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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0 편
열 두 사도를 세우다
. 중도자 위원회
. 활동시기 : 서기 27년 1월 12일
. 장소 : 갈릴리
140:0.1 서기 27년 1월 12일 일요일 정오 직전에,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을 대중에게 전하는 자로 세우려고 사도들을 불러 모았다. 열두 사도는 거의 매일 부름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은 고기 잡으러 해안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않았다. 몇몇은 그물을 고치고 고기잡이 도구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해안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140:0.2 예수는 사도들을 부르려고 바닷가로 나가면서, 먼저 안드레와 베드로를 불렀다; 이들은 물가 가까이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다음에 야고보와 요한에게 손짓했다. 이들은 가까이 있는 배 안에 있었고 아버지 세베대와 이야기하며 그물을 고치고 있었다. 예수는 둘씩 다른 사도들을 모았고, 모두 열두 사도를 모으고 나서 함께 가버나움 북쪽의 고지로 가서, 그곳에서 정식 임명을 위한 준비로 그들에게 지시하기 위해 나아갔다.
140:0.3 이번에 열두 사도는 모두 침묵했다; 심지어 베드로도 회상하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리던 때가 다가왔다!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주(主)를 대표하는 신성한 일에 대하여 개인적 삶의 헌신과 집단적 헌신을 하는, 일종의 엄숙한 예식에 참여하려고 주와 떨어져서 가는 중이었다.
1. 예비 교육
140:1.1 정식 임명 예배가 있기 전에, 열두 사람이 주위에 자리에 앉는 동안 예수는 말했다. “나의 형제들이여, 이 하늘나라의 때가 왔다.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너희가 아버지께 있게 하려고 여기로 나와 함께 너희를 따로 데리고 왔다. 너희가 처음 부름받았을 때, 너희 몇몇은 내가 회당에서 이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갈릴리 바다 근처의 여러 도시에서 나와 함께 일하면서, 너희 각자가 아버지의 나라에 대하여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제 이 하늘나라에 대하여 너희에게 말해줄 더 많은 것이 있다.
140:1.2 “내 아버지가 땅에서 사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세우고자 하는 새로운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그의 신성한 뜻을 행하기를 바라는 자의 마음속에서 내 아버지는 이렇게 끝없이 다스릴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가 유대인의 하나님이거나 또는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님을 선언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에서 오고 서쪽에서 와서 우리와 함께 아버지의 나라에 앉을 것이며, 반면에 아브라함의 많은 자녀들은 사람들의 자녀들 마음에서 아버지의 영(spirit)이 통치하는 이 새로운 형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할 것이다.
140:1.3 “이 나라의 힘은 군대의 힘이나 재물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한 영(spirit)의 영광 안에 있으니, 그 영은 이 하늘나라에서 다시 태어난 시민들인 하나님의 아들들의 지성(mind)과 마음(hearts)들의 법칙을 가르치기 위해 올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의(righteousness)가 지배하는 형제 사랑이며, 다음과 같이 당당이 외칠 것이다: 땅 위에 평화와 모든 사람에게 선한 뜻이 임하리라. 너희가 이 나라를 선포하러 곧 떠나갈 것이니, 이 나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선한 사람들의 열망이며, 온 땅의 소망, 모든 선지자들의 지혜로운 약속의 성취이다.
140:1.4 “그러나 너희, 나의 자녀들아, 너희를 따라 이 나라로 들어가는 다른 모든 자들에게는, 혹독한 시험이 있다. 믿음만으로 너희가 이 문을 통과하게 되겠지만, 너희가 신성한 친교의 진보하는 삶 속에서 올라가기를 계속한다면 내 아버지 영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건대, ‘주님(Lord), 주님(Lord)’ 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들어갈 것이다.
140:1.5 “너희가 세상에 전할 말씀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righteousness)를 구하라. 이것들을 찾는 과정에서, 영원한 생존에 필수적인 다른 모든 것들이 함께 보장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이 아버지의 나라는 겉으로 보이는 능력이나 보기 흉한 군중의 시위와 함께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 나라를 선포할 때에, `그것이 여기 있다' 또는 `그것이 저기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전파하는 이 나라는 너희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40:1.6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모두를 섬기는 자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 사이에서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그는 그의 형제를 섬기는 자가 되게 하라. 그러나 일단 진정으로 하늘나라에서 시민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때, 너희는 더 이상 종이 아닌 아들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 하늘나라는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모든 사람이 내 아버지를 알고, 내가 와서 선포할 구원의 진리를 믿을 때까지, 이 세상에서 진보할 것이다. 심지어 지금도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으니, 너희 중에 몇 사람은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지배하는 것을 볼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다.
140:1.7 "너희의 눈이 지금 보고 있는 이것, 곧 열두 명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 작은 시작은, 마침내 온 땅이 나의 아버지를 향한 찬송으로 가득하기까지 번성하고 성장할 것이다. 너희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사는 삶으로 인해 사람들은 너희가 나와 함께 지냈고, 하늘나라의 실체들을 배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우지는 않겠지만, 내가 지금 이 육체로 살고있는 이 삶 속에서 나의 아버지를 대표하듯이, 내가 머지않아 너희를 떠나게 될 때, 이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는 엄숙한 책임을 이제 너희의 혼에 올려놓으려 한다." 그리고 그는 말을 마치고서, 일어섰다.
2. 임명식 (The Ordination)
140:2.1 예수는 하늘나라에 관하여 선포하는 말씀을 막 들은 열두 사람에게, 이제 그의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꿇으라고 지시했다. 다음에 주는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하여 안드레에게 이르기까지, 각 사도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었다.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그는 두 손을 펼치고 기도했다:
140:2.2 “나의 아버지, 이제 내가 이 사람들, 나의 전령들을 당신께 데려왔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대표하려고 온 것 같이, 나를 대표하여 앞으로 가게하기 위해 나는 이들 열두 사람을 이 땅 위의 우리 자녀들 가운데서 택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함께 계신 것 같이 이들을 사랑하고 이들과 함께 하소서. 이제, 내 아버지여,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모든 일을 이 사람들 손에 맡기오니 이들에게 지혜를 주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들이 하늘나라를 위하여 수고할 때 나는 이들을 돕기 위해 땅에서 한동안 머무르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내 아버지여, 이 사람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내가 하려고 아버지가 주신 일을 마치기까지 계속할 동안, 나는 이들을 아버지의 보호에 맡깁니다.”
140:2.3 예수가 기도를 마쳤을 때, 사도들은 각자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남아 있었다. 베드로조차 감히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기까지 몇 분이 흘렀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은 예수를 끌어안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이 엄숙하고 거룩한 이 장면―우주의 창조자가 인간 지성들(minds)의 지도 아래에 사람의 신성한 형제 사랑의 일을 위탁하는 것―을 내려다보는 동안, 큰 고요함이 그 장소를 덮었다.
