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안의
유수연(21)추천 0조회 10707.11.06 13:44댓글 3
安 義 人 : 사람들이 强하고 사나워 鬪爭을 잘하며(强悍爭鬪), 節儀를 崇尙하고,
老人을 恭敬하며, 生活이 儉素하다. <東國與地勝覽>
安義三洞 : 尋眞洞(長水溪谷)ㆍ花林洞ㆍ猿鶴洞(渭川 搜勝臺)
安義三場 : 縣內(安義)場ㆍ古縣(渭川)場ㆍ道川(西上)場
安義八亭 : 弄月亭ㆍ東湖亭ㆍ居然亭ㆍ尋源亭ㆍ永思亭ㆍ凌虛亭ㆍ樂水亭ㆍ道溪亭
安義八潭 : 月淵潭ㆍ遮日潭ㆍ栗林潭ㆍ鍾 潭ㆍ尋源潭ㆍ鶴 潭ㆍ龜淵潭ㆍ噴雪潭
一 蠹 魚 : 一蠹 鄭汝昌이 安陰縣監으로 在職時에 龍湫瀑布에 봄놀이를 왔다가
龍湫瀑布 위에 물은 있으되 물고기가 살지 않음을 알고, 그 후 홍색비늘이
있는 물고기(피리) 한 무리를 풀어 놓았는데, 그것이 번성하게 되어
그 물고기 이름을 鄭汝昌의 號를 따서 一蠹魚 혹은 鄭魚라 하였다 함溫
溫 公 鱖 : 溫氏가 이 고장에 들어와 살면서 역시 龍湫瀑布 위에 물은 있으되
물고기가 없음을 이상히 여겨, 꺽지 몇마리를 잡아다 溪谷에 풀어놓은
뒤부터 꺽지가 살았다고 하여, 溫公이 번식시킨 물고기라고 溫公鱖
(온공궤) 또는 溫鱖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라 함.
龍門書院 : 安義面 鳳山里에 있었다. 成宗25年(1494) 文獻公 鄭汝昌이 縣監 5年間
에 學校를 일으키고 民心이 悅服하여 追慕不忘으로 세웠다.
黃 巖 祠 : 安義面 堂本里 黃巖洞(馬岩 새書院)에 있었다. 宣祖 丁酉再亂에 黃石山城
이 陷落될 때 殉節한 忠烈公 郭䞭(安義縣監), 忠毅公 趙宗道(前 咸陽郡守)
를 위하여 肅宗40年 甲午(1714)에 建祠하고 더불어 賜額되었다.
牆內에 別廟를 세워 縣人 義士 鄭庸, 義士 劉名盖를 享하였다.
光 風 樓 : 地方文化財 指定 第92號
安義面 錦川里 錦湖江邊에 偉容을 자랑하듯 우뚝 서있는 光風樓는 朝鮮
太祖 壬辰(1412)에 縣監 全遇가 創建하여 宣化樓라 稱하였다. 世宗 乙巳
(1425)에 金洪毅 縣監이 現位置로 移建하였고, 成宗 甲寅(1494)에 一蠹
鄭汝昌 縣監이 更創하여 光風樓로 改稱하게 되었다. 丁酉再亂 때에 불탄
것을 沈宗忱 縣監이 重建하였고, 肅宗 癸亥에 張世南 縣監이 重創增制
하였다. 建物은 正面五間, 側面二間, 二層樓閣으로 우람한 朝鮮時代의
代表的인 樣式이다.
현재의 懸板은 官我齋 趙榮祏(1686~1761) 縣監의 글씨이다. 그는 朝鮮
英祖時代 詩書畵에 뛰어나 三絶이라 불리웠고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三齋로 칭해졌으며, 그의 나이 53세에서 58세 때까지 6년간을 安陰
縣監으로 在任하셨던 분으로서 선비精神과 實學精神을 兼備한 朝鮮 最高의
書畵家였다.
尤庵 宋時烈(1607 宣祖40年 ~ 1689 肅宗15年)이 光風樓記를 남겼다.
1910년에 양재기(梁在基), 임종석(林鐘碩) 등이 주동이 돼 光風樓를 교실로 하여
수업을 시작했다는 단편적 사실만 전해지고 있는 안의의숙(安義義塾)은 학교라기
보다는 규모가 좀 큰 신식 서당 정도라 짐작되지만 안의 고을에서 새 시대의 문을
열어준 선구자의 역할을 했음에는 틀림없다.
1912년 4월 4일에 안의공립보통학교가 안의의숙을 강제로 인수해서 光風樓를 교사
로 하여 개교하였으며, 1951년 10월 1일에는 안의고등학교가 光風樓를 임시교사로
하여 개교하였다.
霽 月 堂 : 一蠹 鄭汝昌이 金遷上에 처음으로 세워 霽月堂이라 命名하였고, 仁祖23년
乙酉(1645)에 縣監 金克譓가 光風樓로 移建하였고, 1951년에 霽月臺 위로
옮겼다.
光風霽月 : 光風樓와 霽月堂은 一蠹 鄭汝昌(1450~1504) 縣監이 처음 命名하였는데,
이 이름은 中國 北宋의 유명한 詩人 黃庭堅(1045~1105)이 北宋 때의
儒學者로 宋學, 道學, 朱子學의 基礎理論을 定立한 宋 命理學의 宗師인
周敦頤(주돈이, 1017~1073)의 人物됨을 평할 때 “인품이 대단히 높고
가슴에 품은 뜻의 초연하고 대범함이 마치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讚揚한 말에서 由來된 것이다.
이러한 先賢들의 모든 노력은 하늘과 땅과 물 그리고 樹林과 함께 트인
空間에서 自然人이 되어 옛날의 性理學者들을 欽慕하고 行動樣式을
따르며 그 學文의 學을 後輩들에게 敎育시키고자함이었을 것이다.