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사찰은 왕궁을 모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앙의 문을 어간문이라고 하여 원당의 주인, 이를 대신하는 주지 스님만이 출입한다. 주지스님이 대사 큰스님이므로 큰스님만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여 일반 불자들은 좌우의 문으로 출입하게 한다.
궁궐의 삼문 가운데 중앙문은 임금이 출입하고 좌우의 문을 통해서 출입하는 방식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불교의 사찰이 동참하고 예경하는 불자의 원당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원당의 주인인 불자들의 출입처를 시자들이 출입하는 좌우 문으로 출입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대사 큰스님만 출입한다고 하는 전통은 이제 새롭게 인식돼야 한다. 중앙의 출입문이 원당의 주인이나 주인을 대신하는 주지스님의 출입처에서 예배하는 모든 불자들이 출입하는 문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가 새롭게 거듭 나려면 이렇게 과거의 역사를 역사로 인식하고 현대의 역사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본질을 바로 보면 문제가 어려울 것은 없다. 불자가 주인이 돼야 한다. 주인이 주인인 세상은 과거의 세상이다. 정문으로 당당하게 출입하고 붓다에 예배하고 붓다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언제까지 범부중생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사상에 적합하다고 볼 수 없다.
오래 전부터 어간문으로 출입하도록 할 것을 제안하지만 반응이 없고, 그것이 전통이라고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분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과거 왕후장상의 원당으로서의 사찰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한 번 시행하면 금새 익숙해진다.
불교의 평등은 본성의 차원이다. 기회의 제공이 평등해야 하듯이 우리가 갈 길도 평등해야 한다. 승속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그것을 차별로 삼아서는 안 된다. 불교의 재공은 스님들에게 하는 것인데 붓다에게로만 향하고 있다. 붓다에게는 존경의 공양을 바친다. 헌화공양이 그것이다. 재공은 출가 스님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역사상 왜곡되었거나 과거사라면 과감히 현대의 불교를 할 필요가 있다. 출가 스님들의 길과 재가 거사들의 길이 있다. 출가는 수행을 통해 법보시를 하고 재가 거사들은 생활전선에서 얻은 재물로 승단을 뒷받침해야 한다. 교단과 승단의 질서는 분명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역사적인 유물의 문화는 과감히 청산해야 한다.
사찰의 어간문을 정문으로 삼아 불자들이 출입하며 당당한 불자로 거듭 날 수 있게 하고 진정 불교의 가르침으로 불도를 이룰 수 있도록 절은 역할을 해야 하고 출가 수행자들은 길을 바로 안내하는 도사가 돼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출가와 재가의 길은 다르면서도 궁극에는 다르지 않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간문이 모든 불자들에게 개방되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진정 새 불교 운동은 요원한 것이 아니라 불자를 주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고 쉽고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가 제시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불자들의 불교가 아니라 스님들의 불교라면 불교는 존재가치가 크지 않다.
진정성 있게 모두가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겸허한 마음으로 불교를 하며 이 길을 다른 이들에게 안내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바웃다넷은 불자들의 소통공간인데 아직 많은 분들이 오고 계시지는 못하다. 이곳에 오시는 분만이라도 같이 고민하고 사유하며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빠라미따
마곡사 대웅보전 정문(어간문) 바로 앞에 괘주지주석 흔적이 남아 있는데 괘불지주를 우측에 새로 세워놓았다. 정문의 의미와 괘불의 위치가 정면이어여 한다는 인식이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