3. 임명 설교
140:3.1 다음에 예수는 말씀했다: “너희는 이제 나의 아버지 나라의 대사가 되었으니, 이로써 땅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과 별도로, 한 부류의 구별된 사람들이 되었다. 너희는 이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어두운 세계의 무지한 사람들 가운데서 또 다른 나라, 하늘나라의 깨우친 시민으로서 있다. 이 시간 이전에 하던 대로 사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나은 삶의 영광을 맛보고, 그 새롭고 더 나은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의 대사로서 이제부터 살아야 한다. 생도 보다 선생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종보다 주인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땅의 통치를 받는 시민보다 하늘나라의 시민에게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 중 일부는 어려워 보일지 모르지만, 너희는 지금 내가 아버지를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도록 선택되었다; 땅에서 나의 대리자로, 공간의 세계들 위에서 너희 필사자의 삶 가운데 나의 이상을 반영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드러내는 나의 땅에서의 삶 가운데서 본보기로 보이는 가르침과 실천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140:3.2 “내가 너희를 보내노니 영적으로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두려움의 속박에 갇힌 자들에게 기쁨을 선포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라. 나의 자녀들이 고통당할 때,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의 말을 하라.
140:3.3 “영(spirit) 안에서 낮아진 자, 겸손한 자는 행복하니, 하늘나라의 보물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140:3.4 “의(義))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는 행복하니, 그들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140:3.5 “온유한 자는 행복하니, 그들은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140:3.6 “마음이 순수한 자는 행복하니,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140:3.7 “심지어 그렇게 더 많은 영적인 위로와 약속의 말들을 내 자녀들에게 말하라.
140:3.8 “애통 하는 자들은 행복하니, 그들은 위로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슬피 우는 자들은 행복하니, 그들은 기쁨의 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140:3.9 “자비로운 자들은 행복하니, 그들은 자비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140:3.10 “화평케 하는 자들는 행복하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140:3.11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반대하며 모든 악한 태도로 말을 할 때에,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주는 상이 크기 때문이다.
140:3.12 “나의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보내노니, 너희는 맛을 내는 소금인,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이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어디에다 소금을 뿌릴 것인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발밑에 버려지고 짓밟히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140:3.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는 숨길 수 없다. 사람들이 촛불을 켜서 측량 그릇 아래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둔다; 그 빛은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불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서 빛나게 하고, 너희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40:3.14 “나를 대표하고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로서 행하라고 너희를 세상으로 보낸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떠날 때 아버지를 신뢰하라, 너희는 그의 전령이다. 불의에 억지로 저항하지 말라; 육체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 이웃이 너의 오른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그에게 돌려라. 너희 가운데서 법대로 처리하기보다는 공평치 않은 처사를 기꺼이 견디라. 곤궁하고 궁핍한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친절로 섬기라.
140:3.15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행을 베풀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에게 복을 베풀고,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고 내가 사람들에게 할 것이라고 너희가 믿는 무엇이든지, 너희도 또한 그들에게 하라.
140:3.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착한 자 뿐만 아니라 악한 자에게도 햇빛이 비치게 하시며, 마찬가지로 옳은 자와 그른 자에게 비를 내리신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더 나아가서 너희는 이제 아버지 나라의 대사들이다. 하나님이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너희의 하늘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하늘나라의 영원한 앞날에 너희도 완전할 것이다.
140:3.17 “너는 사람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지, 사람을 심판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땅에서의 삶이 끝날 때, 너희는 모두 자비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필사 생애 동안에 육체를 입은 모든 형제에게 자비를 보이라고 요구한다. 너희 눈에 대들보가 있으면서 형제의 눈에서 티를 뽑아내려 애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너희 눈에서 먼저 대들보를 뽑고 나서, 눈이 더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뽑아버릴 수 있다.
140:3.18 “너희는 진리를 똑똑히 분별하라; 의로운 삶을 두려움 없이 살라;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사도들, 나의 아버지 사도들이 될 것이다. 너희는 이같이 들었을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려면, 살아 있는 깨끗한 진리의 빛을 따라 스스로 걸어야 한다. 하늘나라의 모든 일에서 나는 너희에게 올바른 판단과 예리한 지혜를 보여 줄 것을 권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보물을 발로 짓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지 않도록 하여라.
140:3.19 “속으로는 굶주린 늑대 같으면서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올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내가 경고한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거두거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있느냐?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지만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썩은 나무도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좋은 열매를 얻지 않는 나무마다 얼마 안 있어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하늘나라로 들어갈 때 중요한 것은 동기이다. 내 아버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저희 마음속의 소망과 진실한 의도를 가지고 판단하신다.
140:3.20 “하늘나라 심판의 큰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당신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니, 거짓 선생인 너희는 나에게서 떠나거라’ 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를 대표한 것 같이, 이 부탁을 듣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대표함에 그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은 나의 봉사하는 길과 하늘 아버지의 나라로 풍성히 들어갈 것이다.”
140:3.21 예수가 이런 식으로 말씀하는 것을 사도들은 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 질 무렵 산에서 내려왔지만, 아무도 예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140:4.1 이른바 “산상 설교”는 예수의 복음이 아니다. 유익한 가르침을 많이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열두 사도를 임명하는 훈시였다. 예수가 그렇게 힘찬 소리로 완전하게 아버지를 대표한 것 같이,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를 대표하기를 열망하고 계속하여 복음을 전할 그들에게 주는 주(主)의 개인적 위탁(委託)이었다.
140:4.2 “너희는 땅에서의 소금, 구원의 맛을 내는 소금이다. 그러나 이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어디에다 소금을 뿌리겠느냐?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의 발밑에 버려지고 짓밟히는 것 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140:4.3 예수 시대에 소금은 귀중했다. 심지어 돈으로도 사용되었다. 현대의 낱말 “월급”은 소금으로부터 유래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뿐만 아니라 방부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른 것들을 더 맛있게 만들고, 따라서 그것은 소비함으로써 소용된다.
140:4.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는 숨길 수 없다. 사람은 초를 켜서 측량 그릇 아래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두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한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서 빛나게 하여, 너희의 좋은 일을 보게 하여,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40:4.5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동안, 그것은 또한 혼란스럽고 좌절할 정도로 "눈이 멀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들이 향상된 삶을 살도록 새롭고 경건한 길로 인도될 수 있게 우리의 빛이 그렇게 빛날 것을 권고한다. 우리의 빛은 자신에게 집중을 끌지 않게 빛나야 한다. 심지어 사람의 직업조차 이 생명의 빛을 퍼뜨리기 위하여 효과적인 “반사경”으로서 활용될 수 있다.
140:4.6 강한 성품은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로 옳은 일을 하는데서 나온다. 이기심이 없는 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상징한다. 최고의 자아-실현은 예배와 봉사로 이루어진다. 실제로 복이 있는 사람은 잘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사랑하는 것에 동기를 부여한다.
140:4.7 “그들의 열매로 너는 그들을 알 수 있다.” 성격(personality)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변화-성장-은 도덕적인 성품이다. 현대 종교의 가장 큰 오류는 부정적 사고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도덕적 가치는 “하지 말라”는 단지 억압-복종을 하는데서 얻어질 수 없다. 종교 생활을 위한 두려움과 수치심은 가치 없는 동기이다. 종교는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드러내고, 인간의 형제 사랑을 높일 때에만 유효하다.
