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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50권, 선조 27년 4월 2일 경술 6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적장 청정이 유 총병에게 전하는 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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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3월 5일에 나온 장희춘(蔣希春)·이겸수(李謙受) 등이 적장 청정(淸正)이 유 총병에게 전하는 답서를 가지고 왔다. 그 겉봉에 ‘대명 도독부(大明都督府)에 청정은 답한다.’고 되어 있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부(貴府)는 영웅이요 준걸입니다. 준걸은 일을 함에 있어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결말을 지어 장부(丈夫)의 뜻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우리 관백은 일본 66국을 다스릴 조화술을 가지고 있어 한번 호령하면 온 나라 사람이 응하여 따르니, 이야말로 하늘이 내시고 땅이 기르신 영웅으로 용맹을 겸비하신 분입니다. 수명(壽命)의 장단(長短)을 헤아릴 수 없이 장원하니 이렇게 귀한 운명을 타고난 분은 천년 동안에 다시 없을 분이십니다. 관백께서는 66국을 아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칭호를 태합(太閤)이라 하고, 높은 명예를 얻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많은 군병을 거느리고 대명국(大明國)을 침벌하게 함으로써 이름을 후세에 드날려 남아(男兒)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이에 먼저 조선을 침벌하게 한 것입니다.
나 청정은 충량(忠良)한 사람입니다. 옛사람이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죽음을 두려워하면 충신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관백의 친병(親兵)과 양장(良將)을 거느리고 왔으니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한인(閑人)은 나를 훼방하나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내가 조선 왕자를 전장에서 포로로 잡았을 때 법에 의하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유희를 즐기었으며 태합 전하에 아뢰어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고향으로 환송하였으니, 나의 은혜는 바다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명(大明)과 조선(朝鮮)에서는 도리어 무정하게 나를 은혜도 의리도 없다 하니, 그대들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선 배신에게 묻노니, 대명 천자는 어떤 마음을 가진 분입니까? 대명과 조선이 군신의 의리로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다고 하나 어찌 남의 나라의 정사를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고명(高名)함에 대해서는 일본의 군중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그대의 장수들은 가소로운 자들이니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해 2월 사이에 풍중영(馮仲英)이 함경도에서 서신을 보내 나와 면회하기를 약속하였습니다. 빠르거나 더디거나 양단간 즉시 결정해야 하는데 오늘까지 오랫동안 한번 만나서 의사를 개진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양장(良將)·강병(强兵)들은 전쟁에서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습니다. 만약 대명과 조선을 상대하는 전쟁에서 우리 관백이 승리하신다면 면대하여 양쪽을 화해시키고 즉시 철병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하면 만백성들이 기뻐하여 생업을 편히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질없이 훼방하는 사람이 있어 시비를 말한다면, 나는 즉시 관백에게 글을 올려 알릴 것이니 그 죄가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금번에 보내온 서신의 뜻은 필요한 사무를 밝히지 않아 나의 마음에 만족하지 않은 데가 많습니다. 이곳에 마침 일이 있어 사람을 차임하여 글을 보내지 못하고 인편에 두어 자 적어 보내니 사리를 판단하여 자세히 규명하십시오. 이는 아무 사욕이 없는 나의 충성된 말입니다.
사람이 먼 앞날을 걱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생기는 것이니 일시적인 계책만 세우지 마십시오. 조선에 나온 일선의 장병들은 천인 가운데 영웅이고 만인 가운데 준걸입니다. 어찌 대명에 항복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작은 물방울이 떨어질 적에 막지 않으면 마침내는 강하(江河)를 이룬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화락(和樂)한 정치는 임금이 죽음으로써 선도(善道)를 지키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대명에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문리를 알고 대도에 통달한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일본국의 현달함을 알아 즉시 화해를 청하고 조선에서 물러나 결코 나의 말을 어김이 없을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29책 5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46면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외교-명(明)
선조실록 51권, 선조 27년 5월 6일 계미 5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유정이 왜적의 군영에 들어가 있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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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이 왜적의 군영에 들어가서 있었던 일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전일 적중에서 나온 정보년(鄭寶年)을 시켜 편지를 왜의 부장(副將) 희팔랑(喜八郞)에게 부치기를 ‘조선(朝鮮) 사신 대선사 북해(北海) 송운이 독부(督府)의 영문으로부터 귀진(貴陣)에 들어가 화해(和諧)의 뜻을 선유(宣諭)하고자 한다.’ 하고, 12일 출신(出身) 이겸수(李謙受) 등을 데리고 들어가니, 희팔랑이 묻기를 ‘그대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하고, 또 ‘어떠한 중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원수(元帥)의 명을 받들고 도독부 영문에서 왔다.’ 했는데, 희팔랑은 바로 청정이 총애하는 장수였습니다.
청정이 나와서 도독부(都督府)의 서찰과 왕자(王子)의 서찰에 대해 묻기에, 답하기를 ‘도독부의 서찰은 가지고 왔으나 왕자는 천자의 소명(召命)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청정이 소서비(小西飛)의 소재와 심 유격(沈遊擊)의 강화에 대한 일을 묻기에, 답하기를 ‘심 유격의 일은 성사될 리가 만무하다.’ 했습니다. 초저녁에 그의 처소로 인도되어 들어갔는데 청정이 ‘일은 기밀(機密)하게 함이 귀중하다.’ 하고, 글로 문답했는데, 승왜(僧倭) 2명이 조금은 서획(書畫)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답하는 일은 오로지 이 중들에게 맡겼으며 세 순배의 술을 마시고 밤이 깊어서야 물러와 잤습니다. 다음날 희팔랑이 심 유격의 강화의 조건을 유정(惟政)에게 보였는데, 첫째 천자(天子)와 혼인을 맺을 것, 둘째 조선의 땅을 갈라서 일본에 귀속시킬 것, 세째 전과 같이 교린(交隣)할 것, 네째 왕자(王子) 한 사람을 일본에 들여보내어 영주(永住)하게 할 것, 다섯째 조선의 대관 노인(大官老人)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등 모두 다섯 조목이었습니다."
선조실록 52권, 선조 27년 6월 26일 계유 5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경상좌도 병사 고언백이 이겸수를 보내 가등청정의 진영을 살피고 온 일을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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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 고언백(高彦伯)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울산(蔚山) 출신 이겸수(李謙受)를 제독부(提督府)의 글을 가지고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들여 보냈습니다. 겸수가 그곳에 도착하니, 희팔(喜八)이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독부(督府)에서 왔다.’ 하고, 이어 묻기를 ‘전일에 왔을 때는 너에게 즐거운 빛이 있더니 지금은 네게 즐겁지 않은 빛이 있으니 무슨 일인가? 하니, 희팔이 웃으면서 ‘관백(關白)의 사자가 부산에서 왔는데 네가 마침 왔다. 이리하여 복잡한 폐단이 생길까 염려되기 때문에 마음에 편치 못한 점이 있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관백의 사자도 내가 온 일을 아는가?’ 하니, 희팔이 ‘비밀의 일을 어찌 먼저 알게 하겠느냐.’ 하고서 희팔이 먼저 들어간 후에 겸수를 불렀다고 합니다.
겸수가 독부의 글을 가지고 들어가니 청정이 펴 보고 갑자기 노한 빛을 띠고 말하기를 ‘글 속에 어찌하여 실제적인 일은 없느냐? 대명(大明)과 조선이 우리와 화친을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내가 듣기로는 왕자군(王子君)이 서울에 있다는데 대명에 입조(入朝)하였다고 핑계하고 이제까지 보내오는 편지가 없고, 송운(松雲)도 경사에 올라갔다 핑계하고 오지 않으니 조선 사람은 한갓 거짓을 행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다. 2월부터 오갔으면서 아직까지도 결정이 나지 않으니 이 어찌 화친에 뜻이 있는 것이겠는가. 그저 우리의 허실을 정탐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내가 왕자의 답장을 바라는 것이 어찌 옥백(玉帛) 등 귀중품을 원해서이겠는가. 나와 함께 있다가 한번 헤어진 뒤로 전혀 소식이 없으므로 내가 보고 싶어서이다.’ 하였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54권, 선조 27년 8월 30일 을해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비변사에서 왜에게 반간계를 쓰는 일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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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장(賊將) 평의지와 평조신 등이 강화를 청한 서신은 군사 기밀에 관계되므로 그 처리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답서를 대략 기초해서 들이니, 이러한 사연으로 경상 감사에게 은밀히 유시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시켜 적의 병영에 회보하여 반간하는 계획을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 왜적의 서신도 경상 감사에게 보내서, 경주 사람으로서 청정의 병영에 왕래하는 자를 시켜 전달해서 돌리고 돌려 서로 격분케 하여 어부지리(漁夫之利)를 거두는 것도 또한 병가(兵家)의 좋은 계책입니다. 다만 이러한 일은 각별히 조심해서 적으로 하여금 반간하는 계책임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승장(僧將) 유정(惟政)이 가등청정의 병영에 들어갔다는데 지금까지도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또한 매우 염려됩니다. 감사로 하여금 다시 유정이 나오기를 기다려 적정 소재를 잘 살펴 만일 틈을 탈 만한 기회가 있으면 이겸수(李謙受)로 하여금 들어가서 청정의 부하 희팔(喜八) 등에게 은밀하게 말하기를 ‘내가 두 나라의 화해를 이루게 하고자 해서 왕래한 것이 한두 차례가 아니지만 늘 다른 왜인들 귀에 들어가지나 않을까 두려워 십분 조심해 왔다. 그런데 근자에 평행장 등이 이미 왕래한 사실을 알고 경상 감사에게 서신을 올렸는데, 대개 이르기를 「왕자가 나오도록 도모한 것은 청정이 한 것이 아니고 바로 행장이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와 강화를 상의하지 않는가. 」라고 하였으니, 일이 매우 괴이하다. 지금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 일만은 마땅히 알려야 하겠기에 말하는 것이다. 이후에 왕래하는 일은 절대로 의지 등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하게 하고, 적장이 이러한 말을 듣고 만약 그 서신을 보고자 하거든 열 겹이나 견고하게 싼 것을 이 겸수를 시켜 가지고 가 보여서 두 적장이 서로 의심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책입니다.
