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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부는 대물림한다
- 은유시인 -
잠자기 전에 영화 한 두 편씩은 꼭 보고자야 직성이 풀리는, 어쩌면 그것 또한 이 은유가 살아가는 유일한 재미요 취미생활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은유에게는 취미가 별로 없는 듯싶습니다. 남들이 즐기는 바둑이나 훌라, 고스톱도 할 줄 모르고, 낚시며 골프며 그런 데에도 별로 관심이 없지요.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묻는 경우엔 여행도 즐기고 캠핑도 즐기고 그림그리기나 조각하기 등을 즐긴다고도 말하지만, 사실 그런 것도 관심 끊은 지 오랩니다. 생각만으로 아무리 그런 것들을 즐긴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 역시 손을 놓은 지 오래이다 보면 멀어지게 마련이지요.
3년여 전부터 살살 쓰기 시작한 글이 이젠 글을 잠시라도 쓰지 않으면 허전해서 배길 수 없게 되었으니, 그렇다고 글쓰기를 취미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늘 하루에 한두 편은 보아왔으니 취미가 뭐냐고 묻는 사람에게 ‘영화감상이요!’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감상이야말로 정말 돈이 안 드는 취미생활입니다. 케이블티브이에 월 5천원 남짓 시청료를 내면 영화는 무한정으로 볼 수 있으니 그보다 더 비용이 적게 드는 취미생활도 없을 겁니다.
간밤에도 비몽사몽으로 잠자리가 뒤숭숭하여 겨우 새벽녘에야 잠시 눈을 붙였을 겁니다. 그리고 오전7시쯤부턴 얼핏 잠에서 깨어나 역시 비몽사몽의 세계 속에 혼곤하게 잠겨있길 두 시간여 지속됩니다. 누구라고 딱히 기억나지도 않는 인물들과의 달콤한 대화가 한동안 이어지고, 또한 황당한 상상에 이끌리어 쉬 잠자리를 떨치고 벌떡 일어서지질 않게 됩니다.
오전9시쯤 되었을까요? 몇 번의 전화벨소리도 귓가로 흘려들으면서 지나치다가 혹 좋은 소식이려니 기대감에 수화기를 들었지요. 하는 일이 없다보니 씨잘 데 없는 전화가 많이 걸려옵니다. 따라서 전화벨이 울려도 여간해서는 잘 받지를 않는 답니다.
그러나 오늘은 전화벨이 울리면 잘 받아야할 것 같습니다. 부산일보에 두 편, 국제신문에 두 편 모두 4편의 단편소설을 신춘문예에 공모하고 난 뒤라 오늘 중에 당선자에게 미리 전화가 올 것이기 때문입죠. 두 지방 신문사 모두 단편소설 당선자에게 상금 5백만 원씩 준다고 그러더군요.
상금 5백만 원을 탈 만큼 그리고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될 만큼 제 글에 자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로또복권을 사놓고 당첨될 것을 기대하는 심정과 같은 겁니다. 압니까? ‘소발에 쥐 잡듯이’ 당첨될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지만 오늘, 또는 내일까지 아무 연락 없으면 꽝이지요.
“에고! 이렇게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다가 정작 떨어지고 나면, 그 다음부턴 창피해서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노.”
그러나 아무 걱정 안합니다. 은유 얼굴도 세월 따라 풍상도 겪을 만큼 겪어 온지라 철판이 제법 두껍게 깔렸답니다. 떨어졌다 해도 그 다음날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스레 고개 쳐들고 나다닐 겁니다.
“뭔 일 있었남?”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엔 누구나 글쓰기를 재미삼아 시작하지요. 또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의 글을 조심스럽게 올리기 시작하고 차츰 글쓰기에 이력이 생기면 자신의 블로그나 칼럼, 카페, 클럽 등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작정하고 나서기 마련이지요. 그러다가 주위에서 ‘엇! 제법인데? 작가해도 되겠어!’라는 격려의 소리가 빗발치면 글을 본격적으로 쓰고 싶다는, 작가 반열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이 동하기 마련입죠.
