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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12
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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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십니다!>
젊은 수도자 시절, 삶 자체가 온통 회색빛이던 시절, 사방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탈출구가 안보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혼자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방이 다 적군으로 둘러쌓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은 분노와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영적 지도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사려깊은 신부님께서는 꽤나 어려운 숙제를 하나 내주셨습니다.
우리 수도원의 장점, 경쟁력, 긍정적인 면을 한번 찾아보라고, 그리고 제 구체적인 삶속에 숨어있는 감사꺼리들을 한번 찾아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이나 긍정적인 측면, 감사꺼리는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도 신부님의 각별한 당부도 있고 해서, 기를 쓰고 노력했습니다. 두 달 가까이 애써 찾아보고 또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를 완전히 낮추고,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니, 전혀 없을 것 같았던 작은 감사꺼리들을 하나둘 발견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사꺼리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방이 온통 은총과 축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간 제 눈이 어두워 지천으로 널려있던 선물과 장점, 기쁨과 감사꺼리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결론을 내릴수 있었습니다. 제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감사의 미덕의 결핍!' 이었다고.
그래서 지금은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속적인 영혼의 평화와 행복의 비결은 항상,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데 있다는 것을!
자신과 동료 이웃들,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분들에게 꼭 권장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축복 노트, 감사 노트를 한 권 장만하라고. 불평불만들은 자비하신 주님께 모두 맡겨드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과 축복, 주님께서 주신 선물과 감사꺼리들을 하나 하나 적어보시라고.
모든 감사꺼리들을 다 적었다고 생각이 들면, 가장 아랫쪽에 굵고 빨간 매직으로 이렇게 써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 리스트를 적는 과정에 유의할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감사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감사 방식과는 철저히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사형통, 승승장구 앞에서는 누구나 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바오로 사도는 고통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옥중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병고와 박해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크게 감사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감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신비스럽고 위대한 존재여서,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견딜 수 없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시고,
비극을 아름다운 결말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주님의 인호, 주님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기에,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인생의 폭풍우를 아름다운 무지개로 바꿀 수 있습니다.
끝까지 그분을 믿고 신뢰한다면 언젠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과 비극, 굴욕을 통해서 주님의 은총이 찾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차 있다할지라도 지난 세월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해서도 감사해야겠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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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믿음의 크기와 찬양의 크기는 비례한다>
저는 다행히도 여러 나라의 미사 전례에 참석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미사 안에서 찬미 소리의 정도와 그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수가 비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독일의 한 성당의 평일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뒤쪽의 2층 성가대석에서 정말 아름다운 성가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딱 들어도 프로였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이런 분위기 때문에 탄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참례자 수는 10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사 참례자들은 미사 내내 성가를 하나도 따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화음 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끼어 넣을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미사가 아니라 콘서트였고 그 콘서트장에 몇 명의 노인들이 참석하여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미사도 이와 비슷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례는 더 경직되고 그와 발맞추어 신자들은 덜 나옵니다. 성가대는 신자들이 따라 부를 수 없는 특송을 많이 부르고 신자들은 마치 성가대가 대신 찬미해 주는 것처럼 앉아있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할 때도 형식적입니다. 그냥 옆 사람과 고개만 살짝 숙이며 눈인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을 때 그렇게 눈인사만 살짝 하였을까요? 서로 기쁨에 끌어안고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전례의 생동감은 믿음에서 오는데 그 믿음은 소리 높은 찬미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이 소리 높여 찬미하지 않으면 그 전례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소리 높여 찬미할 수 없는 이유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샘솟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전례에 절대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전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전례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기쁘게 찬미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마르코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시다가 먼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으로 들어가 성전의 장사꾼들을 모두 쫓아내신 다음, 다시 돌아오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바싹 말라 죽어버린 것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단의 구조가 마치 샌드위치처럼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을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감싸고 있는 형식입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믿음이 없는 전례는 결국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이란 예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도 바로 참다운 예배는 어때야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사마리아 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이 있다면 받은 것에 감사해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사는 이전부터 ‘에우카리스티아’, 즉 ‘감사’로 불렸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구원되었다는 믿음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감사의 찬미가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창피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병이 치유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찬미소리가 저 사마리아인보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참례한 미사 중 가장 길었던 것은 6시간입니다. 피정 때였기 때문에 가능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6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찬미를 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려보았고 평화의 인사를 하며 함께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느꼈습니다. 그 가슴 뜨거움은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뜨거운 찬양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와 큰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한 사마리아 사람만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전례가 과연 구원받은 기쁨에 성당이 떠나가라 찬양하고 춤을 추는 시간인지, 아니면 의무이기 때문에 참아내야 하는 무엇인지 되돌아볼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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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7,11-19 :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한센병 환자에게 그러셨듯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시지 않고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 라자로 마을의 피정의 집을 “아론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아론은 사제이다. 