또 그 전에 일본 병위 제정(兵衛諸正) 등이 만약 항복하면 전에 분부(分付)한 대로 하고, 만약 후회하고 나오려고 하지 않거든 전일의 맹서(盟書)대로 청정이나 행장에게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제거하게 하는 것도 또한 좋은 계책입니다. 이러한 일은 다시 형세를 보아서 아뢴 후에 처리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4일 기묘 2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비변사가 왜적을 이간시킬 계책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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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니 송창세(宋昌世)가 말한 적중(賊中)의 사정은 비록 적의 꾀를 헤아릴 수 없다고는 했지만, 왜적들은 거의 부하(部下)가 배반하고 사졸(士卒)들이 원망하는 것으로 지금이 바로 하늘이 망하게 하려는 때입니다. 병가(兵家)의 이간(離間) 붙이는 기회가 실로 여기에 있으니 너무 의심하고 머뭇거려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목 병위(木兵衛)를 초유(招誘)하는 일은 전날 이미 분부하였으니 만일 몸을 빼내어 나온다면 마땅히 마음을 트고 성의를 다하여 관대하게 대접하여 그의 환심을 거두어야 합니다. 또 평의지(平義智)의 답서(答書)를 이미 계하(啓下)하였으니 경상 감사로 하여금 이에 의하여 회답하게 해도 무방합니다. 또 동래(東萊)의 적중에 있는 사람을 시켜 몰래 우도(右道)의 적진(賊陣)과 통하게 했다 합니다. 대명(大明)이 처음에는 봉작과 조공을 허락하여 중국 사신이 나올 때가 멀지 않았었는데 마침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사가 유 총병의 군영을 왕래하며 말하기를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실은 화친을 청할 뜻이 없으므로 오래지 않아 기병(起兵)하여 침범할 것이다.’하였습니다. 이를 총병이 요동에 전달, 보고하여 명조(明朝)가 이 사실을 알고는 심 유격(沈遊擊)을 심히 문책하자 심 유격이 극력 변론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깊이 믿지 않아 지금까지 망설이며 결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청정이 한짓이라고 하여 행장 등의 마음을 격발시키고 또 이겸수(李謙受)를 시켜 행장이 청정에게 분한 뜻이 있음을 말하여 청정의 노여움을 격발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긴절한 사기(事機)이고 기타 임기하여 처치하는 것은 오직 감사가 형세를 보고 잘 처리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임기하여 선처(善處)하고 원할하게 응변(應變)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감사가 아마도 잘하지 못할 것이니, 비변사가 주도 면밀하게 지수(指授)하도록 하라. 송창세가 이미 적정을 보고한 것으로 저 자신은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고 할 것이니, 비록 그의 술수에 빠진 것인지는 몰라도 우선 논상(論賞)하여 그의 마음을 거두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급히 그에게 관직(官職)을 제수하여 관교(官敎)를 만들어 보내고 이어서 일이 성사되면 마땅히 상을 더 줄 것이라고 효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76권, 선조 29년 6월 20일 병진 5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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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변사의 당상(堂上)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도해하였다는 말은 틀림없다. 박의검(朴義儉)을 내려보내는 일에 대해서 어제는 보낼 수 없다고 하였는데, 사신에게 보내는 회첩(回帖)은 그만둘 수 없는데다 또한 사정을 정탐하여 오지 않을 수 없다. 황신(黃愼)이 거느리는 역관(譯官)과 왜어 통사(倭語通事) 및 진 유격(陳遊擊) 【진운홍(陳雲鴻). 】 의 역관 김선경(金善慶) 등에게 말하여 박의검이 거느리는 자라 칭하여 들여보낸다면 마땅할 듯하다. 사신이 대마도에 오래 머무르면 왕래하는 중국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들여보내는 사람이 없으면 적의 정세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자,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체탐(體探)하는 것처럼 해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회첩(回帖)하는 일로 칭하여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또 적의 심술(心術)을 알 수 없기는 하나, 그 정상은 알 만하다. 어쩔 수 없이 예전에 변성명하여 간첩(間諜)하던 자처럼 하여 들여보내어 정탐하면 좋겠으나, 적당한 자가 없다. 적의 정상을 알기를 절실히 바란다면, 문안이라 핑계하고 아울러 게첩(揭帖)을 만들어 중국 사람과 함께 대마도에 들어가서 사신에게 문안하는 것이 의리에 어그러지지 않고 적도 반드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무반(武班) 가운데에서 합당한 사람을 가려서 보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사신이 게첩한 뜻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자,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기를,
"사신은 도해하였는데 박의검이 전혀 왕래하지 않으면 사세가 마치 거절하는 것 같아서 적이 반드시 의심할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평조신(平調信)이 아직 저곳에 머물러 있다 하니, 말을 잘하는 자를 시켜 ‘천사가 무엇 때문에 나갔느냐.’고 묻게 하고, 통사(通使)가 양편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며 견제하고 지연시키게 하면 괜찮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싶다면 알맞은 사람을 가려서 보내라."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장희춘(蔣希春)과 이겸수(李兼受)를 보낼 만합니다."
하고, 동지(同知) 윤선각(尹先覺)이 아뢰기를,
"박의검을 바로 들여보내어 근수(跟隨)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박의검은 중국 사신을 모시고 들어간다고 말하고, 또 무반도 가려 보내어 사신의 회첩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의검이 전할 말이 있으면 수종인(隨從人)을 보내어 그 곡절을 알아 오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왜어(倭語)를 아는 사람을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윤선각이 아뢰기를,
"김선경 같은 자가 합당합니다. 배천(白川)에 있을 때에 왜어를 잘 알기 때문에 공로가 많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간 뜻을 모르겠다. 대개 사신이 조용히 들어갔다 하는데, 사신의 아랫사람을 죄다 데려갔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이제 유달증(兪達曾)의 말을 들으니, 사신이 거느리는 아랫사람은 죄다 데려갔으나, 우리 나라 사람은 한 사람도 데려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 정사(李正使)의 관하(管下)도 데려갔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그 수는 6백여 명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저 적의 성질은 본디 과장을 좋아하고, 중국 사신이 외이(外夷)의 나라에 가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러니 거느리고 가는 것이 간략하면 보기에 초라할 듯하므로 양 천사로 하여금 관하를 많이 거느려 위의(威儀)를 성대히 벌이게 하여 과시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들어간 뜻은 무엇인가?"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협박하였다면 난처한 일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랬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리에 미안하면 협박하더라도 가서는 안될 것이다. 아마 사신의 생각에는 고명(誥命)과 칙서(勑書)가 장차 올 것이라 하여 먼저 들어갔을 것이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왜적은 중국군이 나오게 되면 평양(平壤) 싸움처럼 될까 두려워서 협박하여 도해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윤선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병부(兵部)의 차부(箚付)에 ‘적이 죄다 철수하지 않았더라도 도해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부사(副使)가 간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왜적도 부산(釜山)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말이 본디 성지(聖旨)에 있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자, 도승지(都承旨) 오억령(吳億齡)이 【처심(處心)과 행사(行事)에 모난 것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험잡을 것이 없었다. 】 아뢰기를,
"그런 말이 있었다면 중국의 과도관(科道官)이 반드시 의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용절(龍節)이 왔는가? 고명(誥命)이 왔는가?"
하자, 윤선각이 말하기를,
"고책(誥冊)이 나왔다 하는데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도감(都監)이 아뢰지 않았습니다. 유달증이 듣기로는, 콩과 쌀의 짐바리와 복물(卜物)이 빗물에 젖으므로 쉽게 전진하지 못한다 합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양덕(楊德)이 제본(題本)을 가지고 갔는데, 그 행차가 조용하여 바쁘지 않은 듯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곳 사람이 양덕에게 묻기를 ‘사신이 도해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답하기를 ‘이곳에서도 의심스럽게 여겨지는데, 더구나 중국 조정에서이겠는가.’ 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죽도(竹島)의 적이 매우 성하고 안골(安骨)·가덕(加德)·부산 등에도 영진(營陣)이 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죽도의 적이 가장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중국 사신을 빨리 데려가는 것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적추의 영이 엄하여 그 아랫사람이 감히 어길 수 없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불행한 탓이다. 상천사(上天使)는 달아나서는 안되는데 달아나고 부사(副使)는 들어가서는 안되는데 들어갔으니, 다 우리 나라의 불행이다. 주문(奏聞)하는 일은 다만 이 일에 의거하여 할 것인가, 아니면 따로 다른 뜻이 있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우선 황신(黃愼)의 장계(狀啓)가 오기를 기다려서 적의 정세를 탐지해서 주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호군(護軍) 유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사명을 받든 신하는 으레 지체하여 쉽게 나아가지 못하니, 이제는 파발아(擺撥兒)를 시켜 황급히 치송(馳送)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손 군문(孫軍門)이 이 뜻을 안다면 갑자기 군사를 보내어 오겠는가?"
하자, 윤선각이 말하기를,
"전혀 무리한 일은 아닙니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로 인하여 군사를 보내준다면, 한편으로 형세를 보면서 군량을 미리 조치해 두고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 사신의 주문(奏聞)의 초고를 보지 못하였는가?"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단단히 봉하여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신이 무엇 때문에 들어갔는지 물은 데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하던가?"
