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고비아가 관심을 가졌던 대성당 악보가 세고비아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무는 동안 전달되었다면 우리는 세고비아가 녹음한 대성당을 아마도 들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 두 사람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어쩌면 세고비아가 위촉한 바리오스의 작품이 생겨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바리오스가 더 일찍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악보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것이 배달사고였는지, 아니면 아예 Pagola 가 부치지도 않았는지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바리오스는 그 악보를 세고비아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세고비아에게 전달되었는지 챙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 바리오스 연구가인 스토버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추측한다. 바리오스는 그 당시 Odeon 사와 음반 레코딩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Pagola에게 쓴 편지에 의하면 이미 다섯 곡을 레코딩했고, 세고비아와의 만난지 얼마 후에 레코딩 스튜디오에 다시 가서 이미 레코딩된 것을 확인해야 했으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곧 있을 예정이었던 여러 번의 콘서트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에 아주 바빴을 것 같다.”
바리오스와 세고비아의 만남에서 흥미로운 점의 하나는 그 때 바리오스가 연주한 기타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기타는 세고비아가 당시 사용하던 라미레즈였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라미레즈에는 거트현이 걸려 있었다.(세고비아는 처음에는 거트현을 사용하다가 나중에 나일론 줄이 발명된 이후부터는 나일론 줄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바리오스는 그때까지 강철현을 사용하고 있었다.거트현에 전혀 익숙지 않았던 바리오스는 세고비아의 거트현 기타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아주 궁금한 대목이다. 바리오스의 편지나 그의 친구 Klinger 의 얘기에 의하면 세고비아가 바리오스의 연주를 듣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세고비아가 바리오스의 작품과 연주력에 대해서는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사실로 봐야할 것 같다. 그러나 바리오스가 내는 소리, 톤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영국의 기타리스트 John Mills (이 사람은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Bream, Williams, Diaz 등과 공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세고비아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나(세고비아)는 바리오스에게 강철현을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말했지. 그러나 그는 그것을 고수했어. 아마도 그의 오른손이 거트현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뽑아 낼 수 있는 힘이 부족해서 강철현을 고수했을지 모르지. 그의 소리는 좋지 않았어.”
거트현에 익숙지 않았던 바리오스가 세고비아의 거트현 기타를 연주했을 때 세고비아는 바리오스의 톤이 좋지 않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한 세고비아의 추측은 부당해 보인다. 거트현은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특히 당시 남미에서는) 습도에 매우 약하다. 바리오스가 태어나고 기타를 배운 파라과이같이 덥고 습한 기후에서는 원래의 텐션과 음정유지가 잘 안된다. 그래서 바리오스는 강철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철현을 사용할 때의 금속현 특유의 건조하고 딱딱한 음색을 보완하기 위해 고음현에는 브리지 새들 부분에 고무로 된 버퍼를 장착해서 더 부드러운 소리가 나도록 했고, 전체적인 음정도 낮추어 튜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바리오스의 연주 녹음을 들어 보면 마치 나일론 줄로 연주하는 듯한 음색이 난다.
어쨌든 그 만남은 두 사람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렸고 이후 세고비아는 바리오스의 작품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이에 대해 이제 알아보자.
(계속)
첫댓글 29세에 바리오스를 만났다면, 무려 65년을 더 살았던 그가 그를 진정 잊고 살았을 리는 없겠는데 ...야튼 다음 얘기가 더 궁금해 진다,
양파같은 이야기네요.ㅋㅋㅋ
다음에는 나오겠지...했는데... 여전히 다음에...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