 교화하니 / 寬力敎衆
백성이 그의 자혜를 즐김은 / 民樂慈惠
그의 치적에서 나타났도다 / 觀其理也
정부인(貞夫人) 유씨(柳氏)는 문화(文化)가 본관인데, 고려의 대승(大丞) 유차달(柳車達)의 후손이다. 본조에 와서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이 있으며, 4세(世)에 와서 창평 현령(昌平縣令)을 지낸 유위(柳湋)가 있다. 현령인 유위가 증 병조 참판 유성민(柳成民)을 낳았으니, 부인에게 아버지 되는 분이다.
어머니 정부인 이씨(李氏)는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의 따님이다. 부인은 단정하고 온후하며 자애롭고 어질고 유순하면서 신중하였다. 희로(喜怒)를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시부모를 극진히 섬겨 공순하였고, 제사를 정결히 하고 정성껏 받들었다.
몸소 검소하게 절약하고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일삼지 않았고, 가정을 올바르게 이끄니 모든 것이 법도가 있으며 하는 일마다 예의에 맞았다. 문사(文詞)에 통달하였으나 남에게 자기 글을 보여 주어 자랑하지 않았으며, 어진 마음씨가 종족(宗族)에게 미쳐 온 문중(門中)이 흠모하였다.
재용(財用)을 다루는 데는 반드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였으므로 항상 여유가 있었다. 공은 조정의 중신으로 세 차례나 관찰사를 맡았고 귀함이 구경(九卿 좌우참찬(左右參贊)과 육조(六曹)의 판서 그리고 한성 판윤(漢城判尹)의 총칭)에 이르렀으나, 부인은 더욱 삼가도록 경계하여, 뇌물로 공에게 누를 끼치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외조인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의 가법이 지극히 엄정하였는데 어진 부인이 이를 잘 지켜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항상 말할 때마다 외가(外家)의 가훈을 들려주었다. 공이 별세하자, 부인이 두 자제를 엄히 경계하여 가르쳐 말을 반드시 조심하고 행동거지를 단정히 하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법도를 익힌 데다 또한 반드시 스승을 택하여 배우게 하여 성립(成立)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부인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부인이 가르치기를, “너의 아버지는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반드시 근엄하였으며, 빈객(賓客)에게 반드시 예(禮)가 있어서 손님을 대할 때 희롱하거나 시끄러웠던 적이 없었다.”하고는, 절친한 분들을 열거하는데 모두 한때의 명사들이었다.
이어, “너희들 또한 사람을 가려 사귀는 것을 반드시 너의 아버지가 선한 사람을 사귀신 것처럼 하라.”하였다. 김준상이 전임 홍문관 수찬으로 안악(安岳)으로 나가게 되니, 부인의 나이 79세였다. 임지로 떠날 때 경계하기를, “관직 생활은 청렴함과 신중함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
한 가지 일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사람이 업신여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니, 매우 두려운 일이다. 침착하고 신중하도록 힘쓰고 경솔하고 조급한 것을 경계해야 하며, 노복을 단속하고 내외를 엄하게 하여라. 자신을 단속하는 데 삼가지 않으면 형벌로는 남을 두렵게 할 수 없는 것이다.”하고, 또한 학풍을 일으켜 선비를 가르칠 것을 거듭 당부하였다.
그 다음해(1681, 숙종 7) 부인이 별세하였다. 임종에도 또한 죽고 사는 것으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이것은 천명이다.”하고는 시자(侍者)에게 초상 치르는 의례를 명하고, 정침(正寢)에 옮기자 운명하였다. 부인은 선조 35년(1602) 8월 6일에 출생하여 금상(今上) 7년(1681, 숙종 7) 5월 13일에 별세하니, 공이 별세한 지 36년 뒤로, 향년 80세였다. 그해 8월에 부장(祔葬)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훌륭하도다 / 善乎
여자 가운데 군자로다 / 可謂女中君子
고령으로 천명을 다하고 편안하게 죽으니 / 而高年考終
천도의 보응이 아니겠는가 / 無非天道之報也
<끝>
[註解]
[주01] 모후(母后)를 …… 의논 : 당시에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 주동이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
모(生母)인 김 대비(金大妃)를 폐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귀양 보냈다.
[주02] 상이 …… 물리쳤다 : 상이 크게 노하여 나만갑(羅萬甲)은 중도부처(中途付處)하고, 김육(金堉)은 의금부에 회부하여 문외출송
(門外黜送)하였다. 《仁祖實錄 8年 4月》
[주03] 진삼(陳三)의 죽음이다 : 진삼은 송 나라 휘종 때의 진사도(陳師道)를 말하는데, 삼이란 진씨(陳氏) 집안의 셋째 아들이란 뜻이다.