하자, 유영경이 아뢰기를,
"전일 병부의 영(令)에 ‘왜가 아직 가지 않았더라도 도해하도록 하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고명이 없는데 지레 가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지금의 적세(賊勢)는 어느 때에나 정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근일에는 동란이 일어날 근심이 없을 듯하나 2∼3년 동안 쉰 뒤에는 조치가 있을 듯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전쟁으로 끝맺을 듯합니다. 중국군은 청하여 오게 할 수도 있으나, 나온다면 싸움이 잇따르고 화(禍)가 이어져서 사세가 반드시 어려워질 것이고, 저 적은 반드시 승세(勝勢)를 기필할 것이니, 그들이 서로 여러 해 동안 지구전을 한다면 우리 나라는 자연히 그 사이에 얼음이 녹아 없어지듯이 멸망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제독(李提督)이 전에 ‘부산의 적이 물러가고 나면 절강(浙江)의 포수(砲手)를 부산에서 훈련시킨 다음에 돌아가겠다.’ 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좋다. 그러나 지금 경상도는 다 분탕(焚蕩)되어 함안(咸安) 이하는 빈 땅으로 버려져서 지킬 방책이 전혀 없으니, 어쩌겠는가. 밤낮으로 생각하여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마침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저 적의 말에는 ‘양 사신을 모시고 대마도에 이른 뒤에 배가 곧 돌아와서 부산에 남은 왜를 싣고 건너갈 것이다.’ 하였으나, 요즈음 사세를 보면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있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 말은 거짓입니다. 요시라(要時羅)가 말하기를 ‘삼영(三營)의 왜는 머물러 있고 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한 말이 옳으면 다른 한 말은 그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성지(聖旨)로 약조한 세 가지에는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 하였으나, 지금에 와서 보면 중국 조정에서 약속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적(夷狄)의 우환은 예전부터 다 그러합니다. 한(漢)나라 때에 묵특(冒頓)이 말하기를 ‘나는 애송이니 어떻게 감히 한나라의 천자와 적대하겠는가.’ 하였으나, 들어와 본 뒤에는 도리어 한나라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고 발이 도리어 위에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대단히 분통합니다."
하고, 윤선각이 아뢰기를,
"손 군문에게 보낸 접반사(接伴使) 유근(柳根) 【재주가 덕(德)보다 승(勝)한 자이다. 글 솜씨는 혹 취할 수 있으나, 처신이 일정하지 않아 방(榜)에 게시된 간인(奸人)과 상종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안목은 엄정한 것이다. 】 은 이미 접반사로 호칭하였으나, 군문이 오지 않으므로 위에서 윤허하지 않으시니, 그렇다면 문안(問安)이라 칭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접반할 일이 별로 없는데 그곳에 오래 머무르면 폐단을 끼칠 것이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문안사(問安使)라 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사후 배신(伺候陪臣)이라 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후 배신이라 칭하면 형세상 반드시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신(黃愼)은 부사(副使)의 접반인데, 부사가 이미 도해하였으면 황신은 별로 할 일이 없을 것이니, 불러올 수 있겠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사신이 없으면 담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진 유격(陳遊擊)과 의논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 유격은 무엇 때문에 오래 머무르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적의 정세를 탐지하려고 그렇게 오래 머무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대규모의 군사가 나온다면 군량을 거두어 모으는 방책도 서둘러야 할 것이나, 마초(馬草)를 장만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을 신이 의주(義州)에 갔을 때에 보았습니다. 이제 미리 농사일이 뜸할 각도(各道)의 각역(各驛) 사람들을 시켜 때에 맞게 베어들여 대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하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군량은 중국 장수의 【섭 유격(葉遊擊). 】 권려가(勸勵歌)를 인출하여 각도에 나누어 주고 중국 장수가 지은 뜻을 일러서 각각 쌀을 내게 하여 각역과 각참(各站)에 미리 쌓아 두게 하였습니다. 다만 이러한 탁지(度支)234) 에 관계되는 일은 판서(判書) 【김수(金睟). 】 가 전적으로 맡았는데,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니, 언제 들어올지 모르겠습니다. 또 섭 유격의 게첩(揭帖)에 ‘각처의 추량(芻糧)을 점열(點閱)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주문(奏聞)은 매양 더디니, 빨리 보내야 하겠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주문하는 일은, 요즈음 대제학(大提學)이 없으므로 일마다 다 비변사에서 마감하기 때문에 매우 답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학(提學)도 없는가?"
하니, 윤선각이 아뢰기를,
"제학이 있기는 하나 중대한 문서는 스스로 결단해서 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책봉을 받고나서 중국 사신을 내보낸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윤선각이 아뢰기를,
"어찌 그렇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이의 곡절이 매우 많은데, 어찌 빨리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양 천사가 오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시라의 말에 ‘관백이 반드시 개시(開市)를 청할 것이다.’ 한 것은 삼포(三浦) 등의 일일 것이다. 개시라는 것은 머물러 살려는 것인가, 왕래하며 무역하려는 것인가?"
하고, 유성룡이 말하기를,
"평시에도 관백이 번번이 ‘제포(薺浦)에 길을 트기를 청한다.’ 하였는데, 기어이 제포로 길을 트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니, 윤선각이 말하기를,
"제포의 수로(水路)는 배를 이용하기에 편리하고 고기를 잡는 이익도 있으므로 그러는 것입니다. 부산은 길이 곧고 막힌 데가 없으며 고기를 잡기에도 좋지 않으므로 길을 트려 하지 않습니다. 전조(前朝)에서는 태안(泰安)·홍주(洪州) 등이 13년 동안 적에게 점거되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비로소 평정하셨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조에서 침범당한 일은 많았습니다. 혹 황간(黃澗)·영동(永同)에 들어오거나 선산(善山)·인동(仁同)에 들어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때에 어사(御史) 배모(裵某)라는 이가 사람을 보내어 타일렀더니, 왜인이 죽이려 하다가 예전부터 적국이 사자(使者)를 죽인 일이 없으므로 다행히 죽음을 면해 주었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전조 때에는 늘 왜적의 우환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우환이 있었더라도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총을 쏘고 진(陣)을 설치하는 것이 범상한 적과 비교가 안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부산에서 살려 한다면, 그들 소원대로 살게 할 것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꼬투리를 열어서는 안됩니다. 부산에서 살면 그 번짐이 그치지 않아서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저 적에게는 반드시 정해진 계책이 있을 것으로 부산에서 사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해진 계책이란 어떤 것인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정해진 계책이란, 큰 것은 곧바로 상국(上國)으로 가는 것이고 그 다음은 우리 나라를 침범하는 것인데, 근일에는 중국에 교통하기를 요구하려는 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우리의 도리는 주문하는 일을 다할 뿐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황신의 장계가 금명간에 올 것인데 오지 않고 있는 것은 무슨 일이오?"
하니, 윤선각이 말하기를,
"빗물이 이렇게 불어서 필시 길이 막혀 못오는 것으로 오늘은 들어올 것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7책 76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6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탁지(度支) : 국가 재정.
적장 청정이 유 총병에게 전하는 답서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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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3월 5일에 나온 장희춘(蔣希春)·이겸수(李謙受) 등이 적장 청정(淸正)이 유 총병에게 전하는 답서를 가지고 왔다. 그 겉봉에 ‘대명 도독부(大明都督府)에 청정은 답한다.’고 되어 있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부(貴府)는 영웅이요 준걸입니다. 준걸은 일을 함에 있어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결말을 지어 장부(丈夫)의 뜻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우리 관백은 일본 66국을 다스릴 조화술을 가지고 있어 한번 호령하면 온 나라 사람이 응하여 따르니, 이야말로 하늘이 내시고 땅이 기르신 영웅으로 용맹을 겸비하신 분입니다. 수명(壽命)의 장단(長短)을 헤아릴 수 없이 장원하니 이렇게 귀한 운명을 타고난 분은 천년 동안에 다시 없을 분이십니다. 관백께서는 66국을 아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칭호를 태합(太閤)이라 하고, 높은 명예를 얻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많은 군병을 거느리고 대명국(大明國)을 침벌하게 함으로써 이름을 후세에 드날려 남아(男兒)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이에 먼저 조선을 침벌하게 한 것입니다.
나 청정은 충량(忠良)한 사람입니다. 옛사람이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죽음을 두려워하면 충신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관백의 친병(親兵)과 양장(良將)을 거느리고 왔으니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한인(閑人)은 나를 훼방하나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내가 조선 왕자를 전장에서 포로로 잡았을 때 법에 의하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유희를 즐기었으며 태합 전하에 아뢰어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고향으로 환송하였으니, 나의 은혜는 바다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명(大明)과 조선(朝鮮)에서는 도리어 무정하게 나를 은혜도 의리도 없다 하니, 그대들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선 배신에게 묻노니, 대명 천자는 어떤 마음을 가진 분입니까? 대명과 조선이 군신의 의리로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다고 하나 어찌 남의 나라의 정사를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고명(高名)함에 대해서는 일본의 군중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그대의 장수들은 가소로운 자들이니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해 2월 사이에 풍중영(馮仲英)이 함경도에서 서신을 보내 나와 면회하기를 약속하였습니다. 빠르거나 더디거나 양단간 즉시 결정해야 하는데 오늘까지 오랫동안 한번 만나서 의사를 개진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양장(良將)·강병(强兵)들은 전쟁에서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습니다. 만약 대명과 조선을 상대하는 전쟁에서 우리 관백이 승리하신다면 면대하여 양쪽을 화해시키고 즉시 철병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하면 만백성들이 기뻐하여 생업을 편히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질없이 훼방하는 사람이 있어 시비를 말한다면, 나는 즉시 관백에게 글을 올려 알릴 것이니 그 죄가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금번에 보내온 서신의 뜻은 필요한 사무를 밝히지 않아 나의 마음에 만족하지 않은 데가 많습니다. 이곳에 마침 일이 있어 사람을 차임하여 글을 보내지 못하고 인편에 두어 자 적어 보내니 사리를 판단하여 자세히 규명하십시오. 이는 아무 사욕이 없는 나의 충성된 말입니다.
