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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은혜교회(담임목사 이광하) 쥬빌리아카데미 줌 모임에서 장기려 선생을 소개했습니다. 존경하는 김종철 변호사가 사회와 대담을 진행했습니다. 미리 보내 준 진행자와 참가자 질문이 참 좋았습니다. 이광하 담임목사께서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다시 사람, 다시 역사"란 제목으로 30분 강연에 30분 대담, 30분은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30분 짜리 원고라 올립니다. 오늘 오후에 진행자와 참석자 질문지를 미리 읽고 강연 내용 절반을 바꿨습니다. ‘다시 사람’ 부분은 여러 곳에서 하였던 부분을 빼고 조금 사적인 내용으로 교체했습니다. 2주간 동안 장기려를 꼼꼼하게 읽은 분들이어서 기본 내지 핵심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 의사' 부분에서 개인 색채를 드러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11월 추천의 도서로 선정해 주시고 줌 강연으로 초청해 주신 교회와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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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람, 다시 역사
-일산은혜교회 쥬빌리아카데미 장기려 강연
, <장기려 평전>을 11월 추천도서로 선정해 주시고 모임에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교회 홈페이지를 둘러 보며 지금까지 다녀간 훌륭한 분들을 보면서 이런 분들이면 됐지 뭐 나같은 사람까지…”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다시 사람, 다시 역사”란 제목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하늘에 계신 장기려 선생은 이 제목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제게는 더이상 좋을 수 없는 제목입니다. 이 제목은 이 평전의 핵심을 가장 잘 포착했습니다. 제 말은 “다시 사람, 다시 역사”가 장기려 삶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제목은 제가 이 책을 쓰면서 무엇에 집중했는지를 가장 잘 드러냈습니다. 이 제목을 정한 분에게 엄지척입니다.
7월에 책을 내고 정릉교회 북콘서트를 시작으로 10차례 장기려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장기려가 어떤 사람으로 무슨 일을 하다가 떠났는지를 중심으로 강연을 구성할 수밖에 없더군요. 공을 많이 들인 역사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기본에 충실한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장기려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역사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오후에 김종철 변호사님과 할 대담과 그 이후 질의 응답 시간의 질문을 미리 받았습니다. 그래서 준비된 원고를 대폭 수정했습니다. 교과서적인 접근을 버리고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로 구성했습니다. 오늘 제목의 ‘다시 사람’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2023년 11월 버전으로 쓴 장기려 프로필입니다. 이 말은 해가 바뀌고 관심이 바뀔 때마다 장기려 프로필은 새롭게 쓰여질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다시 사람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이야기할 때 출신 학교와 어떤 스펙을 쌓았느냐를 중요한 기준으로 봅니다. 인물 전기나 평전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저는 스펙 말고도 우리 삶에 소중한 게 많다는 점을 거듭 확인하고 내면화하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장기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저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의사’란 부제, 그리고 1) 차별과 경계를 허물고, 2) 시대를 앞서 가고, 3) 전문가주의를 경계하고, 4) 평생 교회 개혁을 열망하고, 5) 항상 비기독교인에 입장에서 생각하고, 6) 생각과 이념이 다른 사람과 아름답게 공존한 사람으로 프롤로그에 소개했습니다. 제 책을 이 잡듯 꼼꼼하게 읽으신 분들 앞에서 그 얘기를 다시 하진 않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조금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할머니
장기려 선생님의 1989년 9월 6일 일기는 매우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의 138주기 생일 축하 파티를 청십자병원 식당에서 열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추도일을 30년 기억하기도 어려운데 138주기 생일축하 턱이라니! 우리가 위대한 영웅이니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느니 하는 사람에게도 못할 정성을 장기려 선생님은 할머니에게 이렇게 쏟고 가셨습니다. 그분에게 할머니는 그 어떤 영웅이나 위인에 못지 않았습니다. 그걸 말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낸 증거가 1989년 9월 6일 일기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과 평가기준에서 또 한 가지 놀란 점은 장기려 선생이 주기철과 오정모 손양원 김교신 마틴 루터 킹 등을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과 동급으로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마르틴 루터, 칼뱅,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의 종교 개혁이 절반의 종교개혁이고 오히려 종들의 모임이 진정한 교회개혁이란 판단도 놀랍습니다. 이것이 장기려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아우르는 사람 보는 기준이었습니다.
