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8 - 봉래폭포를 내려와 독도 전망대에 올랐으나 해무로 독도는 보이지 않다!
울릉도 여행 사흘째인 8월 26일 아침에 도동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저동을 지나 주택가를 한참 올라
가서 출발한지 25분만에 계곡에 자리한 봉래폭포 정류소에 내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
자연 에어컨이라는 동굴 이 보이기로 들어가니 바위 틈에서 신비롭게도 찬 바람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다시 왼쪽으로 냇물을 바라보며 숲속 언덕길을 30분 가까이 걸어 올라가는데 여긴 전나무도 많고 산림이
울창한지라 걸을만 하니 삼림욕장 이라고 부르는가 본데 이윽고 도착한 폭포 는 생각보다 커고 물의
수량도 많아 놀라는데 울릉도 주민의 식수인 이 폭포는 나리분지 지하의 물이 분출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라고는 버스는 저동을 거쳐 고개를 넘어오는데 삼거리에서 왼쪽길로 내려가서는
도동 버스터미널 까지 가지는 않고 도중에 내려서 골목길로 들어서니 언덕길
이 나타나는데..... 제법 경사가 가파른 길을 걸어서 독도 전망대 를 찾아 올라갑니다.
왼쪽에는 향나무 전시판매장과 해도사라는 절이 보이고 오른쪽은 독도 박물관 인데 우린 케이블카
정류소로 들어가서는 입장권을 사서 조금 기다렸다가 케이블카를 타고 산정으로 오릅니다.
산을 올라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가게들을 지나 밖으로 나가니 마당이
보이는데 거기에 망원경 도 설치되어 있고 푸르른 바다 가 보입니다.
하지만 짙은 해무 때문에 독도 는 커녕 멀리 보이지 조차 않아 그만 실망하는
데.... 나는 조상복이 없는 것인지 백두산에 2번 이나 올랐지만 결국 천지
를 못보았으니 여기 전망대에서 독도도 3대가 복을 쌓아야 하는 것일러나?
오늘은 날씨가 청명한지라 구름 한점 없는 아니 뭉게구름 몇 개만 떠 있는 맑고
쾌청한 날씨라 독도 를 볼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에 실망하니 매점의 직원
들은 한결 같이 입을 모아 오늘은 해무 때문인데 어제는 잘 보였다고 말합니다.
독도는 울릉도 동쪽 90km 섬이니 동해에 자리한 대한민국의 섬인 독도 를 일본에서는 다케시마 라고
부르는데.... 일본 사람들은 대나무 라고는 한 뿌리도 자라지 않는 돌 섬인 "독도를 왜 다케시마
(竹島 죽도)" 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만 모든 이름에는 다 그 "연유" 가 있기 마련이지요?
전 인제대학교 교수 진태하 선생은 '漢字學全書(한자학전서)' 에서, 한 분야에 10년을 전념하면 프로
의 세계 에 입문하게 되고, 20년을 하면 강호에 나가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지는 않으니 때리기도
하며, 30년을 하면 대가 의 반열에 오르고 50년을 하면 접신(接神) 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진태하 선생의 주장 가운데 "독도(獨島)" 의 이름이 어떻게 해서 독도 가 되었나를 밝힌 부분이 참
흥미로운데..... 원래는 '독섬(돌섬)' 으로 불렸다는 것이니, 고대에 이 섬을 지나다니는
뱃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 섬에 나무가 없이 바위 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니 “돌섬” 을 의미합니다.
“돌(石)” 의 방언이 '독' 이니 우리나라 남부 지방 경상도와 전라도의 사투리에서는 '돌' 을
'독' 으로 발음하는데, 세분하자면 납작한 돌은 “독” 으로 뾰족한 돌은 “돌” 이라 하니
독도는 경상도와 전라도 뱃사람들이 저 섬에 갔다가 붙였던 이름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독섬' 으로 불려오던 이름이 1897년 이후 대한제국 시대에 한자
이름으로 바뀌면서 '石島(석도)' 로 되었는데 그러다가 다시 소리 나는
대로 ( 借音表記 ) 바꾸었으니..... '독섬' 이 '獨島(독도)' 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대나무가 있는 것도 아닌 독도 섬에 왜 대나무 竹(죽) 자를 넣었을까요? 일본인
들이 독도를 竹島(죽도) 로 표기한 경위를 살펴보자면.... 대나무 원산지는 동남아시아
인데 점점 북상하여 중국 남방으로 올라왔으니 중국 남방에서는 竹 을 'tek 텍' 으로 발음 합니다.
이것이 일본에 들어와서는 종성(終聲) 을 분리 하여 발음하는 습관에 의하여 '다케' 로 발음되었고...
반면에 한국에 들어와서는 입성(入聲) 이 탈락된 뒤에 들어와 '대' 로 발음하게 되었다는 것이
진선생 주장인데, 중국말 'tek 텍' 이 일본에서는 “다케” 로 한국에서는 “대” 로 되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뱃사람들이 '독셤' 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일본 사람들이 듣고는 전하는 과정에서
'도케시마' 로 전해지고,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다케시마' 로 정착되었으니
다케시마를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다케는 竹(죽)이니 '竹島(죽도)' 가 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독도에는 대나무가 전혀 없으므로 대나무 竹(죽) 자가 필요 없는데도
우리말의 '독섬' 을 일본 사람들이 소리 나는 대로 전하는 과정에서
도케시마를 거쳐 '다케시마(竹島 죽도)' 로 되었다는게... 바로 저 책에 나옵니다.