사람이 먼 앞날을 걱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생기는 것이니 일시적인 계책만 세우지 마십시오. 조선에 나온 일선의 장병들은 천인 가운데 영웅이고 만인 가운데 준걸입니다. 어찌 대명에 항복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작은 물방울이 떨어질 적에 막지 않으면 마침내는 강하(江河)를 이룬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화락(和樂)한 정치는 임금이 죽음으로써 선도(善道)를 지키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대명에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문리를 알고 대도에 통달한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일본국의 현달함을 알아 즉시 화해를 청하고 조선에서 물러나 결코 나의 말을 어김이 없을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29책 5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46면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외교-명(明)
선조실록 51권, 선조 27년 5월 6일 계미 5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유정이 왜적의 군영에 들어가 있었던 일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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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이 왜적의 군영에 들어가서 있었던 일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전일 적중에서 나온 정보년(鄭寶年)을 시켜 편지를 왜의 부장(副將) 희팔랑(喜八郞)에게 부치기를 ‘조선(朝鮮) 사신 대선사 북해(北海) 송운이 독부(督府)의 영문으로부터 귀진(貴陣)에 들어가 화해(和諧)의 뜻을 선유(宣諭)하고자 한다.’ 하고, 12일 출신(出身) 이겸수(李謙受) 등을 데리고 들어가니, 희팔랑이 묻기를 ‘그대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하고, 또 ‘어떠한 중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원수(元帥)의 명을 받들고 도독부 영문에서 왔다.’ 했는데, 희팔랑은 바로 청정이 총애하는 장수였습니다.
청정이 나와서 도독부(都督府)의 서찰과 왕자(王子)의 서찰에 대해 묻기에, 답하기를 ‘도독부의 서찰은 가지고 왔으나 왕자는 천자의 소명(召命)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청정이 소서비(小西飛)의 소재와 심 유격(沈遊擊)의 강화에 대한 일을 묻기에, 답하기를 ‘심 유격의 일은 성사될 리가 만무하다.’ 했습니다. 초저녁에 그의 처소로 인도되어 들어갔는데 청정이 ‘일은 기밀(機密)하게 함이 귀중하다.’ 하고, 글로 문답했는데, 승왜(僧倭) 2명이 조금은 서획(書畫)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답하는 일은 오로지 이 중들에게 맡겼으며 세 순배의 술을 마시고 밤이 깊어서야 물러와 잤습니다. 다음날 희팔랑이 심 유격의 강화의 조건을 유정(惟政)에게 보였는데, 첫째 천자(天子)와 혼인을 맺을 것, 둘째 조선의 땅을 갈라서 일본에 귀속시킬 것, 세째 전과 같이 교린(交隣)할 것, 네째 왕자(王子) 한 사람을 일본에 들여보내어 영주(永住)하게 할 것, 다섯째 조선의 대관 노인(大官老人)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등 모두 다섯 조목이었습니다."
선조실록 52권, 선조 27년 6월 26일 계유 5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경상좌도 병사 고언백이 이겸수를 보내 가등청정의 진영을 살피고 온 일을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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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 고언백(高彦伯)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울산(蔚山) 출신 이겸수(李謙受)를 제독부(提督府)의 글을 가지고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들여 보냈습니다. 겸수가 그곳에 도착하니, 희팔(喜八)이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독부(督府)에서 왔다.’ 하고, 이어 묻기를 ‘전일에 왔을 때는 너에게 즐거운 빛이 있더니 지금은 네게 즐겁지 않은 빛이 있으니 무슨 일인가? 하니, 희팔이 웃으면서 ‘관백(關白)의 사자가 부산에서 왔는데 네가 마침 왔다. 이리하여 복잡한 폐단이 생길까 염려되기 때문에 마음에 편치 못한 점이 있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관백의 사자도 내가 온 일을 아는가?’ 하니, 희팔이 ‘비밀의 일을 어찌 먼저 알게 하겠느냐.’ 하고서 희팔이 먼저 들어간 후에 겸수를 불렀다고 합니다.
겸수가 독부의 글을 가지고 들어가니 청정이 펴 보고 갑자기 노한 빛을 띠고 말하기를 ‘글 속에 어찌하여 실제적인 일은 없느냐? 대명(大明)과 조선이 우리와 화친을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내가 듣기로는 왕자군(王子君)이 서울에 있다는데 대명에 입조(入朝)하였다고 핑계하고 이제까지 보내오는 편지가 없고, 송운(松雲)도 경사에 올라갔다 핑계하고 오지 않으니 조선 사람은 한갓 거짓을 행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다. 2월부터 오갔으면서 아직까지도 결정이 나지 않으니 이 어찌 화친에 뜻이 있는 것이겠는가. 그저 우리의 허실을 정탐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내가 왕자의 답장을 바라는 것이 어찌 옥백(玉帛) 등 귀중품을 원해서이겠는가. 나와 함께 있다가 한번 헤어진 뒤로 전혀 소식이 없으므로 내가 보고 싶어서이다.’ 하였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54권, 선조 27년 8월 30일 을해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비변사에서 왜에게 반간계를 쓰는 일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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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장(賊將) 평의지와 평조신 등이 강화를 청한 서신은 군사 기밀에 관계되므로 그 처리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답서를 대략 기초해서 들이니, 이러한 사연으로 경상 감사에게 은밀히 유시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시켜 적의 병영에 회보하여 반간하는 계획을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 왜적의 서신도 경상 감사에게 보내서, 경주 사람으로서 청정의 병영에 왕래하는 자를 시켜 전달해서 돌리고 돌려 서로 격분케 하여 어부지리(漁夫之利)를 거두는 것도 또한 병가(兵家)의 좋은 계책입니다. 다만 이러한 일은 각별히 조심해서 적으로 하여금 반간하는 계책임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승장(僧將) 유정(惟政)이 가등청정의 병영에 들어갔다는데 지금까지도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또한 매우 염려됩니다. 감사로 하여금 다시 유정이 나오기를 기다려 적정 소재를 잘 살펴 만일 틈을 탈 만한 기회가 있으면 이겸수(李謙受)로 하여금 들어가서 청정의 부하 희팔(喜八) 등에게 은밀하게 말하기를 ‘내가 두 나라의 화해를 이루게 하고자 해서 왕래한 것이 한두 차례가 아니지만 늘 다른 왜인들 귀에 들어가지나 않을까 두려워 십분 조심해 왔다. 그런데 근자에 평행장 등이 이미 왕래한 사실을 알고 경상 감사에게 서신을 올렸는데, 대개 이르기를 「왕자가 나오도록 도모한 것은 청정이 한 것이 아니고 바로 행장이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와 강화를 상의하지 않는가. 」라고 하였으니, 일이 매우 괴이하다. 지금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 일만은 마땅히 알려야 하겠기에 말하는 것이다. 이후에 왕래하는 일은 절대로 의지 등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하게 하고, 적장이 이러한 말을 듣고 만약 그 서신을 보고자 하거든 열 겹이나 견고하게 싼 것을 이 겸수를 시켜 가지고 가 보여서 두 적장이 서로 의심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책입니다.
또 그 전에 일본 병위 제정(兵衛諸正) 등이 만약 항복하면 전에 분부(分付)한 대로 하고, 만약 후회하고 나오려고 하지 않거든 전일의 맹서(盟書)대로 청정이나 행장에게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제거하게 하는 것도 또한 좋은 계책입니다. 이러한 일은 다시 형세를 보아서 아뢴 후에 처리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4일 기묘 2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비변사가 왜적을 이간시킬 계책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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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니 송창세(宋昌世)가 말한 적중(賊中)의 사정은 비록 적의 꾀를 헤아릴 수 없다고는 했지만, 왜적들은 거의 부하(部下)가 배반하고 사졸(士卒)들이 원망하는 것으로 지금이 바로 하늘이 망하게 하려는 때입니다. 병가(兵家)의 이간(離間) 붙이는 기회가 실로 여기에 있으니 너무 의심하고 머뭇거려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목 병위(木兵衛)를 초유(招誘)하는 일은 전날 이미 분부하였으니 만일 몸을 빼내어 나온다면 마땅히 마음을 트고 성의를 다하여 관대하게 대접하여 그의 환심을 거두어야 합니다. 또 평의지(平義智)의 답서(答書)를 이미 계하(啓下)하였으니 경상 감사로 하여금 이에 의하여 회답하게 해도 무방합니다. 또 동래(東萊)의 적중에 있는 사람을 시켜 몰래 우도(右道)의 적진(賊陣)과 통하게 했다 합니다. 대명(大明)이 처음에는 봉작과 조공을 허락하여 중국 사신이 나올 때가 멀지 않았었는데 마침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사가 유 총병의 군영을 왕래하며 말하기를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실은 화친을 청할 뜻이 없으므로 오래지 않아 기병(起兵)하여 침범할 것이다.’하였습니다. 이를 총병이 요동에 전달, 보고하여 명조(明朝)가 이 사실을 알고는 심 유격(沈遊擊)을 심히 문책하자 심 유격이 극력 변론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깊이 믿지 않아 지금까지 망설이며 결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청정이 한짓이라고 하여 행장 등의 마음을 격발시키고 또 이겸수(李謙受)를 시켜 행장이 청정에게 분한 뜻이 있음을 말하여 청정의 노여움을 격발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긴절한 사기(事機)이고 기타 임기하여 처치하는 것은 오직 감사가 형세를 보고 잘 처리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임기하여 선처(善處)하고 원할하게 응변(應變)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감사가 아마도 잘하지 못할 것이니, 비변사가 주도 면밀하게 지수(指授)하도록 하라. 송창세가 이미 적정을 보고한 것으로 저 자신은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고 할 것이니, 비록 그의 술수에 빠진 것인지는 몰라도 우선 논상(論賞)하여 그의 마음을 거두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급히 그에게 관직(官職)을 제수하여 관교(官敎)를 만들어 보내고 이어서 일이 성사되면 마땅히 상을 더 줄 것이라고 효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76권, 선조 29년 6월 20일 병진 5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다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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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변사의 당상(堂上)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도해하였다는 말은 틀림없다. 박의검(朴義儉)을 내려보내는 일에 대해서 어제는 보낼 수 없다고 하였는데, 사신에게 보내는 회첩(回帖)은 그만둘 수 없는데다 또한 사정을 정탐하여 오지 않을 수 없다. 황신(黃愼)이 거느리는 역관(譯官)과 왜어 통사(倭語通事) 및 진 유격(陳遊擊) 【진운홍(陳雲鴻). 】 의 역관 김선경(金善慶) 등에게 말하여 박의검이 거느리는 자라 칭하여 들여보낸다면 마땅할 듯하다. 사신이 대마도에 오래 머무르면 왕래하는 중국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들여보내는 사람이 없으면 적의 정세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자,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체탐(體探)하는 것처럼 해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회첩(回帖)하는 일로 칭하여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또 적의 심술(心術)을 알 수 없기는 하나, 그 정상은 알 만하다. 어쩔 수 없이 예전에 변성명하여 간첩(間諜)하던 자처럼 하여 들여보내어 정탐하면 좋겠으나, 적당한 자가 없다. 적의 정상을 알기를 절실히 바란다면, 문안이라 핑계하고 아울러 게첩(揭帖)을 만들어 중국 사람과 함께 대마도에 들어가서 사신에게 문안하는 것이 의리에 어그러지지 않고 적도 반드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무반(武班) 가운데에서 합당한 사람을 가려서 보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사신이 게첩한 뜻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자,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기를,
"사신은 도해하였는데 박의검이 전혀 왕래하지 않으면 사세가 마치 거절하는 것 같아서 적이 반드시 의심할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평조신(平調信)이 아직 저곳에 머물러 있다 하니, 말을 잘하는 자를 시켜 ‘천사가 무엇 때문에 나갔느냐.’고 묻게 하고, 통사(通使)가 양편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며 견제하고 지연시키게 하면 괜찮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싶다면 알맞은 사람을 가려서 보내라."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장희춘(蔣希春)과 이겸수(李兼受)를 보낼 만합니다."