140:4.8 효과적인 삶의 철학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 그리고 사회 및 경제 환경에 대한 사람의 감정적 반응의 총합, 이 두 가지를 합침으로 형성된다. 기억하라: 타고난 욕구는 근본적으로 수정될 수 없지만, 그러한 욕구에 대한 감정의 반응은 바뀔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본성은 수정될 수 있고, 성품은 개선될 수 있다. 튼튼한 성품 안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의 반응이 통합되고 조율되며 이처럼 통일된 성격이 만들어진다. 통일성의 부족은 도덕적 본성을 약화시키고 불행을 일으킨다.
140:4.9 가치 있는 목표가 없다면, 삶은 목표가 없고 무익하며 많은 불행의 결과를 낳게 된다. 열두 사도를 세울 때 예수의 말씀은 삶의 주된 철학을 구성한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체험적 신앙을 실천하라고 권했다. 그는 그들에게 단순한 지적 동의, 신뢰, 확립된 권위에 의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140:4.10 교육은 우리의 자연스럽고 유전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더 나은 방법을 배우는 (발견) 기법이어야 하며, 행복은 이러한 향상된 감정 만족 기법의 총합이다. 행복은 환경에 거의 의존하지 않지만, 즐거운 환경은 행복에 크게 이바지할 수도 있다.
140:4.11 모든 필사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해지기를 정말로 갈망하며, 그러한 성취는 마지막 분석에서 “우주는 참으로 아버지와 같기” 때문에 가능하다.
5. 아버지 사랑과 형제 사랑
140:5.1 산상 설교로부터 마지막 만찬의 담화까지,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형제 사랑보다는 아버지 사랑을 나타내라고 가르쳤다. 형제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은 “황금률”의 적절한 이행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 동료 필사자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요구한다.
140:5.2 예수는 인류를 두 가지 애정으로 사랑한다. 그는 이 땅에서 두 가지 성격―인성과 신성―으로 살았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그는 사람의 창조자이며, 그의 우주에서 아버지이다. 사람의 아들(Son of Man)로서, 예수는 필사자들을 형제로서 사랑한다―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사람이었다.
140:5.3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불가능할 정도로 형제 사랑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람을 바라보고,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이 비로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아버지 사랑의 첫걸음을 보여주기 위해―예수는 추종자들이 하나님을 닮으려고―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려고―애쓰기를 기대하였다. 열두 사도에게 이렇게 훈계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수많은 환경적인 사회적 조정 안에 연관되어 있는 확실한 감정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밝히려고 애썼다.
140:5.4 주(主)는 단순한 형제 사랑의 한계와 비교하여, 네 가지 신앙 태도에 주의를 불러일으키면서, 후일에 초월적인 아버지 사랑의 네 가지 최고의 반응을 묘사하는 준비로서 이 중대한 강론을 소개하였다.
140:5.5 그는 먼저 영이 가난하고, 의(義)에 굶주리며, 참을성 있는 온유함과, 마음이 순수한 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한 영을 분별하는 필사자는 아버지다운 애정의 놀라운 실행을 시도함으로서 신성한 비이기적 수준에 도달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애통하는 자로서 그들은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장려하며, 박해를 견디는, 이 모든 힘든 상황들에서, 심지어 사랑스럽지 못한 인류조차도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애정은 형제의 애정을 초월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헌신의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140:5.6 이 행복선언에 나타난 믿음과 사랑은 도덕적 성품을 강화하고 행복을 창조한다. 두려움과 분노는 성품을 약화시키고 행복을 파괴한다. 이 중대한 설교는 행복을 언급하며 시작되었다.
1. “심령이 낮아진 자―겸손한 자―는 행복하다.” 아이들에게 행복은 갈망하는 즐거움을 즉시로 만족하는 것이다. 어른은 나중에 큰 복을 거두기 위하여 극기의 씨를 기꺼이 뿌린다. 예수의 시대와 그 이후 행복은 모두 부의 소유라는 생각과 너무나 자주 연관되어 왔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 한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있었고―독선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은 “마음이 낮아져 있었다”―겸손했다. 한 사람은 부족함이 없었다; 다른 한 사람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심령이 낮아진 사람은 영적인 부의 목표―하나님을 찾는 것―를 추구한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먼 미래에 보상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들은 지금 보상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늘나라를 찾고, 지금 그런 행복을 체험한다.
2. “의(義)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다, 그들이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영이 낮아짐을 느낀 자들은 의(義)에 허덕일 것이다. 오직 겸손한 자는 신성한 힘을 찾고 영적인 능력을 갈구한다. 그러나 영적 자질을 얻고 싶은 욕구를 강화하려고, 고의로 영적 단식을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육체의 금식은 4, 5일이 지나면 위험해진다. 모든 식욕을 잃어버리기 쉽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장기간 단식은 육체의 배고픔이나 영적 갈망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140:5.9 체험적인 의(義)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다. 예수의 의(義)는 역동적인 사랑―아버지 같은― 형제 사랑이다. 그것은 부정적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 형태의 의(義)가 아니다. 부정적인 그 무엇ㅡ“하지 말라”는 그것을 어떻게 계속 갈망할 수 있겠는가?
140:5.10 아이의 지성에 이 팔복의 처음 두 가지를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성숙한 지성은 그 중요성을 파악해야 한다.
3. “온유한 자는 행복하다, 그들이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진정한 온유함은 두려움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협력하는 사람의 태도이다―“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온유함은 인내와 관용을 포함하고, 질서 있고 친절한 우주를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자극을 받는다. 온유함은 신의 이끄심에 반항하려는 모든 유혹을 이긴다.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이상적인 온유한 사람이었고 방대한 우주를 물려받았다.
4. “마음이 순수한 자는 행복하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순수성은 의심과 복수심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 부정적인 성질이 아니다. 순수성을 논하면서 예수는 인간의 남.여의 태도만을 한정해서 다루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 사람이 동료 인간에 대하여 가져야 할 믿음, 부모가 자식에게 지녀야 할 믿음, 아버지가 사랑하는 것 같이 동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을 언급하였다. 아버지의 사랑은 응석을 받아줄 필요가 없고, 악을 용납하지 않지만, 언제라도 비웃는 일이 없다. 아버지의 사랑은 한 가지 목적을 가졌고, 언제나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찾는다. 그것이 진정한 부모의 태도이다.
140:5.13 하나님을―믿음으로―보는 것은 진정한 영적 통찰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영적 통찰력은 조절자의 지도를 강화시키고, 결국 하나님 의식을 증가시킨다. 너희가 아버지를 알게 되면,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보장이 확인되며, 육체를 입은 형제들을 하나하나, 형제로서―형제 사랑―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아버지로서―아버지 같은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140:5.14 이 훈계는 어린아이에게도 가르치기 쉽다. 어린아이들은 자연히 사람을 쉽게 믿으며, 부모는 아이들이 이 단순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을 다룰 때, 어떤 속임수도 피하고 의심을 제기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그들이 영웅을 선택하고 그들 삶의 일을 선택하도록 지혜롭게 도와주라.