구약에서 사제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한센병이 걸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보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한 다음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듯이, 아론의 집의 의미도 같다. 아론의 집에 들어 와서 모든 치유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은 늘 그분의 영광을 시기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먼저 고쳐주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나병의 증세와 그것이 치유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쳐주신 한센인들을 꾸중하신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유대인 한센인들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사드리는 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은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신 분을 찬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사야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섬에서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 42,12)고 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써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 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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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간청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성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기에 늘 거리를 두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간청하려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처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는 등의 특별한 치유 행위를 하지 않으시고, 그냥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아직 치유받기 전인데도 그들은 하나같은 믿음으로 사제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는 가운데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아홉 명의 유다인 나병 환자보다 예수님에게서 더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던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런 그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병을 치유받은 사람은 열 명이었지만, 진정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뵙고 구원에 이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습니다.
제1독서인 지혜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지위 고하, 출신 성분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 곧 지혜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옵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것, 곧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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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2-14)
여기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도 전에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셨을까? 어쩌면 “내가 너희의 병을 고쳐 주겠다.”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을 하셨는데 복음서에는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병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간 것은, 병을 고쳐 주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갔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그들의 ‘믿음’에 어떤 문제점이 안 보입니다.)
두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냥 병을 고쳐 주시지 않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고쳐 주셨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보통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는데, 믿음과 순종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시련’입니다.
만일에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치유 기적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다음에 아홉 명은 그냥 가고, 한 명은 되돌아옴으로써 다른 치유 기적 이야기들과는 다른 특별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5-19)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사제들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았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각자 자기 갈 길을 갔을 것입니다. 1) 그들의 첫 번째 잘못은 청할 줄만 알고 감사드리는 것은 잊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은총을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은총은, 큰 은총이든지 작은 은총이든지 간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항상 특별한 선물입니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냥 가버린 아홉 명처럼, 청할 때에는 정말로 간절하게 청하지만, 은총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사드리지 않으면,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초보 단계의 신앙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계속 그런 식이면, 기복신앙으로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청하는 것만 잘하고 감사드릴 줄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떤 고통 속에 있을 때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청원기도를 바쳤다면 감사기도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 말씀은 원래 ‘의심하지 않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지만,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감사드리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면, 원하는 것을 받기 전이라도 감사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사실 감사기도는 받은 후에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받기 전에도 바쳐야 하는 기도이고, 언제나 항상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감사드리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더욱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의 두 번째 잘못은, ‘몸의 치유’만 원하고, ‘영혼의 구원’은 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몸의 치유’를 원하고, 그것을 간절하게 청한 것 자체는 잘못한 일이 아니라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이 치유된 것에만 만족해서 거기에서 멈추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즉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병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몸’은 썩어 없어질 물질일 뿐입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아홉 명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계속 건강하게 살았겠지만, 그냥 그것으로 끝났을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예수님께 돌아와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노력했을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사제에게 가지 않고 중간에 되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사제에게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참 사제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권능은 곧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또 그가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혼의 구원’을 원했음을 암시합니다. (발 앞에 엎드린 것은, 하느님을 향한 공경의 표시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그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해서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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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를 느끼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짜증 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좋은 것뿐만이 아니고 나쁜 것에서도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말에도, 그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난의 말이 바로 자신에게 보약과 같은 것입니다. 보약은 본래 쓴맛을 냅니다.