이 은유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정도 글을 썼다 싶어지는 순간부터 ‘이왕에 글을 쓸 바엔 등단하여 작가칭호를 들으며 글을 써야지’라는 생각을 먹게 되더라는 것입죠. 그래서 몇 달 전부터 몇몇 잡지사에 원고를 내밀게 되었습니다. 욕심이 많아 시인도 되고 싶고 수필가도 되고 싶고 소설가도 되고 싶었죠.
등단하는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문학관련 잡지를 통해 기성작가의 추천으로 등단하는 방법이 가장 손쉽습니다. 그러한 문학잡지가 100여 개는 넘을 듯싶습니다. 허나 그들 잡지 가운데 대부분 영세하여 잡지 한번 발행하는데 드는 수백만 원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등단을 미끼로 100만원 남짓의 경비를 요구하더란 겁니다. 나 역시 숱한 잡지를 발행해본 경험을 지닌 터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월간 잡지사로 문화관광부에 등록하여 매월 400쪽 내외의 잡지 2천부 제작하는데 소요되는 인쇄제작비는 400만 원선입니다. 발행부수를 1천부 늘릴수록 제작비는 100만원 남짓 더 부담됩니다. 전국 서점에 책을 선보이려면 최소 2만부는 발행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대부분의 문학관련 잡지들은 일반 서점에서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무실 운영비며 직원들 급료도 큰 부담이 됩니다. 따라서 매월 잡지사가 책자 제작비와 별도로 사무실을 운영하고 직원들 월급 때문에 천만 원 이상의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30평 남짓 사무실을 얻어 직원 세 명을 고용하고 매월 400쪽의 잡지 2천부를 발행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사무실 유지비 200만원과 직원 월급 400만원, 잡지 인쇄제작비 400만원, 등단관련 추천비 및 교제비 등 200만원이 소요되며 이를 모두 합치면 1,200만원이란 돈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금액은 가능한 최저로 산출해본 금액으로 잡지사의 이익금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잡지사들은 이 정도의 돈마저 제대로 벌어들일 수가 없지요. 광고수입도 거의 없을 것이고 독자층도 거의 없으니 정기구독료수입도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 등단을 미끼로 책자를 100권 이상 구입하기를 강요하고 심사료를 별도로 부담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물론 분노하고 개탄해야할 상황이지만 작금의 우리 등단코스의 한계가 그렇다보면 잡지사의 그런 작태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비록 영세 잡지사의 난립으로 매년 자격도 갖춰지지 않은 엉터리작가들이 대거 양산되는 문제점도 있지만, 그나마 실력을 갖추고도 빽 없고 돈 없다는 이유로 등단도 못하고 있는 작가들에겐 그만한 등단코스도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다음으론 일간신문사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개 그들 신문사들은 몇 백만 원의 상금을 내걸고 있습니다. 등단을 미끼로 돈을 요구하지 않을 뿐더러 당선되면 오히려 상금을 주고, 몇 십만 부 이상 발행되는 신문지면에 게재까지 해줍니다. 대단한 영광이지요. 소위 장원급제 급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하도 세상이 썩다보니 문예상 역시 썩을 대로 썩은 지라 그 심사과정마저 의혹투성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겁니다.
그 신성하다 할 수 있는 대학입시마저 썩어 예체능계의 경우도 교수에게 미리 개인교습을 받아두면 합격이 보장된다던데, 하물며 신문사 신춘문예 심사위원 자리 역시 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들 독무대 아니던가요?
대개의 ‘신문사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노라’는 사람들 이력을 보면 무슨무슨 대학 문예창작과 출신들이 그리 많더라고요. 아마 이러한 추측은 신문사 신춘문예 역대 심사위원들과 역대 수상자들 이력을 분석하면 틀림없이 깊은 상관관계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니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며 문창과 교수인 심사위원이 문창과 출신인 작가지망생 제자를 뽑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요?
따라서 수백 대 일, 수천 대 일의 관문도 통과하기란 쉽지 않지만 거기에 그런 인간관계란 고리가 개입하니 대학교 문창과 구경도 못한 사람들로써는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이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 같은 빽도 돈도 없는 인간이 감히 신문사 신춘문예에 작품이랍시고 내놓고도
“선생님 글이 당선되었습니다. 오늘 시간 있으시면 인터뷰 좀 해야겠네요. 당선 소감도 미리 준비해 놓으세요.”