140:5.15 다음에 예수는 더 나아가서, 인간의 모든 투쟁의 주요한 목적―완전―의 실현을, 아니 신성에 이르는 것까지도,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항상 그들에게 권고하기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였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열두 사도에게 권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치 있는 성취였을 것이다; 그것은 형제 사랑의 성취를 나타냈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그들을 사랑한 것 같이 사도들에게 사람들을 사랑하라고―형제의 애정 뿐 아니라 아버지의 애정으로―사랑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아버지 같은 사랑 네 가지 최고의 반응을 지적함으로써 이를 보여주었다:
1.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상식이나 최선의 논리로 따져도 슬퍼함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겉으로 또는 꾸며서 슬퍼함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감동하는 태도를 가리켰다. 부드러움을 보이거나 아니면 감정이나 육체가 고통받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고 소년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동정심은 여자 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귀중한 속성이다. 남자답기 위하여 냉담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용감한 사람을 만드는데 있어서 잘못된 방법이다.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슬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세는 슬퍼하는 사람이었고, 삼손이나 골리앗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훌륭한 지도자였으나 또한 온유한 사람이었다. 인간의 필요를 헤아리고 그에 민감한 것은 진정하고, 오래가는 행복을 창조하며, 한편 그런 친절한 태도는 노여움ㆍ미움ㆍ의심의 파괴적 영향으로부터 혼을 보호한다.
2. “자비로운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비는 가장 진실한 우정을 사랑하는 친절의 높이와 깊이와 폭을 의미한다. 자비는 때때로 수동적일지 모르지만 여기서 자비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이다―지극히 아버지 같다. 사랑이 있는 부모는 아이를 용서하는 것을 여러 번이라도, 조금도 어렵게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오염되지 않은 아이에게 여러 번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충동은 자연스럽다. 아이들은 보통 실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면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아진다.
3. “화평케 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화평케 하는 자를 바란 것이 아니라 군사적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평화는 유순하고 소극적 종류가 아니다. 시련과 박해와 마주쳐 그는 말했다.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간다.”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파멸적인 충돌을 막는 평화다. 개인의 평화는 성격을 통합한다. 사회적 평화는 두려움ㆍ욕심ㆍ분노를 예방한다. 정치적 평화는 종족 사이의 적대 감정, 국가적 불신, 전쟁을 방지한다. 화평케 하는 것은 불신과 의심을 고치는 약이다.
140:5.19 아이들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활동하도록 쉽게 가르칠 수 있다. 그들은 팀 활동을 즐긴다; 함께 경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주는 또 다른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 하면 목숨을 읽겠으나,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면 목숨을 찾을 수 있다.”
4.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너를 모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140:5.21 평화가 있은 후에 흔히 박해가 따른다. 그러나 젊은이와 용감한 어른들은 결코 어려움이나 위험을 피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아버지 같은 사랑은 이 모두를―형제 사랑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을―아낌없이 할 수 있다. 진보는 언제나 박해의 마지막 수확이었다.
140:5.22 아이들은 항상 용기의 도전에 응한다. 젊은이는 언제라도 기꺼이 “용감하게 도전한다.” 아이들은 모두 일찍부터 희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40:5.23 그래서 산상 설교의 행복선언은 믿음과 사랑에 기초를 두었고 율법에―윤리와 의무에―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140:5.24 아버지 같은 사랑은 악을 선으로―불의가 선행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기뻐한다.
6. 임명식이 있던 저녁
140:6.1 일요일 저녁, 가버나움의 북쪽 고지대를 떠나 세베대의 집에 도착한 예수와 열두 사도는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였고, 그런 후에 예수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열두 사도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회의가 있은 후에, 쌍둥이가 불을 쪼이고 빛을 더 밝히려고 모닥불을 지피는 동안, 안드레는 예수를 찾으러 나갔고, 따라잡았을 때 말했다: “주(Master)여, 내 형제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이 나라에 대해 더 가르쳐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이 뜰로 가서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당신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요청하러 왔습니다." 예수는 사도들을 만나기 위해 안드레와 함께 갔다.
140:6.2 그는 뜰로 들어가자, 사도들을 모으고 더 가르쳤다. “너희는 옛 가르침 바로 위에 새 가르침을 세우려 하니, 내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겠지만, 내가 선언하건대 너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새로 시작하고 기꺼이 내 가르침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늘나라의 새로운 복음은 옛날부터 내려온 것에 끼워 맞출 수 없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과 땅에서의 그의 사명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제쳐두고 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더 성취하고, 확대하여 밝히려고 온 것이다. 나는 율법을 어기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새로운 계명들을 너희 마음의 판에 새기려고 온 것이다.
140:6.3 “내가 너희에게 구휼과 기도, 금식함으로 아버지의 은혜를 얻으려는 자들의 의(義)를 능가하는 그러한 의를 요구한다. 너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랑, 자비, 진리로 이루어진 의가 있어야 한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진지한 소망―이 있어야 한다.”
140:6.4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당신이 새로운 계명을 가졌으면, 듣고 싶습니다.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십시오.” 예수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너희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라’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동기를 밝히기 위해 행동의 범위를 넘어서 본다. 형제에게 화내는 자는 모두 비난의 위험에 처했음을 너희에게 선언한다. 마음속에 미움을 품고 마음속에서 복수를 계획하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서 있다. 너희는 너희의 동료를 그 행위로 판단한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 의도를 보고 판단하신다.
140:6.5 “너는 율법학자들이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음란한 생각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자마다 이미 그 여자와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이다. 너희는 오직 사람의 행실을 보고만 판단할 수 있지만, 나의 아버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살피시고, 그들의 의도와 진짜 욕망에 따라 그들을 자비롭게 판단하신다.”
140:6.6 예수는 다른 계명들에 대하여 계속 논의할 생각이 있었지만, 이때 야고보 세베대가 끼어들어 물었다: “주여, 이혼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모세가 지시한 대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도록 내버려 둘까요? 이 질문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나는 율법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왔다. 이 세상의 나라들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왔다. 정부나 무역이나 또는 사회 행동에 관한 규칙을 너희에게 가르칠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 이것들은 오늘날 좋을지 모르나 다른 시대의 사회에 도무지 맞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마음을 위로하고 영을 해방하고 사람의 혼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왔다. 그러나 이 이혼 문제에 관하여 내가 이르리니, 모세는 그러한 일을 승인했어도 아담 시절의 동산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40:6.7 사도들이 잠깐 자기들끼리 이야기한 후에, 예수는 계속 말씀했다: “너희는 언제나 사람의 모든 행위에 두 가지 관점―인간의 관점과 신의 관점; 육체의 길과 영의 길; 시간적 평가와 영원의 관점―을 인식해야 한다.” 비록 열두 사도는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 가르침은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140:6.8 다음에 예수는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내 교훈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는 습관이 있는 까닭으로 내 가르침의 영을 분별하는 것이 더디기 때문에, 내 가르침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너희는 다시 한번 나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영 안에서 내 삶을 사는 것처럼 너희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는 나의 개인적 대리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너희처럼 살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이 무리에 속하지 않는 양들을 가졌고, 내가 저희에게도 필사 본성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범을 그들을 위해 준비해야 함을 너희가 또한 기억해야 한다.”
