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1] 빌 2:5-8 우리는 앞에서 빌립보교회가 지녀야 할 덕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덕을 세움에 있어 모범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이므로,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Τοῦτο φρονεῖτε ἐν ὑμῖν)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주님의 마음은 한 바디로 한다면, 2:7의 “자기를 비워”(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라는 말에서 Kenosis 곧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겸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본 장의 6절-9절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주님의 겸손을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본체”(μορφῇ Θεοῦ)이신데도, 성육신으로 완전한 겸손을 드러내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성(神性)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요 1:14, 골 2:9), 6절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οὐχ ἁρπαγμὸν ἡγήσατο τὸ εἶναι ἴσα Θεῷ), 성육신(Incarnation)하심으로 하나님으로 가지실 신권(神權)에 기초한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감추신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여기 헬라어 “동등됨”(ἴσα)이라는 말은 본래 사물의 크기와 양, 질, 성질 및 수치가 정확히 동일함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 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잘 드러냅니다. 주님은 지상의 사역 중에 이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하셨습니다(요 5:18, 10:33, 38, 14:9, 20:28; 히 1:1-3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하나님과 동등하심에도 불구하고 겸손으로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7절에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ἀλλὰ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 μορφὴν δούλου λαβών, ἐν ὁμοιώματι ἀνθρώπων γενόμενος)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의 형체”(μορφὴν δούλου)란 그의 낮고 비천한 위치와, 아버지께 대한 거리낌 없는 순종자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진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의 영광과 독립적인 성자의 권위, 신적인 대권과 만물의 주관자로서의 영원한 부요함,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십자가의 형벌을 통하여 버림을 당하기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 놓으셨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비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ὁμοιώματι ἀνθρώπων γενόμενος)고 함으로써, 여기서 죄성을 가진 사람과 똑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성(人性)을 지니고 있으나 죄는 없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히 4:1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사람이셨음을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참 사람이시면 참 하나님이신 인자(人子,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그리고 성육신에서 보듯이 그는 온전한 하나님이면서 온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즉,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요 1:14).
둘째,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의 극치는 그의 “십자가 지심”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은 9절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ωσεν, καὶ ἐχαρίσατο αὐτῷ τὸ ὄνομα τὸ ὑπὲρ πᾶν ὄνομα)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가장 극악한 범죄자에게 부과하는 최고의 고통이 수반되는 형 집행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하여 골고다로 향할 때에도 아무 말이 없이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했습니다(사 53:1-9). 여기서 보듯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지심”은 모든 것을 비우신 최고의 겸손의 대명사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십자가 지심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가장 낮고 수치스러운 지점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2] 루터와 십자가 신학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신학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이신칭의(以信稱義)와 십자가신학(十字架神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으로, 이러한 의로움이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따른 것이라 봅니다. 특히 이 교리는 하나님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믿음 그 자체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신칭의의 교리는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통회-고백-보속신학) ‘만인제사장주의’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신학이란 모세가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았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과 같이 영광 속에 계신 하나님을 찾으면 언제나 보잘것없는 십자가에 찢긴 볼품없는 모습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왕, 가난한 목수, 심복에게 배신당하신 그리고 최종적으로 살인강도들과 함께 벌거벗기어서 형틀에 못 박혀 비명과 절규 속에 일생을 마치신 예수…. 루터의 ‘십자가신학’은 ‘영광의 신학’과 반대로 성도들을 더 영광스럽게, 더 명예와 부귀를 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낮아지고 미련해 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뒷모습은 약하고 미련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십자가상의 나약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며, 둘째, 그 분을 중심으로 모든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해야 하며, 셋째, 그분의 성품인 겸손과 자기를 비우심을 배워가야 하며, 넷째,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우는 겸손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까지 우리 죄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신 사랑의 실천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과 같이 겸손과 복종,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