그는 동서인 조정지(趙挺之)가 탐오한 것을 미워하였는데, 어느 날 휘종을 따라 교사(郊祀)에 참여하게 되자 그 아내가 조정지의
집에서 갑옷을 구해다 주며 입으라고 하였으나, 물리친 채 교사에 갔다가 한질(寒疾)에 걸려 죽었다. 여기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행한 것을 비유한 것인 듯하다.
[주04] 고변(告變)하는 …… 연루되었으나 : 생원(生員) 이기안(李基安)의 공초 내용에 “잠저시(潜邸時)의 성상(聖上 인조)을 평하
기를, ‘모군(某君)은 믿을 수 없다. 능히 왕위를 오래 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사람들 가운데 공이 끼어 있다.”고 하였다.
[주05] 방납(防納) : 고을의 사무를 대행하는 경주인(京主人)이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대가를 공물을 바쳐야 하는 백성에게 배로 징수하
는 제도이다. 많은 폐단이 있어, 뒤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 최순희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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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戶曹判書金公神道碑銘
公諱世濂。字道源。姓金氏。其先本一善人。三世祖▦遇。永柔縣令。祖孝元。事宣祖。重於時。貳於當路者。斥出爲永興都護府使。卒。父克鍵。通川郡守。母陽川許氏。弘文館典翰篈之女也。後公旣貴。推恩府使府君爲吏曹參判。郡守府君爲吏曹判書 。許氏爲貞夫人。皇明萬曆二十一年十二月一日。公生。我宣祖二十六年也。自爲兒時。端重有儀。才藝卓越。名譽早著。二十 。許夫人歿。旣三年選國子兩試。其明年。擢甲科第一人。爲禮曹佐郞兼侍講院司書。俄入玉堂爲修撰,知製敎。丁巳。爲司諫院正言。當光海九年。有廢母后之議起。公斥劾其主張者。得罪竄郭山。一年。遷之江陵。又一年。釋之。許任便居住者五年。仁祖旣反正。以修撰召之。尋改獻納。復入玉堂。至校理。甲子。以繡衣。廉察湖西。以父憂去。旣除喪。爲校理。移司憲府持平。皆不就。後復以校理。遷獻納。賜暇書堂。丁卯之亂。上出幸江都。命體相李公元翼。從王世子至全州。公以從事在軍中。聞祖母鄭夫人歿。而奔喪。體府許。以所乘馬遣之。後當路者以爲。奔喪不得乘傳。不許銓薦。領議政金公瑬,知經筵鄭公經世白上。上怒以爲排抑異己。其沮毀者皆黜之。後復以修撰召之。公上疏自言犯律。上曰。此陳三▦死也。召之不已。不得已入謝 。猶力辭。仍稱疾還鄕里。凡三召。以副校理入謝。累遷政府舍人。復以繡衣出湖南。啓陳民情政弊。上特蠲逋租以寬民。還爲副應敎。時功臣等爭言章廟追崇事。諸言不可者皆斥去。公與諸學士上箚力爭。俄改執義。辭曰。天威日嚴。大小戰戰。莫不寒心。自古安有否隔如此。而國不亡者也。斥臣駑劣云云。上乃止三司竄逐之命。時朝廷以虜爲憂。方議築城江都。分遣御史兩湖嶺南諸道。試諸生。令不才者從軍。又有棄淸北之議。公上疏曰。國家失百姓心在此。歷數言之。又曰。人心離而大勢已傾。殿下雖有十丈之城。百萬之衆。無益於勝敗之數。群臣爲此計者過也。上下其議廷議。多右之者。以故其事不行。有功臣李貴自薦爲吏曹判書。公啓上曰。臣聞客有求一官於貴者。貴心薄之。欲啓其人。自衒之恥。貴亦恥之。安有堂堂盛朝。以貴之所不爲者 者。待貴也。上爲安李貴。斥公爲玄風縣監。至縣。立學規。修鄕約法。條制詳密。逾年。邑大治。有宰相白上。上賢之。令上其條制。