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메시지✿
晩秋, “얘야, 너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한혜원
세월은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르다고 합니다. 엊그제 2019년을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11월에 이르러 있습니다. 무심코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들에 얼마나 많은 경험과 지혜가 스며있었나를 되새기게 되는 것을 보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봅니다. 달력을 넘기며 드는 상념입니다. 매 해, 제가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희로애락을 나누는 각별한 친구들은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이었습니다. 지난 십 오년 동안 주변이 항상 그래 왔기에 스스로 나이 드는 것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올해는 제게 나이와, 살아감의 의미가 각별합니다. 나이의 앞자리 수가 바뀌었기 때문이고,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 가실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교실에서, 그리고 동네 곳곳에서 곰 벌레가 신기하고, 간판에서 발견한 아는 글자 하나를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데 익숙했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은 발견이고 가능성이고 즐거움입니다. 장애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생의 마무리가 다가왔을 때 세상은 어떤 의미인가를 자주 생각합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스러지고 멀어져 외로워질 때, 어떤 눈으로 세상을 마주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요즘의 제 일상은 발달 장애와 치매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습니다. 일상을 살아갈 기능을 얻기 위한 아이의 지난한 분투와 어느 새 사라진 기능에 대한 노인의 깊은 애도 사이, 그 어딘가에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늦가을. 안오일 시인은 초록도 주황도 아닌 감을 보며 ‘익어가는 색깔’ 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에 정해진 방향과 색깔이 어디 있으랴. 주황에서 초록으로 회귀하는 속절없는 노년의 시간을 바라보며 인간은 생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각자 자기 속도와 방식으로 익어가는 존재라고 믿어 봅니다.
공자의 구분대로라면 ‘不惑’이어야 할 나이, 성인의 경지에 한참 미치지 못해서 인지 아직도 세상만사에 유혹이 가득합니다. 다만, 이제 제게 무엇이 가장 유혹이 되는지 감지할 수 있고,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책임과 도리를 받아들일 만큼은 철이 든 것 같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보며, 복잡했던 지난 한 해의 상념을 하나씩 떨쳐 보냅니다. 애써 키운 열매와 잎을 모두 다 내려놓은 후에, 혹독한 겨울을 맞을 나무를 상상해봅니다. 겨울은 나무의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봄을 위한 준비이듯, 모든 생명의 성장도 소멸도 거대한 순환의 일부임을 받아들입니다.
생동하는 어린 생명들 곁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보낼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은 참 축복입니다. 잠시 잊었던 생로병사의 진리, 결국 병들고 늙고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 이르기 위해 오늘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나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정이 얼마나 값진 발견과 가능성으로 충만한가를 잘 안내하는 교사로 늙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방식대로의 ‘不惑’ 이 가져다 준 성찰입니다(시립 상현 어린이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