자신의 장애물 같은 사람도 그 사람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주니 감사해야 합니다. 돌 길 위에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이 아프지만, 건강에 아주 좋은 것입니다. 혈통과 신경을 자극하여 온몸이 안정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어떤 힘이나 도움이 되면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 무관심하여 표현이 없으면 사랑이 없는 태도입니다.
저는 318명의 카톡 친구가 있어 하루에 두 번 이상 글을 보내는데 어떤 이는 귀찮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무관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하루에 7, 8개의 내용이 옵니다. 중복되는 것도 있고 한 달 전에 전해 받은 것도 있지만, 책을 두 번 세 번 보는 것같이 감사하게 받아봅니다.
어떤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받으면 더 성실하게 보내 드리고 있지만, 어떤 이는 무관심해도 관계가 중요하여 계속 보냅니다.
저는 전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본인이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어서 정성껏 보내시는 내용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말을 주고받고 생각을 나누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외국인 말고 감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며 그의 믿음을 칭송하였듯이 우리도 감사하는 마음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감사의 정을 표함은 마음에 믿음, 희망, 사랑을 품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도록 다짐하고 주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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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는 이의 행복>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병 환자 열 사람 …그들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뼛속 깊은 나병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하여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주님을 만났을 때 무엇을 청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주님과 마주했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온 몸 던져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께 되돌아온 한 사람 … 그 사람은 정녕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온 몸으로 체험했으니까요. 그의 깨달음은 그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예수님께로 향하게 했으니까요.
실낱 같은 희망으로 채워진 주님과의 첫 만남은 감사와 찬미 가득한 믿음의 두 번째 만남으로 곱게 곱게 이어졌으니까요. 있는 그대로 나를 아는 것, 주님과 마주하기 위한 첫 걸음이기에 나를 아는 만큼 행복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주신 것들을 깨닫는 것 주님께 온전히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니 깨닫는 그만큼 더욱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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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뒤늦게 알았습니다>
1894년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가 쓴 여러 가지 글을 모아 한 권으로 묶은 ‘홍당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몸이 약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렇게 감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눈이 보인다. 귀가 즐겁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괜찮다. 고맙다. 인생은 참 아름답다.“
눈을 뜨고 일어나 땅을 밟고 있다는 자체가 그렇게 감사하였다는 기도입니다. 눈을 비비면서 눈에 감사합니다.
“눈아! 감사하다. 네가 있어서 내가 모든 것을 본다.”
발을 두드려주면서 감사합니다.
“발아! 오늘도 너 수고하겠다. 나를 많은 곳으로 데려다주겠지.”
귀 에게도 감사합니다.
“귀야! 너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듣는다. 오늘도 너 때문에 많은 것을 들을 것이다.”이렇게 하나하나 감사하면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느덧 ‘스트레스가 사라졌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병이 나은 아홉 사람은 왜 감사를 잊고 가 버렸을까요?
어느 책에 보니까, 병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던 9명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병이 진짜 나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하여 달려가느라고….”
두 번째 사람은 “병이 낫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이 앞으로 재발할지 모르니까 좀 더 두고 보느라고….”
세 번째 사람은 “더러운 옷도 갈아입고, 목욕도 깨끗이 하고 예물도 준비해서 천천히 찾아 뵈어야겠다고….”
네 번째 사람은 “인제 보니 나병이 아니었던 것 같아” 나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진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다섯 번째 사람은 “약간 낫게 된 정도야. 겉에 있는 부스럼은 떨어져도 아마 속에는 아직도 나병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며….”
여섯 번째 사람은 “일단 사제들에게 뛰어가서 자기의 몸을 보이고 다 나았다는 것을 완전히 보장받고 난 뒤에 마음대로 거리를 활보하며 돌아다니느라….”