하고, 동지(同知) 윤선각(尹先覺)이 아뢰기를,
"박의검을 바로 들여보내어 근수(跟隨)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박의검은 중국 사신을 모시고 들어간다고 말하고, 또 무반도 가려 보내어 사신의 회첩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의검이 전할 말이 있으면 수종인(隨從人)을 보내어 그 곡절을 알아 오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왜어(倭語)를 아는 사람을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윤선각이 아뢰기를,
"김선경 같은 자가 합당합니다. 배천(白川)에 있을 때에 왜어를 잘 알기 때문에 공로가 많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간 뜻을 모르겠다. 대개 사신이 조용히 들어갔다 하는데, 사신의 아랫사람을 죄다 데려갔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이제 유달증(兪達曾)의 말을 들으니, 사신이 거느리는 아랫사람은 죄다 데려갔으나, 우리 나라 사람은 한 사람도 데려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 정사(李正使)의 관하(管下)도 데려갔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그 수는 6백여 명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저 적의 성질은 본디 과장을 좋아하고, 중국 사신이 외이(外夷)의 나라에 가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러니 거느리고 가는 것이 간략하면 보기에 초라할 듯하므로 양 천사로 하여금 관하를 많이 거느려 위의(威儀)를 성대히 벌이게 하여 과시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들어간 뜻은 무엇인가?"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협박하였다면 난처한 일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랬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리에 미안하면 협박하더라도 가서는 안될 것이다. 아마 사신의 생각에는 고명(誥命)과 칙서(勑書)가 장차 올 것이라 하여 먼저 들어갔을 것이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왜적은 중국군이 나오게 되면 평양(平壤) 싸움처럼 될까 두려워서 협박하여 도해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윤선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병부(兵部)의 차부(箚付)에 ‘적이 죄다 철수하지 않았더라도 도해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부사(副使)가 간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왜적도 부산(釜山)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말이 본디 성지(聖旨)에 있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자, 도승지(都承旨) 오억령(吳億齡)이 【처심(處心)과 행사(行事)에 모난 것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험잡을 것이 없었다. 】 아뢰기를,
"그런 말이 있었다면 중국의 과도관(科道官)이 반드시 의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용절(龍節)이 왔는가? 고명(誥命)이 왔는가?"
하자, 윤선각이 말하기를,
"고책(誥冊)이 나왔다 하는데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도감(都監)이 아뢰지 않았습니다. 유달증이 듣기로는, 콩과 쌀의 짐바리와 복물(卜物)이 빗물에 젖으므로 쉽게 전진하지 못한다 합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양덕(楊德)이 제본(題本)을 가지고 갔는데, 그 행차가 조용하여 바쁘지 않은 듯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곳 사람이 양덕에게 묻기를 ‘사신이 도해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답하기를 ‘이곳에서도 의심스럽게 여겨지는데, 더구나 중국 조정에서이겠는가.’ 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죽도(竹島)의 적이 매우 성하고 안골(安骨)·가덕(加德)·부산 등에도 영진(營陣)이 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죽도의 적이 가장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중국 사신을 빨리 데려가는 것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적추의 영이 엄하여 그 아랫사람이 감히 어길 수 없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불행한 탓이다. 상천사(上天使)는 달아나서는 안되는데 달아나고 부사(副使)는 들어가서는 안되는데 들어갔으니, 다 우리 나라의 불행이다. 주문(奏聞)하는 일은 다만 이 일에 의거하여 할 것인가, 아니면 따로 다른 뜻이 있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우선 황신(黃愼)의 장계(狀啓)가 오기를 기다려서 적의 정세를 탐지해서 주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호군(護軍) 유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사명을 받든 신하는 으레 지체하여 쉽게 나아가지 못하니, 이제는 파발아(擺撥兒)를 시켜 황급히 치송(馳送)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손 군문(孫軍門)이 이 뜻을 안다면 갑자기 군사를 보내어 오겠는가?"
하자, 윤선각이 말하기를,
"전혀 무리한 일은 아닙니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로 인하여 군사를 보내준다면, 한편으로 형세를 보면서 군량을 미리 조치해 두고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 사신의 주문(奏聞)의 초고를 보지 못하였는가?"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단단히 봉하여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신이 무엇 때문에 들어갔는지 물은 데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하던가?"
하자, 유영경이 아뢰기를,
"전일 병부의 영(令)에 ‘왜가 아직 가지 않았더라도 도해하도록 하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고명이 없는데 지레 가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지금의 적세(賊勢)는 어느 때에나 정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근일에는 동란이 일어날 근심이 없을 듯하나 2∼3년 동안 쉰 뒤에는 조치가 있을 듯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전쟁으로 끝맺을 듯합니다. 중국군은 청하여 오게 할 수도 있으나, 나온다면 싸움이 잇따르고 화(禍)가 이어져서 사세가 반드시 어려워질 것이고, 저 적은 반드시 승세(勝勢)를 기필할 것이니, 그들이 서로 여러 해 동안 지구전을 한다면 우리 나라는 자연히 그 사이에 얼음이 녹아 없어지듯이 멸망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제독(李提督)이 전에 ‘부산의 적이 물러가고 나면 절강(浙江)의 포수(砲手)를 부산에서 훈련시킨 다음에 돌아가겠다.’ 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좋다. 그러나 지금 경상도는 다 분탕(焚蕩)되어 함안(咸安) 이하는 빈 땅으로 버려져서 지킬 방책이 전혀 없으니, 어쩌겠는가. 밤낮으로 생각하여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마침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저 적의 말에는 ‘양 사신을 모시고 대마도에 이른 뒤에 배가 곧 돌아와서 부산에 남은 왜를 싣고 건너갈 것이다.’ 하였으나, 요즈음 사세를 보면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있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 말은 거짓입니다. 요시라(要時羅)가 말하기를 ‘삼영(三營)의 왜는 머물러 있고 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한 말이 옳으면 다른 한 말은 그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성지(聖旨)로 약조한 세 가지에는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 하였으나, 지금에 와서 보면 중국 조정에서 약속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적(夷狄)의 우환은 예전부터 다 그러합니다. 한(漢)나라 때에 묵특(冒頓)이 말하기를 ‘나는 애송이니 어떻게 감히 한나라의 천자와 적대하겠는가.’ 하였으나, 들어와 본 뒤에는 도리어 한나라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고 발이 도리어 위에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대단히 분통합니다."
하고, 윤선각이 아뢰기를,
"손 군문에게 보낸 접반사(接伴使) 유근(柳根) 【재주가 덕(德)보다 승(勝)한 자이다. 글 솜씨는 혹 취할 수 있으나, 처신이 일정하지 않아 방(榜)에 게시된 간인(奸人)과 상종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안목은 엄정한 것이다. 】 은 이미 접반사로 호칭하였으나, 군문이 오지 않으므로 위에서 윤허하지 않으시니, 그렇다면 문안(問安)이라 칭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접반할 일이 별로 없는데 그곳에 오래 머무르면 폐단을 끼칠 것이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문안사(問安使)라 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사후 배신(伺候陪臣)이라 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후 배신이라 칭하면 형세상 반드시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신(黃愼)은 부사(副使)의 접반인데, 부사가 이미 도해하였으면 황신은 별로 할 일이 없을 것이니, 불러올 수 있겠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사신이 없으면 담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진 유격(陳遊擊)과 의논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 유격은 무엇 때문에 오래 머무르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적의 정세를 탐지하려고 그렇게 오래 머무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대규모의 군사가 나온다면 군량을 거두어 모으는 방책도 서둘러야 할 것이나, 마초(馬草)를 장만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을 신이 의주(義州)에 갔을 때에 보았습니다. 이제 미리 농사일이 뜸할 각도(各道)의 각역(各驛) 사람들을 시켜 때에 맞게 베어들여 대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하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군량은 중국 장수의 【섭 유격(葉遊擊). 】 권려가(勸勵歌)를 인출하여 각도에 나누어 주고 중국 장수가 지은 뜻을 일러서 각각 쌀을 내게 하여 각역과 각참(各站)에 미리 쌓아 두게 하였습니다. 다만 이러한 탁지(度支)234) 에 관계되는 일은 판서(判書) 【김수(金睟). 】 가 전적으로 맡았는데,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니, 언제 들어올지 모르겠습니다. 또 섭 유격의 게첩(揭帖)에 ‘각처의 추량(芻糧)을 점열(點閱)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주문(奏聞)은 매양 더디니, 빨리 보내야 하겠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주문하는 일은, 요즈음 대제학(大提學)이 없으므로 일마다 다 비변사에서 마감하기 때문에 매우 답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학(提學)도 없는가?"