頒行四方。乙亥。有上變者。連累及公。上卽釋之。其年以疾去歸。邑人至刻石。不忘其遺愛云。丙子。馬島副官平調興。與其主不相能。日䜛愬於其國。仍搆釁我者百端。關白要我遣使以試釁。朝廷以公爲副使如日本。海路五千里。至其國都。關白大悅。禮之上堂。治道築館。供悵甚肅。令其貴臣問官制服色事。仍與語詩書仁義之說。頓首謝曰。海外之人。乃今得聞君子之言。其贈遺皆不受。關白以候館供帳之餘。具黃金百七十錠。辭曰。饋贐受之。至金絶河投之淺水曰。示我無貨取而已。毋令有用者無用。後馬島收其金。乞代歲給布一萬五千。使還。上新從南漢歸矣。公以司諫。特進通政。出爲西海道觀察使。明年 。入爲同副承旨。移兵曹參知。兵刑二曹參議。己卯。再爲吏曹參議,副提學。復爲政院。辛巳。乞養。爲安邊都護府使。一年。爲本道觀察使。北俗雜胡羯。易怒易叛。守令率武人。多不法。民怨之。公乃申明大同法。令科輸毋濫。而北邊逋欠積久。流亡尤多。收郡縣粟不入會計者。又出營儲萬一千六百以償之。其餘驛聞悉除之。增損鄕約。須行郡縣。聚士府學。親勸學藝。選於列邑。得優於學者。以敎郡縣士。練戎卒。治器械。以爲緩急之恃。甲申。移關西觀察使。西方多事。民不堪命。請於朝。得三千金五千斛穀。以寬民。北使繼至。其傲暴我多無狀。公待之無所失。亦不以賂遺驕其心。彼亦畏憚之。不得恣所欲。平壤置養蒙齋。以大亂初定。尤以養士爲先。乙酉。入爲大司憲兼弘文館提學。尋改都承旨。上甚倚任之。擢爲戶曹判書。於是大禁郡縣防納。公素多病。廉察兩界。勞悴四年。前年。長子翊相死。疾仍劇卒。丙戌正月十七日。年五十四。其四月。葬于楊州南族葬之次。後二十年。改葬州北姑母峴西南之壟。公好凝重。動止有法。臨事詳愼。無疾言遽色。明於體要。事簡而民易從。朝野重之。其在經筵。啓發聰明。敷陳義理。委曲的當。相國瑬稱之曰。眞學士也。鄭公經世。亦曰。論人物。爲當代第一云。晩年。尤致力於經學。自修身謹行。推至於敎民正俗。又本之心術之要。考之行事而可見。禮所謂夙夜儆戒。秉德不回者也。樂觀書。文章典雅。尤長於詩。嘗斥居東海上。自號東溟。有東溟集六卷。前夫人文化柳氏歿而無子。後夫人柳氏。亦籍文化。贈兵曹參判成民之女。生三男二女。男翊相,弼相,儁相。壻二人。李嘉雨,申晑。皆名家子。其銘曰。
溫恭愼德。以篤愷悌。觀其行也。直道不回。通塞不貳。觀其定也。周聞令善。犯而不隱。觀其敬也。秉禮制義。遠人向服。觀其使也。寬力敎衆。民樂慈惠。觀其理也。 貞夫人柳氏。籍文化。高麗大丞車達之後也。至本朝有議政寬。議政四世。有昌平縣令湋。縣令生贈兵曹參判成民。於夫人爲皇考。妣貞夫人李氏。延原府院君光庭之女也。夫人端厚慈仁。姹而重人。不見喜怒。事舅姑盡承順。奉祭祀極潔誠。躬行節儉。不事奢華。敎家正家。皆有法度。動合禮義。通文詞。亦不以文字示人。仁及宗族。一門歸心。至於財用之節。必量入以爲出。常有嬴餘。公爲朝重臣。三任方面。貴至九卿。夫人戒飭愈謹。無一以貨賄累公者。外祖延原。家法甚正。夫人之賢。能服膺不怠。恒言。必稱外家家訓。公旣卒。夫人敎養二孤。訓戒必嚴。言語必愼。容止必端。自孩提有識。習以義方。亦必擇師而就學。以至成立。皆夫人之敎也。其敎曰。汝之先君。臨下必嚴。與賓客必有禮。對客。未嘗戲語喧譁。歷擧所親善者。皆一時名流曰。汝亦擇人而交。必如汝先君之友善。及儁相以前任弘文修撰。出安岳。夫人七十九。臨行。戒之曰。居官。廉謹爲第一務。一事不謹。人之慢忽乘之。甚可懼也。務凝重。戒輕躁。禁奴僕。嚴內外。律己不謹。刑罰不足以畏人也。又申之以興學敎士。其明年。夫人卒。臨卒。亦不以死生動心曰。此命也。命侍者治初喪之禮。移正寢而卒。夫人生於我宣祖三十五年八月六日。卒於今上七年五月二十三日。後公三十六年爲八十。其八月祔葬。善子。可謂女中君子。而高年考終。無非天道之報也。<끝>
東溟先生集附錄 / [附錄]
記言別集卷之十六 / 丘墓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