일곱 번째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히 애쓰신 것도 별로 없어. 사실 예수님은 ‘너희 몸을 사제들에게 가서 보여라.’라고 말씀하신 그것밖에는 없었어. 약을 발라주신 것도 아니니까….”
여덟 번째 사람은 “이런 것은 랍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뭐!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감사할 일이 못 돼…….”
아홉 번째 사람은 “사실 나는 이미 회복되고 있었다고…. 예수님 때문에 나은 것이 아니고, 나을 때가 되어 저절로 나았다고 생각하며….”
** 아무튼 아홉 사람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번째 사람은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병을 낫게 해주셨으니까 당연히 예수님께 돌아가서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뜻은 “원수는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은혜는 마음에 새겨 오랫동안 감사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병이 나은 아홉 사람도 예수님께 갔더라면 또 다른 은총을 받았을 터인데, 왜 그랬을까요?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벅찬 감정에 취해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랬더라도 그들은 은혜를 망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적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총에는 감사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축복으로 인도됩니다. 감사는 은총을 붙잡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하! 감사를 뒤늦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성령님, 성모님, 그리고 모든 고운님들과 모든 은인께도 감사합니다.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견디어내고 버티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음을 믿고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주님의 은총을 마음에 새기며 매 순간을 감사하며 살려고 노력하시는 고운님들에게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늘 우리 주님께서 늘 함께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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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14)
♧♧ 시편 60편 9절….
"길앗도 내 것, 므나쎄도 내 것 에프라임은 내 마리의 투구, 유다는 내 왕홀"
* 길앗...
‘길앗’은 ‘기념하기 위하여 쌓은 돌무더기’라는 뜻을 가진 지명입니다. ‘길앗’은 요르단 동쪽의 모든 이스라엘 땅을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
* 므나쎄...
‘므나쎄’란 본래 요셉의 장자의 이름이며(창세기41장 52절. 참조), 그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고생과 내 아버지의 집안조차 모두 잊게 해주셨구나.’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 요셉의 맏아들 므나쎄의 후손인 므나쎄 지파 중 반은 가드 후손과 르우벤의 자손들과 더불어 모세로부터 요르단 강 동쪽 지역의 길앗 북부 지방의 땅을 분배받았으며(민수기 32장 39-42절. 여호수아기 17장 1절. 참조), 나머지 반 지파는 요르단 강 서쪽의 에프라임 지파의 영토와 경계한 지역의 땅을 분배받았습니다.(여호수아기 17장 5-11절. 참조)
* 에프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
‘에프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이었지만(창세기 41장 52절. 참조), 야곱에게서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창세기 48장 8-20절. 참조) 그리고 그 후손인 에프라임 자손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 요르단 강 서쪽 지역에 있는 중앙 지역을 차지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여호수아기 16장 1-10절. 참조) 에프라임이 ‘머리의 투구(보호자)’란 말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주요한 위치를 시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들은 훗날 이스라엘 통일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북 이스라엘의 주도 세력이 되었습니다.(이사야서 7장 2-17절. 참조).
즉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하느님께 불순종한 채 범죄를 행함에 있어서 주독적인 역할을 하여 하느님을 진노하게 함으로써(호세아서 12장 1-14절. 참조), 북 이스라엘 전체가 훗날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게 하는 비운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유다는 내 왕홀...