하니, 윤선각이 아뢰기를,
"제학이 있기는 하나 중대한 문서는 스스로 결단해서 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책봉을 받고나서 중국 사신을 내보낸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윤선각이 아뢰기를,
"어찌 그렇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이의 곡절이 매우 많은데, 어찌 빨리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양 천사가 오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시라의 말에 ‘관백이 반드시 개시(開市)를 청할 것이다.’ 한 것은 삼포(三浦) 등의 일일 것이다. 개시라는 것은 머물러 살려는 것인가, 왕래하며 무역하려는 것인가?"
하고, 유성룡이 말하기를,
"평시에도 관백이 번번이 ‘제포(薺浦)에 길을 트기를 청한다.’ 하였는데, 기어이 제포로 길을 트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니, 윤선각이 말하기를,
"제포의 수로(水路)는 배를 이용하기에 편리하고 고기를 잡는 이익도 있으므로 그러는 것입니다. 부산은 길이 곧고 막힌 데가 없으며 고기를 잡기에도 좋지 않으므로 길을 트려 하지 않습니다. 전조(前朝)에서는 태안(泰安)·홍주(洪州) 등이 13년 동안 적에게 점거되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비로소 평정하셨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조에서 침범당한 일은 많았습니다. 혹 황간(黃澗)·영동(永同)에 들어오거나 선산(善山)·인동(仁同)에 들어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때에 어사(御史) 배모(裵某)라는 이가 사람을 보내어 타일렀더니, 왜인이 죽이려 하다가 예전부터 적국이 사자(使者)를 죽인 일이 없으므로 다행히 죽음을 면해 주었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전조 때에는 늘 왜적의 우환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우환이 있었더라도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총을 쏘고 진(陣)을 설치하는 것이 범상한 적과 비교가 안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부산에서 살려 한다면, 그들 소원대로 살게 할 것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꼬투리를 열어서는 안됩니다. 부산에서 살면 그 번짐이 그치지 않아서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저 적에게는 반드시 정해진 계책이 있을 것으로 부산에서 사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해진 계책이란 어떤 것인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정해진 계책이란, 큰 것은 곧바로 상국(上國)으로 가는 것이고 그 다음은 우리 나라를 침범하는 것인데, 근일에는 중국에 교통하기를 요구하려는 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우리의 도리는 주문하는 일을 다할 뿐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황신의 장계가 금명간에 올 것인데 오지 않고 있는 것은 무슨 일이오?"
하니, 윤선각이 말하기를,
"빗물이 이렇게 불어서 필시 길이 막혀 못오는 것으로 오늘은 들어올 것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7책 76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6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탁지(度支) : 국가 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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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3월 5일에 나온 장희춘(蔣希春)·이겸수(李謙受) 등이 적장 청정(淸正)이 유 총병에게 전하는 답서를 가지고 왔다. 그 겉봉에 ‘대명 도독부(大明都督府)에 청정은 답한다.’고 되어 있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부(貴府)는 영웅이요 준걸입니다. 준걸은 일을 함에 있어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결말을 지어 장부(丈夫)의 뜻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우리 관백은 일본 66국을 다스릴 조화술을 가지고 있어 한번 호령하면 온 나라 사람이 응하여 따르니, 이야말로 하늘이 내시고 땅이 기르신 영웅으로 용맹을 겸비하신 분입니다. 수명(壽命)의 장단(長短)을 헤아릴 수 없이 장원하니 이렇게 귀한 운명을 타고난 분은 천년 동안에 다시 없을 분이십니다. 관백께서는 66국을 아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칭호를 태합(太閤)이라 하고, 높은 명예를 얻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많은 군병을 거느리고 대명국(大明國)을 침벌하게 함으로써 이름을 후세에 드날려 남아(男兒)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이에 먼저 조선을 침벌하게 한 것입니다.
나 청정은 충량(忠良)한 사람입니다. 옛사람이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죽음을 두려워하면 충신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관백의 친병(親兵)과 양장(良將)을 거느리고 왔으니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한인(閑人)은 나를 훼방하나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내가 조선 왕자를 전장에서 포로로 잡았을 때 법에 의하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유희를 즐기었으며 태합 전하에 아뢰어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고향으로 환송하였으니, 나의 은혜는 바다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명(大明)과 조선(朝鮮)에서는 도리어 무정하게 나를 은혜도 의리도 없다 하니, 그대들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선 배신에게 묻노니, 대명 천자는 어떤 마음을 가진 분입니까? 대명과 조선이 군신의 의리로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다고 하나 어찌 남의 나라의 정사를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고명(高名)함에 대해서는 일본의 군중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그대의 장수들은 가소로운 자들이니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해 2월 사이에 풍중영(馮仲英)이 함경도에서 서신을 보내 나와 면회하기를 약속하였습니다. 빠르거나 더디거나 양단간 즉시 결정해야 하는데 오늘까지 오랫동안 한번 만나서 의사를 개진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양장(良將)·강병(强兵)들은 전쟁에서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습니다. 만약 대명과 조선을 상대하는 전쟁에서 우리 관백이 승리하신다면 면대하여 양쪽을 화해시키고 즉시 철병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하면 만백성들이 기뻐하여 생업을 편히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질없이 훼방하는 사람이 있어 시비를 말한다면, 나는 즉시 관백에게 글을 올려 알릴 것이니 그 죄가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금번에 보내온 서신의 뜻은 필요한 사무를 밝히지 않아 나의 마음에 만족하지 않은 데가 많습니다. 이곳에 마침 일이 있어 사람을 차임하여 글을 보내지 못하고 인편에 두어 자 적어 보내니 사리를 판단하여 자세히 규명하십시오. 이는 아무 사욕이 없는 나의 충성된 말입니다.
사람이 먼 앞날을 걱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생기는 것이니 일시적인 계책만 세우지 마십시오. 조선에 나온 일선의 장병들은 천인 가운데 영웅이고 만인 가운데 준걸입니다. 어찌 대명에 항복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작은 물방울이 떨어질 적에 막지 않으면 마침내는 강하(江河)를 이룬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화락(和樂)한 정치는 임금이 죽음으로써 선도(善道)를 지키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대명에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문리를 알고 대도에 통달한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일본국의 현달함을 알아 즉시 화해를 청하고 조선에서 물러나 결코 나의 말을 어김이 없을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29책 5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46면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외교-명(明)
선조실록 51권, 선조 27년 5월 6일 계미 5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유정이 왜적의 군영에 들어가 있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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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이 왜적의 군영에 들어가서 있었던 일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전일 적중에서 나온 정보년(鄭寶年)을 시켜 편지를 왜의 부장(副將) 희팔랑(喜八郞)에게 부치기를 ‘조선(朝鮮) 사신 대선사 북해(北海) 송운이 독부(督府)의 영문으로부터 귀진(貴陣)에 들어가 화해(和諧)의 뜻을 선유(宣諭)하고자 한다.’ 하고, 12일 출신(出身) 이겸수(李謙受) 등을 데리고 들어가니, 희팔랑이 묻기를 ‘그대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하고, 또 ‘어떠한 중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원수(元帥)의 명을 받들고 도독부 영문에서 왔다.’ 했는데, 희팔랑은 바로 청정이 총애하는 장수였습니다.
청정이 나와서 도독부(都督府)의 서찰과 왕자(王子)의 서찰에 대해 묻기에, 답하기를 ‘도독부의 서찰은 가지고 왔으나 왕자는 천자의 소명(召命)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청정이 소서비(小西飛)의 소재와 심 유격(沈遊擊)의 강화에 대한 일을 묻기에, 답하기를 ‘심 유격의 일은 성사될 리가 만무하다.’ 했습니다. 초저녁에 그의 처소로 인도되어 들어갔는데 청정이 ‘일은 기밀(機密)하게 함이 귀중하다.’ 하고, 글로 문답했는데, 승왜(僧倭) 2명이 조금은 서획(書畫)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답하는 일은 오로지 이 중들에게 맡겼으며 세 순배의 술을 마시고 밤이 깊어서야 물러와 잤습니다. 다음날 희팔랑이 심 유격의 강화의 조건을 유정(惟政)에게 보였는데, 첫째 천자(天子)와 혼인을 맺을 것, 둘째 조선의 땅을 갈라서 일본에 귀속시킬 것, 세째 전과 같이 교린(交隣)할 것, 네째 왕자(王子) 한 사람을 일본에 들여보내어 영주(永住)하게 할 것, 다섯째 조선의 대관 노인(大官老人)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등 모두 다섯 조목이었습니다."
선조실록 52권, 선조 27년 6월 26일 계유 5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경상좌도 병사 고언백이 이겸수를 보내 가등청정의 진영을 살피고 온 일을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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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 고언백(高彦伯)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울산(蔚山) 출신 이겸수(李謙受)를 제독부(提督府)의 글을 가지고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들여 보냈습니다. 겸수가 그곳에 도착하니, 희팔(喜八)이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독부(督府)에서 왔다.’ 하고, 이어 묻기를 ‘전일에 왔을 때는 너에게 즐거운 빛이 있더니 지금은 네게 즐겁지 않은 빛이 있으니 무슨 일인가? 하니, 희팔이 웃으면서 ‘관백(關白)의 사자가 부산에서 왔는데 네가 마침 왔다. 이리하여 복잡한 폐단이 생길까 염려되기 때문에 마음에 편치 못한 점이 있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관백의 사자도 내가 온 일을 아는가?’ 하니, 희팔이 ‘비밀의 일을 어찌 먼저 알게 하겠느냐.’ 하고서 희팔이 먼저 들어간 후에 겸수를 불렀다고 합니다.
