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영산면 죽사리 1023-2번지, 그곳에는 기이한 발자국을 확인할 수 있다. 주민들은 단단한 암반에 자국을 남긴 존재를 경외하여 신성시 여겨 왔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문호장文戶長, 발자국의 주인이자 영산의 수호신. 도술을 부려 관에 억눌렸던 평민을 대변한 영웅. 350년이 지난 지금도 단오가 되면 그를 위한 굿이 봉행된다. 문 씨 성을 가진 호장이었던 그가 어떻게 신이 되었을까.
370여 년 전 창녕 영산에는 문 씨 성을 가진 호장이 있었다. 그는 무인이 아니면서도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검술이 뛰어났다. 또한 도술을 부리고 축지법을 사용하였으며, 호랑이를 수족처럼 다루었다.
어느 해 여름, 농번기라 농민들이 점심을 싸들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영산을 방문한 관찰사의 행렬이 농민들의 점심밥 광주리를 짓밟고 지나가는 일이 생겼다. 문호장은 아무렇지 않게 가는 관찰사를 보고 분노하여 도술을 부려 말의 발을 땅에 붙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 걸어간 관찰사는 나중에 문호장의 짓임을 알게 되어 문호장을 불러 꾸짖었다.
그러자 문호장이 대답했다.
“쌀농사를 지어서 나라님을 섬기고 부처님 공양하며, 죽은 조상 봉제하고 산부모 봉양하면 만백성이 양식하는 것인데 아무리 높은 관찰사의 행차라도 백성을 위한 마음이 없고 농민들의 점심밥을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관찰사는 그 답변이 맞다고 생각하였으나 일개 호방이 관찰사를 호령하였으니 화가 나 심한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기는커녕 언제 매를 맞았냐는 듯 태연하였다. 이에 관찰사는 그를 자인(지금의 경산 자인면)에 귀향 보내었으나 같이 간 나졸보다 먼저 영산에 도착하였다. 혼비백산한 관찰사가 다시 자인에 확인해보자 문호장이 자인에서 고문 받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묘한 모습에 관찰사는 당황하며 문호장을 죽일 방법은 없구나 하고 낙담하였다.
이때 문호장은 본인의 삶이 다했음을 깨닫고 관찰사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혼자의 몸이라 내가 죽은 뒤 물밥 줄 사람이 없어 적적하니 내가 죽으면 단옷날 관가에서 제사를 지내주시오.” 그리고 겨드랑이 밑에 난 날개를 지릅대(삼대(麻木)의 줄기)로 살짝 치면 죽는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이후 매년 단옷날 영산 일대에서 문호장을 위한 굿이 봉행되었으며, 시간이 흘러 문호장은 영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문호장은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기록이 없고 내용도 일부 다르게 전승된다. 문호장 설화에서도 다른 설화에서 흔히 보이는 요소들이 확인된다. 지방관리 체계의 변화에 따라 관권官權에 희생되는 민중의 영웅이라든지, 아기장수 설화에서 흔히 보이는 겨드랑이 밑 날개를 꺾는 모습이 그것이다. 날개는 힘의 근원이나 평민의 꿈 등을 상징한다.
문호장은 문 씨 성을 가진 호장, 그렇다면 호장은?
고려 성종 2년(938) 개혁에 따라 변화된 지방 행정 공무원이다. 초기에는 전 국토를 관리하기가 어려워 본래 지역에 있던 토착 세력들이 지방 행정을 도맡아왔다. 그 중 가장 권력이 높았던 것을 당대등이라 불렀다.