‘유다’는 야곱과 레아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창세기 29장 35절. 참조) 그의 후손을 통하여 평화를 가져오는 이가 오실 것이 예언되었습니다.(창세기 49장 10절. 참조) 다음으로 ‘왕홀’은 권위의 상징으로 왕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 혹은 패를 말합니다. 창세기 49장 10절에는 이 ‘왕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이는 유다의 후손을 통해서 영원히 왕 노릇을 하실 분 곧,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느님이 유다를 가리켜 ‘내 왕홀’이라고 한 것은 유다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들어 쓰시는 왕족이 될 것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윗 임금이 바로 이 유다 지파의 출신입니다.(사무엘 상권 16장 1절. 사무엘 하권 2장 4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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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라틴어로 ‘Amor fati’(아모르 파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이지요. 운명이 끔찍할 때도 있지만 이 운명에 슬퍼하기보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안에서 감사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운명을 사랑하면 지금의 내 일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을 비롯한 나와 관계된 관계를 사랑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나의 감정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저절로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이 두려움을 내 삶에 끼어들지 않게 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드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 감사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듯 운명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것을 보지 못하고 받고 싶은 것만을 떠올리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뛰고 있는 내 심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식사를 할 수 있고,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크든 작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기에 감사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주라고 이르시지요. 가서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셨던 것은 이렇게 할 것을 율법이 지시했기 때문입니다.(레위 14,2 참조)
이 점만을 봐도 주님께서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 말씀처럼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요. 이 율법의 완벽한 완성을 위해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깨끗해진 사람은 열 명이었지만, 다시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나병의 치유라는 커다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리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쳐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에 더 마음이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쳐주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고쳐주신 분을 먼저 봅니다. 그 결과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큰 구원이라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으니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사람은 구원의 선물까지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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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
매일 아침 눈을 떠서 3가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매일 내용을 달리해서 21일 동안 계속하면 비관론자도 낙관론자로 변한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평생 비관론자로 살아왔던 84살의 남자도 이 방법을 사용한 결과 낙관론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인간의 성격 구조까지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성격은 안 바뀌어.” 바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드십니까? 혹시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길 원하신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보십시오. 평생 비관론자로 살아온 사람도 3주 만에 낙관론자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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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신문사 옆에는 뉴욕에서 가장 큰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피정 강의를 요청했고,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강의 도중에 ‘선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기쁘게 행하고, 나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단호히 행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한 일은 반드시 되돌아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에게 선한 일은 신문을 구독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강의를 마쳤는데 신문을 구독하겠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신문 구독에 대해 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신문의 지면 중에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가 있습니다. 매주 한 분씩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분, 투병 중인분, 갑작스럽게 재난을 당한 분, 직장을 잃어버린 분,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분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있습니다. 매주 신문의 사연을 읽고 도움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성금을 한국의 가톨릭 평화신문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신문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을 보니 기분도 좋고, 보람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시사 고발 프로를 10년 넘게 제작했습니다. 세상이 변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아빠 얼굴이 너무 어두워 보여! 화났어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바로 잡겠다고 방송했지만, 세상은 그리 깨끗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울을 보니 예전에는 늘 웃는 모습이었는데, 정말 화난 얼굴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태석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아프리카로 가서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촬영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모든 걸 바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합니다. 로마의 바티칸에 초대받았고, 교황님과 추기경님들 앞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멘터리를 보여 드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아빠 얼굴이 참 밝아 보여요. 요즘 좋은 일이 있나 봐요?” 세상의 좋은 면을 드러내는 그분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유럽의 정치를 보았고, 유럽의 사회 복지 제도를 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모든 걸 검색하는 시대입니다. 신문을 제작하고, 홍보하는 일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문을 보고, 마음이 변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선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면 됩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지혜서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전해줍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힘없는 이와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가난한 이, 불쌍한 이에게 정의를 베풀어라. 힘없는 이와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어라.”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 받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사의 감사송은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이유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차동엽 노르베르또 신부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차동엽 노르베르또 사제와 죽은 모든 교우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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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8년에 세례를 드린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에 한분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끔씩 만나서 대화를 하고, 주로 책 읽은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시기 때문에 제가 모르는 분들을 많이 아시고 계십니다. 제가 서서울 지역 교육담당 업무를 할 때에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인,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께서 좋은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지난 월요일에도 잠시 만남을 가졌습니다. 2017년 서품식 장소를 구해야 하는데,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매님께서는 장소를 운영하는 분과 잘 아신다고 하면서 대관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하셨습니다. 드러내시지는 않지만 언제나 저의 부탁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화를 하면서 작은 체험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모 교구에서 부제님들을 대상으로 평신도들과 모임을 주선하였다고 합니다. 주제는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였다고 합니다.