2) 근검 절약
장기려 선생은 1962년 9월부터 5개월간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부산 복음병원에서 2000달러의 경비를 제공받았음에도 세 가지 원칙을 정했습니다. 하루 10달러만 쓴다, 택시나 버스 안 타고 걷는다, 여행 가이드는 없다는 원칙은 경비를 최대한 절감하려는 자구책이었습니다. 독일에 도착했을 때 구두 밑창에는 구멍이 났습니다. 할 수 없이 예정에 없던 8마르크(2달러)를 주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신는 구두를 샀습니다. 귀국해서 복음병원에서 마련해 준 2000 달러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되돌려주었습니다. 그 아동용 구두를 1년이나 더 신고 다녔습니다. 그때 장기려 나이가 쉰 셋이었습니다. 동네 의원 원장이 아니라 부산 복음병원장이었습니다. 53살 먹은 서울대 교수가 1년 넘게 아이용 구두를 신고 다녔습니다. 장기려는 그게 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3) 키우던 개
1950년 10월 20일 김일성과 그 군대는 평양을 버리고 후퇴했습니다. 국군과 연합군이 평양에 입성했습니다. 선생은 평양에서 12킬로미터 북쪽 반성 마을 동굴로 피신했습니다. 대한민국이 평양을 접수한 걸 확인하자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키우던 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소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선생께서 강렬한 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아주 섭섭했다.” 1950년 북한에 오늘과 같은 반려 동물 문화가 형성돼 있었는지 여부는 잘 모릅니다. 혹 그런 문화가 있었더라도 아이를 태우는 유모차에 강아지를 태우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강아지 장례를 치루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제는 장승배기역 근처를 지나다가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아 주거나 있는 곳을 알려 주는 사람에게 200만 원을 후사하겠다는 전봇대 포스터를 보았습니다.
선생은 개를 잃어버리기 한 달 전 미군 폭격으로 병원에 폭탄이 떨어져 죽다 살아 났고, 매일 총과 포탄에 맞은 환자를 수술했습니다. 전쟁 중이었기에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런 전쟁통에 키우던 개 한마리 안 보이는 게 뭔 대수겠습니까. 그러나 선생은 그 와중에서도 작고 미천한 미물까지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장기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장기려 선생이 경의전 수석 졸업을 하고 1943년에 간 설상절제술에 우리나라 최초로 성공을 하고, 1959년에 역시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대량절제수술에 성공해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1979년에 막사이사이 사회봉사 부분 상을 수상한 것만 찬양할 게 아니라 장기려의 이런 마음을 사람들이 많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역사
이 평전을 전면 개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우선은 팩트 차원에서 오류를 바로 잡거나 보강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았습니다. 장기려 선생에게 죄송했고, 독자들에 부끄러웠습니다. 게다가 문장도 봐주기 힘들었습니다. <장기려, 그 사람>을 생각하면 늘 선생님께 죄송했습니다. 이 평전이 이렇게 나온 것은 한마디로 장기려 선생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개정 이유는 종들의 모임의 역사 문제였습니다. 초판을 내기 전에도 어떻게 한 공동체가 수백 년 동안 이어졌는데 아무리 교단이 없고 신학교가 없고 그 어떤 공식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을 수 있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책을 냈지만 기원에 대한 궁금증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외국에 있는 한 페친을 통해 실마리가 될 단서를 제공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제가 평생 가장 바쁘곤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조금도 시간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 부당해고 문제가 터졌습니다. 제가 그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하자 부정 청탁으로 입사한 사람이라고 공적 매도를 하였고, 급기야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장기려, 그 사람>을 낸 출판사 대표이자 100주년기념교회 사모님께서 공식 모임에서 저 책을 제가 혼자 쓴게 아니라 홍성사 편집부와 자기가 함께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공동 저작이라는 겁니다. 담임목사는 지방노동위원회에 지강유철이 자기 아내에게 부정청탁으로 입사했다며 명백한 명예훼손과 모욕을 했는데 그분 사모님께서는 <장기려, 그 사람>의 공동저자라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남편 목사가 저를 양화진문화원 직원으로 뽑기로 해서 저로 인해 이런 날이 올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고 서로 다른 사실을 공포해 버렸습니다.