란 전화가 걸려오길 기다리고 있다니….
“인간아! 꿈에서 깨어나셔~!!”
내가 워낙 횡설수설하는 타입이라 본래의 취지와는 많이 벗어난 얘기를 왈왈 짖어댄 꼴이 되었군요. 뭐 어때요, 어차피 횡설수설이다 보니 그게 그거지요.
다시 얘기는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기껏 수화기를 거머쥐고 듣노라니 ‘곧 개발될 땅으로 지금 사두면 머잖아 대박 터뜨릴 겁니다’란 부동산관련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더군요. 전에도 몇 번 유사한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던 적이 있어 더 이상 집적거리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지요.
“저 신용불량잔데요.”
이 한 마디가 직빵으로 먹혀 대부분 전화를 끊던데 어럽쇼? 전화기 속의 남자는 한 수 더 뜨는 겁니다.
“그럼 부자가 되셔야겠네요.”
그러더라고요.
“부자 되기는 애초부터 글렀응께, 또 부자 되는 것도 싫응께 고만 귀찮게 하이소.”
되받아쳤죠. 그랬더니 떨어져 나가기는커녕
“부는 대물림한다지 않습니까.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 소리에 뒤통수가 ‘띠웅~~~~~~’ 부지깽이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면서, 내 알토란같은 아들놈 ‘형규’와 토끼 같은 딸년 ‘여진’이의 얼굴이 떠오르는 겁니다.
벌써 3년 반이나 되었지요. 집사람과 합의 이혼한 뒤로 애들 얼굴 한 번도 못보고 지낸지가…….
전, 사람이 제 구실을 하고 못하고는 ‘다 저 하기 나름’이라고만 생각해왔습니다. 인간이 될 것 같으면 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것이고, 못사는 것 또한 저 자신이 불성실한 탓이려니 했던 거지요. 그러니 옛적에 ‘개천에서 용 난다’라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떠올리곤 했던 겁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다보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란 고전적 사고를 못 벗은 것이지요. 그리고 부란 것도 3대를 못 지탱할 것이란 생각을 해왔지요.
‘아무리 당대에 억척같이 부를 축재했어도, 자식 대에 손자 대에 낭비벽만 있고 돈 관리에 무능하면 거덜 나기란 한 순간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지녀왔습니다. 사실 부유한 집 자식들일수록 돈에 대한 애착심이 별로 없거든요.
그렇지만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전혀 그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부가 대물림되듯이 못사는 것도 대물림되는 세상이 되었다’라는 겁니다.
이젠 자식들에 대해 교육의 질도 달라졌지만 그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즉 자식이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남을 발굽으로 깔아뭉개고 남을 밟고 올라타야 하는, 즉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이길 수 있는 교육을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다. 참으로 야비하면서도 치열한 생존경쟁의 시대를 맞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나도 ‘부의 대물림’이란 도도한 대세가 감히 거스를 수 없는 현실임을 깨닫고 일련의 양심이 가슴을 쪼아대는 걸 느꼈습니다. 3년 넘도록 나 몰라라 의식에서 몰아내려했던 아들 형규와 딸 여진이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낳아준 아비로서의 역할을 해줘야 도리일 것이라는 걸 사무치게 절감했지요. 어차피 그 아이들은 내 분신입니다. 내가 세상에 나와 하나의 흔적으로 남겼을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한 겁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내 아이들이 절실한 도움을 누군가에게 요청할 때 아비로써 반드시 단 한번만이라도 도움을 줘야 하리란 각오가 들더라고요.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준비를 해야 되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러니 새해부터는 뭔 일이라도 시작해야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때문만이 아니라 당장의 호구지책을 위해 온/오프라인 ‘노벨문학’을 시작하려했습니다만, 진작 자식들 생각까지 했던 건 아닙니다.
오~ 하늘이시여!!
제게 힘을 주십시오!!
제게 용기를 주십시오!!
- 끝 -
(200자원고지 32매 분량)
2004/12/29/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