부제님들도 이야기를 경청하셨고, 모임에 참석한 분들도 진지한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의 모습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소통을 하시고, 친교를 나누셨듯이 교회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신학교도 서로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선발은 각 신학교에서 하지만 교육은 학년별로 통합을 할 수도 있고,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통합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함께 밥을 먹는 사이라면 교구간의 사제 연대도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사제의 인사이동도 원하는 경우에는 각 교구에서 통합으로 실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라도에서 자란 신부님께서 경상도로 가서 사목을 하시고, 제주도에서 서품 받으신 분이 서울에 와서 사목을 하시고, 서울 신부님은 안동으로 가셔서 사목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작은 땅에서 사제들이 서로 연대해서 사목을 할 수 있다면 지역 갈등을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시의 분주함 속에서 지친 사제들은 시골의 자연 속에서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지내던 신부님께서도 도시의 다양성과 분주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유에서 존재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다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도 같습니다. 해외 선교를 지망하는 것도 좋지만 이 땅에서 먼저 나눔과 소통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람은 10명이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1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사제는,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요?
10년이 넘은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친정어머니께서 그 자매를 제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그 자매와 남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를 갖게 되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작은 선물을 가져왔고, 저는 축하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잊고 지냈는데 이번에는 쌍둥이를 출산했다고 하면서 신랑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다 잊고 지냈는데 그분들은 저의 기도가 고마웠었고, 아이를 출산한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제게 감사를 드린 것이 제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힘으로 그렇게 되신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제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 것은 앞으로도 그분들의 가정에 더 큰 은총으로 다가 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를 하였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뻐하면 기뻐할 일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감사와 찬미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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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육靈肉의 온전한 치유의 구원>
-찬양과 감사의 믿음-
오늘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 복음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어제 강론은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충복에 대해 했습니다. 마침 어제 피정 온 자매들 미사 강론시 드린 말씀입니다.
“오늘 집에 가면 오늘 복음 말씀,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는 말씀을 잘 보이는 곳에 써서 붙여놓고 매일 보며 마음에 담고 생활하십니다. 세상의 종이 아닌 주님의 충실한 여종이 되어 살아가십시오. 참으로 주님을 충실히 섬기는 주님의 충복으로 살아갈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세상을 섬기는 세상의 종이 아닌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종임을 강조했습니다. 바로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얼마전 사촌 형과 아우가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형님, 이제 감사하시면서 교회에 나가시면 되겠습니다. 기도하며 응원하겠습니다.”
“교회나 절간에 나갈 시간이 없네. 늘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친구들이나 주변 인물들에게도 감사하며 산다네. 쉽게 말해서 어느 틀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자는 생각이지.”-
나름대로 훌륭하게 살아가는 형입니다. 순간 '감사의 중심인 하느님이 빠졌구나. 웬지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주님을 믿는 이들이면 하느님께 감사가 우선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기도는 우리의 영적 본능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명의 나병환자들, 만일 부를 예수님 이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래서 사랑을 가득 담아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닌 열명의 동병상련의 나병환자들 공동체였고 이들은 주님께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간절히 찾았기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주제는 ‘지혜를 찾아라’입니다. 세상의 권력가들이나 세력가들, 통치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다음 내용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지혜이자 말씀이신 주 예수님은 당신을 갈망하고 갈구하는 모든 이를 찾아 오십니다. 열명의 나병환자가 상징하는 바 우리 모두입니다. 잘 깊이 들여다 보면 병자 아닌 사람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로 이 가르침대로 열명의 나병환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찾아 만났고 병도 치유 받았습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는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부르짖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대로 매일미사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바치는 자비송 기도입니다. 나병환자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칠 때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들의 간절한 믿음의 기도에 주님은 응답하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은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문제는 육신의 치유만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 전인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육신의 병만이 아니라 무지의 병의 치유가 근원적입니다. 몸은 깨끗해 졌지만 마음은 아직 깨끗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열명의 나병 환자 중 온전한 믿음으로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찬양과 감사의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 다음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