140:6.9 그러자 나다니엘이 물었다: “주여, 우리는 공정을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까?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는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 내 전령들은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누구에게나 관대해야 한다. 받은 만큼 그대로 갚는 것을 너희의 규칙으로 만들지 말라.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그러한 율법을 가질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언제나 자비가 너희의 판단을 결정하고 사랑이 행위를 결정한다. 이러한 말이 지키기 어려우면, 너희는 이제라도 돌아갈 수 있다. 사도의 요구 조건이 너무 힘들면, 그보다 힘들지 않은 제자의 길로 돌아갈 수 있다.”
140:6.10 깜짝 놀랄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사도들끼리 한동안 물러났지만, 곧 돌아왔고,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우리는 계속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추가로 값을 치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잔을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제자가 아니라, 사도가 될 것입니다.”
140:6.11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기꺼이 너희의 책임을 지고 나를 따르라. 착한 일을 몰래 하라. 자선금 낼 때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너희끼리 따로 가라, 말을 헛되이 되풀이하고 뜻 없는 구절을 쓰지 말라. 아버지는 구하기도 전에 너희가 무엇이 필요한 줄 아심을 언제나 기억하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슬픈 얼굴로 금식에 빠지지 말라. 하늘나라의 봉사를 하려고 이제 따로 구별하여 내가 택한 사도로서, 자신을 위하여 땅에서 보물을 쌓지 말고, 사심 없이 봉사함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을지니, 보물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또한 있다.
140:6.12 “육체의 등불은 눈이다; 그런즉, 너희 눈이 너그럽다면 너희 온몸에 빛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이 이기적이라면, 온몸이 어두움으로 가득 찰 것이다. 네 안에 있는 바로 그 빛이 어둠으로 바뀐다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140:6.13 그리고 나서 토마스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계속 가져야” 하는지 물었고, 주의 대답은 이러했다: “맞다, 나의 형제들아, 내가 바라건대, 이해심 있는 한 가족으로서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 너희에게 위대한 일이 맡겨졌고, 한 눈 팔지 않고 봉사하기를 몹시 바란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좋은 말씀을 너희가 안다. 너희는 하나님을 성실하게 예배하고 동시에 진심으로 재물을 섬길 수 없다. 이제 하늘나라 일을 하려고 아낌없이 지원하였으니 너희의 생활은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해서도 무슨 옷을 입을까 더군다나 걱정하지 말라. 기쁘게 일하는 손과 진지한 마음을 가진 자는 배고프게 지내지 않을 것을 너희가 이미 배웠다. 이제, 너희가 온 에너지를 하늘나라 일에 바치려고 준비할 때, 아버지가 너희의 필요를 모른 체하지 않으실 것을 확실히 믿으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찾으라. 너희가 거기에 들어가는 문을 찾아냈을 때, 무엇이 필요하든지 너희가 더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 하루의 어려움은 그날로 충분하다.”
140:6.14 그들이 밤새도록 질문하면서 늦게 있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내일 일을 준비하도록 잠자러 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서 이미 잠이 달아났다. 베드로는 나서서 주에게 요청했다: “나는 당신과 개인적으로 그저 조금 의논할 것이 있습니다. 형제들과 따로 무슨 비밀을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괴롭고, 혹시라도 주로부터 꾸지람을 받아야 한다면, 당신하고만 따로 있으면 더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집안으로 길을 인도하며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 따라오라.” 주가 계신 곳으로부터 베드로가 무척 명랑해지고 크게 격려받고 돌아왔을 때, 야고보는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가려고 마음먹었다. 이런 식으로 날이 샐 때까지, 다른 사도들은 하나씩 주와 함께 이야기하러 갔다. 잠든 쌍둥이를 제쳐놓고 모두가 예수와 개인적으로 상담을 마쳤을 때, 안드레는 예수가 계신 데로 들어가서 말했다: “주여, 쌍둥이는 뜰에서 불 옆에 잠들었습니다; 당신과 또한 이야기하고 싶은지 저희를 깨워서 물어볼까요?” 예수는 빙그레 웃으며 안드레에게 말했다. “그들은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있으니―그대로 두어라.” 이제 밤은 지나갔다; 또 다른 날의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7. 임명식 다음 주
140:7.1 몇 시간 동안 잠을 자고 나서, 열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늦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희는 신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예루살렘으로 갈 준비를 해라.” 예수가 말한 후에, 토마스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우리가 이제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야 함을 압니다만, 우리가 아직 이 위대한 일을 완수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며칠만 더 이 근방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예수는 사도들이 모두 이와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너희의 요구대로 할 것이다; 우리는 안식일 동안 여기에 머물 것이다.”
140:7.2 몇 주 동안,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호기심에 이끌린 구경꾼들과 함께 예수를 보려고 벳세다로 오고 있었다. 이미 그에 관한 소식이 시골에 퍼졌다. 티레ㆍ시돈ㆍ다마스커스ㆍ케자리아ㆍ예루살렘과 같이 먼 도시로부터 수소문하는 무리가 왔다. 여태까지 예수는 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늘나라에 관하여 가르쳤으나 이제 주는 이 일을 열 둘에게 넘겼다. 안드레는 사도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한 집단의 방문자들에게 배치했고 때로는 열둘이 다 그렇게 바빴다.
140:7.3 이틀 동안 그들은 낮에는 가르치고 밤늦게까지 사적인 회의를 열면서 일했다. 사흘째에, “고기를 잡으러 가거나, 홀가분하게 변화를 찾거나, 아니면 혹시 너희 가족을 찾아보라”하고 사도들을 보낸 동안, 예수는 세베대와 살로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 가르침을 받기 위해 3일이 지난 목요일에 그들은 돌아왔다.
140:7.4 연습하는 이 주간에, 예수는 세례받은 후에 그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두 가지 큰 동기를 여러 번 사도들에게 되풀이했다:
1.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
2. 사람들이 아들 의식을 갖도록―최고자(Most High)의 자녀임을 믿음으로 깨닫도록―이끄는 것.
140:7.7 한 주 동안 이렇게 다양한 체험을 겪은 것은 열두 사도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더러는 지나치게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였다. 마지막 회의에서, 안식일이 끝난 그날 밤에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우리는 이제 하늘나라를 차지하러 나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는 대답하였다. “너희가 열심인 만큼 지혜롭고, 너희의 용기가 무지를 보충하기 바란다.”
140:7.8 비록 사도들은 그의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예수가 그들과 함께 살았던 매력적으로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실패하지 않았다.
8. 목요일 오후 호수에서
140:8.1 예수는 사도들이 그의 가르침을 완전히 새겨듣지 못했음을 잘 알았다.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에게 얼마큼 특별 교육을 주기로 작정하였고, 그들이 동료들에게 그 개념을 뚜렷하게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열두 사도가 영적 하늘나라 개념의 어떤 모습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고 땅에서 현세의 권력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운다는, 글자 그대로의 나라 개념, 오래되고 뿌리 깊은 개념 바로 위에, 이 새로운 영적 가르침을 붙이려고 끈질기게 고집하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목요일 오후에 하늘나라의 일을 의논하려고 예수는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배를 타고 물가를 떠나갔다. 이것은 네 시간 동안 가르치는 회의였고 수십 가지 질문과 대답을 포함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형 안드레에게 다음 날 아침에 알려준대로, 이 중대한 오후의 요점을 다시 정리하여 이 기록에 넣는 것이 가장 유익할까 한다:
1.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하늘 아버지가 넉넉히 돌보심을 믿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맹목적이고 수동적인 숙명론이 아니었다. 이날 오후에 어느 옛 히브리 속담이 옳다고 인용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그는 자신의 체험이 그의 가르침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라고 지적하였다. 아버지를 신뢰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현대나 어느 다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가르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이상적 원리들을 담고 있다.