그런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과 일본 양쪽 모두 명칭이 자주 바뀌어 혼란스러운데, 우산국 - 우릉도
- 우산도(태종실록) - 우산도와 울릉도(무릉, 우릉, 동국여지승람) - 우산도와 무릉도
(세조실록) 등으로 이름이 바뀌며.... 주민들이 부르던 독섬(돌섬)이 석도(石島) 로 그리고
다시 독도(獨島) 로 바뀌니 일본은 우산도가 울릉도 옆의 죽도 라고 하고 한국은 독도라고 말합니다.
먼저 조선에서 독도가 처음 기록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 울진현조에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 가
나오는데 우산, 무릉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그러고는 일설에는 우산도 = 울릉도 라 기록했으며, 18세기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쓰시마) 이다"
울릉도 동편 바로 옆에는 죽도(죽서도) 라고 불리는 별개의 섬이 존재하니 '울릉도 옆에 있으면서 사람
이 사는 섬' 이라고 했으니 이는 독도가 아닌 죽도 를 말함이니 그럼 우산도는 죽도(죽서도)이냐
독도이냐 를 놓고 논란이 있으며.... 독도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산도?(于山島), 성종시대에
삼봉도?(三峰島), 숙종때 안용복 관련 기록에 자산도(子山島), 정조실록에는 가지도(可支島) 로 나옵니다.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 에서 돌아와 토산물 대죽, 물소가죽, 생모시, 목화솜, 떡갈나무 등을 바쳤다. 또한
거주하던 사람 3명 을 데리고 왔는데, 그 섬은 호(戶)가 무릇 15가구 이고 남녀 아울러 86명 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오면서 태풍을 만나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5일
“쇄출 하자는 주장이 옳다. 저들은 일찍이 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
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이 분명 싫어할 것이니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할수 없다. 마땅히 김인우를 그대로 안무사로 삼아서 우산과 무릉 등지에 돌아 들어
가서 그 주민들을 이끌고 육지로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8일
세종때 완성된 고려사에 하나의 섬(울릉도=무릉=우릉) 이라하고 일설에 우산과 무릉 2개 섬이라 나오는데
처음 '우산무릉등처안무사' 라고 했다가 무릉도를 울릉도로 보면서 '무릉도순심경차관' 이라고 쇄출사
직함이 바뀝니다만, 우산도는 독도가 아닐수도 있으니 “우산도는 86명이 사는 비옥한 석벽에 둘러싸인
섬” 이라고 기록했고 또 울릉도에서 독도가 90km 인데 '부속 도서로 취급할만한 거리' 인지도 의문입니다.
공도 정책후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섬은 무릉도(울릉도) 가 세종 15건등 40건이고 “우산” 이란 단어는
울릉도를 뜻하기도 하고 독도 를 뜻하기도 하는데, 태종 3건, 세종 4건, 문종과 단종 1건, 고종 1건에
불과하니 조선 조정은 섬의 존재를 잊어버린 모양인데, 1882년 고종때 『승정원일기』 4월 7일자에 고종은
울릉도, 우산도, 송죽도등 섬이 3개라 하고 검찰사 이규원은 울릉도(우산도)와 송죽도 2개 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독도박물관 으로 들어가 지도와 전시물을 구경하는데 고려 공민왕
때 왜구는 경상, 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에 출몰하며 황해도에 상륙해 개경을
노리니 수도를 한양이나 철원 등 내륙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데, 24년간 100회
가 넘는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이 되었으며..... 우왕 때에는 15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무려 370회 에 달했으니 1년에 25회 꼴로 38년간 왜구가 무려 "470회나 고려를 침략" 한 것입니다.
강화가 함락되고 수도 개경이 위협당해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수도를 내륙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지니 섬과 해안은 사람의 자취라고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
으로 변해 황폐화 되었는데, 왜구 침탈은 횟수도 많고 병력도 대규모에 이른 것은 요시노 남조 조정 이
교토의 북조와 전쟁 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대거 왜구의 대열에 참가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조선조 들어서도 왜구침탈이 끊이지 않자 태종과 세종 임금은 울릉도에 공도령(空島令) 을
내리는데...... 왜구의 피해가 심한지라 울릉도에 관리를 보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게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으로, 섬에
숨어들어간 백성이 없는지 확인해 잡아오거나 일본 어부를 쫓아내기 위해 순시선 을 보냅니다.
중국은 한나라 부터 시대별로 도자기 발달사 가 일목요연하게 순서대로 전시되지만 고려는 쌍기가 온 이래
갑자기 등장하고 중간 발달 과정이 없으니 청자 기술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중국
을 능가한 비색으로 최우수 고려청자 가 탄생했으나 도요지가 있는 강진이 왜구로 황폐화되자 고려청자는
사라지니...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고려청자를 선물하니 고종은 이건 우리나라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외 중국에서 청자가 백자로 유행 이 바뀐데다가 엄청난 돈을 지불하던 고려 권신들이 사라지고, 조선은
유교 영향으로 화려함 보다는 검소하고 단아한 순백의 미 를 좋아하니 분청사기를 거쳐 이조 백자로
이어지지만.... 조선초 3~4% 이던 양반이 조선말에는 돈 벌어서 논밭을 사고 큰 집을 짓고 노비
에다가 양반 족보를 사니 양반이 90% 를 넘으면서 과거시험에 매달리자 저 이조백자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처음엔 3년마다 섬의 상태를 확인할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점차 느슨해져서 중종 이후로는
아예 파견 기록 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숙종때인 1693년 부산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에 고기잡으러
갔다가 왜인들이 섬에 거주하며 고기 잡는 것을 보고는 항의하다가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옵니다.
이후 일본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일본인들에게 도해금지령 을 내리는데, 한국측은
울릉도와 독도 두 섬 모두 가지 말랬다고 해석하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는 아니고 조선령인 울릉도에만 가지 말라고 했다고 다르게 해석합니다.
첫댓글 독도에도 케이블카가 잇군요.
아..... 케이블카는 울릉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