출판계약을 해지했습니다. 그때부터 종들의 모임 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 남아공, 미국, 호주 등에서 부적절한 아동 성폭행을 비롯한 성적 문제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장기려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이 문제를 책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자로 거의 1년을 고민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고신교단 산하 단체에서 역사 바로세우기라며 복음병원 역사에서 장기려 지우기를 공공연하게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바로세우기란 명분을 내걸고 불순한 의도를 관철하려는 나쁜 짓이라고 여겨 최선을 다해 팩트를 추적했습니다. 고신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역사학자는 장기려가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병원 뒷 문을 열고 도망가게 수 많은 사건을 하나의 사건인 것처럼 호도하면서 병원 뒷 문을 열어 준 의사는 장기려가 아니라 그 제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부분도 수십 년 알고 지낸 교수님과 루비콘 강을 건너더라도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이 사실 관계를 바로 잡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장기려 선생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자기 동상을 만들려는 시절에 그렇게 준엄하게 저주까지 하며 부정했지만 돌아가시고 불과 2년만에 복음병원에 내걸렸습니다. 그 이후 동상이 인제대와 부산대에 세워졌습니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장기려 선생이나 아호를 사용하는 기관이나 단체가 나서서 우리 사회가 크게 우려할 만한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서문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6개월씩이나 걸리게 만든 문제는 모두 역사 이슈였고, 장기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 문제였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역사를 중요하게 다뤘다고 한 의미는 장기려의 역사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우선은 시대와 역사 속에서 장기려를 만나고 싶었고, 그 과정을 잘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초판도 그런 태도로 썼지만 <장기려 평전>에서는 그 원칙을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역사를 전공한 분들에게서조차 우리 민족과 세계의 통사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역사가 겉돌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장기려와 “직접 연관되지 않은 역사가 이 대목에서 왜 거론되느냐”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국가 또는 세계사에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 분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스탠스를 취했는지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장기려를 역사적으로 바로 서술하는 것 뿐 아니라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장기려의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제게는 매우 중요한 관전 포인트였습니다. 장기려 평전은 그분이 이런 사람이었다는 얘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를 제대로 배우려면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사람들의 부정적 행태까지 살펴야 오늘 우리가 그 분으로부터 무얼 배워야 하는지가 선명해 진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오늘 우리가 장기려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서 상당 부분 밝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장기려 제자나 유족 및 유관 단체로부터 고소를 당해도 할 수 없다는 각오로 저들의 이야기를 쓴 이유입니다.
평전을 내고 나면 장기려에 대해 꽤 알 줄 알았습니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학자의 입을 빌려 아는 게 없고, 오히려 자기에게 공부한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고생만 시켰다는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습니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게 뭔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진짜 장기려를 얼마나 반영하는지에 대해 점점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장기려 일생의 어느 구석에 대충 뭐가 어디 있는지는 파악했습니다. 여기서 대충이라고 하는 건 겸손한 척 하려는 게 정치적 수사가 아닙니다. 책을 내고 새롭게 발견한 자료가 여럿 입니다. 단순 오타가 아니라 팩트 오류도 발견했습니다. 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기려 선생과 관련해 대충 뭐가 있는지 파악하려고 보낸 지난 세월이 쓸데없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절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장기려 평전>이 겨우 나왔습니다. 제주도에서 닷새 동안 마지막 교정을 보면서, 그리고 강연을 준비하면서 정말 제가 장기려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다는 걸 몸이 알려줬습니다. 사실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각주를 붙인 글쓰기가 어느 정도로 제 상상력을 얼어붙게 만들었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그에 더해 장기려에 대한 진짜 공부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헐겁기는 하지만 장기려로 가는 네비는 확보했으니 이제 장기려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몸이 원할 때 장기려의 곁에 오래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분을 추앙하며 떠받들며 살겠다는 게 아니라 그 분의 진심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멍 때리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장기려 공부는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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