140:8.3 예수는 세 사람에게 사도직과 제자직의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나서도 열두 사도의 신중함과 통찰력이 발휘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그가 전했던 것은 앞의 일에 대한 생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능동적이고 경각심을 주는 복종을 가르쳤다. 검소와 절약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다만 목수, 조선공, 어부로서의 그의 삶과, 열두 사도를 신중하게 조직한 것을 주목하라고 했다. 그는 세상을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즉 삶의 환경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일하는 신성한 지배체제를 구성한다.
140:8.4 몸으로 저항하지 않는 자신의 습관을 이해시키는 데 예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아예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 않았다. 사도들의 눈에는 그들이 똑같은 원칙을 따른다면 주가 기뻐할 듯이 보였다. 악에 대항하지 말고, 부당한 처사나 권리 침해에 맞서 싸우지 말기를 가르쳤으나, 악행을 수동적으로 묵인하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행악자와 범죄자를 사회가 처벌하는 것을 인정한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공정을 실행하기 위해서 국가 정부는 때때로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날 오후에 예수는 분명히 밝혔다.
140:8.5 예수는 보복의 악습을 경고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복수, 보복하는 관념을 어떤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원한 품는 것을 개탄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관념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복수라는 개념 전체를 경시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민간정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겼다. 그는 세 사람에게 자신의 가르침은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그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40:8.6 원수를 사랑하라―인간이 형제라는 도덕적 주장을 기억하라.
140:8.7 악은 무익하다: 보복한다고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다. 악한 수단으로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1. 신의 공정과 영원한 선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확신―믿음을 가지라.
2. 정치적 태도. 당시에 유대 민족과 로마 정부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된 관계에 대하여 논평을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떤 면에서도 그들이 이 난국에 말려드는 것을 금했다. 그는 적들이 놓은 정치적 덫을 피하려고 늘 조심스러웠고 “시저의 것을 시저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늘 대답했다. 그는 구원받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명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다른 것에 관여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사생활에서 언제나 국가의 모든 법과 규칙을 마땅히 준수했다; 어떤 대중 교육에서도 그는 시민ㆍ사회ㆍ경제 분야에 관여하지 않았다. 오직 사람의 내적인 삶, 개인의 영적 생활의 원칙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세 사도에게 말했다.
140:8.10 따라서 예수는 정치 개혁가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재편성하러 온 것이 아니다; 설령 그가 이렇게 했더라도, 그것은 오직 그날과 세대에게만 적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고, 어떤 세대도 예수의 삶을 자신의 문제에 잘 적용시킬 수 있는지 발견하는 수고를 해야한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어떤 정치 이론이나 경제 이론, 어떤 사회 체제나 산업 체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결코 범해서는 안된다.
3. 사회적 태도. 유대인 랍비들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예수가 와서 적극적이고 저절로 우러나오는 친절 관념을 제시하였다.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진지하였고, 그 사랑이 전 세계를 포함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자기 이웃으로 만들기까지 이웃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 모두와 함께, 예수는 대중이 아니라 오직 개인에 관심을 가졌다. 예수는 사회학자가 아니었지만, 온갖 형태의 이기적 고립을 깨뜨리려고 수고했다. 순전한 동정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르쳤다.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비에 지배를 받는 아들이다; 동정심이 바로 그의 본성이다.
140:8.12 사람들이 식사 자리에 그들의 친구를 접대하는 것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주(Master)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주는 추종자들에게 가난한 자와 불행한 자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는 공정에 대한 확고한 감각을 가졌지만, 그 감각은 반드시 자비로 완화되었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사회의 기생충이나, 또는 전문적으로 자선금을 얻어내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사회학적 선언에 아주 가깝게 간 말씀은 “판단을 받지 않도록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한 것이다.
140:8.13 그는 무분별한 친절은 많은 사회악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다음 날, 그가 요청하거나 두 사도가 공동으로 간청할 때를 제쳐놓고, 사도의 기금을 조금도 자선금으로 써서는 안 된다고 유다에게 분명히 지시했다. 이 모든 문제에서 항상 “뱀 같이 지혜롭되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하는 것이 예수의 습관이었다.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인내, 관용, 용서를 가르치는 것이 그의 목적인 듯 보였다.
140:8.14 가족은―여기서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예수의 생활 철학의 바로 그 중심을 차지했다. 하나님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가족에 기초를 두었고, 한편 그는 조상을 지나치게 존경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고치려고 애썼다. 가족생활을 인간의 가장 높은 임무로 높였지만, 가족 관계가 종교적 의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가족은 이 세상의 제도요, 죽음 뒤에 살아남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가족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날 때 예수는 가족을 서슴지 않고 버렸다. 사람이 형제라는 새롭고 더 위대한 정신―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에서, 그리고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이혼 관습은 엄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율법 만들기를 거듭 물리쳤지만, 초기에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은 이혼에 관하여 뚜렷한 의견을 가졌고 그런 의견을 서슴지 않고 예수의 덕분으로 돌렸다. 요한 마가를 제외하고,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모두 결혼에 대하여 이렇게 좀더 엄격하고 진보된 관념을 지켰다.
4. 경제적 태도. 예수는 그가 당면한 세상에서 일하고 살고 물건을 교환했다. 경제 개혁가가 아니었지만, 그는 재산의 불평등한 분배가 부당한 것에 빈번히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그는 아무런 대안을 내놓지 않았다. 사도들이 재산을 차지해서는 안 되지만, 부와 재산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은 재산 분배에 반대하는 것을 전파했다고 세 사람에게 분명히 일러주었다. 그는 사회적 공정과 산업적인 공평의 필요를 인정했지만, 이를 성취하기 위한 원칙들을 제공하지 않았다.
140:8.16 그는 추종자들에게 세상의 소유물을 피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고 다만 열두 사도에게 그렇게 했다. 의사인 누가는 평등한 사회를 굳세게 주장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개인적 관점과 어울리게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많이 애썼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공동체 형태의 생활을 채택하라고 친히 지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어떤 종류의 선언도 하지 않았다.
140:8.17 예수는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탐욕을 피하라고 자주 경고했고, “사람의 행복은 물질 재산의 풍부함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항상 되풀이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어버리면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인가?” 그는 재산 소유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영적 가치의 우선이 필수라고 영원히 주장했다. 후기의 가르침에는, 대중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제시한 수많은 비유를 들어 유란시아의 그릇된 생활들의 관점을 고치려고 애썼다. 예수는 결코 경제 이론을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각 시대는 기존의 문제에 대하여 자체의 처방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오늘날 육체를 입고 살면서 땅에 계신다면 예수는 대다수의 선한 남녀의 기대에 크게 어긋날 터이니, 오늘날의 정치나 사회나 경제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리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그는 너희의 순전한 인간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풀려고 너희를 몇 배나 더 유능하게 만들기 위해, 너희 내면의 영적한 삶을 완벽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당당하게 초연히 남아있을 것이다.
