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다지.
나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가 만들어 낸 단어다.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6살까지 그 단어를 사용했었다)
나는 어렸을 때, 꼰다지가 있는 밥그릇에 있는 밥은 먹지 않았다.
꼰다지는 밥을 담은 밥그릇에서 숫가락으로 밥을 푼 흔적.
즉,
밥그릇에서 밥을 먹은 흔적을 꼰다지라고 했고,
나는 꼰다지가 있는 밥은 먹지 않았다.
상상해보라.
밥을 한 술 뜨면, 그 자리에 꼰다지가 생긴다.
그런데, 그 밥그릇에 있는 밥은 먹지 않았다는 것은, 한개의 밥그릇에서 한 숫가락의 밥만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밥을 먹을 때는 밥이 두 그릇이 준비되고, 나를 시중드는 사람이 반드시 있었다.
내가 한 술을 뜨면, 옆에서 그 뜬자라를 또 하나의 밥그릇에서 퍼서 메웠다.
결국 내가 먹는 밥은
내 앞에 놓였던 밥그릇에서는 한 숫가락 정도이고, 주로 내가 먹는 밥은 여분으로 나를 시중드는 사람앞에 있는 밥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배불리 먹어도, 내 밥그릇은 채워진채로 내 식사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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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얼마나 내가 응석받이였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창조능력이 있었다는 작가적인 소양이 있다는 것으로도 포장할 수 있을지?)
꼰다지는 6살까지 가능했었고, 그 이후는 사용되지 않았다.
다만,
"
어휴!
어릴 때 참 못되게 굴었었는데,
어떻게 그런 놈이 저렇게 변했는지 몰라?
"
라고 말해질 때만, 튀어나오는 단어가 됐다.
그런 단어를 사용하던 아이가 7살 이후에는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7살 이후에는
응석받이, 심술장이의 모습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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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못됐던 아이가 어떻게 저럴게 변했을까" 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어떤 환경이기에 그런 모습으로 행동했었고, 어떻게 그런 아이를 저런 아이로 바꾸도록 교육했을까' 가 맞는 말이다.
'누굴 닮아서 저럴까' 도 아니다.
'저 아이를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할까' 이다.
'너는 더 했잖아' 도 아니고
'너도 그랬었는데,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아? 너는 경험이 있으니까 더 잘 알것같아서 묻는 거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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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고 한다고 모두 되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 누군가 책임져야 되는 것도 아니다.
최선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몫이다.
'어떻게 했기에, 저 모양이야?' 대신에
'저 아이를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할까' 이다.
나의 어머니는 그랬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그런 응석받이로 커가는 모습을 고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셨고,
그로 인해서 나의 꼰다지가 없어진 것이다.
어느 때부터 못됐던 아이가 착해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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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할까?" 하면서
주인으로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자기 자식을 상대로
'저 아이는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이야' 라고 말하는 분들
"
당신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으로 살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당신 삶의 주인으로 살면서,
당신과 당신 아이에게 행복을 안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