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여행5 - 명나라 성벽 중화문(中华门) 을 보면서 도시의 유래와 주원장을 생각하다!
난징시 남쪽에 육조시대인 6세기 전반 梁武帝(양무제) 때에
雲光法師(운광법사) 가 경전을 講(강) 할 때 천신이 감동해 하늘에서 꽃이 비 처럼
내린 곳이라고 하여 雨花臺(우화대) 라고 불리는 언덕이 있습니다.
20세기 현대사 에서는 국민당 정부 때 공산당원 10만명이 처형된 사형장 으로 지금은
우화대열사릉원 (雨花臺烈士陵園) 이라고 불리는데 혁명열사의 기념관이 자리합니다.
위화타이레스링위엔 雨花臺烈士陵園(우화대열사릉원) 공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는
11위안을 내고 중화문 에 내리니 거대한 성벽과 육중한 성문이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여기 중화먼 中华门 (중화문)은 명나라 초기 만들어진 난징성 13개의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좋으니 폭이 120m 에 깊이가 130m 인 4중의 성문 입니다.
4개의 문 사이 27개 藏兵洞(장병동) 에 숨은 3천 병사가 적을 유인해 千斤閘(천근갑) 이라는
문짝을 떨어뜨려 퇴로를 차단하고 전멸시킨데서 옹성 이라 불린다고도 하네요?
그러니 어떤 군대가 이 견고하기 그지없는 성문을 공격할수 있을까요?
6조 시대에 반란군 이 점령한 적은 있지만 그건 명대 이전 의 일이라....
이 도시 난징 南京(남경) 은 손권이 오나라 수도(건업) 로 삼은 이래.....
동진, 송, 제, 양, 진, 남당을 거쳐 주원장의 명나라 수도 로 번창했습니다.
시가지는 칭장 長江(장강, 양쯔강) 남쪽에 길이 33km, 높이 12m 남짓한 명대 초기의
성벽 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아직도 일부 성벽은 이처럼 남아있는 것이네요?
거대하고 육중한 난징의 남문인 성벽 중화먼 中华门(중화문) 을 보면서 도시의 유래
를 생각하는데..... 난징 은 일찍이 전국시대에 초(楚) 나라의 금릉읍 이었습니다.
삼국시대인 229년에 오나라의 손권이 건업 이라고 개칭하여 도읍을 정한 뒤 부터
강남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318년에는 동진(東晋)의 원제 가 도읍하였습니다.
이후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의 4대에 걸쳐 남조 왕조의 국도 가 되어......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하다가 589년 수(隋) 나라에 의해 멸망되면서 파괴됩니다.
당나라 때에는 금릉(金陵) 으로 불리다가 오대십국(五代十國) 때에
강녕부 로 개칭한 뒤에 남당(南唐) 20여 년의 도읍지가 되었습니다.
남송(南宋) 때에 건강부, 원나라 때는 집경로로 불리다가 1368∼1421년에 명(明)나라
도읍지가 되어 처음에 응천부(應天府) 라고 하다가 뒤에 남경(南京) 으로 불립니다.
현재 난징(남경) 명칭의 시작으로 주위 34km 의 성벽도 축조되었는데 1441년에 도읍지가
베이징(北京) 으로 옮겨진 뒤.... 청(淸) 나라 때에는 강녕부(江寧府) 로 불리었습니다.
난징을 수도로 정하고 중화문을 세운 이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 인데 그가 태어난 1328년은
원나라 황실에서 아리바가가 천순제로 즉위하자 토그 티무르 가 폐위시키고 황제가 됩니다.
이후 황족끼리의 골육상잔으로 옥좌의 향방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원제국의 두 수도인 대도와
상도 그리고 카라코룸 사이에 피바람이 불자 억눌려 있던 한족들의 반란 이 일어납니다.
원나라 재정의 80퍼센트를 충당하면서도 “남인”이라고 낮은 대우를 받던 강남 지역의 한족들
의 불만 이 하늘을 찔러 양자강 해적들이 강북으로 가던 세금 운반선들을 차단합니다.
원왕조의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진압하려고 토벌대 를 보냈으나 문란해진 군 기강과
물싸움에는 약한 몽골군의 특성 때문에 성과가 없자 지방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됩니다.
소작농의 아들 주원장 은 참담한 유년 시대를 보내던중 17세가 되던 1344년에는 기근까지
휩쓸어 부모와 형이 영양실조 전염병 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주원장 은 살기위해 황각사 절 에 들어갔지만 끼니가 충분할리 없으니...
바로 탁발승 이 되어 떠도는 비렁뱅이 생활을 4년간 하게 됩니다.
1351년에 백련교도 를 주축으로 한 “홍건적” 이 봉기하고 양자강 일대가 세력권이 되면서
“망할 놈의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보자”는 민중의 목소리가 결실을 보는 듯 싶었습니다.
주원장 도 시류에 동참해 안휘성 홍건적 곽자흥의 수하 로 들어가 재능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곽자흥의 양녀인 마씨 처녀와 혼인도 치렀는데 그녀는 후일 마황후 입니다.
주원장 은 곽자흥이 죽은후 대장이 되었고 송나라 황실의 후예를 자처하며 봉기했던 홍건적
두령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 가 송(宋) 을 세우자 인정하여 부원수의 직함을 받습니다.
더욱 세력을 키운 주원장 은 1356년에 집경(남경) 을 점령하고는 “응천부” 로 개명하고
본거지로 삼으니... 홍건적 3대 세력 (장사성, 진우량, 주원장) 의 하나로 발돋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