140:8.18 예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처럼 만들고, 다음에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신의 정치ㆍ사회ㆍ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이해심을 가지고 구경하려 할 것이다. 그가 비난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재산에 굴종하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재산이 미치는 영향이었다. 이 목요일 오후에 예수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처음으로 동료들에게 말했다.
5. 개인적 종교. 너희는 예수의 사도들이 그랬듯이, 예수의 삶을 보고 그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 그는 유란시아에서 완전한 삶을 살았고, 그의 독특한 가르침은 오직 그가 당면한 배경을 두고서 그 삶을 상상할 때에야 겨우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의 신성과 사랑하는 성격을 드러내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그의 삶이지, 열두 사도에게 준 가르침이나 군중에게 한 설교가 아니다.
140:8.20 예수는 히브리인 선지자나 그리스인 도덕가들의 가르침을 공격하지 않았다. 주는 이 위대한 선생들이 부르짖는 많은 좋은 것을 인식했으나, 무언가 더 큰 것, “사람의 뜻이 자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땅에 내려왔다. 예수는 다만 종교인, 온통 종교적 느낌에 싸여 있고 오직 영적 충동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너희가 한 번 얼핏 그를 볼 수 있었다면, 예수가 이 세상일에 큰 경험을 가진 실재한 사람이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교 시대의 여러 세기를 통해서 계속,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많이 와전되었다. 너희는 또한 주의 온유함과 겸손함에 대하여 비뚤어진 생각을 지녀 왔다. 그가 일생에서 목표로 한 것은 당당한 자존심이었던 듯하다. 사람이 참으로 높아질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라고 충고했다. 그가 정말로 목표로 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겸손이었다. 그는 성실함―깨끗한 마음―을 높이 평가했다. 인품을 평가할 때 충실은 으뜸가는 미덕이었고, 한편 용기는 그의 가르침의 바로 그 핵심이었다. “두려워 말라”가 표어였고, 참을성 있게 견디는 태도는 강건한 인품의 이상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용맹과 용기와 용감한 정신의 종교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보통 사람 열두 명을 개인 대표로서 선택한 이유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거칠고 튼튼하고 남자다운 어부였다.
140:8.21 예수는 그 시대의 사회악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거의 없었다. 도덕적 방탕을 언급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참된 미덕을 가르치는 적극적인 선생이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방법을 세심하게 피했고 악을 선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도덕을 개혁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인류의 육체적 욕심은 종교적 꾸지람이나 율법으로 금지한다고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렇게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얼마 안 되는 비난은 대체로 자만, 잔인, 억압, 위선에 대한 것이었다.
140:8.22 예수는 요한처럼, 바리새인조차 맹렬히 비난하지 않았다. 많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마음은 정직함을 알았고, 종교적 전통에 노예처럼 매여 있는 것을 이해했다. 예수는 “먼저 나무를 좋게 만드는 일”을 크게 강조했다. 그가 어떤 몇 가지 특별한 미덕 뿐 아니라, 생애 전체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세 사람에게 강조하였다.
140:8.23 요한이 이날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한 가지는 예수가 믿는 종교의 핵심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한 동기를 가진 성격, 더불어 자비로운 성품을 얻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140:8.24 베드로는 그들이 전하려는 복음이 온 인류를 위한 정말로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인상을 나중에 바울에게 전했고, 바울은 이로부터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이라는 그의 교리를 만들어냈다.
140:8.25 야고보는 땅에서 자녀들이 마치 완성된 하늘나라 시민이 이미 된 것처럼 살기를 예수가 바란다는 감격스러운 진리를 깨달았다.
140:8.26 예수는 사람들이 다른 것을 알았고 사도들에게 그렇다고 가르쳤다. 제자와 신자들을 어떤 정해진 형태에 맞추어 한 모양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를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항상 훈계하였다. 각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지고 있는 독립된 개인을 개발하도록 버려두려고 애썼다. 베드로의 여러 질문 중 하나에 대답하여, 주는 말씀했다: “어린아이로서 새롭고 더 나은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해방하기를 내가 원한다.” 예수는 참된 선함은 의식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 하기를 언제나 주장하였다.
140:8.27 이날 오후에 세 사도는 주의 종교가 영적 자기반성에 대하여 아무런 제한이 없음을 깨닫고 놀랐다. 예수의 시절 이전과 이후에 있던 모든 종교는, 기독교조차 양심적으로 자기를 반성하라고 조심스럽게 지시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의 생활 철학에는 아예 종교적 자아 반성이 없다. 목수의 아들은 결코 성품을 만들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성품의 성장을 가르쳤고,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는 오만한 자기 본위를 막는 수단으로 자아 분석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전혀 하지 않았다.
140:8.28 하늘나라에 들어갈 권리는 믿음, 곧 개인의 신념에 달려 있다. 하늘나라로 진보하여 계속 올라가느라고 치르는 값은 진주, 사람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얻고자 하는 값비싼 진주와 같다.
140:8.29 예수의 가르침은 약자와 노예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이다. 그의 종교는 (당대에) 결코 신조와 신학 법칙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 줄의 글도 뒤에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일생과 가르침은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에도, 영적 안내와 도덕적인 가르침이 되기에 적당한 유산, 영감을 주는 이상적 유산으로, 우주에 남겼다. 오늘날도 예수의 가르침은 각 종교에게 살아 있는 희망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모든 종교와 따로 구별된다.
140:8.30 예수는 종교가 땅에서 사람이 유일하게 추구할 일이라고 사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한 유대인의 관념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열두 사도가 전념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예수가 신자들의 진정한 교양 추구를 막으려고 가르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는 전통에 묶인 예루살렘의 종교 학당들을 비난하였다. 그는 생각이 자유롭고 마음이 넓었고, 박식하고 너그러웠다. 의롭게 사는 그의 철학에는 의식적인 경건함이 설 자리가 없었다.
140:8.31 주는 자신이 살던 시대나 후일에 어느 시대에도 비종교적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예수는 영원한 실체들을 꿰뚫어 보는 영적 통찰력을 개발하고 독창적으로 사는 주도권을 자극하고 싶어 했다; 인류의 기초에 있는 영구한 영적 필요에만 순전히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정도의 선을 드러냈다. 사랑―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신의 이상이요 영원한 실체라고 높이 평가했다.
140:8.32 주는 사람 속에서 새로운 영,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려고―진리를 알고, 동정심을 체험하고 선을 택하는 새 능력을 전하려고―오셨으니,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게 되려는 영원한 욕구와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려 하는 의지이다.