겸수가 독부의 글을 가지고 들어가니 청정이 펴 보고 갑자기 노한 빛을 띠고 말하기를 ‘글 속에 어찌하여 실제적인 일은 없느냐? 대명(大明)과 조선이 우리와 화친을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내가 듣기로는 왕자군(王子君)이 서울에 있다는데 대명에 입조(入朝)하였다고 핑계하고 이제까지 보내오는 편지가 없고, 송운(松雲)도 경사에 올라갔다 핑계하고 오지 않으니 조선 사람은 한갓 거짓을 행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다. 2월부터 오갔으면서 아직까지도 결정이 나지 않으니 이 어찌 화친에 뜻이 있는 것이겠는가. 그저 우리의 허실을 정탐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내가 왕자의 답장을 바라는 것이 어찌 옥백(玉帛) 등 귀중품을 원해서이겠는가. 나와 함께 있다가 한번 헤어진 뒤로 전혀 소식이 없으므로 내가 보고 싶어서이다.’ 하였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54권, 선조 27년 8월 30일 을해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비변사에서 왜에게 반간계를 쓰는 일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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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장(賊將) 평의지와 평조신 등이 강화를 청한 서신은 군사 기밀에 관계되므로 그 처리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답서를 대략 기초해서 들이니, 이러한 사연으로 경상 감사에게 은밀히 유시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시켜 적의 병영에 회보하여 반간하는 계획을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 왜적의 서신도 경상 감사에게 보내서, 경주 사람으로서 청정의 병영에 왕래하는 자를 시켜 전달해서 돌리고 돌려 서로 격분케 하여 어부지리(漁夫之利)를 거두는 것도 또한 병가(兵家)의 좋은 계책입니다. 다만 이러한 일은 각별히 조심해서 적으로 하여금 반간하는 계책임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승장(僧將) 유정(惟政)이 가등청정의 병영에 들어갔다는데 지금까지도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또한 매우 염려됩니다. 감사로 하여금 다시 유정이 나오기를 기다려 적정 소재를 잘 살펴 만일 틈을 탈 만한 기회가 있으면 이겸수(李謙受)로 하여금 들어가서 청정의 부하 희팔(喜八) 등에게 은밀하게 말하기를 ‘내가 두 나라의 화해를 이루게 하고자 해서 왕래한 것이 한두 차례가 아니지만 늘 다른 왜인들 귀에 들어가지나 않을까 두려워 십분 조심해 왔다. 그런데 근자에 평행장 등이 이미 왕래한 사실을 알고 경상 감사에게 서신을 올렸는데, 대개 이르기를 「왕자가 나오도록 도모한 것은 청정이 한 것이 아니고 바로 행장이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와 강화를 상의하지 않는가. 」라고 하였으니, 일이 매우 괴이하다. 지금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 일만은 마땅히 알려야 하겠기에 말하는 것이다. 이후에 왕래하는 일은 절대로 의지 등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하게 하고, 적장이 이러한 말을 듣고 만약 그 서신을 보고자 하거든 열 겹이나 견고하게 싼 것을 이 겸수를 시켜 가지고 가 보여서 두 적장이 서로 의심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책입니다.
또 그 전에 일본 병위 제정(兵衛諸正) 등이 만약 항복하면 전에 분부(分付)한 대로 하고, 만약 후회하고 나오려고 하지 않거든 전일의 맹서(盟書)대로 청정이나 행장에게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제거하게 하는 것도 또한 좋은 계책입니다. 이러한 일은 다시 형세를 보아서 아뢴 후에 처리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4일 기묘 2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비변사가 왜적을 이간시킬 계책을 아뢰다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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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니 송창세(宋昌世)가 말한 적중(賊中)의 사정은 비록 적의 꾀를 헤아릴 수 없다고는 했지만, 왜적들은 거의 부하(部下)가 배반하고 사졸(士卒)들이 원망하는 것으로 지금이 바로 하늘이 망하게 하려는 때입니다. 병가(兵家)의 이간(離間) 붙이는 기회가 실로 여기에 있으니 너무 의심하고 머뭇거려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목 병위(木兵衛)를 초유(招誘)하는 일은 전날 이미 분부하였으니 만일 몸을 빼내어 나온다면 마땅히 마음을 트고 성의를 다하여 관대하게 대접하여 그의 환심을 거두어야 합니다. 또 평의지(平義智)의 답서(答書)를 이미 계하(啓下)하였으니 경상 감사로 하여금 이에 의하여 회답하게 해도 무방합니다. 또 동래(東萊)의 적중에 있는 사람을 시켜 몰래 우도(右道)의 적진(賊陣)과 통하게 했다 합니다. 대명(大明)이 처음에는 봉작과 조공을 허락하여 중국 사신이 나올 때가 멀지 않았었는데 마침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사가 유 총병의 군영을 왕래하며 말하기를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실은 화친을 청할 뜻이 없으므로 오래지 않아 기병(起兵)하여 침범할 것이다.’하였습니다. 이를 총병이 요동에 전달, 보고하여 명조(明朝)가 이 사실을 알고는 심 유격(沈遊擊)을 심히 문책하자 심 유격이 극력 변론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깊이 믿지 않아 지금까지 망설이며 결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청정이 한짓이라고 하여 행장 등의 마음을 격발시키고 또 이겸수(李謙受)를 시켜 행장이 청정에게 분한 뜻이 있음을 말하여 청정의 노여움을 격발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긴절한 사기(事機)이고 기타 임기하여 처치하는 것은 오직 감사가 형세를 보고 잘 처리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임기하여 선처(善處)하고 원할하게 응변(應變)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감사가 아마도 잘하지 못할 것이니, 비변사가 주도 면밀하게 지수(指授)하도록 하라. 송창세가 이미 적정을 보고한 것으로 저 자신은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고 할 것이니, 비록 그의 술수에 빠진 것인지는 몰라도 우선 논상(論賞)하여 그의 마음을 거두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급히 그에게 관직(官職)을 제수하여 관교(官敎)를 만들어 보내고 이어서 일이 성사되면 마땅히 상을 더 줄 것이라고 효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76권, 선조 29년 6월 20일 병진 5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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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변사의 당상(堂上)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도해하였다는 말은 틀림없다. 박의검(朴義儉)을 내려보내는 일에 대해서 어제는 보낼 수 없다고 하였는데, 사신에게 보내는 회첩(回帖)은 그만둘 수 없는데다 또한 사정을 정탐하여 오지 않을 수 없다. 황신(黃愼)이 거느리는 역관(譯官)과 왜어 통사(倭語通事) 및 진 유격(陳遊擊) 【진운홍(陳雲鴻). 】 의 역관 김선경(金善慶) 등에게 말하여 박의검이 거느리는 자라 칭하여 들여보낸다면 마땅할 듯하다. 사신이 대마도에 오래 머무르면 왕래하는 중국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들여보내는 사람이 없으면 적의 정세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자,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체탐(體探)하는 것처럼 해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회첩(回帖)하는 일로 칭하여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또 적의 심술(心術)을 알 수 없기는 하나, 그 정상은 알 만하다. 어쩔 수 없이 예전에 변성명하여 간첩(間諜)하던 자처럼 하여 들여보내어 정탐하면 좋겠으나, 적당한 자가 없다. 적의 정상을 알기를 절실히 바란다면, 문안이라 핑계하고 아울러 게첩(揭帖)을 만들어 중국 사람과 함께 대마도에 들어가서 사신에게 문안하는 것이 의리에 어그러지지 않고 적도 반드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무반(武班) 가운데에서 합당한 사람을 가려서 보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사신이 게첩한 뜻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자,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기를,
"사신은 도해하였는데 박의검이 전혀 왕래하지 않으면 사세가 마치 거절하는 것 같아서 적이 반드시 의심할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평조신(平調信)이 아직 저곳에 머물러 있다 하니, 말을 잘하는 자를 시켜 ‘천사가 무엇 때문에 나갔느냐.’고 묻게 하고, 통사(通使)가 양편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며 견제하고 지연시키게 하면 괜찮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싶다면 알맞은 사람을 가려서 보내라."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장희춘(蔣希春)과 이겸수(李兼受)를 보낼 만합니다."
하고, 동지(同知) 윤선각(尹先覺)이 아뢰기를,
"박의검을 바로 들여보내어 근수(跟隨)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박의검은 중국 사신을 모시고 들어간다고 말하고, 또 무반도 가려 보내어 사신의 회첩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의검이 전할 말이 있으면 수종인(隨從人)을 보내어 그 곡절을 알아 오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왜어(倭語)를 아는 사람을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윤선각이 아뢰기를,
"김선경 같은 자가 합당합니다. 배천(白川)에 있을 때에 왜어를 잘 알기 때문에 공로가 많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간 뜻을 모르겠다. 대개 사신이 조용히 들어갔다 하는데, 사신의 아랫사람을 죄다 데려갔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이제 유달증(兪達曾)의 말을 들으니, 사신이 거느리는 아랫사람은 죄다 데려갔으나, 우리 나라 사람은 한 사람도 데려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 정사(李正使)의 관하(管下)도 데려갔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그 수는 6백여 명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저 적의 성질은 본디 과장을 좋아하고, 중국 사신이 외이(外夷)의 나라에 가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러니 거느리고 가는 것이 간략하면 보기에 초라할 듯하므로 양 천사로 하여금 관하를 많이 거느려 위의(威儀)를 성대히 벌이게 하여 과시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들어간 뜻은 무엇인가?"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협박하였다면 난처한 일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랬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리에 미안하면 협박하더라도 가서는 안될 것이다. 아마 사신의 생각에는 고명(誥命)과 칙서(勑書)가 장차 올 것이라 하여 먼저 들어갔을 것이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왜적은 중국군이 나오게 되면 평양(平壤) 싸움처럼 될까 두려워서 협박하여 도해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윤선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병부(兵部)의 차부(箚付)에 ‘적이 죄다 철수하지 않았더라도 도해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부사(副使)가 간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왜적도 부산(釜山)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말이 본디 성지(聖旨)에 있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자, 도승지(都承旨) 오억령(吳億齡)이 【처심(處心)과 행사(行事)에 모난 것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험잡을 것이 없었다. 】 아뢰기를,
"그런 말이 있었다면 중국의 과도관(科道官)이 반드시 의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용절(龍節)이 왔는가? 고명(誥命)이 왔는가?"