과연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 묻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때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앎으로 우리의 근원적 병인 무지라는 마음의 병도 치유되어 온전한 믿음을 지니게 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에는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믿음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다음 시편 구절이 좋았습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 평생 주님을 찬양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5,1)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온전한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사실 우리의 영육의 전인적 치유와 구원에 미사 은총보다 더 좋은 식食과 약藥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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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돌아가 감사를 드렸다>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얼른 가서 사제에게 보이고 자신의 삶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받기만 하는 것, 기다리기만 하는 것, 청하기만 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구원은 감사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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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거룩함을 향합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루카 17,12-13)
예수님께 나병환자 열 사람이 치유를 청합니다. 그들은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도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합니다. 부정한 전염병이라고 접촉을 꺼리는 이들을 피해 살아왔기에 스스로 조심합니다. 그래서 "멀찍이"라는 말씀 안에는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슬픔이 서려 있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소문으로 들었는지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분임을 압니다. 치유와 기적, 죄의 용서와 말씀은 그분의 능력과 힘, 자비와 거룩함을 드러냅니다. 부정하다고 낙인 찍힌 그들은 그런 예수님께 자기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더 다가설 수 없지만 그분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바로 자비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5-16)
예수님 말씀대로 사제에게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 중 한 명,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 가까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발 앞에 엎드렸으니 예수님과 매우 근접한 자리입니다. 이 가깝고 밀접한 관계성의 회복이야말로 단순한 치유를 넘어서는 자비의 효과입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임금들, 통치자, 권력자, 군주들, 세력가들을 일깨웁니다.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지혜 6,6)
그러니 하느님에게서 권력을 받은 이들은 그 힘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지혜 6,9) 애써야 합니다. 그들이 지닌 세속적 힘은 세상에서나 유용할 뿐 오히려 진정한 구원에 장애가 되기 십상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지혜 6,10)
하느님의 거룩함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그분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숨쉬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거룩해지니까요.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분 마음을 차지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고통 속에 비참히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그분께서 주신 힘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지혜 6,7) 주신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
돌아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나병환자는 비록 한때 부정하다고 세상에서 내쫒긴 이였지만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길 줄 아는 이였습니다. 치유를 물리적 변화로 치부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라고 꿰뚫어 볼 줄 알았으니까요. 여기까지 깨달은 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분 발 앞에 몸을 던짐으로써 거룩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큰 사람이건 작은 사람이건, 건강하건 병들었건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 때 거룩함이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를 둘러싼 존재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 안에서 움직이시는 하느님을 깨달을 때 거룩하게 됩니다. 거룩한 이는 거룩함을 나누어 주신 분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야 구원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치유된 이는 깨끗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이는 구원됩니다. 자비를 청하여 치유의 은혜를 받고, 감사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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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감사드린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인 나병 환자 아홉은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리고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십니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아시리아에서 옮겨 온 타민족이었지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서 그 일이 일어난 데는 뜻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라는 구절은,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 인은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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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감사>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갈망과 갈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빌고 또 비는 정성을 기울입니다.
구하는 것을 얻고 나면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감사할 줄 아는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명을 고쳐줬는데
한 명만 와서 감사를 드리니 나머지는
어디 갔느냐고 물으십니다.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옮겨지는 감사는
더 큰 감사를 할 일이 생깁니다.
감사는 하면 할수록 내가 더욱 행복해집니다.
원하는것을 얻고 나서
입 닦는 사람 되지 않기를!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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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루카 17, 17)
치유로 가는
모든 길 위에
치유의 주체이신
구원의 주님이
계십니다.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돌아가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간절함이
너무도 빠르게
하느님을 망각하는
당연함으로
바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느님을 너무 쉽게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마음을
보는 데서
진정한 관계는
시작됩니다.
감사가 구원으로
찬미가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감사와 영광을
먼져 올려드리는
삶이 진정한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은 비로소
소중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구원의 선물이 됩니다.
믿음이 없다면
구원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돌아가는
믿음의
위령성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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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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