9. 성직에 임명하는 날
140:9.1 그다음 안식일에는 예수가 사도들을 위해 헌신하였고, 사도들을 세웠던 고지로 돌아갔다; 거기서 길고도 아름다운 감동적인 격려의 메시지를 준 후에, 열두 제자를 거룩하게 임명하는 엄숙한 행동에 들어갔다. 이 안식일 오후 예수는 사도들을 언덕 비탈에 불러 모으고, 그가 그들을 세상에 혼자 남겨둘 수 밖에 없었을 때를 위해 준비하면서 그들을 하늘 아버지의 손에 맡기었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가르침은 없었고, 단지 사적인 만남과 친교만 있었다.
140:9.2 예수는 바로 이 자리에서 했던 사도 임명 설교의 많은 특징들을 검토하고, 그들을 자기 앞에 차례로 부르면서 자기의 대표로 세상에 나가게 하기 위해 그들을 임명했다. 성직 임명식에서 주의 명령은 이것이었다, “온 세계로 가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 영적으로 포로 된 자를 해방시키고, 억압받는 자를 위로하며, 고통 받는 자를 돌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140:9.3 예수는 그들에게 돈이나 여벌의 옷을 가져가지 말라고 충고하며 말했다, “일꾼은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마침내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를 늑대 가운데 있는 양처럼 보내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그러나 주의할지니, 너희의 적이 너희를 공회 앞으로 끌고 갈 것이요, 회당에서 너희를 징계할 것이다. 이 복음을 믿는다고 너희는 총독과 권력자들 앞에 넘겨지겠고, 너희의 바로 그 간증이 저희에게 나를 위한 증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재판으로 이끌 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내 아버지의 영이 너희 안에 깃들고 그런 때에 너희를 통해서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 중에 더러는 죽음을 당하겠고, 땅에서 하늘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 복음 때문에 숱한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고, 내 영이 온 세상으로 너희 앞에 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나서 이방인에게 가는 동안, 내 아버지가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140:9.4 그리고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 세베대 집의 그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10. 성직 임명식이 있던 날 저녁
140:10.1 그 날 저녁,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으므로, 예수께서 집 안에서 가르치시는데, 열두 사람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고, 아주 길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의(義)―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특정한 일을 강요하는 종교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말했다. “하늘나라에서는 너희가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의(義)를 지켜야 한다.” 예수는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런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는 완전하라.” 그러는 동안 내내 주는 당황한 사도들에게, 그가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려고 왔으며, 단순하고 신실한 믿음에 의해서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예수는 말했다: “요한은 옛 생활 방식을 뉘우치라는 회개하는 세례를 외쳤다. 너희는 하나님과 친교하는 세례를 선포해야 한다. 회개의 가르침이 필요한 자에게는 회개를 전파하되, 이미 하늘나라를 진실하게 추구하는 자에게는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즐겁게 친교하는 관계로 들어가도록 애써야 한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의롭게 되는, 믿음으로, 땅에서 필사자가 하루하루의 삶에서 의(義)를 행하는 것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이 갈릴리 어부들에게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40:10.2 열두 사도를 가르치는 이 일에서 또 다른 큰 장애물은, 종교적 진리의 높은 이상적이고 영적인 원칙을 취하여 그것을 개인의 행동 규칙으로 다시 만드는 그들의 성향이었다. 예수는 혼의 태도에 담긴 아름다운 영적인 것을 제시했지만, 그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개인적인 행동의 규칙으로 풀이하기를 고집했다. 여러 번, 그들이 주가 한 말을 확실히 기억할 때, 주가 말씀하지 않은 것을 거의 확실히 기억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천천히 그의 가르침을 소화시켰다. 그들은 그의 말로 가르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그와 함께 살면서 점차 얻게 되었다.
140:10.3 주가 방대한 우주의 어느 세계에,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에게도, 영감을 주는 인생을 사는 데 전념했다는 것을 사도들의 눈에는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예수가 말씀했는데도 사도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광대한 창조에 존재하는 모든 다른 세계를 위하여 일한다는 생각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이 세상의 남녀를 위하여 필사자로 사는 본보기를 친히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세계의 모든 필사 존재를 위하여 영적이며 영감을 주는 높은 이상을 만들려고 유란시아에서 땅의 삶을 살았다.
140:10.4 바로 이날 저녁에 토마스는 예수께 물었다: “주여,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전에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당신이 말씀하시고, 그래도 거짓 선지자에게 속지도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잘못도 저지르지 말라고, 당신이 경고하였습니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토마스에게 대답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겠느냐! 내가 가르치는 모든 걸 문자 그대로 만들려고 주장하는 것이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값으로 어린 아이 같이 되라 요구했을 때, 쉽게 속거나 단지 기꺼이 믿으라거나 호감이 가는 낯선 사람을 얼른 신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너희가 얻기를 내가 바란 것은,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였다. 너희는 어린아이요 너희가 들어가고자 하는 곳은 너희의 아버지의 나라이다. 모든 정상적인 자녀와 그 아버지 사이의 자연스러운 애정이 존재하며, 이는 이해와 사랑의 관계를 보장하며, 또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얻으려고 협상하는 모든 성향을 영원히 배제해야 한다. 너희가 나가서 전하려는 복음은 바로 자녀-아버지의 관계의 믿음-실현에서 성장하는 영원한 구원과 관련이 있다.”
140:10.5 예수가 가르친 한 가지 특징은 그의 철학에 담긴 도덕이 개인과 하나님의 개인적 관계에서―바로 이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에서―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인종이나 민족이 아닌 개인에 중점을 두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예수는 마태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말씀 가운데 어떤 행동의 도덕성도 개인의 동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예수의 도덕은 언제나 긍정적이었다. 예수가 부활시킨 황금률은 적극적인 사회적 접촉을 요구한다; 오래된 부정적인 규칙은 고립된 채 복종될 수 있다. 예수는 모든 규칙과 의식을 벗겨버리고 그것을 장엄한 수준의 영적 사고와 진정으로 정의로운 삶으로 격상시켰다.
140:10.6 예수의 이 새로운 종교는 실질적으로 암시하는 것이 없지 않았지만, 그 가르침에서 실용적인 정치적ㆍ사회적, 또는 경제적 가치가 무엇이든지 간에 진정한 개인적 종교적 체험의 자발적인 일상적 봉사에서 영의 열매가 나타나기 때문에, 혼의 내적 체험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작용이다.
140:10.7 예수와 마태가 이야기를 마친 뒤에, 열심 당원 시몬이 물었다. “그러나 주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가요?” 예수는 대답했다: “맞다, 시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것이 너희가 선포할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러한 교리를 깨달을 수 없었다; 새롭고 이상하고 깜짝 놀랄 발언이었다. 이 진리를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기게 하려는 소망 때문에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모든 사람을 형제로 대우하라고 가르쳤다.
140:10.8 안드레가 던진 질문에 대해 주는 그의 가르침의 도덕은 그의 삶의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그가 가르친 도덕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140:10.9 요한이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하늘나라가 무엇입니까?” 예수는 대답했다. “하늘나라는 이 세 가지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실을 믿는 것이다; 셋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최고 소망의 효과―하나님같이 되려는 믿음이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좋은 소식이다; 믿음으로 모든 인간은 구원의 이 모든 본질을 가질 수 있다.”
140:10.10 그리고 이제 기다리는 주간이 지났다. 그들은 이튿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