하자, 윤선각이 말하기를,
"고책(誥冊)이 나왔다 하는데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도감(都監)이 아뢰지 않았습니다. 유달증이 듣기로는, 콩과 쌀의 짐바리와 복물(卜物)이 빗물에 젖으므로 쉽게 전진하지 못한다 합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양덕(楊德)이 제본(題本)을 가지고 갔는데, 그 행차가 조용하여 바쁘지 않은 듯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곳 사람이 양덕에게 묻기를 ‘사신이 도해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답하기를 ‘이곳에서도 의심스럽게 여겨지는데, 더구나 중국 조정에서이겠는가.’ 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죽도(竹島)의 적이 매우 성하고 안골(安骨)·가덕(加德)·부산 등에도 영진(營陣)이 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죽도의 적이 가장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중국 사신을 빨리 데려가는 것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적추의 영이 엄하여 그 아랫사람이 감히 어길 수 없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불행한 탓이다. 상천사(上天使)는 달아나서는 안되는데 달아나고 부사(副使)는 들어가서는 안되는데 들어갔으니, 다 우리 나라의 불행이다. 주문(奏聞)하는 일은 다만 이 일에 의거하여 할 것인가, 아니면 따로 다른 뜻이 있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우선 황신(黃愼)의 장계(狀啓)가 오기를 기다려서 적의 정세를 탐지해서 주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호군(護軍) 유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사명을 받든 신하는 으레 지체하여 쉽게 나아가지 못하니, 이제는 파발아(擺撥兒)를 시켜 황급히 치송(馳送)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손 군문(孫軍門)이 이 뜻을 안다면 갑자기 군사를 보내어 오겠는가?"
하자, 윤선각이 말하기를,
"전혀 무리한 일은 아닙니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로 인하여 군사를 보내준다면, 한편으로 형세를 보면서 군량을 미리 조치해 두고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 사신의 주문(奏聞)의 초고를 보지 못하였는가?"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단단히 봉하여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신이 무엇 때문에 들어갔는지 물은 데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하던가?"
하자, 유영경이 아뢰기를,
"전일 병부의 영(令)에 ‘왜가 아직 가지 않았더라도 도해하도록 하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고명이 없는데 지레 가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지금의 적세(賊勢)는 어느 때에나 정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근일에는 동란이 일어날 근심이 없을 듯하나 2∼3년 동안 쉰 뒤에는 조치가 있을 듯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전쟁으로 끝맺을 듯합니다. 중국군은 청하여 오게 할 수도 있으나, 나온다면 싸움이 잇따르고 화(禍)가 이어져서 사세가 반드시 어려워질 것이고, 저 적은 반드시 승세(勝勢)를 기필할 것이니, 그들이 서로 여러 해 동안 지구전을 한다면 우리 나라는 자연히 그 사이에 얼음이 녹아 없어지듯이 멸망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제독(李提督)이 전에 ‘부산의 적이 물러가고 나면 절강(浙江)의 포수(砲手)를 부산에서 훈련시킨 다음에 돌아가겠다.’ 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좋다. 그러나 지금 경상도는 다 분탕(焚蕩)되어 함안(咸安) 이하는 빈 땅으로 버려져서 지킬 방책이 전혀 없으니, 어쩌겠는가. 밤낮으로 생각하여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마침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저 적의 말에는 ‘양 사신을 모시고 대마도에 이른 뒤에 배가 곧 돌아와서 부산에 남은 왜를 싣고 건너갈 것이다.’ 하였으나, 요즈음 사세를 보면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있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 말은 거짓입니다. 요시라(要時羅)가 말하기를 ‘삼영(三營)의 왜는 머물러 있고 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한 말이 옳으면 다른 한 말은 그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성지(聖旨)로 약조한 세 가지에는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 하였으나, 지금에 와서 보면 중국 조정에서 약속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적(夷狄)의 우환은 예전부터 다 그러합니다. 한(漢)나라 때에 묵특(冒頓)이 말하기를 ‘나는 애송이니 어떻게 감히 한나라의 천자와 적대하겠는가.’ 하였으나, 들어와 본 뒤에는 도리어 한나라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고 발이 도리어 위에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대단히 분통합니다."
하고, 윤선각이 아뢰기를,
"손 군문에게 보낸 접반사(接伴使) 유근(柳根) 【재주가 덕(德)보다 승(勝)한 자이다. 글 솜씨는 혹 취할 수 있으나, 처신이 일정하지 않아 방(榜)에 게시된 간인(奸人)과 상종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안목은 엄정한 것이다. 】 은 이미 접반사로 호칭하였으나, 군문이 오지 않으므로 위에서 윤허하지 않으시니, 그렇다면 문안(問安)이라 칭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접반할 일이 별로 없는데 그곳에 오래 머무르면 폐단을 끼칠 것이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문안사(問安使)라 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사후 배신(伺候陪臣)이라 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후 배신이라 칭하면 형세상 반드시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신(黃愼)은 부사(副使)의 접반인데, 부사가 이미 도해하였으면 황신은 별로 할 일이 없을 것이니, 불러올 수 있겠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사신이 없으면 담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진 유격(陳遊擊)과 의논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 유격은 무엇 때문에 오래 머무르는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적의 정세를 탐지하려고 그렇게 오래 머무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대규모의 군사가 나온다면 군량을 거두어 모으는 방책도 서둘러야 할 것이나, 마초(馬草)를 장만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을 신이 의주(義州)에 갔을 때에 보았습니다. 이제 미리 농사일이 뜸할 각도(各道)의 각역(各驛) 사람들을 시켜 때에 맞게 베어들여 대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하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군량은 중국 장수의 【섭 유격(葉遊擊). 】 권려가(勸勵歌)를 인출하여 각도에 나누어 주고 중국 장수가 지은 뜻을 일러서 각각 쌀을 내게 하여 각역과 각참(各站)에 미리 쌓아 두게 하였습니다. 다만 이러한 탁지(度支)234) 에 관계되는 일은 판서(判書) 【김수(金睟). 】 가 전적으로 맡았는데,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니, 언제 들어올지 모르겠습니다. 또 섭 유격의 게첩(揭帖)에 ‘각처의 추량(芻糧)을 점열(點閱)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주문(奏聞)은 매양 더디니, 빨리 보내야 하겠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주문하는 일은, 요즈음 대제학(大提學)이 없으므로 일마다 다 비변사에서 마감하기 때문에 매우 답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학(提學)도 없는가?"
하니, 윤선각이 아뢰기를,
"제학이 있기는 하나 중대한 문서는 스스로 결단해서 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책봉을 받고나서 중국 사신을 내보낸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윤선각이 아뢰기를,
"어찌 그렇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이의 곡절이 매우 많은데, 어찌 빨리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양 천사가 오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시라의 말에 ‘관백이 반드시 개시(開市)를 청할 것이다.’ 한 것은 삼포(三浦) 등의 일일 것이다. 개시라는 것은 머물러 살려는 것인가, 왕래하며 무역하려는 것인가?"
하고, 유성룡이 말하기를,
"평시에도 관백이 번번이 ‘제포(薺浦)에 길을 트기를 청한다.’ 하였는데, 기어이 제포로 길을 트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니, 윤선각이 말하기를,
"제포의 수로(水路)는 배를 이용하기에 편리하고 고기를 잡는 이익도 있으므로 그러는 것입니다. 부산은 길이 곧고 막힌 데가 없으며 고기를 잡기에도 좋지 않으므로 길을 트려 하지 않습니다. 전조(前朝)에서는 태안(泰安)·홍주(洪州) 등이 13년 동안 적에게 점거되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비로소 평정하셨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조에서 침범당한 일은 많았습니다. 혹 황간(黃澗)·영동(永同)에 들어오거나 선산(善山)·인동(仁同)에 들어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때에 어사(御史) 배모(裵某)라는 이가 사람을 보내어 타일렀더니, 왜인이 죽이려 하다가 예전부터 적국이 사자(使者)를 죽인 일이 없으므로 다행히 죽음을 면해 주었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전조 때에는 늘 왜적의 우환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우환이 있었더라도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총을 쏘고 진(陣)을 설치하는 것이 범상한 적과 비교가 안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부산에서 살려 한다면, 그들 소원대로 살게 할 것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꼬투리를 열어서는 안됩니다. 부산에서 살면 그 번짐이 그치지 않아서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저 적에게는 반드시 정해진 계책이 있을 것으로 부산에서 사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해진 계책이란 어떤 것인가?"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정해진 계책이란, 큰 것은 곧바로 상국(上國)으로 가는 것이고 그 다음은 우리 나라를 침범하는 것인데, 근일에는 중국에 교통하기를 요구하려는 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우리의 도리는 주문하는 일을 다할 뿐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황신의 장계가 금명간에 올 것인데 오지 않고 있는 것은 무슨 일이오?"
하니, 윤선각이 말하기를,
"빗물이 이렇게 불어서 필시 길이 막혀 못오는 것으로 오늘은 들어올 것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7책 76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6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탁지(度支) : 국가 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