하지만 나라가 안정을 찾자 중앙정부에서는 지방을 직접 관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당대등을 호장으로 개편하고 그 역할을 축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 간 갈등이 생겼다. 권한을 빼앗긴 토착 세력은 물론이고 지역민들의 반발도 심하였다. 중앙에서 파견 오는 관료들은 지역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잦아 지역민은 중앙 관료를 적대시 여기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을 문호장 설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관찰사와 문호장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를 해소하는 방법을 통해 당시의 생각을 읽어볼 수 있다. 문호장이 도술을 이용하여 관찰사를 응징하여 중앙 관료들에게 억눌린 토착 세력들과 지방민들의 한을 해소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문호장이 관찰사를 이길 수 있었지만 결국 자신이 죽는 법을 알려주고 떠났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지역민의 패배가 아닌 그들의 양보와 타협이 있어 가능한 것을 일러주고 있다. 이는 현감이 제사를 지내지 않자 현감의 집 부엌 큰 솥에 수십 마리 구렁이가 있었다는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일방적인 요구를 강요하면 이에 맞는 저항이 있을 거라는 지역민의 경고인 것이다.
중앙과 지방의 융합,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문호장이다.
왜 단오에 제사를 지내라고 했을까
예로부터 홀수는 양기를 가진 숫자로 생각하였으며, 이 홀수가 두 번 반복되는 날은 좋은 날이라 여겨왔다. 특히 음력 5월 5일 단오는 여름이 접어드는 시기로, 세상의 모든 것이 생동하는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였다. 설날·추석 등과 함께 큰 명절로 여겨졌으며, 천중절 또는 중오절·수릿날이라고도 한다. 집안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자 제사를 지내거나 쑥 뜯기,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창포에 머리 감기, 씨름, 그네뛰기 등 다양한 놀이와 행사를 지냈다. 이때 마을의 수호신에게 굿을 통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풍습은 전국에서 확인되는데, 대표적으로 경산 한장군놀이, 강릉 단오굿, 삼척 오금잠제, 창녕 문호장굿 등이 있다.
문호장은 이러한 단옷날 제사를 지내라고 유언을 남겼다. 왜 단오였을까.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몇 가지 유추해볼 수 있다. 아주 단순하게는 문호장과 관찰사의 갈등 시점이다. 설화의 내용을 보아 이와 가장 가깝고 큰 명절로 여겨지는 것이 단오였던 것이다. 또한 문호장은 관찰사에 맞서 영산民을 지킨 수호신 같은 존재였기에 신에 대한 제사를 주로 지낸 단오에 지내게 된 것이다.
오늘날 많은 문화들이 사라졌으나 문호장굿은 그 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이는 영산 지역이 이와 같은 풍습을 중히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면모는 국가무형문화재인 영산쇠머리대기의 시작이 서낭대 싸움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지금도 영산내 마을에서는 서당나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호장굿은 음력 4월 보름부터 5월 6일까지 이루어진다. 5월 1일 본굿을 시작하여 5월 6일까지 지속된다. 영산 장터에 설치된 굿청을 중심으로 장청, 교리의 상봉당, 성내리의 두룽각시왕신당과 삼시랑애기당, 죽사리의 남산믹이지성국당, 영취산숙댕이, 말재죽골 등에서 행해진다.
각 당에는 주신主神이 있다. 상봉당은 문호장, 삼시랑애기당은 문호장의 본처, 두룽각시왕신당은 문호장의 딸, 남산믹이지성국당은 문호장의 첩이다. 각 사당은 위치한 마을이 주체가 되어 관리하였다.
문호장굿은 단순히 문호장을 기리던 굿이 아니다. 중앙관이 아닌 호장이 중심이 되어 지역 사람들이 함께하는, 지역민이 주인공이 되는 축제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가정과 내 지역의 평안과 풍년을 빌고 미꾸라지 던지기 등을 통해 한 해의 운세를 점치며 공동체 의식을 함께 나누던 행위였다. 문호장은 신이 되어 영산을 지켰지만, 주민들은 문호장을 기리며 영산의 가치를 지켜온 것이다.
또한 문호장굿은 지역 내 여러 서낭을 돌며 전 읍내를 아우르는 읍치제의 성격,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별신제적 성격, 주민이 함께하는 동제의 성격, 열네 바퀴 돌기 등의 다양한 굿놀이 등으로 구성된 축제적 성격이 모두 포함된 전통 연희로서 그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